2024.8.12.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에제1,2-5.24-28ㄷ 마태17,22-27
분별의 지혜와 사랑
“겸손한 삶”
“주님을 찬미하라 하늘로부터
높고 높은 곳에서 찬미들하라.”(시편148,1)
찬미의 종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들입니다.
어제 제 고향집이 구암리카페로 변했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웬지 모를 참 미묘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평생 그러할 것입니다. 결코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기에
깊고 긴 침묵속에 담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한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은 판단을 보류하며 침묵하며 하느님께 맡깁니다.
공동생활에서도 참 필요한 겸손한 사랑, 분별의 지혜입니다.
김훈의 소설에서도 겸손과 지혜를 발견합니다.
이런 내용을 자주 발견하는데 연륜에서 오는 겸손과 지혜일 것입니다.
“이승훈의 죽음과 형식에는 순교와 배교가 합쳐져 있다.
그는 고문과 순교의 과정을 배교로 마감하고 참수되었지만, 그의 최후의 내면이 배교인지 순교인지는
달레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정약용의 신문과정은 그가 천주교 지도자들과 동료 지식인을 고발한 대가로 사형을 모면했으리라는
정황을 보여주지만 증거는 없다.
형틀에 묶여서 고문당하고 있는 인간의 육성 진술을 놓고 신앙의 순수성을 따지는 언설은
무의미해 보인다.”(김훈, 허송세월 232쪽)
겸손한 지혜와 연민이 배어있는 통찰입니다.
특히 사람의 경우는 삶 전체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지혜로운 통찰이 빛납니다.
“마음이 자세에서 드러나듯 몸가짐 또한 마음에 스며든다.
마음의 안정을 원한다면 먼저 몸가짐부터 정돈하라.”<다산>
“얼굴이 단정하면 마음도 경건해 지니, 옷매무새와 띠를 항상 단정 해야 한다.”<관자>
이 또한 겸손한 삶의 지혜이자 예의입니다. 결코 마음따로 몸따로의 삶이 아닙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중 일부말씀과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 핵심 내용 또한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우리의 편견에 기초해 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과 기도는 정신과 마음에 열려있다.
너희가 정신과 기도가 닫혀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 그의 믿음과 기도는 참되지 않다. 마리아여,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믿음으로 듣고, 그분의 뜻을 용감히 실천하도록 도우소서.”
“평화를 위한 우리의 강렬한 기도를 새롭게 합시다. 특별히 우크라이나, 중동, 팔레스틴, 이스라엘,
그리고 미안마를 위해!”
교황님의 시야는 세계 곳곳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자제력과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 또한 겸손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삶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합니다.
주님은 분명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했음을 봅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다는 반응입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의 심중을 이해하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한 채 이런 현실을 겸손한 침묵중에
깊이 담아뒀을 것입니다.
이어 성전세를 바치는 문제로 국면을 전환합니다.
주님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주님의 자녀들이자 제자들이 성전세에서 자유롭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겸손히 성전세를 내도록 말합니다.
흡사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마태22,21)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스타테르 한 닢을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물고기 예화의 자연이적은 처음부터 대담에 깔려 있지 않았고 후대에 첨부됐을 것이라 해서
생략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이적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해석을 한다면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의 초인적 능력은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일 겁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계시되는 자유롭고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 모습이 친근감이 가고 감동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안에 갇혀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현장의 하느님,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중 크바르 강가에서 만나는 에제키엘의 하느님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중인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에제키엘 메시지의 핵심 주제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전조(前兆)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은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극치이자 절정입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가 주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피조물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영광이니 온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비가 시인은 고백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계시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눈을 열어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에제키엘 같은 묵시적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볼 수 있다면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움에 에워싸여 있음을 알것이다.”
그대로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라는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주님이 함께 계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겸손한 사랑중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언제 어디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살게 합니다.
“너희는 주님 이름 찬미들 하라.
당신의 이름만이 홀로 높으시도다.
하늘땅 아득 높이 찬란하신 그 영광!”(시편148,13).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