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8세의 이혼편력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칵테일이 있다. 보드카에 토마토 주스를 섞은 것이다. ‘블러디 메리’,즉 ‘피의 메리’라는 이 칵테일의 이름은 16세기 중반 영국의 여왕이었던 메리에게서 따 온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누라 갈아치우기로 유명한 헨리 8세였다. 사실 헨리8세의 ‘마누라 갈아치우기’는 일종의 통치행위였다.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가를 개창한 아버지 헨리7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헨리8세로서는 아들을 낳아 왕조의 기틀을 닦아야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아들을 낳아 줄 수 있는 여자를 찾아 모두 여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의 형수였다. 캐서린은 딸 (후일의 메리 여왕, 재위 1553~1558)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아들도 낳지 못하는 늙은 왕비에게 싫증이 난 헨리 8세는 뒤늦게 형수와의 결혼은 불법이라며 로마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
열받은 헨리 8세는 영국교회를 가톨릭으로부터 독립시켜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창설한 후, 캐서린과의 이혼을 강행했다. 헨리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불법으로 선언되자 메리는 졸지에 서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캐서린과 이혼한 헨리 8세는 시녀인 앤 볼린과 재혼했다. 그러나 앤 볼린에게서도 딸만 하나 얻었다. 이 딸이 바로 후일의 엘리자베스1세 (재위 1558~1603)다.
앤 볼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실망한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걷어찼다. 앤 볼린은 그녀의 오빠를 비롯해 다섯 명의 남자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헨리8세는 앤 볼린이 마녀였고, 자신은 마녀에게 홀렸던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두 살 난 엘리자베스는 그의 이복언니 메리처럼 서자로 선언되고, 궁전에서 추방되었다.

블러디 메리
1553년 16세의 에드워드6세가 사망하자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즉위하자마자 전에 무효화된 헨리8세와 캐서린의 결혼을 합법적인 것으로 선언, 캐서린을 복권시켰다.
아울러 메리는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추진했다. 그녀 자신이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외가이자 가톨릭 종주국인 스페인에 대한 동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신교도들은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후 스미스필드의 벌판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 수가 300여명을 넘었다.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모친의 복권을 외면한 엘리자베스
1558년 메리가 암으로 죽었다. 메리의 공포정치 아래서 숨을 죽이고 살던 영국인들은 진심으로 엘리자베스1세의 즉위를 환영했다.
메리와는 달리 엘리자베스1세는 앤 볼린을 복권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실 비천한 신분이었던 앤 볼린은 왕실이나 귀족 사회는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미움 받는 존재였다. 앤 볼린이 마녀였다는 헨리8세의 말도 안 되는 선전의 영향도 작지 않았다.
엘리자베스1세는 재위 기간 중 자신의 어머니 앤 볼린의 복권시키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친을 복권시키는 것이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을 둘러싼 해묵은 정치적․종교적 논쟁을 재발시키고, 국론분열을 야기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착한 베스', 대영제국의 초석을 놓다
대신 그녀는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통치자가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즉위 다음해인 1559년 의회가 그녀에게 하루빨리 결혼하여 후사를 볼 것을 청원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에게는 이미 영국(잉글랜드)이라는 남편이 있다.”
그녀는 신민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그대들은 나보다 더 위대한 군주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나보다 그대들을 더욱 사랑하는 군주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1세는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외국과의 무의미한 마찰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를 위해 그녀는 때로는 거짓말도 했고, 유럽 열강의 왕후(王侯)들에게 계산된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적 노력이 다했을 때에는 결연하게 행동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와의 결전을 앞두고 틸베리에서 장병들을 열병하는 자리에서 엘리자베스1세는 이렇게 말했다.
“대신들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지만, 나는 나의 신민들을 믿노라. 나는 즐거움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함께 살고 함께 죽기 위해 왔노라.”
국민들도 엘리자베스1세를 사랑했다. 국민들은 그녀를 ‘착한 베스’,‘글로리아나’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이따금씩 궁정음모가 발각되기도 하고, 치세 말기에는 경제위기가 닥치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 영국은 나라 전체를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성공했다.
엘리자베스1세가 즉위할 무렵 영국은 유럽의 변방 소국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치세가 끝날 무렵에는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스페인을 꺾고, 신흥 해양제국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가 개척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후 3세기 동안 계속될‘해가 지지 않는 제국’,대영제국’의 초석이 놓인 것이다.

‘과거지향형’ 지도자와 ‘미래지향형' 지도자
이복자매이면서도 메리와 엘리자베스1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부왕(父王)에게 억울하게 쫓겨난 자신의 어머니를 신원(伸寃)하고, 이미 대다수 영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던 낡은 신앙을 고집하면서 공포정치를 폈던 메리는 한 마디로 ‘과거’를 바라보며 산 통치자였다.
그 결과는 무익한 유혈과 국가의 퇴행, 민심의 이반이었다. 그녀는 이제 ‘피의 메리’라는 칵테일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어제에 얽매이는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과거에 집착하는 지도자는 나라를 망친다”는 교훈과 함께….
반면에 엘리자베스1세는 아예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지조차 않았다.신앙에 대해서도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녀 재위 기간 중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상당히 강도 높게 진행되긴 했지만, 그것은 반체제 세력에 대한 예방조치라는 성격이 강했다).
대신 그녀는 국민들의 해양진출을 장려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심지어 해적선을 후원하면서까지 국부(國富)를 쌓아 올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그녀는 ‘오늘’에 충실하면서, ‘내일’을 바라보며 살았던 지도자였다.
그 결과는 이후 300년에 걸친 ‘대영제국’의 번영이었다. 오늘날 엘리자베스1세는 여전히 영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근래에는‘위대한 CEO’로 재조명되고 있다.
메리가 ‘과거’와 자신의 개인적 신념에 얽매이는 지도자의 전형이었다면, 엘리자베스는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에 충실한, 그리고 교조적 신념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 지도자의 전형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떤 형의 지도자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형의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거기에 앞으로 수백년 동안의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