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세상이 참 단순한 줄로만 알았다. 두메 산골 까막골, 그 작은 동네가 곧 세상의 전부였다.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의 물소리, 저수지 무넘기에서 졸졸 내려오던 도랑, 둑 위에 늘어선 느티나무와
표고나무들. 그것들이 나에게는 세상의 경계였고, 그 너머는 막연한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다른 세계였다.
가끔 하루에 한두 대 지나가던 화물차는 그 경계를 잠시 흔들어 놓았다.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지나가는
그 큰 쇳덩어리를 바라보며 나는 자동차라는 것이 저런 것 하나뿐인 줄로 알았다. 그러다 조금 자라 ‘아이노리’
니 ‘하이야’니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쓰리쿼터’와 ‘버스’라는 이름의 교통수단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었고, 내가 모르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왕재 너머 평촌에 있는 고모댁에 갔을 때 처음 본 기차는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칙칙폭폭’ 소리를 내는 그 거대한 물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기차가
모두 같은 속도로 달리는 줄로만 알았다. 완행과 급행이 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이해는 그렇게 하나씩, 늦게 늦게 넓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던 배 위에서도,
가와사키에서 나라로 향하는 신칸센 안에서도 나는 또 하나의 차이를 배웠다. 같은 열차라도 어떤 것은 역마다
서고, 어떤 것은 빠르게 목적지로 향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속도의 차이는 곧 가격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에도 값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꼈다.
그 깨달음은 훗날 더 분명해졌다. 캄보디아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기다릴 때, 몇 달러를 더 내면 줄을 서지 않고
바로 통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또 러시아의 한 박물관 앞에서 몇 시간을 줄 서 있다가, 뒤늦게 온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먼저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돈으로 시간을 사고 있었고, 나는 시간
으로 돈을 대신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서류 하나를 빨리 떼려면 ‘급행료’가 필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어쩐지 부당
하게 느껴졌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것 역시 시간의 값에 대한 한 방식의 인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더 노골적이다. 일본의 어느 식당에서는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판다고 한다. 휴대폰
으로 QR코드를 찍으면 결제가 되고, 때로는 그 ‘빠른 입장’의 값이 음식값보다 몇 배나 비싸기도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을 아끼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문득 까막골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곳에는 줄도 없었고, 급행도 없었다. 모든 것은 느렸고, 그래서 오히려
충분했다. 기다림은 불편이 아니라 일상이었고,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지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서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쓰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어떤 이는 돈으로 시간을 사고, 어떤 이는 시간을 들여 돈을 아낀다. 그 선택의 갈림길
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속도를 정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먼 길을 걸어왔다. 까막골의 개천가에서 시작해 신칸센의 속도를 체험하고, 공항과 박물관의 줄
앞에서 시간을 생각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한 문장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시간은 곧 돈이다.
그러나 동시에, 돈으로 다 살 수 없는 시간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