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지혜 18,6-9; 히브 11,1-19; 루카 12,32-48
연중 제19주일; 2022.8.7.; 이기우 신부
1. 시대의 징표에 깨어 있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시대의 징표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뜻입니다. 참지식으로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지난 주일 말씀에 이어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시대의 징표에 따라서 행할 바를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이어서 거룩한 변모를 통해 신성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시대의 징표가 가리키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기를 촉구하십니다(8.6. 토요일 강론). 그것이 우리가 구원되는 길이요 시대가 구원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거짓의 문화로부터 받는 유혹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살림의 문화를 알아보는 데에도 둔감합니다(8.1. 월요일 강론). 그래서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작은 양 떼’라고 부르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 주셨습니다. 호수 위에 띠워 놓은 배에서 풍랑에 시달리면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구하시러 물 위를 걸어서라도, 아니 더 먼저는 기도 중이시라도 그리 하시듯(8.2. 화요일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고 유령인 줄로 착각하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 ‘작은 양 떼’ 속에는 세상으로부터 보잘것없다고 무시당하고 소외된 모든 이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고 이방인 출신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8.3. 수요일 강론). 오히려 사람들은 그저 하찮게 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일이 필요할 뿐입니다(8.4. 목요일 강론). 과연 십자가는 부활의 과정이자 하느님 나라의 관문이요 심판의 주요 대상입니다. 그래서 악에 대해 짊어지는 의인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함께 짊어지어 주시고 악에 맞서 함께 싸워주십니다(8.5. 금요일 강론).
3.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 설정된 원주교구에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지학순 다니엘 주교와 함께 강원도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일순 선생과 함께 시대의 풍상을 견디어 내며 자신을 내던져 이 땅의 정의를 살리고 생명 운동과 협동 운동의 소중한 가치를 가꾸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제자 세 사람(김영주, 이경국, 김상범)이었습니다. 노자 도덕경 38장에 “얄팍하게 살지 아니하고 중후한 삶을 살면서 높은 덕과 두터운 도를 좋아하는 사람을 대장부(大丈夫)라 칭하는 구절이 나옵니다(是以大丈夫處其厚 不居其薄: 시이대장부처기후 불거기박,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움에 머물고 얄팍한 데 거하지 않는다”). 장일순 선생이 노자 사상을 좋아해서 호를 ‘무위당’(無爲堂)이라고 짓고, 이 제자들을 ‘대장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원주 캠프’에 모인 사람들은 이 네 사람을 두고 ‘무위당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혹독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시대에 민주화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 생명 운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했습니다. 이 사랑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산업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4. 시대의 징표를 묻는다는 것
무위당 사람들의 실천이 지닌 의미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이고,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실천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시의 사제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정작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예레 2,8). 그런데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사람들은 신생 교구와 강원도의 가난한 이들에게 과연 필요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공의회 가르침에 비추어 하느님께 여쭈었습니다. 특히 교구 출범 후 얼마 되지 않은 1972년 8월에 남한강 유역에 집중 호우가 쏟아져서 원주교구가 관할하는 산하 탄광 지대와 제천, 단양 지역 등 남한강 유역의 13개 시군에서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물에 잠기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사태를 계기로 삼았습니다.
5. 협동조합 운동
지 주교는 독일 가톨릭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제레올, 카리타스 등으로부터 구호성금이 답지하자, 이 성금의 용도에 대해 무위당과 상의한 결과 무조건적인 시혜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노력의 대가로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구호성금을 재해지원금으로 지급하되 일정 기간 후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지급하였고, 개인을 통해서는 지급하지 않고 꼭 협동조직을 통해서만 지급함으로써 이 협동조직이 나중에 신용협동조합의 모태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탄광촌에서는 고리대금업이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필수품이 여러 단계의 유통 단계를 거치면서 시중 가격보다 3배 이상 비싼 경우도 흔했는데, 재해대책 활동으로서 이런 광산 지역에는 고리대금의 폐해를 없앨 수 있는 신협뿐만 아니라 유통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소비자협동조합까지 만들어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6. 민주화 운동을 거쳐 생명 운동으로
무위당 사람들이 지 학순 주교를 도와 가난한 농민들과 광부들을 협동조합 운동으로 자립을 시키고자 했던 1970년대는 유신독재 시절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자연히 농민들과 광부들도 예전과 달리 의식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 감시의 눈초리가 심해지기도 했고, 원주교구가 투자했던 원주문화방송의 부정부패로 투자금을 날리게 되자 이에 항의하는 민주화 운동이 자연스럽게 전개되었습니다. 이 민주화 운동은 얼추 자리잡기 시작한 협동 운동에서 더 근본적인 생명 운동으로 전환시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유신독재에 맞서는 투쟁과정에서 영성과 공동체성이 심히 훼손되었다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농업이 농약과 비료를 써서 토지를 산성화시키고 있어서 땅을 살려야 한다는 필요성도 컸으며, 신협 운동과 병행해서 실천했던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에 두루 적용시켜보자는 실험 정신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약과 비료를 써서 농사를 짓는 대신 유기농 방식으로 농산물을 생산하고, 도시의 소비자들도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계약을 맺으면, 농부들은 선불을 받고 재배할 수 있으니까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또 도시 소비자들은 안정된 가격에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살림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7. 공동체 운동의 리더십
협동조합 운동이건, 민주화 운동이건, 생명 운동이건 모두 대동세상을 이루자는 공동체 운동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지니는 사회적이고 영성적인 취지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리더십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리더십은 이미 박해시대에 한과 정과 흥의 조화로써 이룩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천주교 신자들은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억울한 희생을 당하면서 생긴 한이 엄청나게 컸었습니다. 하지만 이 한을 '교우촌'이라는 새로운 대동세상으로 건설하면서 풀었고 이 과정에서 '교우'라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특유한 정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과 대축일의 전례는 그들의 한과 정을 흥으로 승화시켜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사람들은 가장 늦게 설정된 꼴찌 교구에서 농촌과 탄광촌의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천주교 교우촌의 모범을 보여준 한과 정과 흥의 리더십을 재현함으로써 순교자들을 이어 받는 첫째가는 노릇을 한 셈이었습니다.
8. “기어라, 모셔라, 함께 하라”
이러한 운동이 아무런 갈등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원주교구 사제들이 늘어나고, 독일에서 지원했던 사업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면서 일어났던 무위당 사람들과 사제들 사이의 갈등은 지 학순 주교가 해소해 주어야 하는 몫이었고, 농촌이든 탄광촌이든 또는 도시에서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운동을 하면서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은 교육하는 일과 서로 간의 갈등을 조정해 주는 일이었는데 이 일은 무위당 장일순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숱하게 진행된 교육에서 무위당 선생이 강조했던 기본 자세가, “기어라, 모셔라, 함께 하라!”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할 수만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공동체 운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 “기어라!”에 담겨 있습니다. 모두의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듯이 정성껏 하라는 뜻이, “모셔라!”에 담겨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도 공생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동참해야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과도 공생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9. 허리에 띠를 매고, 시대의 징표에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뜻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되 실천함에 있어서는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시대의 징표에 걸맞게 응답한 처신에 따라 심판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예수님의 관심사는 메시아적 백성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펴도록 하시는 것이니 그분이 시대의 징표에 대한 반응과 응답 그리고 처신을 대상으로 삼아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허리에 띠를 매고”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응답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