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막내로 만나 12년 우정을 쌓아오며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던 홍명보와 황선홍. 스페인전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킨 뒤 황선홍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던 홍명보. "폴란드전에서 선홍이가 첫골을 넣는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홍명보. 이런 아름다운 두 선수와 그들의 우정을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못본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H-H라인과의 영원한 안녕!
지난 7월 5일 월드컵 국가대표팀 해단식을 취재하기 위해 축구협회 건물로 향하는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장마철에 월드컵이 열렸음에도 한 달 내내 경기에 영향을 줄 만한 비 한번 내리지 않더니 월드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태풍이 오고,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월드컵 기간 내내 히딩크 감독에게 고맙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태극 전사들에게 고맙고 지칠 줄 모르는 붉은 악마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살았는데 이젠 때맞춰 내려 주는 비에게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걸음 종종거린다. 오늘은 해단식.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비를 뚫고서 축구협회 건물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니 벌써 많은 사람들(학생들도 많고 히딩크 감독의 팬인지 아주머니들도 꽤 된다)이 진을 치고 있고, 그 앞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아직도 축구협회 건물까지는 몇 십 미터나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통제를 하는 것을 보니 오늘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고 예상을 하나 보다. 선수들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달려왔는데 일찌감치 길이 막혀 버린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아직 해단식까지는 1시간도 넘게 남았건만 벌써 1백여명이 넘는 취재진이 들어와 있었다. 우와, 월드컵 축구 선수단의 인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앞선 일정이 청와대 오찬이라더니 좀 늦어지는 모양인지 예정 시간인 오후 2시가 넘도록 선수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취재진들의 불만 섞인 말들이 터져 나오는 찰나, 비상구로 히딩크 감독을 앞세운 선수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도착해 제일 앞 좋은 자리에 서 있다가 방송 ENG 카메라와 일간지 사진 기자들의 몸싸움에 밀려밀려 비상구 앞까지 쫓겨갔던 필자는 눈앞에서 보고야 말았다. 23명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을. 김남일, 송종국, 박지성, 차두리, 이영표...... 그리고 나란히 들어오는 홍명보와 황선홍.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유명한 홍명보와 황선홍. 두 선수는 해단식 내내 조용조용 말을 나누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왔다. 언제 다시 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이젠 마지막이 아닌지. 황선홍은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 대회를 마친 후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겠다고 공식 선언을 한 상태였고 홍명보도 곧 선수 생활을 마감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최고의 콤비라던 환상의 'H-H 라인(홍명보-황선홍 라인)'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었다. 오래오래 담아두고 싶어 눈을 떼지 않았다. 잔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한 표정의 홍명보와 깔끔한 신사의 느낌을 풍기는 황선홍이 함께 국가대표라는 이름으로 하는 마지막 자리. 해단식은 4년 후의 꿈을 기약하는 자리라지만 히딩크 감독도 한국을 떠나며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작별을 뜻하는 Goodbye라고 말하지 않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So long이라고 하겠다"라고 말했다지만 지금 이 자리는 H-H라인과의 영원한 Goodbye의 자리였다. 안녕, H-H라인, 그러나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이번 월드컵은 한국 사람들에게 의미가 깊은 대회였다. 끝난 뒤 한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월드컵 얘기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적어도 1시간은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경기이야기를, 여자들은 주로 선수이야기를. 그만큼 한달동안 온 국민을 들뜨게 했던 대회. 그러니 선수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마는, 그 의미가 홍명보와 황선홍 선수만큼 큰 사람이 있을까?
이번 월드컵은 두 선수에게 의미가 그냥 크다기보다 어찌보면 치열한 마지막 전투장 같은 곳이었다. 12년을 붉은 색 국가대표복을 입고 산 선수들이었다. 1년이면 몇 달씩 대표팀에 차출되어 집에도 가지 못하고, 가족들도 보지 못하고, 그게 당연한 생활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선수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선수복을 벗는 마지막무대였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홀로 무대에 서 있는 느낌. 관객에게도,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장 멋진 무대를 만든 후 내려오는 커튼 뒤로 숨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커튼 뒤에서 만족한 표정으로 흐르는 땀을 닦고 싶었을 것이다. 참, 아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12년을 하루같이 최고의 친구로 있었던 두 선수는 함께 무대에 올려졌다. 그리고 공연은 시작되었다. 결과는?
해단식에서 두 선수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16강을 목표로 시작한 경기에서 선수들은 세계 4강이라는 신화를 일구어냈고 홍명보 선수는 이번 월드컵의 브론즈상을 거머쥐었다. 황선홍 선수는 우리나라의 첫 경기, 첫 골을 뽑아내 이번 대회가 이전의 월드컵처럼 그를 버리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 은퇴를 앞두고 보여 준 인상적인 플레이 덕에 세계적인 주얼리 브랜드 쇼메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커튼콜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홍명보와 황선홍. 이젠 헤어져 각각의 길을 가겠지만, 아마도 후배들의 헹가래로 함께 하늘을 날았던 그 순간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1990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막내로 만나 12년 우정을 TKg아오며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 주던 두 선수.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김태영과 교체 투입되면서 그라운드를 만진 뒤 유니폼에 입을 맞췄던 황선홍. 스페인전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킨 뒤 황선홍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던 홍명보, "폴란드전에서 선홍이가 첫 골을 넣는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홍명보. 이런 아름다운 두 선수와 그들이 우정을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못 본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월드컵 한국 경기 내내 걸려있던 현수막처럼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위안을 삼도록 하자.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축구를 만나다!
외아들이라 집에서 거는 기대라 컸던 홍명보는 축구가 좋았지만 쿡구를 하고 싶다는 말을 감히 부모님에게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 시간, 방과후에 축구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면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5학년이 되어서야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과외를 하면서 공부와 축구를 병행해야 했다. 그러던 홍명보가 전적으로 축궁제 전념할 수 있었던 건 모범생이었던 그가 어느 날 축구 경기를 보느라 과외를 땡땡이 쳤던 사건? 때문이다. 결국 부모님은 꼬마 홍명보의 축구에 대한 마음을 헤아리고 축구를 허락한다. 이 지점이 바로 홍명보가 드디어 축구와 랑데부를 하는 곳이다. 물론 모범생 홍명보는 축구를 시작하고서도 성적이 내내 20등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축구를 시작했다고 그가 일사천리의 길을 걸어온 건 아니가. 그에게 온 첫 번째 고비는 키였다. 도대체 키가 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운동 선수임에도 키가 앞에서 몇 번째일 정도였으니. 그래서 심각하게 축구를 그만둬야 하나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축구를 잘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았으나 언제나 '그런데 키가 너무 작아서...'라는 말을 들었으니.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키가 170cm가 되지 않던 그가 드디어 2학년때부터 1년에 10cm씩 자라기 시작해 2년 만에 지금의 키인 183cm로 훌쩍 커버린다.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소심한? 홍명보는 또 고민하기 시작한다. '축구선수가 키가 너무 크면 안정감이 없어서 좋지 않은데......'라고 걱정하며 키를 키우지 않기 위한 특단의 조취를 취한다. 우유 끊기!
홍명보의 좌절과 시련
축구를 시작한 이래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홍명보에게 최대의 시련은 바로 이번 2002 월드컵을 앞둔 작년에 일어났다. 그 나이까지 부상 없이 선수생활을 해 올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그였는데 이전에 없었던 부상이 나타난다. 왼쪽 정강이의 이상. 그것과 함께 바로 대표팀에서의 제외. 누구도 홍명보가 대표팀에서 빠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새로 부임한 히딩크 감독은 인기스타든 누구든 원점에서 다시 경쟁시키길 원했다. 게다가 부상으로 그 기간은 자꾸만 길어졌다. 언론에서도 그를 퇴물 취급하며 대표팀의 세대 교체를 얘기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든 시기였다.
몸을 추스르고 경기력을 되찾으며 히딩크 사단의 차출을 기다리던 올 2월. 드디어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건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다. 경기에 나가지 않고, 단지 대표팀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의 제의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자리라면 사양이다. 주전 경쟁을 통해서 당당히 베스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들어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선수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가 아니라 월드컵 그라운드에서 직접 뛰고 싶었던 선수였다. 그렇게 다시 합류한 히딩크호에서 그는 금세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얻었고, 철저한 자기관리 덕에 부상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며 이번 월드컵을 맞았고 브론즈상과 각종 MVP의 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홍명보가 말하는 황선홍
홍명보가 가장 절친한 친구라고 항상 말하고 다는 황선홍. 홍명보가 처음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었던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 황선홍은 이미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홍명보로서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든 처지였지만 금세 친구가 되었다.
홍명보는 황선홍을 백년지기 친구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8강 스페인전 때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후 황선홍에게 달려가 안겼던 것이다. 홍명보는 언제나 황선홍을 성실하고 더없이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중요한 시합때마다 부상으로 마음 고생을 겪었던 그의 불행을 항상 마음 아파했다. 그런 그들이기에 마지막 무대인 이번 월드컵이 의미있었고 선전을 다짐했다. 그리고 두 노장은 그 꿈을 이뤘다.
사랑을 만나다
축구선수 홍명보는 지금의 부인도 월드컵 때 만났다. 중학교 때 이민을 갔던 조수미씨는 1994년 월드컵을 앞두고 평가전을 위해 미국을 찾았던 홍명보를 만났다. 홍명보를 알고 있던 친구를 따라서 우연히 갔던 경기장에서 그와 인사를 나눈 것이다. 다섯 살 차이였지만 스무 살 부인의 눈에는 무표정에 말 없는 홍명보가 그저 아저씨처럼 느껴졌다고. 게다가 축구에 관심이 없던 그녀로서는 국가대표 선수든 아니든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해 월드컵에서 홍명보는 두 골을 터뜨렸고, 그 선수가 자기가 예전에 만났던 그 아저씨라는 것을 안 조수미씨는 축가 전화를 걸었고, 그 게 두 사람 연애의 시작이었다. 국제 전화비만 1백만원이 넘게 나와 전화선이 끊기기도 하는 시련?이 있었지만 듬직한 홍명보를 본 부모님의 적극 찬성으로 결혼으로 골인!
profil
◎1969년 2월 12일생◎183cm, 73kg◎백넘버 20◎광장초-광장중-동북고-고려대◎포항(92~97년)-일본 벨마레 히라스카(97~98년), 일본 가시와 레이솔(99~2001년)-포항(2002년~현재)◎월드컵 4회 출전, 일본 j리그 최초 외국인 주장, 2002년 월드컵 FIFA 브론즈볼 수상
가장 아름다운 선수 황선홍
축구를 만나다!
그 시절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듯, 황선홍도 낮이나 밤이나 친구들과 공을 치며 놀았다. 특별히 축구 선수가 되고 싶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더 축구에 빠졌다. 하지만 공을 치며 놀다가도 저녁때가 되면 친구들은 부르러 온 엄마들이 손을 잡고 하나둘 사라졌고, 어린 황선홍은 그런 모습을 항상 부럽게 쳐다보아야만 했다. 달리기를 잘해 육상선수가 될 뻔하기도 했으나 결국 5학년때 다른 학교 축구 감독의 눈에 들어 축구선수의 길로 들어선다.
차범근 같은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던 황선홍은 각종 초등학교 대회에서 득점왕과 최우수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중학교 때도 축구선수 생활은 계속 되었는데 초등학교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합숙 생활을 싲가했다는 것. 다른 선수들처럼 엄마의 손길이 없었지만 대신 황선홍에겐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가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황선홍에게 최고의 후원자이다.
황선홍의 좌절과 시련
황선홍은 흔히 운이 없는 선수라고 말한다. 수많은 대회에서 득점왕과 MVP를 거머쥔 선수에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명성에 비해서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국내용 선수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의 이런 평가 뒤에는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부상이 있었다. 그에게 부상은 공포일 정도였고, 그래서 그는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하는 홍명보가 부러운 따름이었다.
그의 최고의 시련 또한 부상과 함께 다가왔다. 국가대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국내 축구의 드래프트 제도의 부당함에 맞섰고, 결국 어느 구단으로도 가지 못하는 미아가 되고 말았다. 그 속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독일행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속했던 레버쿠젠으로 간 그는 한 시즌동안 17골을 넣으며 '차붐'에 이은 '황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상으로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전지 훈련차 독일에 온 홍명보 등 국가대표를 만난 후 집에 돌아와 샤워기를 틀어놓고 펑펑 울었다는 일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다음해 국내의 드래프트 제도가 바뀌면서 포항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독일에서의 2년은 그에게 최고 고난의 해였다.
황선홍이 말하는 홍명보
황선홍 역시 홍명보는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그고 그럴 것이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지도 13년. 포항과 가시와 레이솔을 거치며 항상 같은 팀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그래서 언제나 수비 깊숙한 지역에서 홍명보의 발을 떠난 공은 정확히 황선홍의 발로 옮겨지고 바로 골네트를 가른다. 바로 환상의 H-H 라인. 황선홍은 홍명보의 그런 경기 전체를 보는 눈을 높이 평가한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도 많이 믿는 친구다. 말이 없어서 간혹 화가 난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지만 사실은 의리 있고, 생각이 깊은 친구라고. 그래서 친해지기가 힘들지, 일단 가까워지고 나면 농담도 잘하고 친구를 배려하는 마을 씀씀이가 굉장히 깊다고 귀띔한다. 게다가 가정적인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황선홍이지만 홍명보의 자상한 면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니 오래 사귀어서 그런가. 점점 서로 닮아 가는 모습이 보인다.
사랑을 만나다
황선홍의 러브 스토리는 너무 유명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 또한 그가 유명한 애처가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다. 독일에서 외로운 시절을 보내던 황선홍은 한 모임에서 독일로 유학을 온 지금의 부인 정지원 씨를 만난다. 급속하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2시간을 달려야 볼 수 있는 거리에 살았음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물론 황선홍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것. 그러다 황선홍이 경기 도중 부상을 입어 수술 후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지원 씨가 그에게 달려와 병원 근처에 여관을 잡고 그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보살핌 덕분일까, 황선홍은 부상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고, 뒤이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prefile
◎1968년 7월 14일생◎백넘버 18◎183cm, 79kg◎송곡초-용문중-용문고-건국대◎독일 부퍼탈(91~92년)-포항(93~98년)-일본 세레소 오사카(98~99년)-수원 삼성(2000년)-일본 가시와 레이솔(2000년~현재)◎월드컵 4회 출전, 현 한국 A매치 최다골, 1999년 j리그 득점왕
홍명보 + 황선홍 네 번의 그들만의 월드컵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 막내로 월드컵 첫 무대를 밟다!
먼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건 황선홍이었다. 대학축구연맹전에서 '미완의 대가'라는 찬사를 들으며 황선홍은 1988년에 대표팀에 합류했고, 홍명보는 월드컵을 바로 앞둔 시점에 합류했다. 황선홍이 이미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찬사를 받았다지만 어쨌든 홍명보와 함께 대표팀의 막내였고, 둘은 얼떨떨한 상태로 이탈리아로 향한다. 황선홍이 나이상으로는 한 살 위였지만 이때 처음 만난 둘은 당장 친구가 되기로 한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홍명보와 황선홍은 세 게임 모두 주전으로 뛰었다. 그러나 결과는 3전 전패로 예선 탈락. 대표팀은 부진한 성적에 허탈해 했지만 둘은 달랐다. 월드컵에 출전했다는 것만으로 즐거웠고, 둘 모두 막내여서 부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 월드컵을 마치고 줄은 훌쩍 성장했고, 그들만의 월드컵은 그렇게 첫 걸음을 떼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 수비수 홍명보 두 골, 공격수 황선홍 한 골
이미 둘에게는 두 번째 월드컵이었고 이제는 막내가 아닌 팀의 기둥으로 출전한 대회였다. 물론 홍명보에게는 지금의 부인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 대회여서 더 의미 깊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홍명보에게는 잊을 수 없는 멋진 월드컵이었다면 황선홍에게는 큰 대회 부진이라는 오명이 시작되는 힘겨운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방을 썼었기에 홍명보는 대회 기간 룸메이트이면서 절친한 친구였던 황선홍의 부진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서정원, 노정운, 고정운 등 당시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와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홍명보는 스페인전에서 생애 첫 월드컵 골을 성공시키고, 독일전에서도 멋진 중거리 슛을 성공시킨다. 수비수의 득점이었기에 더 의미가 있었고, 그는 진정한 리베로가 된다. 하지만 공격수 황선홍은 한 골에 그치고 만다. 두 번째 월드컵은 두 사람에게 확실히 다른 의미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 황선홍의 큰 경기 부진이 되살아나다!
축구 팬들에게는 아픔으로 기억되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성적과 상관없이 대회 중에 당시 감독을 맡았던 차범근 감독이 전격 경질되었다. 2002년 월드컵 때에는 해설자로 새롭게 사람들에게 다가온 차 감독이지만 그 당시에는 성적 부진의 희생양이 되어 중간 귀국하였고, 결국 한국에서 견디지 못하고 중국으로 쫓겨가게 된다. 이런 사건 때문에 홍명보와 황선홍에게도 아픔으로 기억되는 월드컵이다.
황선홍은 월드컵을 앞둔 평가전 때 부상을 입어 프랑스에는 갔지만 한 번도 그라운드에서 뛰어보지 못했다. 홍명보에게는 콧수염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에게 5:0으로 졌던 기억이 아픔으로 남았다.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이임생이 붕대투혼을 보이고 선제골을 내주고도 유상철이 동점고을 뽑아내 마무리짓긴 했지만, 두 선수에게는 다시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대회였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 H-H라인이 이룬 월드컵 4강의 신화
황선홍은 대회 전에 월드컵 후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고, 홍명보에게도 마지막 월드컵. 때문에 아시아 최고의 H-H라인은 이번에는 꼭 16강에 들자고, 월드컵 첫 승을 올리자고 다짐했다. 새로운 전술과 선수 선발 방식을 갖고 있는 히딩크 감독의 영입으로 두 선수는 대표팀에서 제외되기도 하면서 마음 고생을 했지만, 결국 현 국가팀의 두 기둥이라는 것을 실력으로 감독에게 인정받는다.
그렇게 시작된 2002년 월드컵에서 황선홍은 그 동안의 큰 대회 부진의 오명을 씻고 환상적인 논스톱 킥으로 월드컵 첫 결승골을 성공한다. 그리고 내내 최전방과 최후진에서 후배들을 독려하며 팀을 이끌어 결국 한국팀을 4강에 올려놓는다. 스페인전에서 마지막 승부차기에 성공한 후 활짝 웃었던 홍명보 선수가 기억나는지. 어떤 자리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홍명보는 그 날 최고의 살인 미소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터키전에서 황선홍은 부상으로 뛰지 못하고, 홍명보는 실수로 선취점을 내줬지만 아름다운 한판 승부였다. 그게 축구 경기 아닌가. 경기 직후 관중들은 황선홍과 홍명보를 연호라고 히딩크 감독은 두 사람의 팔을 번쩍 들어 수고를 치하했고, 후배들은 그들을 헹가래쳤다. 네 번째 월드컵은 이렇게 그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