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히로시라고 합니다. 나는 1925년에 태어났고요, 태어난 디는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인디요, 살기로는 완주군 삼례면 혜전리 451번지로 이사를 가서요, 1945년 패전할 때까지 주욱 거기서 살았어요. 마을에 커다란 농장이 두 군데가 있었는디요, 하나는 호소카와 농장이고요, 또 하나는 이마무라 농장인디요, 이마무라 농장에는 신사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농사일을 했는디요, 그중의 어느 농장에서 일했는지는 잘 몰라요. 벌판을 빙 둘러 커다란 마을이 듬성듬성 에워싸고 있었는디요, 전체가 500세대라고 했어요. 그중의 30세대가 일본 사람이었어요.
늘 함께 놀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이제부터 나는 창식이가 아니라 니시무라니께 그렇게 불러야 되어. 그래도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창식이라고 불렀어요. 그랬더니 안 부르면 혼난다고 어서 부르래요. 그렇게 불렀어요. 그 친구는 열다섯 살 때 순사한테 연행되어 갔어요. 그렇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되어 곧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패전 때요? 중학교를 마치자 부산의 수산전문대학에 입학했어요. 스무 살 때였어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근로봉사를 나갔어요. 울산에서 근로봉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어요. 나는 왜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는지 몰랐어요. 해방이 뭔지, 패전이 뭔지, 그때까지 전혀 그런 거 몰랐어요.
(질의) : 한국말을 꽤 잘하시는군요. 어렸을 때 배운 말을 어떻게 잊어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까?
(이노우에) : 다 까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배웠습니다.
(질의) : 새로 배웠다면서 억양까지도 새로 배웠습니까? 억양을 들어보면 당신이 어릴 때 살았다는 전라도 억양 그대로인데, 그렇다면 새로 배울 때도 전라도 사람한테 배웠다는 뜻입니까?
(이노우에) : 잘 모르겄는디요. 그냥 혼자서 공부했는디요.
(질의)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일본에 와서 당신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말을 듣다 보니, 당신은 태어나기도 한국 땅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초등학교 중학교도 한국에서 다녔고, 또 대학도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했는데, 그렇다면 졸업하고 직장도 한국에서 잡고, 결혼도 한국에서 하고, 그렇게 영원히 한국 땅에서 살 생각을 하셨는지, 아니면 언젠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당신처럼 한국에 나와 사는 일본인 젊은이들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노우에) :—?
오늘 참석해주신 네 분 증언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분들은 모두 그 부모가 한반도에 이주하여 사는 동안 거기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라다가 패전이 되자 다시 일본으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이분들의 가슴속에는 모두 어린 시절의 일본이 없습니다. 오로지 한반도에서 살던 추억만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인구가 일본에는 지금 50만 명 이상이나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자이니치 자파니즈’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고, 이런 살아 있는 역사를 듣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송하춘,「시모다 후미요의 연애방정식」중에서
자이니치 자파니즈, 재일 일본인(在日日本人)의 사연을 전하는 소설 한 대목을 읽으며 역사의 낯선 가짓길 하나를 만난 느낌이 듭니다. ‘일본에 사는 일본인’이라는 아이러니한 이 호칭은 재일교포 지문 날인 거부 사건으로 다양한 일본의 구성원이 문제가 되었을 때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로 건너가 살다가 패전이 되자 돌아온 사람, 혹은 한반도에 나가 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 한반도에 살다가 할 수 없이 돌아온 사람들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가 생겼고 일본 정부는 ‘자이니치 자파니즈’라는 명칭으로 이들을 껴안았다고 합니다.
한편, 우리 사회에는 한국이나 일본 어느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 ‘재한 일본인 처’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과 결혼해 해방 후에도 한반도에 눌러앉은 일본 부인들, 해방과 함께 조선인 남편을 따라 한반도로 들어온 일본인 부인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경계인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들이고, 이들이 맞닥뜨려 사는 정체성은 견고한 역사에 균열을 냅니다. 역사는 기타를 괄호에 묶고 말지만 문학은 그 괄호를 풀어내며 시작합니다. 문학은 괄호에서 풀려나온 존재들의 흔들리는 몸짓에서 실존이든 역사든 인간 존재의 일반에 대해서 숙고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