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명: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허문도와 국풍 81>
방 송 일 시: 2005년 4월 10일 밤 10시 35분 ~ 11시 30분 (55분)
1. 기획의도
광주 항쟁 1주년을 무마시키기 위한 행사로 알려져 있는 국풍 81.
5일간 16만평의 여의도 광장에서 만 삼천명의 출연자와 천만여명의 관람객이 동원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축제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유신시대 저항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김지하와 김민기를 포함한 민중문화운동그룹을 체제내화 시키기 위한 허문도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
허문도를 중심으로 한 그의 하수인들과 이들에 대항하여 참여를 거부했던 그 반대진영의 처절한 싸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최초 공개한다.
2. 이 프로그램이 밝히는 새로운 사실
◆ 전국대학생민속축제에서 “국풍 81”로 탈바꿈한 관제행사
◆ 민중문화운동 진영을 포섭하라!
-출소한 김지하를 찾아 원주와 해남까지 찾아갔던 허문도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채희완 등 마당극 인사를 동원시키고자 했던 국풍 81
◆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대학생들을 포섭하려 했던 국풍의 주최측. 결국 군인, 공무원들 서울대 재학생으로 위장 참여!
-서울대 풍물패 학생들 국풍 참여 거부하자 선배들과 군인들 불러서 강제로 위장 참여
◆ 國風 ‘81, 그 이면에 숨겨진 파시즘
-전두환, 허문도 친필서명! 국풍 관련 정부문서 최초 공개
3. 주요 내용
“전국대학생민속축제”에서 “국풍 81”로 탈바꿈한 관제행사
허문도의 계획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 국풍 81. 이것의 효시가 “전국대학생민속축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그계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 당시 KBS PD 김웅래의 소박한 기획안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KBS 사장 이원홍과 허문도를 거치면서 거대 관제행사인 “국풍 81”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는 문화창달의 도구로 이용된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자유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축제’였다.
80년 12월 출소한 김지하를 찾아 원주와 김해까지 찾아갔던 허문도
허문도는 일본 유학 당시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국가형성과정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일본의 천황주의와 국수주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두환의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되어 5공의 체제홍보를 맡게 된다.
81년, 정무 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가 술을 들고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김지하를 찾아 그가 살고 있던 원주로 간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당성과 정치적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릴 국풍 행사에 참가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지하는 허문도를 피해 김해로 내려가고 허문도는 다시 김해로 가지만 끝내 김지하를 설득하진 못한다. 허문도의 국가주의를 완성시키기 위한 포섭 대상은 김지하 뿐만 아니라 그를 선두로 한 문화운동그룹에까지 미친다.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채희완을 포섭하라!
<소리굿 아구>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였으나 70년대 전반을 통해 크게 일어난 마당극 운동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이를 연출했던 김지하는 투옥되지만 80년 12월 석방되었을 때 시대는 많이 변해있었다. 마당극에 참가했던 저항의 상징인 김지하를 비롯하여 김민기, 연탈계의 교주로 불리우는 채희완, 소리꾼 임진택은 모두 회유 대상이 되었다. 그 목적은 국풍에 참가하여 문화적 리더쉽을 발휘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신체제하에서 탄압받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포섭하여 공개적으로 놀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참여를 거부하고 임진택은 KBS PD를 그만두고 마당극 소리꾼의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허문도는 그들 계보의 아래쪽에 위치한 각 대학의 연탈반 학생들에게 접근한다.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대학생들을 포섭하려 했던 국풍의 주최측
결국 군인, 공무원들 서울대 재학생으로 위장참여!
폭발적인 민주화의 열망으로 술렁이던 대학가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에서는 이들을 체제내화 시키고자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다.”라는 구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80년도부터 퍼져 나가기 시작한 각 학교의 탈반을 국풍에 참가시키고자한다.
하지만 이들도 참여를 거부하자 허문도는 새로운 묘안을 내놓는다. 자신의 학교 후배인 서울대학교 풍물패를 참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풍물패 “두레”의 현역 회원들마저 제의를 거절하고 군인이나 공무원 등을 동원하여 진행시키게 된다. 풍물패의 졸업생들과 군대에서 복무 중이던 이들까지 모두 데려와 “서울대”라는 이름으로 위장 참여시키고 공연 중 혹시라도 다른 행동을 할까봐 전경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상태로 진행된다.
국풍은 애초 허문도의 계획과는 달리 청년이 아닌 전문 예능인들 위주의 잔치로 바뀐다. 16만평의 여의도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기획 당시 주최측의 포섭 대상이 되었던 그룹의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國風 ‘81, 그 이면에 숨겨진 파시즘
-전두환, 허문도 친필서명! 국풍 관련 정부문서 최초공개
“넷째, 교육혁신과 文化暢達로 국민정신을 개조하려는 것입니다.” 1980년 9월 1일 육군 대장에서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 등극한 전두환의 제 11대 취임사 중 일부이다. 그리고 5공화국 정부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문화예술 분야를 언급한다. 또 민족문화 창달이 국정 4대 지표로 등극함으로써 문화가 국가의 적극적 통치 전략으로 격상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얻은 국풍 81의 효시였던 “전국대학축제경연대회” 문서에는 버젓이 전두환과 허문도의 친필서명이 담겨 있다.
대규모 군중동원으로 문화정부의 이미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전통문화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문화적 학살로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은 전두환 정권. 민중들마저 자신의 권력 안에 수용하려 했지만 매해 개최하려던 계획과는 달리 한해로 끝나고 말았던 여의도 드넓은 광장에서의 화려한 축제를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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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5 00:4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