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닌 일본 여성관
얼마 전 일본의 토교 올림픽 조직위원장 모리 요시로(森 喜郞)가 여성 폄하 막말로 현직에서 쫓겨났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깊은 배려 없이 올린 적이 있다. 명색이 10년 전이지만 총리를 했다는 모리 요시로의 정치인으로서의 행적이 곱지 않던 터라 역사적으로 몸에 밴 일본 남성들의 여성관을 힐난하다 보니 덩달아 일본의 여성마저 한 물에 싸잡아 험담만 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6 25 당시였던가 소설가 정비석의 수필 "러시아의 질라께 여인'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연해주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은 조선여자를 질라께 여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연해주에 살던 조선 질라께 여인 서너 명이 저고리 밖으로 젖가슴이 삐져나온 것도 아랑곳 않고 물에 밥을 말아먹는 걸 보고 질라께 여인은 음식도 깔끔하게 씻어 먹는다고 감탄하고 있을 참에 그나마도 한입에 훌쩍 마셔버린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하던 러시아 아낙네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내가 일본에서 학교 다닐 때 학교 아랫 쪽 철쭉에서 일본 여인 서너 명이 치마 걷어 올리고 흰 허벅지 들어내 놓고 엉거주춤 남자처럼 오줌 누는 모습을 보고 한 반 친구 여럿이서 합창하듯 놀려 댄 기억이 있고 초등학교 때 여자 담님 선생이 웃옷 홀랑 벗고 젖가슴 덜렁거리며 구령에 맞추어 건포 마사지 체조를 시키던 모습을 으레 그런 것이려니 하고 보아 았든 얘기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어렸을 쩍 여성관은 철저히 일본화된 의식이었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오히려 조선이란 사회가 철저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식민정책에도 풍속 문화만큼은 쉽게 동화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조선여인을 알기는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집 밖에서 본 일본 여인들은 무척 야무지고 강해 보였고 여자 담님 선생을 볼 때마다 무섭게만 보였다. 우리 조선의 어머니들은 바느질이나 자 자그레 한 손질이나 바느질할 때면 버릇처럼 "아이고아이고"하는 한탄쪼 흥얼걸임이나 어떤 때는 천리 밖 고향의 외할머니 생각하며 훌쩍훌쩍 눈물 흘리시는 것을 자주 보았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참 약한 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침 조회 때면 곧곧한 차렷 자세로 천황이 사는 궁성 니 주바 시(二重橋 궁성 들어가는 다리) 액자를 쳐다보며 최경례(最敬禮 ; 90도 각도 경례)를 철저히 시행하는 정규 사범학교 출신인 처녀 담님 선생님은 반 친구들과 놀다가 울면 "사나이는 우는 게 아냐! 요와 무시(弱蟲 ; 약한 벌레)나 우는 것이야!" 하며 되려 우는 녀석 따귀를 사정없이 갈기는 것이 예사였다.
지금도 이름은 잊었지만 70년이 넘은 지금도 성(姓)만은 기억된다. 쓰지센세이(辻先生)! 그녀는 만 2년 동안을 내 담님 선생이었다. 철저히 무장된 여자 훈장(訓長)으로 전혀 흐트러짐 없는 무서운 여자 선생이었지만 내가 조선으로 돌아간내가 지닌 일본의 여성관다는 말을 듣고 방학 중임에도 집으로 찾아왔다. 두려웠다. 행여 내가 또 뭣 잘 못 한 것이 없나 생각하면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나를 꼭 껴안아 주면서 "조선에 가더라도 건강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이 큰 처녀 선생님 눈에서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다. 내 어머니 같은 따뜻함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종전이 가까워질 무렵~ 사흘이 멀다 하고 마을 부인회에서 센닝바리(千人針)를 부탁하러 온다. 같은 마을에서 전장에 출정하는 장정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부적(?) 같은 것으로 1m 정도의 흰 천에 붉은 실로 "+"를 천명의 여인이 색여 휴대하도록 하는 센닝바리(千人針)로 이것을 착용하면 전장에서 적탄을 피해 죽지 않는다는 속설이지만 모두가 이것을 챙겨가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 집 길 건너에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베 고시"가 있었다. "벤고 시"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들어 보았자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부인이 어머니께 출정하는 남편을 위해 천일 침 한 땀을 부탁하러 왔다. 마을 반상회 때는 대동아전쟁을 이기고 미영 귀축들을 박멸하여 텐노 헤이카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후방의 여성들이 단호히 궐기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던 마을 유지 벤고시의 부인이었다. 단 몇 분이면 되는 천일침이 한 시간이 넘은 것 같다. 목숨을 기약 못하는 전장에 나가는 남편의 출정이 불안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헤어지는 벤고시 부인의 눈이 벌겋다. 강하다는 일본의 여성도 역시 범인의 아내임은 어쩔 수 없었던지 평소에 언니처럼 대하던 조선사람인 우리 어머니에게는 일본인에게는 말 못 할 여자의 약한 심정을 하소연했든 것 같았다. 아무리 군국주의 하에서 단련된 일본 여성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혈육의 아픔에는 거짓을 감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벤고시는 우리말 변호사(辯護士)의 일본말임을 알았다. 전쟁 말기에는 공무원이나 현직 판검사 아닌 자유업인 변호사도 가차 없이 동원되었지만 다행히 40세 고령자라는 이유로 국내 근무 중 종전을 맞아 무사했다는 전언을 들었다.
시절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의 척도가 달라짐은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느끼는 한일 양국 간의 여성의 기질이 확연히 다름은 한마디로 지조라는 가치관의 차이로 여겨진다. 철저한 일부종사의 미덕을 중시하는 조선의 여인과 과거야 어떠했건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실리주의적 일본의 여성들의 의식의 차이~ 내가 감히 단정 지을 수 없는 문화의 영역인 것을~
내가 70년도 말에 일본에 갔을 때 일이다. 늦은 겨울밤, 숙소로 정한 료(寮)를 못 찾고 방황할 때 조찡(초롱불)을 든 어느 노파에게 료를 물었더니 제법 먼 길을 걸어 료 입구까지 안내해 주었다. 한참 가다 뒤돌아 보니 그때까지 희미한 조 찡을 들고 내가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비춰주고 있었다. 료에 들어 서자 장지문을 열며 료를 못 찾아올 것 같아 무척 걱정했다고 무릎 꿇고 말하는 반백의 노파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글 / 쏠 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