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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정본(正本) 북부여기(北夫餘紀) 전문 및 해석
<통선생>
* 이 분을 국사 교과서 집필진으로 추천 운동을 하고 싶은데 힘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始祖 檀君 解慕漱 在位 四十五年 壬戌元年 帝 天姿英勇 神光射人望之 若天王郞 年二十三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사십오년 임술원년 제 천자영용 신광사인망지 약천왕랑 년이십삼
從天而降 是 檀君 高列加 五十七年 壬戌 四月 八日也
종천이강 시 단군 고열가 오십칠년 임술 사월 팔일야
(북부여의) 시조 단군 해모수의 재위 기간은 45년이다. 임술년(BC 239)이 원년이다.
단제께서는 한울님의 자태와 영웅의 용맹스러움을 지녔으며, 신령스런 광채가 번득이는 눈빛을
가지셨으니, 가히 천왕랑(하늘을 다스리는 왕의 자손, 天子)이라 할 만한 용모를 지니셨다.
그의 나이 23살이 되던 해 하늘의 뜻을 따라 강림하였다.
이때가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57년(BC 295)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依熊心山 而起 築室蘭濱 戴烏羽冠 佩龍光劒 乘五龍車 與從者 五百人
의웅심산 이기 축실난빈 대오우관 패용광검 승오룡거 여종자 오백인
朝則聽事 暮則登天 至是卽位 癸亥 二年 是歲
조즉청사 모즉등천 지시즉위 계해 이년 시해
해모수는 웅심산(대릉하 상류 조양 지역에 있는 산으로 추정)에 의거하며 병사를 동원하여
난강(蘭江, 대릉하로 추정)가에 궁궐을 짓고, 까마귀 깃털을 꽂은 갓을 쓰고,
용의 문양이 새겨진 번쩍이는 칼을 차고,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났다.
그를 따르는 500인의 군사들과 함께 아침에 나랏일을 살피시고,
저녁에 신축한 궁궐(天, 천안궁(天安宮)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음)에 입궁하였다.
드디어 해모수가 북부여 초대 단군으로 즉위한 것이다. 그해는 계해 2년(BC 238)이다.
三月 十六日 祭天 設煙戶法 分置五加之兵 屯田自給 以備不虞
삼월 십육일 제천 설연호법 분치오가지병 둔전자급 이비불우
이 해 3월 16일에 해모수는 하늘에 제를 올리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조세를
결정하는 연호법(煙戶法)을 제정하였고, 오가의 병사를 나누어 변방에 배치하였으며, 둔전제를
실시하여 자급자족하도록 하는 등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불우한 사태에 철저히 대비토록 하였다.
己巳 八年 帝 率衆 往諭故都五加 遂撤共和之政 於是 國人 推爲檀君 是爲北夫餘 始祖也
기사 팔년 제 솔중 왕유고도오가 수철공화지정 어시 국인 추위단군 시위북부여 시조야
기사 8년(BC 231) 단제께서 친위대를 이끌고 옛수도(고도, 백악산 아사달)로 가 오가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국인(공화정을 이끄는 수장, 백성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음)은
그를 단군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하여 해모수는 북부여의 시조가 되었다.
<참고>
단군세기 47대 고열가 단군 조(條)에 의하면 고열가 단군은 국세가 기울고 백성들이 흩어지자
단군의 자리를 내놓고 입산수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열가가 입산하기 전에 오가들에게 명하기를
이후 탁월한 자가 나타나면 그를 단군으로 추대하라고 하였다. 이에 오가들은 논의를 거친 후
탁월한 자가 나타날 때까지 공화정을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약 6년간 공화정을 실시하였다.
이 공화정을 해모수가 철폐시키고 그가 단군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冬十月 立公養胎母之法 敎人 必 自胎訓始
동십월 립공양태모지법 교인 필 자태훈시
그 해 겨울 10월에 단제께서는 공양태모법(公養胎母之法, 태교법, 여성교육법, 기초기본법 등으로
해석 가능)을 제정하고, 백성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태교(기초기본법)부터 가르칠 것을 훈시하였다.
壬申 十一年 北漠酋長 山只喀隆 襲寧州 殺巡使 穆遠登 大掠而去
임신 십일년 북막추장 산지객륭 습영주 살순사 목원등 대략이거
임신 11년(BC 228) 북막의 추장 산지객융이 영주(일부학자들은 영주를 조양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산동성 동쪽이라고 주장하기도 함, 여기서는 영주로 추정함)를 습격하여 순사(전국을 순회하며
감찰하는 특수임무를 맡은 관리) 목원등을 살해하고, 대량의 약탈을 저지르고 돌아갔다.
庚辰 十九年 丕 薨 子準 襲父封 爲 番朝鮮王 遣官監兵 尤致力 於備燕
경진 십구년 비 훙 자준 습부봉 위 번조선왕 견관감병 우치력 어비연
先是 燕遣將 秦介 侵我西鄙 至滿番汗 爲界
선시 연견장 진개 침아서비 지만번한 위계
경진 19년(BC 220) 비(丕, 기자의 후손, 번조선왕)가 죽었다. 그 아들 준(準,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箕準을 말함)이 아버지의 직위를 세습하여 번조선의 왕이 되었다. 관리를 파견하여 병사를
감독하도록 하고, 연나라의 침입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의 진개가 우리나라 서쪽지방을 침입하여 만번한(대릉하의 하류와 요하의 하류,
요동만 지역으로 추정)에 이르러 그 경계를 이룬 적이 있었다.
辛巳 二十年 命 祭天 于白岳山阿斯達 七月 起新闕 三百六十六間
신사 이십년 명 제천 우백악산아사달 칠월 기신궐 삼백육십육간
신사 20년(BC 219) 단제께서는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고
7월에 366칸 새로운 궁궐(이 궁궐을 천안궁(天安宮)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음)을 짓도록 하였다.
癸未 二十二年 滄海力士 黎洪星 與韓人張良 狙擊秦王政 于博浪沙中 誤中副車
계미 이십이년 창해력사 여홍성 여한인장량 저격진왕정 우박양사중 오중부거
계미 22년(BC 217) 창해역사 여홍성과 한(韓)나라 사람 장량이 진왕(중국의 진시황제)의 어가(政)를
박랑사(모래사장, 해변가) 한복판에서 저격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오중하여 부차(수레)만 박살내었다.
<참고> 이후 창해역사 여홍성은 창해군의 거수(제후)가 되었는데, 창해군은 북부여의 거수국으로
현 중국의 천진지역에 있었다. 추정하건대, 박랑사는 천진지역의 해변가 모래사장으로 추정된다.
창해군에 대하여 중국 사서인 후한서에서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면서 창해역사를
창해군의 제후로 봉하고, 얼마 되지 않아 창해군을 폐하여 요동군과 병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중국의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 서술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북부여의 기록으로는
맹위를 떨쳤던 연나라 진개를 해모수가 몰아내었고, 회복한 고토(난하의 하류 요동군)에
기준(箕準)을 번조선왕으로 봉하여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으며, 진나라의 확장을 저지하였던
여홍성을 창해군(천진지역)의 거수로 봉하여 진나라의 확장을 막았던 것이다.
壬辰 三十一年 陳勝 起兵 秦人 大亂 燕齊趙民 亡歸番朝鮮 者數萬戶 分置於上下雲障 遣將監之
임진 삼십일년 진승 기병 진인 대란 연제조민 망귀번조선 자수만호 분치어상하운장 견장감지
임진 31년(BC 208) 진승(중국 하남성 등봉 사람)이 병사를 일으키자 진나라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도망쳐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그 수가 만여 호에
달했다. 번조선은 그들을 상하운장(난하하류, 연장성의 상하 지역, 구(舊) 요동군, 현(現) 창려현)
지역에 분치하였다. 그리고 장군을 파견하여 그들을 감독하였다.
<참고> 진승
- 이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부분 수정하여 인용한 것임을 밝힘.
진승은 중국 진(秦) 말기의 농민반란의 지도자로서 자(字)는 섭(?)이고, 양성(陽城, 지금의 河南省
登封) 사람이다. 한(漢)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은왕(?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진승은 BC 210년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BC 210)가 죽고 막내아들 호해(胡亥, BC 221 ~BC 207)가 2세황제(二世
皇帝)로 즉위하였으나, 환관 조고(趙高)의 전횡(專橫)으로 백성들은 더욱 도탄(塗炭)에 빠졌다.
기원전 209년 7월, 2세황제는 장성(長城) 건설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위해 과역(課役)이 면제되었던
빈민(貧民)까지 징발(徵發)하였고, 진승(陳勝)도 징발되어 둔장(屯長)으로서 900명의 일행과 함께
어양(漁陽, 지금의 北京市 密雲)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일행이 기현(?縣) 대택향(大澤?,
지금의 安徽省 宿州市 宿縣)에 이르렀을 때 큰 비를 만나 정해진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진(秦)은 법(法)으로 기한을 어기는 사람들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정해 놓고 있어서,
진승(陳勝)은 오광(吳廣)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진승(陳勝)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진승(陳勝)은 ‘대초(大楚)’의 장군(將軍)임을 자처하며 당시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던 당대 영웅이었다.
己亥 三十八年 燕盧? 復修遼東故塞 限浿水 浿水 今潮河也
기해 삼십팔년 연노관 복수요동고새 한패수 패수 금조하야
기해 38년(BC 201)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연장성)를 수리하였다. 그 요새(연장성)는
패수까지 이르렀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난하의 서쪽 강, 하북성에서 발원하여 일부는
백하(白河)와 합류하여 발해만으로 흐르는 강, 일명 월하(月河), 고수(沽水), 조백신하(潮白新河),
한고(韓沽))다. 고(沽)는 물줄기라는 뜻이다.
丙午 四十五年 燕盧? 叛漢 入凶奴 其黨衛滿 求亡於我 帝不許
병오 사십오년 연노관반한 입흉노 기당위만 구망어아 제불허
병오 45년(BC 195)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들어갔다.
그 무리 중 위만은 우리나라(북부여)에게 망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단제께서는 불허하였다.
然 帝以病 不能自斷 番朝鮮王 箕準 多失機 遂拜衛滿 爲博士 劃上下雲障 而封之
연 제이병 불능자단 번조선왕 기준 다실기 수배위만 위박사 획상하운장 이봉지
얼마 후 단제께서는 병이 나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뇌졸중으로 추정).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의 망명을 수용하고, 그에게 박사라는 직위를 내렸다.
그리고 상하운장(난하의 하류, 구(舊) 요동군, 현(現) 창려현)을 나누어 주고,
위만을 그 지역의 거수(제후)로 봉하였다.
<참고>
이것이 소위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위만조선이다.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 북부여의 서쪽 변방인 난하 하류 지역이다.
즉 연장성이 끝나는 갈석산을 기점으로 하여 그 상, 하 지역이다.
현재 중국의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끝이 나는데, 산해관까지 연장성을 연장시킨 것은
명나라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是歲冬 帝 崩 葬于熊心山東麗 太子 慕漱離立
시세동 제 붕 장우웅심산동려 태자 모수리립
그 해 겨울 단제께서 붕어하였다. 웅심산의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태자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二世 檀君 慕漱離 在位 二十五年 丁未元年 番朝鮮王 箕準 久居須臾 嘗多樹恩 民皆富饒
이세 단군 모수리 재위 이십오년 정미원년 번조선왕 기준 구거수유 상다수은 민개부요
2세 단군 모수리의 재위 기간은 25년이다. 정미년(BC 194년)이 원년이다. 번조선왕 기준(箕準)은
수유국(須臾國, 중국 하북성 난하의 승덕 지역에 있던 나라로 고조선의 거수국, 백악산 아사달)을
오랫동안 통치하면서 일찍부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기(嘗多樹恩)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넉넉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後 爲流賊所敗 亡入于海 而不還 諸加之衆 奉上將卓 大擧登程 直到月支 立國
후 위류적소패 망입우해 이불환 제가지중 봉상장탁 대거등정 직도월지 립국
月支 卓之生鄕也 是爲 中馬韓
월지 탁지생향야 시위 중마한
하지만 후에 떠돌이 도적떼 위만(衛滿)을 중심으로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에서 망명해 온 망명족)들
에게 패망하였다. 기준은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제가의 무리들은
상장군 탁(卓)을 받들고, 대거 이주 길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 현(現) 중국의 서장자치구로 추정,
중국의 서북쪽)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月支)는 탁(卓)의 고향이다.
이것을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참고>
월지국에 대한 논란은 미궁에 빠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탁(卓)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충청남도
익산의 금마, 혹은 충청남도 홍성(예산)의 금마(홍성과 예산의 경계 지역에 금마면이 있음)라는 곳에
접안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는 설이 있고, 일부 학자들은 탁(卓)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간 것이
아니라, 육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서북쪽 서장자치구 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설이 있다.
번조선의 후예들이 서장자치구 쪽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중에는 번조선의 후예들이
현 아프카니스탄 지역에 대월지국(BC 130 - AD 45)을 건설하였고, 이후 AD 5세기경 인도의
쿠샨왕조를 이루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위 글에서도 탁(卓)의 군대가 바다를 건넜다는 말은 없고, 대거등정(大擧登程)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번조선의 후예들이 육로를 이용하여 어디론가 멀리 떠났음(탁(卓)의 고향)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운 나라가 중마한(中馬韓) 이라는 것이다.
於是 弁辰二韓 亦 各以其衆 受封百里 立都自號 皆聽用 馬韓政令 世世不叛
어시 변진이한 역 각이기중 수봉백리 립도자호 개청용 마한정령 세세불반
이때부터 변한과 진한 역시 각각의 무리를 이끌고 백여리의 땅을 봉 받아 도읍을 정하고
각자 국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변한과 진한 모두 오랜 기간 동안 마한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마한의 지시를 따랐다.
戊申 二年 帝遣上將 延? 勃 設城柵 於平壤 以備賊滿 滿亦厭苦 不侵擾
무신 이년 제견상장 연타발 설성책 어평양 이비적만 만역염고 불침요
무신 2년(BC 193) 단제께서는 상장군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심양으로 추정)에 성책(城柵)을 쌓아
도적 위만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위만 역시 평양 공격의 불가함을 깨닫고 더 이상 침략하여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참고> 평양(平壤)이라는 지명은 특정 지역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거수국(제후국) 중 규모가 컸던 나라의 도읍지 또는 혁명의 발상지를 일컫는 보통명사다.
"향고도"님이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daum.net/sabul358/4399090)에 있는 중국 고지도를
분석해 보면 하북성에도 평양이 있었고, 하나라, 주나라가 일어난 빈기(낙양과 장안 지역, 하북성,
산서성, 하남성, 산동성의 경계지역, 섬서성)에도 평양이 있었으며, 요녕성 조양, 요양, 심양도
한때는 평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반도 북한에도 평양이 있다.
평양이라는 용어는 고조선 시기에는 장당경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위 글 무신 2년에 상장군 연타발이 성책을 쌓았다는 평양은 요양이나 심양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위만(衛滿)이 기준(箕準)을 몰아내고 요동지역을 차지한 후 한(漢)나라의 외신(外臣)을 자처하며
한나라의 지원을 받아 계속해서 북동진하여 대릉하 하류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이후 위만은 한나라에게 점령되었고, 한나라는 이곳에 소위 한삼군(漢三郡, 낙랑, 진번, 임둔)을
설치한 후 또다시 동진하여 요하의 저쪽지역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현토군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말하는 한사군(漢四郡, 낙랑, 진변, 임둔, 현토, BC 108)이다.
그렇다면 BC 108년 이후 한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경계는 요하를 기점으로 그 경계를 이루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대릉하의 상류 지역에 있던 조양(북진)은 BC 195년 이후
북동진하는 위만과 그 이전 연나라의 타켓이 되었으므로 당시의 도읍지라고 볼 수 없다.
요양은 조양의 동쪽에 있으며 요하의 지류인 혼하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심양과 해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에 의하면 단제께서는 기유 3년(BC 192)에
요하의 하류 동쪽에 있는 해성(海城)을 평안도에 편입시키고, 동생인 고진에게 그 지역을 수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양은 요양이거나 심양을 말한다. 그러나 요양은 요하나 혼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도시로 발전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다.
따라서 요양은 거수국의 도읍지였을 수는 있으나 당시의 평양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현재 북한의 평양 역시 당시의 평양이라고도 볼 수 없다. 평양이 속한 평양도가
당시 요동반도를 넘어 요하지역까지 그 도계를 이루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현재 북한의 평양 주위에는 해성이라는 성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심양은 요하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요하와 혼하 사이에 위치하며 요하 물줄기에
더 근접해 있다. 따라서 심양은 도읍지로서의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당시 북부여의 중심지역이었다.
추측하건대 심양은 당시 단군의 직할지였고, 이곳이 아래 기사에 나오는 중부여(中夫餘)의
중심지로서 당시 중부여의 도읍지 평양이었을 것이다. 심양과 해성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해성은 한때 고조선의 이궁이 있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역이다.
당시 심양이 평양이었다면 해성을 평안도에 편입시켰다는 아래 기사는 그렇게 어색하지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양은 심양지역으로 추정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개원 지역까지도
평양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己酉 三年 以海城 屬平壤道 使皇弟 高辰守之 中夫餘 一域 悉從 糧餉
기유 삼년 이해성 속평양도 사황제 고진수지 중부여 일역 실종 량향
기유 3년(BC 192)년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포함시키고, 황제의 동생 고진에게 그 지역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며 따랐으므로 곡식을 내어 구제 하였다.
冬十月 立京鄕分守之法 京則天王 親總衛戍 鄕則四出分鎭 恰如 柶戱觀戰 龍圖知變也
동십월 립경향분수지법 경즉천왕 친총위수 향즉사출분진 흡여 사희관전 용도지변야
그 해 겨울 10월에 경향분수지법(京鄕分守之法, 총체적 국가 방어법)을 제정하였다.
서울(도읍지)은 천왕이 친히 총체적으로 수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윷놀이 판의 말판과 같았다.
<참고>
오늘날 윷놀이의 말판은 정방형(정사각형)의 모습이나 과거에는 마름모형의 말판이었다.
만주의 북쪽에 북부여가 있었고, 한반도에 마한이 있었으며, 만주의 서쪽에 중마한이 있었고,
동쪽에는 읍루(숙신)가 있었다. 그리고 마름모꼴의 한 복판에는 중부여(단군의 직할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모습은 마치 윷놀이의 말판과 같았으며,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거수국(제후국)들이 있었던 것이다.
辛未 二十五年 帝 崩 太子高奚斯立
신미 이십오년 제 붕 태자고해사립
신미 25년(BC 170)에 단제께서 붕어하셨다. 그리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였다.
三世 檀君 高奚斯 在位 四十九年 壬申元年 正月 樂浪王 崔崇 納穀 三百石 于海城
삼세 단군 고해사 재위 사십구년 임신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 납곡 삼백석 우해성
3세 단군 고해사의 재위기간은 49년이다. 임신원년(BC 169) 정월에
낙랑(현 북한의 평양과 안주 지역)의 왕 최숭(崔崇)이 곡식 삼백석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先是 崔崇 自樂浪山 載積珍寶 而渡海 至馬韓都王儉城 是 檀君解慕漱 丙午冬也
선시 최숭 자낙랑산 재적진보 이도해 지마한도왕검성 시 단군해모수 병오동야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산(난하, 고려하 지역의 산,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에 있던 산)으로부터
보물(珍寶)을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도읍지인 왕검성(북한의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 195) 겨울이다.
<참고> : 최숭(崔崇), 패수(浿水), 낙랑군(樂浪郡), 낙랑국(樂浪國)
해모수 병오년는 BC 195년이다. BC 195년은 위만(衛滿)이 번조선에 망명을 요청한 시기이다.
북부여의 단제 해모수는 위만의 망명을 불허하였으나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을 받아들였다.
결국 위만은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로부터 망명한 망명족을 규합하여 번조선(일명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당시 번조선 지역은 난하(?河)를 기점으로 난하의 동쪽에 위치한 구(舊) 요동군, 현(現) 창려현
지역이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갈석산이 있는 곳으로 갈석산은 연나라 장성이 끝나는 지점이다.
현재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의 장성은 산해관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후에 명나라가 연장하여
쌓은 것이다. 한편 중국 기록에 의하면 번조선왕 기준(箕準)을 몰아낸 위만(衛滿)은 한(漢)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어 한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고 계속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당시 낙랑(樂浪)은 북부여의 거수국(渠帥國, 제후국)이었고, 최숭은 낙랑국의 거수(渠帥, 제후)였다.
난하(?河)를 기점으로 중국과 경계를 이루며 중국의 확장을 막아주던 번조선이 위만 세력에게
망하자, 번조선과 인접해 있던 낙랑은 위만의 세력을 막을 수 없어 그의 일족과 함께 많은 재물을
싣고 망명길에 올랐고, 그들의 마지막 귀착지는 바로 마한의 도읍지인 현 북한의 평양(마한의
왕검성)인 것이다. 당시의 뱃길은 해안선을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숭(崔崇)은 단번에 평양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물자를 싣고, 많은 백성들과 함께
그 먼길을 단번에 항해한다는 것은 당시의 조선술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숭 세력은 요동만(요동반도의 서쪽)과 서한만(요동반도의 동쪽)을 항해하면서 망명지를 찾아
여러 곳을 물색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숭(崔崇)은 그의 세력의 일부를 군데군데에 잔류시켰을 것이며, 그들은 주로 강의
하구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언제든지 또 다른 지역을 찾아 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머물던 강을 모두 패수(浿水)라 칭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낙랑은 번조선과 함께 난하(?河)를 기점으로 그들의 삶을 영유하였었는데,
이 난하가 바로 패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나 우리나라의 역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를 보면 요녕성과 한반도에
패수(浿水)라는 이름이 구석구석에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북성의 난하, 요녕성의
대릉하와 요하, 한반도의 압록강과 청천강과 대동강을 모두 패수(浿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최씨 낙랑의 이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패수(浿水)라는 강 이름이 이곳저곳에 있을 수 있었을까?
한편 한반도 평양에 도착한 최숭(崔崇)은 마한에 망명을 요청하였고, 마한은 최숭의 망명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청천강 중류의 안주(安州) 지역을 할애하여 주었다. 그들을 후에 안주와 평양을
기점으로 그들의 세를 확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반도의 최씨낙랑국이다. 일명 낙랑국이라 한다.
우리는 낙랑군과 낙랑국을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낙랑은 난하 지역에 있던 고조선과 북부여의
거수국이었다. 그러나 후에 낙랑은 위만과 한나라에게 점령되었다. 이곳을 점령한 한(漢)나라는
이 지역을 요동군과 낙랑군으로 쪼개 놓았다.
즉 낙랑군은 난하 지역에 한나라가 설치한 행정구역상의 낙랑군이다.
반면 한반도의 안주와 평양지역에 있던 낙랑은 최숭(崔崇)의 일족이 건국한 최씨낙랑국이다.
따라서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은 난하의 동쪽 요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중부 평양과
안주 지역에 있었다. 이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과거 역사학자들은 한반도의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착각하여 한나라의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한나라는 결코 요하를 넘어서지 못하였고, 한사군은 한반도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난하와 대릉하 사이에 있었다.
癸丑 四十二年 帝 躬率 步騎一萬 破滿賊 於南閭城 置吏
계축 사십이년 제 궁솔 보기일만 파만적 어남여성 치리
계축 42년(BC 128) 단제께서는 몸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녀성에서
위만 도적떼를 격파하고 그곳에 관리를 주둔시켰다.
<참고> 남여성(南閭城)은 창해군(蒼海郡)
중국 기록에 의하면 남여(南閭)는 창해군(蒼海郡)의 제후다.
남여를 우리 역사서에서는 창해역사(蒼海力士)라 칭한다. 창해군은 현재 중국의 천진 지역이다.
남여는 위만이 번조선을 권모술수(한나라의 침입을 빙자하여 군대를 입궐시켜 번조선왕 기준을
몰아냄)로 멸망시키자 요동인 28만명을 이끌고 한(漢)나라에 투항하였다.
한나라는 그들을 천진 지역에 살도록 하였다.
중국은 이 천진 지역을 창해군이라 칭하고, 남여를 창해군의 제후로 봉하였다.
이 창해군을 <북부여기>에서는 남여성(南閭城)이라 칭한 것이다.
그 후 한나라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창해군에서 군대를 징발한 일이 있다.
하지만 창해군의 군대는 한나라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흉노는 진조선의 별종으로
번조선과는 같은 조선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나라는 1년 후 창해군을 폐하고 요동군에 편입시켰다.
창해군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북부여의 3세 단군인 고해사(高奚斯)가
위만을 격파한 지역은 천진 지역이다.
庚申 四十九年 一群國 遣使 獻方物 是歲 九月 帝 崩 太子 高于婁立
경신 사십구년 일군국 견사 헌방물 시세 구월 제 붕 태자 고우루립
경신 49년(BC 121) 일군국(황하강 이남의 나라)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방물, 특산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가 즉위하였다.
四世 檀君 高于屢(一云 解于屢) 在位 三十四年 辛酉元年 遣將討右渠 不利 擢高辰 守西鴨綠
사세 단군 고우루(일운 해우루) 재위 삼십사년 신유원년 견장토우거 불이 탁고진 수서압록
增强兵力 多設城柵 能備右渠 有功 陞爲 高句麗侯
증강병력 다설성책 능비우거 유공 승위 고구려후
4세 단군 고우루(일명 해우루)의 재위 기간은 34년이다.
신유 원년(BC 120)에 장군을 파견하여 우거(위만의 손자)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백하)을 지키도록 하였다.
고진은 병력을 증강하고, 많은 성책(성벽과 울타리)을 쌓아 우거의 침략을 막는데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를 고구려의 제후로 승격시켰다.
癸亥三年 右渠賊 大擧入寇 我軍大敗 海城以北 五十里之地 盖爲虜有
계해삼년 우거적 대거입구 아군대패 해성이북 오십리지지 개위로유
계해 3년(BC 118)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대패하여 해성(海城, 요하의 동쪽)과 그 북쪽 50여리 땅을 모두 빼앗겼다.
* 북쪽이 고진(고구려)에 막히자 우거는 동으로 세력을 펼친 것으로 추정된다.
甲子四年 帝 遣將 攻海城 三月 而不克
갑자사년 제 견장 공해성 삼월 이불극
갑자 4년(BC 117) 단제께서 장군을 파견하여 3개월 동안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탈환하지 못하였다.
丙寅六年 帝 親率 精銳五千 襲破海城 追至薩水 九黎河以東 悉降
병인육년 제 친솔 정예오천 습파해성 추지살수 구려하이동 실항
병인 6년(BC 115) 단제께서 친히 정예병 5000명을 이끌고 해성을 습격하여 대파하고,
그들을 살수(조하, 潮河, 난하와 백하 사이의 강)까지 추격하였다. 구려하(백하(白河, 중국의
음산산맥에서 발원하여 천진을 지나 발해만으로 흐르는 강), 일명 서압록) 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참고>
"청국지지(1882년 작)"를 보면 백하의 밀운 지역에 고가(高家)가 보인다.
즉 고구려 집성촌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근원지가 밀운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은 이 백하를 고구려하, 또는 구려하라 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수(薩水)가 조하(潮河)이고, 백하(白河)가 압록강이라는 또 다른 주장은
아래 블로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살짝 클릭 : http://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437
丁卯七年 設木柵於坐原 置軍於南閭 以備不虞
정묘칠년 설목책어좌원 치군어남여 이비불우
정묘 7년(BC 114) 좌원(북경 또는 밀운으로 추정)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여(천진)에 군대를 주둔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참고>
중국의 기록에 한나라는 천진 지역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창해역사 남여(南閭)를 제후로
봉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남여는 현 중국의 천진 지역이다.
癸酉十三年 漢劉徹 寇平那 滅右渠 仍欲易 置四郡 盛以兵四侵
계유십삼년 한유철 구평나 멸우거 잉욕역 치사군 성이병사침
계유 13년(BC 108) 한나라 유철이 평나(영평, 난하의 동쪽, 구(舊) 요동)을 침략하여
우거(위만의 손자)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지역에 사군을 설치하였다.
사군 병사들의 침략행위는 더욱더 심해졌다.
於是 高豆莫汗 倡義起兵 所至連破漢寇 遺民四應 以助戰 軍報大振
어시 고두막한 창의기병 소지연파한구 유민사응 이조전 군보대진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였다.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도왔다.
고두막한의 군대는 크게 적을 무찔러 유민의 호응에 보답하였다.
甲午三十四年 十月 東明國 高豆莫汗 使人來告 曰 '我是天帝子 將欲都之 王其避之' 帝難之
갑오삼십사년 십월 동명국 고두막한 사인래고 왈 '아시천제자 장욕도지 왕기피지' 제난지
是月 帝 憂患成疾以崩 皇弟 解夫婁立
시월 제 우환성질이붕 황제 해부루립
갑오 34년(BC 87) 10월 동명국 고두막한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장차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그곳을 비워 주시오."라고 하였다.
단제께서는 난처해 하였다. 이 달에 단제께서는 우환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황제(해우루)의 동생 해부루가 즉위하였다.
東明王 以兵脅之不已 君臣頗難之 國相 阿蘭弗 奏 曰
동명왕 이병협지불이 군신파난지 국상 아란불 주 왈
'通河之濱 迦葉之原有地 土壤膏? 宜五穀 可都’
'통하지빈 가섭지원유지 토양고유 의오곡 가도'
遂勸王移都 是謂 迦葉原夫餘 或云 東夫餘
수권왕이도 시위 가섭원부여 혹운 동부여
동명왕은 군사를 동원해 협박을 늦추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들은 더욱 난처해졌다.
이때 국상 아란불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통하(송화강)의 동쪽 가섭원에 땅이 있는데, 그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오니
그곳을 도읍지로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은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이것이 가섭원 부여다. 혹은 동부여라고도 한다.
<참고>
통화(通河)는 송화강을 말한다. 만주 동북쪽 소흥안령산맥과 장광재령이 만나는 지점에
지금도 통화(通河)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하얼빈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지점이다.
가섭원(迦葉原)이란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라는 뜻이다. 소흥안령산맥과 장광재령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지금 그곳에는 방정(方正)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후 동부여는 하얼빈 남쪽으로
이주한 듯하다. 하얼빈의 남서쪽 60km 지점에 부여(夫餘)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五世 檀君 高豆莫(一云 豆莫婁) 在位 二十二年 在 帝位 二十七年 癸酉元年
오세 단군 고두막(일운 두막루) 재위 이십이년 재 제위 이십칠년 계유원년
是爲 檀君高于婁 十三年 帝爲
시위 단군고우루 십삼년 제위
5세 단군 고두막(일명 두막루)의 재위기간은 47년이다(고구려 후 재위 22년, 황제 재위 27년).
계유년(BC 108)이 원년이다.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BC 108)이다.
人 豪俊 善用兵 嘗見 北夫餘衰 漢寇熾盛 槪然有濟世之志
인 호준 선용병 상견 북부여쇠 한구치성 개연유제세지지
至是 卽位 於卒本 自號東明 或云 高列加之後也
시위 즉위 어졸본 자호동명 혹운 고열가지후야
단제의 사람 됨됨이(帝爲人)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며(豪俊) 병사들을 잘 다루었다.
단제께서는 일찍이 북부여가 쇠퇴하고, 한나라 도적들이 번성(熾盛)하는 것을 보시고,
분연히 일어나 세상 구할 뜻을 세웠다. 마침내 단제께서는 졸본(卒本)에서 즉위하시고,
스스로 나라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혹자들은 (그가 고조선 47대 단군인)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참고> : 졸본(卒本) - 홀본(忽本), 흘승골성(紇升骨城), 졸본천(卒本川)
졸본(卒本)을 홀본(忽本)이라고도 하는데, 졸본은 중국의 표현 방식이다.
중국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하면 중국은 주변국을 비하하여 칭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졸(卒)은 상대방을 낮춰 부르는 방식이다. 그러나 홀(忽)은 '소홀한'이라는 뜻도 있으나
'홀연히 나타난', '세찬', '중요한'이라는 뜻도 있다.
원(元)나라 세조의 이름이 홀필열(忽必烈)인데, 그를 홀(忽)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즉 홀(忽)은 '중요한', '중심' 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홀본(忽本)이란 중심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도읍지(都)를 일컫는 말이다.
당시 북부여의 도읍지는 난하(?河)의 상류 승덕(承德) 지역으로 비정됨으로 위 글에서의 졸본은
승덕(承德) 지역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졸본천(卒本川)은 난하(?河)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위서(魏書, 이 위서가 누구의 위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 위서의
종류는 여러 가지임)에서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를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은 고주몽(추모)의 도읍지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썼다는 삼국사기의 진위여부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고구려는 분명 고주몽(추모)의 고구려다.
우리는 흔히 고두막한(高豆莫汗)과 고주몽(高朱蒙, 일명 高鄒牟)을 혼동하여 두 사람을 같은 인물로
보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고두막한은 BC 108년 난하의 상류지역(승덕, 난평)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도적들을 몰아내고 북부여를 계승한 북부여 5대 단군이다.
고두막한은 북부여를 계승하기 전 4대 단군 고우루에게 고구려의 제후로 봉(封)받은 적이 있고,
이후 국호를 동명왕국(東明王國)이라고 하였다. 일명 서국(西國)이다. 고두막한이 건국한 나라의
국호는 고구려, 동명왕국, 서국 등으로 불렸다.
고주몽(추모)은 BC 57년에 비류곡에서 송양의 세력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이다.
<제왕운기>에 의하면 당시 고주몽(추모)과 송양의 대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주몽(추모)이 말하기를 "나는 서국(동명왕국)의 왕자요, 천자의 아들인데, 그대의 조상은
누구신지요?"라고 묻자, 송양이 답하기를 "나는 선인의 후손이요."라고 답하였다.
선인이란 단군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송양은 고조선 단군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고주몽(추모)이 온 곳이 서국(西國), 즉 동명왕국이며,
동명왕국의 왕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주몽을 동명왕이라고 역사가들이 전한 것이다.
하지만 고두막한의 고구려와 고주몽(추모)의 고구려는 그 시차는 약 50년(BC 108 - BC 57 = 51년)
이라는 차이가 난다. 30년을 1세대로 본다면 고주몽(추모)은 고두막한의 손자인 것이다.
요약하면 고두막한이 동명왕국을 세웠고, 고주몽(추모)이 고구려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고두막한의 동명왕국은 고주몽(추모)이 고구려를 세우기 이전부터 고구려 또는
서국 등으로도 불렸다.
따라서 고두막한도 동명성왕이라 칭하였고, 고주몽(추모)도 동명왕국의 왕자였음으로
동명성왕이라 칭한 것이다. 고주몽(추모)은 송양세력과 손을 잡고 나라를 세울 때
그의 고향이자 조상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써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위서(魏書)에서 전하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라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은 현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된 요녕성 집안시 지역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졸본천(卒本川)은 그 지역을 흐르는
혼강(渾江, 동가강(?佳江, 혼강의 지류))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고두막한의 졸본, 졸본천과 고주몽의 졸본, 졸본천이 다른 것이다. 졸본(홀본)은 특정지역을
말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도읍지(都)라는 보통명사이며, 그 지역을 흐르는 강이 졸본천인 것이다.
乙亥 三年 帝 自將 傳檄 所至無敵 不旬月 衆至五千
을해 삼년 제 자장 전격 소지무적 불순월 중지오천
을해 3년(BC 106) 단제께서는 스스로 장(의병장)이라 칭하고, 각 지역에 격문(檄)을 띄웠다.
이르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들이 없었다. 채 열흘이 못 되어 오천의 무리가 합류하였다.
每與戰漢寇 望風而潰 遂引兵渡 九黎河追 至遼東西安平 乃古藁離國之地
매여전한구 망풍이궤 수인병도 구려하추 지요동서안평 내고고리국지지
단제의 의병은 한나라 도적들과 전쟁을 할 때마다 한나라 도적들은 기세가 꺾여 궤멸되었다.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강(조하와 백하)을 건너 구려하까지 추격하여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렀다.
그곳은 옛 고리국의 땅이다.
<참고> : 요동의 서안평
초기 고구려의 도읍지는 밀운지역이다(청국지지라는 중국 고지도를 보면 밀운 지역에
고가(高家)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일찍이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는 신해 원년(BC 120)에
위만의 손자 우거를 치기 위해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도록 하였고, 고진이 공을
세우므로 고진을 고구려 제후로 봉한 일이 있다. 여기서 서압록은 하북성의 백하(白河)을 말한다.
이후 위만이 한나라에게 망하면서 요동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자
고구려는 난하의 상류 승덕(承德)지역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된다.
이 승덕(承德)에서 북부여 5세 단군인 고두막한(高豆莫汗, 고진(高辰))은
동명왕국(일명 서국)을 세우고, 거병하여 한나라 정벌에 나선다.
이때가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 재위 13년, 계유 원년(BC 108)이다.
이후 고두막한은 한나라군을 추격하여 살수(薩水, 潮河)를 건너, 구려하(九黎河, 白河)까지 이르게
된다. 원래 구려하(九黎河)는 '아홉 줄기의 물줄기'라는 뜻으로 중국의 하북성 백하(白河)와
영정하(永定河)가 만나 천진으로 들어가는 모든 강줄기를 이르는 말이다.
즉 고두막한이 한나라군을 추격하여 이른 곳이 바로 현 영정하의 오른쪽 북경, 밀운지역이다.
이 북경, 밀운 지역이 바로 서안평이며, 서안평은 옛 고리국의 땅이었던 것이다.
甲午二十二年 是爲檀君 高于婁 三十四年 帝遣將 破裵川之漢寇 與遺民幷力 所向連破
갑오이십이년 시위단군 고우루 삼십사년 제견장 파배천지한구 여유민병력 소향연파
漢寇 擒其守將 拒以有備
한구 금기수장 거이유비
갑오 22년(BC 87), 이 해는 단군 고우루 34년이다. 단제께서는 장수를 파견하여
배천(요녕성 안산(鞍山) 지역을 흐르는 강, 혼하, 요하의 지류)의 한나라 도적들을 격파하고,
유민들의 협력을 받아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였다.
마침내 한나라 수장을 잡아 감금시키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철저히 방비하도록 하였다.
乙未二十三年 北夫餘 擧城邑降 屢哀欲保 帝 聽之 降封解于婁 爲侯 遷之?陵
을미이십삼년 북부여 거성읍항 루애욕보 제 청지 강봉해우루 위후 천지분릉
을미 23년(BC 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북부여는 종묘사직만은 보존해 줄 것을
여러차례 애원하기에 단제께서는 그 원을 들어주었다. 해우루(고우루)를 단군의 자리에서 강등시켜
제후로 봉하고, 분능(일명 차릉, 송화강의 통하(通河), 가섭원, 동부여)으로 옮겨 가도록 하였다.
帝 前導鼓吹 率衆數萬 而入都城 仍 稱北夫餘 秋八月 與漢寇屢戰 於西鴨綠河之上 大捷
제 전도고취 솔중수만 이입도성 잉 칭북부여 추팔월 여한구루전 어서압록하지상 대첩
단제께서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수만의 군중들을 이끌고 도성(개원 또는 장춘으로 추정,
하얼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음)에 입성하였다.
북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仍)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
그 해 가을 8월에 한나라의 도적들과 서압록(白河) 상류에서 여러차례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대승을 거두었다.
<참고> : 당시 북부여의 도성은 어디였을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군악대를 앞세우고 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입성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도성이 어디였을까? 북부여는 원래 서만주의 대흥안령산맥과 동북평원(둥베이평원) 지역에
있었다. 고조선의 외곽세력으로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이후 위만에 의하여 번조선이 와해되자
해모수는 고조선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군 57년(BC 239)에 번조선 중흥을 위하여 웅심산(북진,
조양 지역으로 추정, 일부학자들은 파림좌기라고 주장하기도 함)에서 거병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
이후 해모수는 옛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난하의 백악산 아사달(험독)로 가 오가(五加)의 공화정을
폐하고, 드디어 고조선 잔류세력을 병합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북부여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당시 북부여의 도읍지는 난하의 백악산 아사달(험독)이거나 아니면 북진, 조양(장당경)
지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북부여는 이후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위만과 한나라의
침략을 받았고, 국력은 점점 쇠약해져 동으로 후퇴하게 된다.
한나라는 하북성 북쪽에는 옛 고구려(고리국) 세력이 건제하게 버티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북진을
포기하고 동진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부여는 그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험독) 또는 북진,
조양의 장당경에서 대릉하의 하류 태자하가 흐르는 태안(台安)지역으로, 요하의 동쪽 해성(海城),
요양(遼陽), 심양(沈陽)지역으로 후퇴하며 천도를 계속하였다.
이후 하북성 북쪽의 고구려(고리국)의 고두막한은 요녕성에 침략한 한나라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 세력을 난하 북쪽에서 요녕성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이 과정에서 요녕성이 시끄러워지자
북부여는 다시 도읍지를 북쪽의 개원(開原), 장춘(長春) 지역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고두막한은 한나라를 토벌하여 하북성 영정하 서쪽 지역으로 몰아내고 옛 고리국이었던
서안평을 되찾았고, 유명무실한 북부여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북부여가 종묘사직만은 보전해
줄 것을 애원하자 고두막한은 그들이 분릉(차릉, 송화강의 동쪽 통화(通河))으로 이주하는 것을
눈감아 준 것이다. 이것이 가섭원 부여고, 동부여다.
그렇다면 고두막한이 군악대를 앞세우고, 수만의 군중을 이끌고 입성한 곳은 바로 북부여의
마지막 도읍지로 추정되는 장춘(長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춘에서 보았을 때 송화강의 동쪽
통화(通河) 지역은 분명 동쪽이다. 그래서 동부여다.
하지만 장춘은 북부여의 실질적 도읍지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북부여는 이미 그 세가 약해져 종묘사직을 보전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북부여는 안전 지역으로 천도하기 바빴고,
그 과정에서 천도한 도읍지는 명실상부한 도읍지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북부여의 실질적 도읍지는 심양지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조양 지역이
위만의 습격으로 완전 전소하자(북부여기에서는 원인 모를 불이라고 하였음) 북부여는 심양의
남쪽 해성(海城)에 이릉(異陵)을 두었던 사실이 있으며, 이후 해성이 한나라의 공격을 받자,
다시 심양으로 천도하였다. 심양으로 천도한 북부여 시대를 북부여기에서는 중부여라고
소개하였는데, 이는 이곳에서 북부여가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두막한이 입성한 곳은 심양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壬寅 三十年 五月 五日 高朱蒙誕降 于?陵 辛酉四十九年 帝 崩 以遺命 葬于卒本川 太子 高無胥立
임인 삼십년 오월 오일 고주몽탄강 우분릉 신유사십구년 제 붕 이유명 장우졸본천 태자 고무서립
임인 30년(BC 79)년 5월 5일 고주몽이 분릉(차릉)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 60)에 단제께서
붕어하셨다. 유언에 따라 졸본천(?河)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가 즉위하였다.
<참고> 고두막한의 고향은 하북성 난하 상류 지역이다.
고두막한은 죽으면서 자신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 줄 것을 유언하였고,
신하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난하지역에 장사 지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졸본천(도읍지에 흐르던 강이라는 의미)은
난하(?河)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六世 檀君 高無胥 在位 二年 壬戌元年 帝 卽位 于卒本川 與父老 會 于白岳山 立約 祭天
육세 단군 고무서 재위 이년 임술원년 제 즉위 우졸본천 여부노 회 우백악산 립약 제천
頒 行事例 內外大悅
반 행사례 내외대열
6세 단군 고무서의 재위기간은 2년이다. 임술원년(BC 59)에 단제는 졸본천(난하)에서 즉위하였고,
원로들과 백악산(난하의 험독)에서 모임을 가진 후 하늘에 제사 지낼 것을 약속하고
제천에 관한 법령을 반포하였다. 내외 모든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참고> 고무서(高無胥) 제천의식 약속의 내막
옛 고리국(고구려, 고씨족)의 후예들은 하늘님을 모시는 환웅족(桓雄族)이 아니었다.
고리국은 곰을 모시는 웅족(熊族)이었다. 이 웅족은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환웅족과 손잡고
단군조선(고조선)을 탄생시킨 우리 민족의 중추세력이었다.
그러나 웅족은 환웅족보다 지위가 낮았고, 그들의 강역은 고조선의 서북쪽 변방이었다.
웅족의 생활 터전은 난하의 북쪽과 요녕성 북쪽 지방이었다. 현재 요녕성과 그 북쪽 내몽골자치구
지역에서 출토되는 요하문명(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이 바로 고리국의 웅족이다.
이런 주장은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그 사실들을 반증해 준다.
특히 적봉시(赤峰市) 남쪽 능원(陵原), 건평(建平) 지역에서 발굴되는 우하량 유적은
기원전 3000년 경의 것으로 단군조선의 건국(기원전 2333년) 역사보다 오랜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옥저룡(玉猪龍)이라는 장식용 악세사리가 여러 종 발굴되었는데,
중국인들은 그 악세사리에 새겨진 동물의 문양이 돼지의 모습이라고 하여
그 이름을 '돼지 저(猪)' 자(字)을 써서 옥저룡(玉猪龍)이라 칭하였다.
하지만 그 형상은 돼지(猪)가 아니라 곰(熊)의 형상이다.
따라서 정확히 칭하자면 옥웅룡(玉熊龍)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우리의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마저도 왜곡을 한 것이다.
물론 그 형상이 돼지라 해도 별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맥족(고구려족, 웅족)은
옛 부터 오가(五加) 제도가 있었는데 그 오가 중 하나가 저가(猪加)이기 때문이다.
또 우하량 제2지점 여신묘(女神廟) 유적에서는 여신상이 발굴되었는데,
이 여신상은 바로 웅족이 모시던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고리족(고구려족, 고씨족, 웅족)은 환웅족과 손을 잡고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지만
하늘님을 모셨던 것이 아니라 토템신앙인 곰을 모셨던 것이다.
이 웅족이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 제 44대 단군 구물 시대부터다.
구물 단군은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삼한을 폐하고, 삼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다.
대부여가 역사에 등장하면서 환웅족 중심의 역사가 웅족(고구려족) 중심의 역사로 전환되었고,
웅족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면서 하늘님을 모시는 제천의식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천의식의 소홀은 기존 환웅족(구(舊) 고조선 세력, 일명 예족(濊族))의 이탈을 초래하였고,
그들이 웅족에서 이탈하면서 각각 독립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열국시대인 것이다.
이처럼 이탈되어 가는 민심을 수습하고, 옛 고조선의 재통일을 위해서
고무서(高無胥)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제천의식의 부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원로회의를 소집하였고, 하늘에 제사 지낼것을 약속하였으며,
제천의식 법령을 제정하여 반포하게 된 것이다.
帝 生 而有神德 能以呪術 呼風喚雨 善賑 大得民心 有小解慕漱之稱
제 생 이유신덕 능이주술 호풍환우 선진 대득민심 유소해모수지칭
時 漢寇騷亂 遍于遼左 屢戰得捷 癸
시 한구소란 편우요좌 루전득첩 계
단제께서는 어려서부터 신령스런 덕이 있었고, 주술(주역)에도 능하여 바람과 비를 예측할 수
있었고, 불쌍한 백성들을 구휼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소해모수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나라 도적들이 요동의 왼쪽에서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여러 번의 전쟁 끝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亥二年 帝 巡 至寧古塔 得白獐 冬十月 帝 崩 高朱蒙 以遺命 立承大統
해이년 제 순 지영고탑 득백장 동십월 제 붕 고주몽 이유명 립승대통
先時 帝 無子 見高朱蒙 爲非常人 以女妻之 至是 卽位 時年 二十三
선시 제 무자 견고주몽 위비상인 이여처지 지시 즉위 시년 이십삼
계해 2년(BC 58) 단제께서는 국토 순회 중 영고탑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었다.
그 해 겨울 10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셨다. 고주몽이 유언을 받들어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본 단제께서는 그가 범상인이 아님을 알고 딸과 결혼을 시켰다.
이렇게 하여 고주몽이 단제의 뒤를 이어 즉위를 하였는데, 당시 고주몽의 나이는 23세였다.
時 下夫餘人 將欲殺之 奉 母命 與烏伊 摩離 陜父 等 三人 爲德友 行
시 하부여인 장욕살지 봉 모명 여오이 마리 협부 등 삼인 위덕우 행
당시 부여의 하수인들이 고주몽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자 (고주몽은)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부 등 덕으로 맺은 3인의 친한 친구들과 함께 탈출(行)하였다.
至? 陵水 欲渡 無梁 恐爲追兵 所迫 告 水 曰
지분릉수 욕도 무량 공위추병 소박 고 수 왈
'我是 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 垂及 奈何' 於是 魚鼈 浮出成橋 始得渡 魚鼈乃解
'아시 천제자 하백외손 금일도주 추병 수급 내하' 어시 어별 부출성교 시득도 어별내해
그들이 분릉수(송화강)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병들이 추격해 오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주몽은 강물에 고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지금 쫓기고 있는 상황으로 아주 다급한데,
어찌하면 좋을고?'라고 말하자 물고기들과 자라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비로소 그들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들은 그들이 강을 건너자(乃) 모두 해산하였다.
.끝.
<빙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북부여기>에 대한 차이점이 무엇일까?
왜 대한민국 강단 사학은 이런 한단고기를 위서라 일컬으며 인정하려고 들지 않을까?
중국와 일본은 없던 역사들도 만들어내는데
한국 사학계는 있던 역사마저도 부정하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이런 살아있는 역사를 젖혀두고 일제사학에 짜여진 역사를 배우게 만드는
정치인들부터 대가리를 바꾸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은 반드시 거란족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꿰지 않으면 아무리 다음 단추를 잘 꿰고 싶어도 바르게 꿸 수 없듯이
대한민국의 고대사 하나도 올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는 나라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제2의, 제3의 이완용이 나타나 역사가 없는 곰새끼 후손의 대한민국을 진멸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첫댓글 한자에 맞추어 글을 정리하느라 4시간이 소요되었다.
빙혼도 이렇게 한자를 번역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읽을 책들이 수없이 많은데 번역본에 의지하여 책을 읽으려니 답답할 뿐이다.
통선생 같은 분이 한국 역사를 집필하는 것이 좋은데
또 기독 계열의 일제사관과 중화사상에 물든 자들만 있으면
국사 교과서 새로 만드나 마나...
하기야 역대 대통령들부터 모두가 외래 종교에 미쳐서
민족의 기상을 끊어 놓고 이 나라의 민족정신을 망쳐놓았으니
그런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 손가락만 원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