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建 ⊙ 1938년 경북 경주 출생. ⊙ 서울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연세춘추> 편집국장,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동창회장, 서울고 총동창회 회장, 駐韓 이태리 명예영사, 외교통상부 국제 친선대사, 국제로타리 이사ㆍ재무ㆍ재단관리위원 역임. ⊙ 현재 (주)부방 대표이사 회장. ⊙ 상훈: 석탑산업훈장, 올해의 자랑스러운 서울인상, 2007년 자랑스러운 연세인상.
“우리가 자리를 좀 아담한 곳으로 옮길까요? 우리 때문에 단체 손님을 못 받으면 안 되니까.”
지난 9월 고국을 찾은 李東建(이동건) 국제로타리 회장. 약속 장소인 서울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몇몇 知人(지인)들과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필자가 옆자리에 앉자 서둘러 지인들을 보낸 후 자리를 단체석에서 2인석으로 옮기자고 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남은 시각이라 대부분의 좌석이 비어 있는데 그는 마시던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탁자를 재빨리 정리했다. 그러곤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식당 보이 생활을 해봐서 이런 일에 익숙하다”며 멋쩍게 웃었다.
“국제로타리 회장 취임 후 51일 동안 세계 12개국 27개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회장 주재 회의 14개 중 7개나 소화했어요.”
한국 방문 중인 9월 1일과 4일 사이에도 스케줄은 빈틈이 없었다. 인터뷰 전날은 경기도 고양의 킨텍스에서 1만여명의 로타리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복지모금회와 국제의료재단 공동 주최로 ‘한국 로타리의 날’ 행사를 가졌다. 재임 기간 중 이 회장의 역점 사업인 ‘5세 미만 영유아 사망 줄이기’ 캠페인 출범식을 겸한 이날 행사에서 10억원의 재원을 마련했다. 이 돈은 영유아 사망률이 높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행사장 전면에는 ‘Make Dreams Real’(꿈을 현실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꿈을 현실로’는 이동건 회장이 임기 동안 주력할 사업에 대한 캐치프레이즈다. 그는 “어린아이는 미래의 꿈이고, 로타리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곳”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구촌 곳곳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살피고 교육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갔는데 뼈만 남은 아기가 나오지도 않는 엄마 젖을 빨고 있더군요. 이를 보고 제가 차차기 회장에 선출된 뒤부터 아이들의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해 왔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소아마비 퇴치 운동과 더불어 영유아 사망률을 낮추는 데 전력을 기울일 생각이에요. 임기 동안 세계 어디를 가도 로타리 사무실에는 제 사진과 ‘꿈을 현실로’라는 표어와 태극기가 걸려 있고, 회원들은 애국가를 제창합니다”
시카고 본부에 펄럭이는 태극기
미국 일리노이州 에반스톤 중심가에 위치해 있는 국제로타리 본부. 7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이 건물의 국기 게양대에는 매일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게양된다.
그가 맨 넥타이 문양은 어머니가 아기를 안은 모습을 상징화한 디자인이었다. 그는 “임기 동안 내가 수행해야 할 과제가 영유아 사망 줄이기”라며 “국제로타리는 회장이 바뀌면 회원들이 매는 넥타이와 스카프는 물론 시카고 본부에 게양되는 국기도 바뀐다”고 말했다.
“국제로타리 본부는 시카고에서 승용차로 20분 거리인 일리노이州(주) 에반스톤 중심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에반스톤은 노스웨스턴대학이 있고, 미시간 호수를 끼고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죠. 이곳 에반스톤 시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국제로타리 본부 건물입니다. 이 건물 앞 국기 게양대에는 지난 7월 1일부터 성조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고 있죠.”
국제로타리 제99대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지난 7월 1일부터 내년 6월 말까지 1년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기아 대책과 빈곤 퇴치 등 봉사 활동을 펼친다. 차기 회장 때부터 그는 시카고 본부에 상근하고 있다.
그가 공식 회장으로 취임한 것은 지난 7월 1일이지만 차차기 회장에 피선된 것은 2006년 9월이다. 국제로타리만의 독특한 회장선출 방식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국제로타리에는 4년마다 2년 임기의 이사를 각 존(전체 34개 존)에서 한 명씩 뽑아 총 17명의 이사들이 2년 임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회장 선출도 마찬가지로 34개 존 중 홀짝제로 17개 존에서 매회 한 명씩 회장 선출 지명위원을 뽑아 선거에 참여시켜 회장을 뽑는데, 17표 중 10표 이상 득표해야 회장으로 인정을 받죠. 보통 마지막 판에 두 명의 후보가 8 대 9로 접전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는 운이 좋았는지 수월하게 결정이 났습니다. 그렇게 선출되고도 두 달 넘게 전 세계 클럽으로부터 까다로운 검증 과정을 거쳐 비로소 차차기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죠.”
지난 2월 7일 국제로타리는 반기문 UN 사무총장(中)에게 ‘국제로타리 영예상’을 수여했다. 맨 오른쪽은 스코트 로타리재단 관리위원장, 왼쪽이 이동건 국제로타리 회장이다.
국제로타리는 장기 프로젝트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회장 재임 기간 중 차차기 회장을 뽑아 1년여 전부터 이양 준비 수업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재 차기 회장과 차차기 회장의 보좌를 받고 있는 셈이다. 에반스톤에 있는 본부 건물 18층에 가면 회장 방, 차기 회장 방, 차차기 회장 방 등 세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한국은 1927년 국제로타리에 가입했다. 6·25 직후 국제로타리 최대 수혜국이었던 한국은 이제 연간 1000만 달러를 기부하는 세계 4위 기여국이며, 회원수(17개 지구에 5만4000여명)로는 미국, 일본, 인도에 이어 세계 4위다.
일본은 1920년 로타리에 가입했다. 1980년 히로시 무카사씨가 일본 사람으로는 두 번째로 회장에 지명된 이후 거의 30년 가까이 회장을 내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 인도 또한 거의 20년 동안 새로운 회장을 배출하지 못했다. 가까운 장래에 브라질, 일본, 인도에서 국제로타리 회장이 탄생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제로타리의 주된 봉사 활동 중 하나가 1985년부터 벌여온 소아마비 퇴치 운동이다. 소아마비는 한 번 걸리면 사망 혹은 최소한 절름발이가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국제로타리는 벌써 20년 넘게 WHO(세계보건기구), 유니세프, 미국 CDC(질병예방통제소) 등과 함께 소아마비 박멸 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그 결과 1985년에만 해도 하루에 1000건씩 1년에 35만건이나 되었던 발병률이 오늘날에는 수백건에 불과할 만큼 줄어들었다.
“1985년에만 해도 전 세계 125개 국가에 퍼져 있던 소아마비 균이 이제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인도 등 4개 국가에만 잔존해 있을 정도로 99% 박멸됐습니다. 국제로타리는 그 동안 소아마비 박멸을 위해 7억 달러를 넘게 썼고, 2010년까지 10억 달러가 훨씬 넘는 돈을 쓰게 됩니다. 올해는 빌게이츠 재단에서 1억 달러를 지원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죠.”
국제로타리는 안타깝게도 북한은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로타리 규정상 非(비)회원 국가에는 예산 지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 이 회장은 “북한의 굶주리는 어린이들과 소아마비 환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는 이들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유학자 李彦迪의 15대손
이동건 회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경주 양동마을 본가 입구. 왼편에 보이는 600년 된 향나무는 그의 놀이터였다고 한다.
이동건 회장이 한국로타리 클럽 회원이 된 것은 1971년. 미국 유학 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주)부방 영업 담당으로 일할 때다. 그는 “하늘같은 아버지가 로타리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나도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 이원갑씨는 (주)부방의 모태인 부산방직 창업자로 부산에서 로타리 클럽 회장과 지역 총재를 지냈다.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2대 독자인데 아버지는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대하라’는 속담을 철저히 실천하셨죠.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지만 용돈 주는 데 늘 인색했고, ‘100원을 갖고 있어도 10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라’ ‘남의 칭찬은 반만 믿어라’ ‘첫째도 둘째도 겸손하라’는 훈계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죠.”
귀한 아들이라 더 강하게 키우려 했던 아버지는 2대 독자인 그를 군대에 보냈다. 당시 2대 독자는 6개월 단기복무 대상이었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그는 1년을 더 복무했다. 제대 후 미국에 유학 중일 때도 아버지는 경제적 지원을 크게 해주지 않았다. 그는 학비는 물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하고 버스 보이를 하는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했다.
“아버지는 제가 선진국에서 공부보다는 세상을 배우길 바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참에 고생 한번 제대로 시키자고 마음먹은 거죠.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리라는 아버지의 예상을 깨고 저는 유학생활을 그런대로 잘 견뎠고, 친구들로부터 ‘있는 집 자식이 더하다’는 얘기까지 들어가며 열심히 일한 덕에 돌아올 때는 주머니에 약간의 여윳돈도 있었지요. 저를 마냥 어리고 약한 자식으로 대하던 아버지의 눈이 이때부터 달라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경상도, 그 중에서도 양반고을로 이름난 경주 양동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양동마을은 儒家(유가)의 법도와 선비의 기품으로 500년을 다져오면서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보기 드문 반촌. 400년 이상 된 古家(고가)가 54채나 보존되어 있는 데다 국보급 유물과 중요민속자료, 유형문화재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마을 자체가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동건 회장은 이곳 양동마을에서 조선 중기 유학자 晦齋(회재) 李彦迪(이언적)의 15대 손으로 태어나 소년기까지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가족이 부산에 살고 있을 때도 양동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손자를 예뻐하는 할머니를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고 한다.
“부산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도 방학에는 양동에서 지냈어요. 베풀기 좋아하는 할머니 덕에 저희 집에는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귀하고 맛있는 음식은 항상 손님상에만 올라가 하루는 손님 귀에 대고 ‘음식을 좀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가 작은할아버지께 들켜 호되게 야단맞은 적도 있죠.”
그는 엄한 가정교육 때문에 중ㆍ고등학교 시절에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서울고 문예반 시절 친구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동건 회장, 세 번째가 황동규 시인, 여섯 번째가 마종기 시인이다.
黃東奎·馬鍾基 시인이 고교 동창
부산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서울고에 진학했다. 시인 黃東奎(황동규)와 馬鍾基(마종기)가 그의 동기 동창이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솔직히 재능은 없었다”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그를 “수줍음이 많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친구”로 기억했다.
성장기 내내 아버지는 그에게 ‘그림자도 밟아서도 안 되는 절대자’였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 때도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다. 이런 그가 딱 한 번 아버지의 뜻을 어긴 적이 있다. 한국로타리에 가입할 때다.
“1971년에는 서울에 클럽이 10개 정도밖에 없었어요. 당시 아버지는 부산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부산지역 클럽 회장을 맡고 있었고, 저는 서울에서 영업활동을 하며 회사 규모를 키워가고 있었죠. 그 무렵 친한 친구가 자신의 처남이 클럽 총무라며 제가 가입했으면 하길래 절차를 밟기로 약속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로타리 활동을 하면 업무에 지장이 있다며 반대하셨어요. 업무 기반이나 잡고 하라는 거였죠. 그런데도 이미 친구에게 약속한 상황이라 슬그머니 가입해 버렸습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이왕 가입한 것 열심히 하라”며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들어가거든 회장이나 총재는 바라지 마라. 나는 시골이라서 총재가 되었다만 서울은 엘리트들이 많아 네가 그 판에 끼어들면 괜히 상처만 입는다. 그러니 감투 쓸 생각 말고 조용히 봉사활동만 해라.”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사 업무와 클럽 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회장에 추천되는 밑거름이 됐다. 이 회장은 등을 떠밀다시피 하는 회원들의 추대로 클럽 회장, 지구 총재, 존 이사 등을 차례로 거쳤다. 자신도 모르게 국제로타리 회장 후보가 되는 수순을 밟은 셈이다.
2남2녀의 자녀들과 함께 한 가족사진. 차남 이중희씨를 제외하고 모두 로타리 회원 자녀와 결혼했다. 뒷줄 왼쪽부터 큰사위 그랜드힐튼호텔 이윤기 실장과 장녀 이희원씨, 둘째 사위 허세홍 GS 칼텍스 상무와 차녀 이희정씨, 맏며느리 고주희(미스 캐나다 출신)씨와 장남 이대희 (주)부방테크론 부회장, 차남 이중희씨.
이동건 회장은 과거 ‘로타리 활동을 하면 사업에 소홀하지 않겠나’ 하는 아버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는 아버지가 일궈 놓은 부산방직을 섬유는 물론 전자, 유통, 해운까지 아우르는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미국 유학 중 아버지가 부르지 않았다면 저는 미국에 정착해 유통 사업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960년대 초 섬유산업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대체할 만한 분야가 유통이라고 여겼으니까요.”
로타리 활동에 들인 에너지까지 사업에 쏟아부었다면 (주)부방은 훨씬 더 큰 회사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30대 청년 시절부터 로타리 활동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로타리 활동은 돈과 관계없는 일이지만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줬다. 좋은 선배와 후배 동료, 그리고 명예까지.
최근 정부에서 일하는 친구 하나는 그에게 ‘2F(Forget와 Forgive) 2R(Remember와 Reward)’ 운동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나를 괴롭힌 사람은 잊어버리고 용서하고, 나에게 은혜를 베푼 이는 기억하고 보상하라는 뜻이다.
최고의 자리는 어디든 외로운 법. 봉사단체라 해도 시기하는 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돈과 관계 없이 순전히 자존심으로 하는 일이라 말과 행동에 각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 회장은 “아내가 동행해 주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국제로타리 활동 덕분에 요즘 아내와는 24시간 붙어 다닙니다. 둘이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는 처음입니다. 40년 넘게 살면서도 서로에 대해 몰랐던 게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웃죠.”
그는 부인 鄭英子(정영자·63)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
▣ 세계 최대의 민간 봉사단체 ‘국제로타리’
국제로타리는 1905년 2월 23일 미국 시카고에서 변호사 폴 해리스가 세 명의 친구와 함께 가진 봉사 모임에서 비롯됐다. ‘로타리’는 회원들이 각자의 사무실에 돌아가며 모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우리보다 못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100년을 이어온 이 모임의 기본 정신이다.
모임은 클럽(회원 20~25명), 지구(60개 클럽과 2100명의 회원), 존(Zone 16개 지구 3만5000명 회원) 순으로 단위가 커지며, 현재 세계 203개국에 34개 존, 534개 지구, 3만3000여 클럽, 121만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국제로타리 103년의 역사상 이동건 회장은 아시아인으로는 7번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로타리 首長(수장)에 올랐다.
이를 총괄하는 본부가 국제로타리 발상지인 시카고에 자리 잡고 있고, 이곳에는 회장을 비롯한 7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