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自明)
- ‘화엄음악제’에 붙여
이양주
가을이 물드는 지리산 자락에 금강경이 펼쳐진다.
해는 서(西)로 향하고 있다. 저무는 해가 가는 곳은 어디일까. 서쪽으로 십만 국토를 지나면 다다를 수 있다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일까. 화엄사 각황전 안에서 스님들과 연주자들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다. 법당 밖에선 법고와 목어와 운판과 범종의 사중주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화엄음악제의 서곡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사방이 어둠 속에 사위어간다. 어둠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물들인다. 천년 고찰 화엄사 뜰에 마련된 무대와 객석에 내리는 어둠이 또 하나의 조명처럼 느껴진다. 화엄사 무대는 눈부시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무대를 위한 인위적인 설치나 조명은 최대한 자제하였다. 객석에 앉아 있으면 화엄사 전체가 무대라는 것을 몸으로 서서히 느끼게 된다. 세속의 빛이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물상을 쫓아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거두어진다.
객석을 채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오래된 관객들, 부처도 조사도 나한도 보살도, 꽃도 나무도 돌도, 화엄사 구석구석 깃들어 사는 모든 유정 무정물이 다 관객이다. 화엄사 뜰이 작은 우주 공간으로 다가온다. 오늘은 또 어떤 선지식을 만나게 될까. 내 안에 있던 선재 동자가 걸어 나와 금강경 속에 앉는다.
화엄음악제는 2006년에 ‘첫 발자국’을 내디딘 것을 시작으로, ‘길 떠남’ ‘길을 묻다’ ‘길동무’ ‘길눈 뜨다’ ‘기쁨 마중’······‘2014년에 정견(正見)’ ‘심금(心琴)’ ‘알아차림’ 그리고 2017년 ‘자명(自明)’에 이르렀다. 매 음악회 마다 마치 화두를 잡고 풀듯이 십이 년을 이어왔다.
나는 처음부터 거의 빠지지 않고 화엄제에 동참하였다.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까닭도 있지만, 화엄음악제를 통해 ‘답다’가 무엇이며, 답게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화엄음악제의 초심이 대중과 시류에 꺾여 변질될까 봐 나는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봐 왔다. 관객 중에 자기는 나훈아의 ‘무시로’가 훨씬 좋다며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그런 대중의 마음을 어찌 주최 측에서 모르겠는가.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혼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한 단계 더 끌어올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정치는 정치답고 교육은 교육답고 불교는 불교다워야 한다. 이 세상 많은 즐거움 중에 맑은 즐거움이야말로 불교다운 게 아닌가. 다행히 해를 거듭할수록 화엄제의 색깔에 맞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점점 이어졌고, 이제는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 스스로를 구도자라고 칭하며 예술로 화엄의 세계를 현현하고자, 자신의 역량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연출자도 훌륭하지만, 그를 믿고 지원해주는 대덕(大德) 스님들이 안 계셨다면 화엄제의 맥은 끊어졌을 것이다.
‘영성음악회’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화엄제는 남다를 뿐만 아니라 가히 실험적이다. 내외국에서 영성 음악을 추구하는 연주자들을 초대하여, 음악을 통하여 가장 근원적인 자신의 내면에 다가가는 시간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이 동석하여 진리에 대한 의심을 묻고 대답하는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의 장이다.
그동안 인도 티베트 몽골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 터키 루마니아 스코틀랜드 등 참으로 다양한 국적을 지닌 연주자들이 화엄사 무대에 섰다. 그들은 소리로 악기로 때론 춤으로, 자신이 추구한 삶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과 노력을 통해 발견한 세계를 자신만의 색깔로 보여주었다. 화엄사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은 공연자라기보다 구도자로서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 단순한 무대가 아닌 구도의 장에서 기도하듯, 진지하고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연주하는 그들은 객석에 앉은 나에게도 구경꾼이 아닌 구도자로서의 자세를 호소했다. 연주자들의 몸짓에는 그들을 길러낸 땅과 하늘과 자연의 소리가 묻어있었다. 나는 그들을 키우고 살려낸 이국의 땅에서 불어오는 푸른 바람에 가슴을 열었다. 그들이 걸림 없이 자유롭게 드러내어 놓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현실 속에서 무디어진 내게도 그런 본성이 있음을 돌아보게 했다. 어떤 작품은 초현실적이며,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신비한 샤먼 적인 제의(祭儀)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안에서 감응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들 악기의 울림이 내 속에도 악기가 있음을 감지하게 하며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한 해는 조명이 완전히 꺼진 어둠 속에서 거문고 주자가 악보도 없이 즉흥 연주를 했다. 거문고는 그녀가 택한 선(禪)이었다. 그녀는 거문고를 알아차렸기에 자유자재로 부리며 한 몸인 듯 놀았다. 아름다우면서도 비장미가 느껴지는 거문고 선율이 경내를 검푸른 비단으로 휘감는 듯했다. 물든다는 것, 가을에 물들고 음악에 물들고 서로에게 물들며 그렇게 밤이 깊어갈 즈음, 뒷산에서 달이 떠올랐다. 산중의 밤이라 기온도 낮고 날씨가 흐려있었던지라, 달의 손이 등에 닿는 순간,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감응이라도 하듯 하늘을 열고 나타난 원만한 달의 등장은 눈부셨다. 그때 조명이 들어왔다. 조명은 어둠 속의 전각을 단박에 살려내고는 신비로운 빛으로 붓칠을 하기 시작했다. 대웅전이 살아나고 각황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각황전에 커다란 눈동자가 떴다.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보라! 제대로 관(觀)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절묘한 타이밍, 한순간에 번쩍하는 깨달음이 있다면 그와 같지 않았을까.
부처가 부처인 까닭은 회향(廻向)에 있다고 했다. 자신이 닦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향해 돌려내어 함께 나누는 것. 올해도 많은 연주자들의 아름다운 회향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화엄리젠시’란 프로젝트로 이십여 명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화엄사에 일주일 전부터 머물면서 참선과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며, 공동 작업하여 창작한 음악 ‘자명’을 선보인 것이 인상적이다. 그들 중 몇몇은 전에도 화엄제에 공연한 적이 있는데, 이 무대가 그리워 다시 동참하였다고 한다.
무대는 연주자들에게 삶의 최고의 장이다. 연주자들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지금의 삶을 살고, 관객들은 객석에서 지금의 소중한 삶을 산다. 무대 위의 주인공만 주인공이 아니다. 사람도 만물도 존재하는 것은 다 주인공이다. 모든 존재는 존귀하다. 나 혼자만의 존귀함이 아니라 복수의 존귀함을 인정함으로써 함께 더 큰 존귀함으로 나아가게 된다. 아름다운 선지식들이 어우러진 화엄의 뜰에 부처의 흔적이 가득하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늘 화엄제의 든든한 배경과 받침이 되어주는 화엄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선율로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연주한다. 아다지오(Adagio) 조용하고 느리게. 우리는 너무 바삐 산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은 채 무언가에 쫓기듯 소중한 순간을 흘려보내며, 내 속에 있는 진아(眞我)를 놓쳐버리고 산다. 화엄사 천년의 공간에서 오래된 시간 속에 앉아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참으로 값지다. 이어 오케스트라와 수십 명의 젊은 음악인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함께 깨달아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행복한 나라를 향해 다 같이 손잡고 나아가자며 아름다운 하모니로 노래한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연꽃등을 든 무용수가 객석을 돌고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연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 꽃은 옆 사람에게 전달되고, 꽃은 또 다른 사람의 꽃으로 환하게 피어난다. 수많은 연꽃이 화엄의 뜰에 가득 피었다. 조명이 들어오며 각황전에도 연꽃을 피워낸다. 물고기가 헤엄치고 나무가 들어서고, 부처의 방에도 불이 들어온다······.
만물의 주인은 사람만이 아니다. 너와 나의 분별없이 모든 생명이 서로 어우러질 때 이상적인 세계가 된다. 눈앞에 펼쳐진 이 눈부신 광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모두 말을 잃는다. 많은 수행을 하여 만덕(萬德)을 쌓아, 지혜와 광명이 가득하여, 사방을 꽃으로 장식한 화엄의 세계가 있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자명(自明). 굳이 설명이나 증명을 하지 않아도 지당한 사실을 스스로 아는 것. 우리는 늘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있다. 모든 것은 이대로 자명하고 자명하다.
음악회의 종료를 알리는 범종이 천지간에 울려 퍼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모든 것은 공(空)하니 상(像)도 없고 법(法)도 없다고 금강경은 설(說)한다. 춤춘 자도 노래한 자도, 보고 들은 자도 없다. 인연 따라 생겨났다 사라질 뿐.
펼쳐져 있던 금강경을 닫는다.
첫댓글 다음 주말 화엄제가 열립니다.
올해는 진혼(鎭魂)이라는 묵직한 타이틀로 펼쳐질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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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을 통한 예술적 모험을 시도하는 엘로이즈 진
아쟁 연주자 김유나, 반도네온 연주자 이어진
명장 원장현의 대금연주와 조경주의 지전춤
니어 이스트 콰르텟, 피아노 연주자 겸 가수 노영심, 이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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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출연자들이 무대에서 혼을 다할 모양입니다.
해마다 화엄제에 참석하고 있으면
귀한 인연공덕을 혼자 누리기가 너무 아쉽고 미안하여
부끄러운 글이나마 많은 인연의 고마움에 답하고자 글을 썼습니다 ....()....
그러니까 2017년 화엄음악제 주제가 "자명"이엇군요
붓다의 유언인 '자등명 법등명'에서 가져온 것일까요
뮤직님이 작년에 문학잡지에 발표한 글인가요
호흡이 긴 글이어서
어제밤 보고서...오늘 낮에 다시 읽습니다
화엄음악제....
2박 3일 일정이군요
두분 귀한 시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날 저는 어머니 산소에 있을거 같습니다
네 ~
작년
< 수필미학 > 겨울호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오가시는 길
길조심 하시고
어머님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
@musicok 自明...
찬찬히 다시 읽으니
마치 그 자리에 제 자신이 서있는 느낌이 드는군요.
無法無像...
모든것은 空하니.
범종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합니다.
@청풍명월(武泉)
댓글 보러 왔다가
저도 다시 그 자리에 앉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