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1980년 5월 21일 광주상황 20. 1980. 5. 21 - [광주교도소 상황] 시위대, 장갑차 몰고 접근 전교사는 시위대의 광주교도소 습격 첩보에 따라 5월 21일 01시 45분 31사단에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02시 45분경 31사단 96연대 2대대 소속 장교 13명·사병 444명이 광주교도소에 배치 완료되었다. 08시 58분경 버스 2대, 트럭 1대에 탄 시위대 400여 명이 교도소에 접근하였고, 10시 22분경 150여 명의 시위대가 버스 1대, 트럭 3대를 타고 교도소 앞을 2~3회 선회한 후 광주 쪽으로 갔다. 11시 02분경 시위대 50여 명이 장갑차 1대, 트럭 1대, 군용지프차 1대를 타고 교도소에 접근했다. 15시 38분경 시위대가 경찰 기동순찰차... 등 20여 대의 차량으로 교도소에 접근하였으나 계엄군과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11시 46분경 31사단 소속 교도소 경계 병력에 실탄이 공급되었다. 21. 1980. 5. 21. - 사단장 지프차 등 지휘차량 14대 탈취당해 육군본부의 20사단 증원 결정에 따라 20사단 61연대 소속 장교 82명·사병 1413명은 5월 20일 22시 30분경 사령부와 62연대 소속 장교 114명·사병 1555명은 5월 21일 02시 30분경 각 용산역을 출발하였다. 61연대는 5월 21일 04시경, 사단 사령부와 62연대는 08시 50분경 차례로 광주 송정역에 도착, 상무대에 집결했다. 08시경 전교사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광주 교육대학으로 이동하던 20사단 61연대는 광주통합병원을 지나 골고개 지역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쳐 상무대로 복귀했다. 02시 30분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당했다.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다. 09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했다. 22. 1980. 5. 21 - 5월 21일 자위권 발동 결정 5월 21일 04시 30분 육군본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재로 열린 계엄사 대책 회의에서, 계엄군을 광주 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고, 1개 연대(聯隊)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 소탕 작전은 5월 23일 이후에 의명 실시(依命 實施)하고, 자위권(自衛權)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06시 25분경 가스 살포용 500MD 헬기 5대가 전교사에 도착하였으며, 08시 전교사 지역에 진돗개 하나(비상경계령)이 발령되었다. 그 동안 광주 관련 보도를 통제하던 계엄사는 5월 21일 오전 처음으로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21일 오전 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부-] 정웅 31사단장은 10시경 시위대의 주장 내용이 정치적인 것이므로 물리적인 수습방안보다는 정치적인 수습방안이 최선이라는 내용의 사태 수습 방안을 전교사에 건의했다. 윤흥정 전교사령관의 후임(後任) 내정 통보를 받은 소준열 육군 종합행정학교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부임 조치에 따라 15시경 헬기로 종합행정학교를 출발하여 16시 30분경 전교사에 도착, 5월 22일 10시 정식으로 전교사령관에 취임했다. 5월 21일 15시 35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선무활동(宣撫活動)으로 시민과 불순세력을 분리하고, 지휘체계의 일원화(一元化)로 군 사기를 진작하며, 광주 외부도로망을 차단하고, 끝까지 교도소를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16시 진돗개 둘을 발령, 대공경계를 강화하였다. 같은 시각 전교사령관은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31사단으로부터 전교사령관으로 전환, 직접 공수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23. 1980. 5. 21 - 장교들, 시위대 돌진 차량에 총격 전남대에는 5월 21일 이른 시각부터 시위대가 트럭·버스·소방차·장갑차 등을 몰고 와 10시경 정문에는 4만여 명, 후문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3공수여단 병력과 대치하여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그 무렵 엄청난 시위대가 모인 데다가 아래와 같은 첩보가 전파되었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였다' 13대대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각 경계용 실탄 탄창(30발) 2개씩 지급되었다. 12시경 시위대의 전격적인 차량 돌진 공격으로 전남대 정문이 300m 가량 시위대에 의해 돌파당하자, 3공수여단은 기동 예비 1개 대대로 시위대 전열(前列)을 공격했다. 2개 대대는 정문지역을 확보한 후 시위대를 밀어붙여 광주역 부근 신안동 굴다리까지 1km 정도 퇴각시키는 등 14시경 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시위대가 장갑차·트럭 등 차량을 돌진시키자 일부공수부대 장교들이 차량을 향해 총격을 가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도망가는 시위대를 굴다리부근 민가(民家)에까지 쫓아가 최루탄을 발포하거나 전남대로 연행했다. 시위대의 장갑차·5t 구난차·경찰가스차·트럭 등 차량 13대를 노획하여 4대는 파기하고, 나머지는 광주 교도소로 가져가 도로를 차단하는 데 사용했다. 이날 전남대 앞 시위 진압 과정에서 주부 최미애(여·23세·임신 8개월)와 성명불상자 2명(운전자와 학생으로 추정)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최성환(남·18세·대동고1년·대퇴부 및 무릎관절 파편상), 양일권(남·19세·우측대퇴부 및 하지 총상), 신사균(남·15세·좌측 대퇴부 관통상) 등이 총상으로 부상 입원하였다. 공수부대에 연행된 안두환(남·46세), 장방환(남·57세)은 5월 28일 광주교도소에서 타박상 등으로 사망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24. 1980. 5. 21 - 시위대, 광주시장 향해 화염병 던져 전날 밤 시위대의 차량 공격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뒤 도로에서 교대로 가수면(假睡眠)을 취한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앞 금남로 전면(前面)에 11공수여단이 61·62대대를, 노동청 방면에 63대대를, 광주천 방면에 7공수여단 35대대를 각각 배치하여 전남도청 방어를 준비했다. 동이 트자 시위대들이 금남로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5월 21일 08시 전남도청 앞에는 수만명의 시위대가 사체(死體) 2구가 실린 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蠻行)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0시경 시위대 대표 4명이 7공수여단 35대대장의 안내로 전남도청에서 장형태 도지사와 면담, '공수부대의 철수', '연행자의 석방', '과잉 진압의 사과', '계엄사령관과의 면담 주선'을 요구했다. 장형태 도지사는 시위대 대표에게 "요구사항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고 도청 앞에 마이크 설치를 기다리던 중에 먼저 구용상 광주시장이 나가 시위대가 진정하게 하도록 하였다. 시위대는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각목과 화염병을 던졌고 구용상 시장은 연설을 하지 못했다. 11시경 장형태 도지사는 시위대 앞에서의 연설을 포기하고, 헬기를 타고 아래와 같은 방송을 했다.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생업에 복귀해 달라' 시위대는 '12시까지 공수부대가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손에 카빈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고, 장갑차, 트럭· 버스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시위대 전면(前面)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해 왔다. 위기의식을 느낀 11공수여단 61대대장은 여단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대책강구를 건의했다. 여단 참모장은 '활동(活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도청을 사수(死守)하라'는 지시만 반복했다. 11시경에 63대대장은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대대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 지급하고, '위급시에만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12시경에는 공수부대가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을 저지했다. 시위대는 이에 맞서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100여 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압박했다. 그런데 공수부대도 시위대도 모두 물러서지않고 맞서면서 서로 10m 정도까지 접근하면서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되었는데 13시경에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었고 이때 갑자기 시위대측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상무관·수협·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장갑차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발포가 되었다.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宣撫活動)의 일환으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를 방송하며 해산을 호소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왔다. 뒤쪽에 있던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하여 버스 1대는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도청 건물 좌측 건물과 충돌하여 정지하고, 장갑차와 다른 차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 나갔다. 25. 1980. 5. 21 - 돌진하는 장갑차에 일제히 발포 시위대의 차량 기습 돌진에 놀라 산개했었던 공수부대원들은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대형 화분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그 뒤에서 사격자세로 경계했다. 그런데 13시 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또 다시 돌진하였고 이에 경계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다.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가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이고, 그 중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그 무렵 방송국 등의 경계임무를 수행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철수해 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사단으로 철수하면서 경계용 실탄 200여 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에게 넘겨주어,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분배받았다.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강진·완도·승주·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를 확보, 무장을 했다.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와 카빈 9정을 탈취했다. 고속버스·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산광지서에서 총기 100여 정, 실탄 2상자를 확보했다. 13시 35분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 발을 탈취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 정, M1 소총 200여 정, 실탄 4만 6000여 발을 탈취했다. 15시 35분경 화순광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만 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 4000여 발을 탈취했다. 그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호남방직·연초제조창·영암경찰서·화순경찰서·지원동 석산 화약고·한국화약·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M1·AR·LMG 등 총기 4900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 사용 교육을 실시했다. 15시경 광주공원에서 총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했다.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組)를 편성하여 정찰, 도청 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시민군(市民軍)이라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4시 50분경 시위대의 장갑차가 다시 전남도청 광장 쪽으로 돌진하다가 공수부대 장갑차에서 발포하자 후퇴했다. 15시경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20여 정의 총기를 분배했다. 화순 경찰서 등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도 학동 석천다리, 지원동에서 총기를 분배하여 일부 무장 시위대는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했다. 26. 1980. 5. 21 - 시위대와 공수부대 총격전 시작 14시 40분경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수협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일부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부근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였다. 15시 15분경 전남도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000여 명이 모여 일부 시위대는 카빈과 실탄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5시 50분경 카빈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 도청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다. 16시경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게 30여 정의 카빈을 분배했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 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상공(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대공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 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기종의 61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전교사로 복귀한 61연대장은 전교사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27. 1980. 5. 21 - 20시경 전남도청 시민군이 접수 5월 21일 16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와 '자위권 발동'을 승인받아 전남도청에 있는 7·11공수여단의 철수를 지시했다. 한편, 16시 55분 '예하 부대에 예비군무기 및 탄약 확보', '도로 봉쇄'를 지시하고, 이어 17시 50분 '광주도시권 외곽 도로의 완전 봉쇄'를 지시했다. 17시경 11공수여단 3개 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는 장갑차를 선도로 전남도청을 출발, 시위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공포(空砲) 사격을 하면서 조선대로 철수했다. 7공수여단 33대대를 포함한 공수여단 5개 대대 병력을 도보제대와 차량제대로 편성하여 시외곽 철수를 시작했다. 19시 30분경 차량제대가 먼저 장갑차를 선두로 조선대-전남도청-15번 도로를 따라 제2수원지로 철수했다. 도보제대는 조선대 뒷산-학동-지원동을 경유하여 산악능선을 따라 주남마을로 철수했다. 19시 40분경 차량제대가 전남대 병원, 남광주시장, 숭의실고 부근을 지나면서 시위대의 사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아 군 차량 3대가 전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장교 1명과 사병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16시 30분경 전남도청 상황실이 폐쇄되었다. 17시 15분경 전남도청 상황실이 폐쇄되고 도청 지휘부가 광주공항으로 이동함에 따라 경찰병력도 철수를 시작했다. 군경들은 운동복으로 바꾸어 입고 철수했다. 20시경 전남도청은 시민군에 의하여 접수되었다. 이날 전남도청 등 광주 시내 일원에서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15세 가량의 성명불상 남자(두부총상·의식 불명 상태로 13시 10분 전남대 병원 도착·총기불상), 진정태(남·27세·5월 21일 13시 50분 사망 상태로 전남대 병원 도착·총기불상), 최승희(남·19세·5월 21일 13시 15분 전남대 병원 도착·카빈총상), 윤성호(남·27세·회사원·카빈총상), 조사천(남·33세·목공·5월 21일 14시 광주기독병원 도착·카빈총상), 나홍수(남·34세·5월 21일 17시 15분 전남대 병원 도착·카빈총상), 안병태(남·26세·목공), 조남신(남·52세), 심동선(남·30세·다방 주방장·건물 옥상에서 피격), 김광석(남·전남대 2년·5월 21일 13시 55분 영남신경외과 도착·카빈총상), 민청진(남·20세·5월 21일 13시 55분 영남신경외과 도착·카빈총상), 김상구(남·22세·5월 21일 14시 10분 전남대 병원 도착), 윤형근(남·21세·5월 21일 15시 30분 전남대 병원 도착·카빈총상), 황호정(남·63세·자택에서 피격), 이경호(남·20세·카빈총상), 박인천(남·26세·카빈총상), 박금희(여·17세·춘태여상 3년), 김완봉(남·13세,무등중 3년), 박창권(남·14세·숭의중 2년), 이성자(여·14세·카빈총상) 김함옥(남·18세), 김용표(남·23세), 채이병(남·25세), 박인배(남·17세), 장하일(남·38세), 박세근(남·35세), 임균수(남·20세), 김복만(남·28세), 정찬용(남·29세), 정영진(남·17세), 조대훈(남·33세), 김형관(남·22세), 나안주(남·27세), 김영철(남·23세), 박민환(남·26세), 성명불상자 수 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28. 1980. 5. 21 - 연행 시민을 심하게 구타하여 수명 사망 5월 21일 14시 3공수여단에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광주시 외곽을 차단하고, '31사단 병력과 교대하여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16시 30분경 3공수여단은 15대대를 선두로 전남대를 출발하여 17시 20분경 광주교도소에서 방어 임무를 분담했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15대대가 교도소 앞 주유소에서 31사단 병력과 임무 교대중, 고속버스 2대에 카빈을 장착한 시위대의 기습 사격으로 공수부대원 1명이 총상을 입었다.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수십 명의 연행시위대를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했다. 광주역, 전남대 등 격렬했던 시위대와의 충돌과정에서 흥분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이 N호송트럭 안으로 최루탄과 가스를 집어넣고, 연행자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군화발로 구타했다. 그 과정에서 연행자 수명이 사망했다. 광주-담양간 국도(國道)와 순천행 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에서 외곽 봉쇄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3공수여단 병력과 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 간에 간헐적으로 총격전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서 19시 30분경 픽업 차량을 타고 교도소를 지나가던 담양거주 주민 4명이 카빈 총상을 받아 임은택(남·35세)과 고규석(남·37세) 등 2명이 좌대퇴부 또는 흉부 관통 총상으로 사망했다. 3공수여단은 5월 21일 밤 무장 시위대로부터 고속버스 2대 등 차량 6대를 노획하고, M1·카빈 등 총기 4정과 실탄 138발을 회수했다. 29. 1980. 5. 21 - 자위권 보유 알리는 경고방송 전남도청에 있는 공수부대와의 임무 교대가 불가능함에 따라 대기중이던 20사단은 5월 21일 18시 50분경 전교사령관의 '광주시 외곽 도로 차단봉쇄' 및 '상무대 경계 명령'에 따라 61연대를 광주-목포 및 광주-전주 간 도로 차단을 위해 송암동과 광주 톨게이트에, 62연대를 통합병원 입구와 송정리 비행장 및 전교사에 각 배치했다. 1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각군 참모총장·류병현 합참의장·백석주 연합사 부사령관·진종채 2군사령관·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방부장관 주재 회의에서 '계엄군 외곽 철수'와 '자위권 발동'이 최종 결정되었다. 19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방송을 통한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20시 30분 전교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하였으며, 20사단에는 21시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었다. 19시 20분 506항공대대 소속 500MD 헬기 4대가 전교사에 도착했다. 21시 육군본부의 1개 연대 추가투입 지시에 따라 20사단 2대대·3대대와 91포병대대 소속 장교 88명·사병 1514명이 성남 비행장을 출발하여 5월 22일 07시경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 격납고에 대기했다. 5월 21일 22시 10분경 효천역 부근에 배치되어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61연대 2대대 5·6중대와 지프차의 선도하에 트럭 ·버스 등 차량 6~7대에 탑승하고 목포쪽에서 오던 시위대 간에 교전이 발생하여 시위대 버스 2대가 전복되었다. 시위대와 교전을 보고받은 61연대장의 지시에 따라 5월 22일 0시 15분경 1대대 1중대와 연대 수색중대 병력이 증원되었다. 이어 01시경 광주쪽에서 버스 5~6대에 탑승하고 온 시위대와 다시 교전이 벌어져, 두 차례의 교전 과정에서 시위대 10여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2명이 총상을 입었고, 시위대로부터 총기 16정과 실탄 500여 발이 회수되었다. <자료 출처>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군검찰부 발표 5.18수사보고서 전문(1995년 7월 18일 발표) * 1980년 5월 광주 1편, 5월 18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2편, 5월 19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3편, 5월 20일 상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