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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의뢰받아 썼는데, 아주 흥미로운 책이라 공유합니다. 아직 잡지에서 나오기 전이니 눈팅만 부탁해요~~~ 잡지는 10월에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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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 부흥을 향한 제도 구축의 대장정
(클라우스 뮐한 지음, 윤형진 옮김, 『현대 중국의 탄생 – 청제국에서 시진핑까지』, 너머북스, 2023(908쪽); Klaus Mühlhahn (Author)Making China Modern: From the Great Qing to Xi Jinping, Belknap Press: 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9, 736 pages)
이 책이 처음 출판된 2019년 초는 연말에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 못 하던 때였다. 탈고에서 출판까지 몇 년 걸리기 때문에, 이 책에는 트럼프 시대의 미중 관계 악화와 디커플링 역시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니 현재 청년 실업률 20%에 육박한 중국의 경제 위기는 당연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책의 거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의 현황과 전망 서술에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는 것은 저자가 섣부른 “중국 모델 대안론”이나 “중국 위기론”과 확실히 선을 긋고 “장기 제도 구축”의 역사적 관점을 취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가 19세기 말에서 21세기까지 직면했던 도전에 어떠한 제도 구축으로 응전해 왔느냐는 관점에서 10분의 9를 서술하고, 나아가 앞으로의 중국을 예측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단기 변화에는 끄떡 않는 탄탄함이 있다. 영어 원서가 736쪽이고, 올해 출판된 번역본이 908쪽으로 분량 역시 만만찮다.
근현대 중국사 개설서로 책은 연대순으로 서론에 이어 1부(청의 흥망)는 청 제국의 흥성과 청 말 위기, 2부(중국의 혁명들)는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역사, 3부(중국 개조하기)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4부(떠오르는 중국)는 개혁개방 정책과 중국의 부상까지를 다룬다. 각 부는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전체 서론과 12장의 구성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중국사 서적이 영미 및 일본 저서가 많은데, 저자 클라우스 뮐한은 베를린 자유대학의 교수이다. 전반적으로 유럽과 관련된 서술이 상세하고, 특히 독일과 러시아의 근현대 중국사에서의 활동이 집중 조명된 것에 특색이 있다. 이하 책의 집필 순서에 따라 특징적인 부분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여,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일독하는데 가이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전체적으로 저자의 집필 의도와 방법론, 결론까지 서론에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현대 중국이 만들어진 장기 지속의 역사를 18세기 전후부터 오늘날까지 “제도들의 연속성”에서 찾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는 “제도”는 상당히 포괄적이다. “한 사회에서 협력하기 위해 인간들이 정한 사회적 질서”이자 “모든 거래의 기초로 작용하며 배후에서 작동하는” 범주의 것이며, “구성원들에게 내면화되고 그들의 세계관과 신념의 일부가 될 때” 비로소 제도가 된다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광의의 의미에서 “과거에서 전해져 온 제도는 새로운 상황에서 행위의 고정된 틀을 제공”하므로 현대 중국에 작동하는 제도를 이해하려면 역사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1-22).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고 실패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곧 몇 세기에 걸쳐 중국이 쇠퇴하고 승리한 것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이처럼 이 책은 현대 중국 만들기를 부와 권력으로 가는 길에 있던 제도적 약점과 기능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제도로 보았을 때, 4부로 나뉘는 중국의 근현대사는 어떻게 승패가 결정되었을까. 청 중기까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경제 가운데 하나”였으나, 제도적 전환에 실패하면서 1830년대 이후 위기를 맞았다(28). 중화민국 시기에는 의미 있는 개혁과 혁신 노력이 있었으나, 전쟁과 내전이 제도 개혁을 계속 방해했다. 이 과제를 이어받은 사회주의 중국은 제도적 파괴에는 능숙했지만, 새로운 제도를 수립하는 데는 덜 성공적이었다. 다만, 문화대혁명 동안 관료제 국가의 잔재가 철저히 파괴된 것이 포스트 마오 시대의 새로운 행정 엘리트의 지배력을 강화했고, 이것이 개혁개방 이후 안정적 제도 개혁이 성공하는 핵심 요인이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청 말, 중화민국 시기, 마오쩌둥 시기(책의 1부, 2부, 3부)의 중국을 제도적 성격에서 동질적으로 파악했다.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여러 세계의 정치제도 모델을 선택적으로 실험하였지만 결국은 “지배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경제로부터 자원을 빨아들이려는 착취적 제도”였다는 점에서 똑같다는 것이다(37). 제도적 관점에서 진정한 단절은 1978년 이후이다. 인민에 부를 나눠주어 자원 분배를 더 평평하게 하는 포용적인 경제 제도가 도입된 다음에야 중국 경제가 진정으로 이륙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기에 개혁개방 이래 중국의 놀라운 부상은 “제도적 변화의 점진적·실험적 특징 덕분”이었다. 그러나 포용적이고 현대화된 경제 제도의 인상적인 개혁과 달리, 지속적이며 효율적인 정치 제도는 구축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배타적이다. 현재의 도전들, 즉 강국 열망이 초래한 세계와의 갈등, 국내의 다민족 문제, 환경 위기, 불평등의 심화를 잘 다룰 수 있는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의 구축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으며, 이러한 과제는 중국뿐 아니라 지구화된 오늘날 우리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41).
2.
서론에 이어 4개의 부로 구성된 본론의 경우, 각 부의 도입부와 마지막에 각 시대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제도에 역점을 두는 만큼, 행정, 재정, 경제, 교육, 사회조직 각 방면의 제도 개설을 비롯해, 사법 제도에 대한 개관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수치와 통계를 폭넓게 인용하고 있다. 당대의 지성사, 사상사 서술 역시 풍부하다.
지금부터는 각 장의 순서에 따라 개설서로서 이 책의 특징과 장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을 위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1부 1장 “영광의 시대(1644-1800)”는 19세기 이전 청 제국의 역사에 해당하나, 본문 첫 장의 성격상 중화제국의 통사적 특징에 대한 기술이 꽤 있다. 어떤 개설서이든 무대 설정으로 자연환경 및 생태에 관한 부분이 맨 앞에 나오기 마련인데 이 책의 경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이 상세하다. 광물 자원 등 잘 다뤄지지 않은 주제나 환경사 관련의 서술이 신선하다(49-60).
유럽사와 비교사적으로 서술한 부분 역시 눈에 띄는데, 특히 청대 고증학과 한학에 대해 “같은 시기 유럽의 지적 경향과 닮았다”며, 전통 교리와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열망,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 합리적 논증과 경험적 접근법, 과학의 발전 등에서 유사성을 찾았다. “계몽운동은 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예외적 전환점으로 유럽 역사에서 다소 독특한 순간으로 여겨질 때”가 많지만, 지구적 동시성의 맥락에서 유럽 계몽주의도 청대 초기의 사상사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지적하는데, “작은 나라에 살았고 이웃 국가로 옮겨서 쉽게 정부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유럽 사상가들과 달리, 중국 사상가들은 구석구석 미치는 청 제국의 감시와 압력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정부와 사회의 문제에 비판적 태도로 맞설 능력이 제한되었다”고 평가하였다(108). 한편, 청의 조공 질서에 대해서는 강희제가 일본 구리 구매를 위해 암묵적으로 교역을 묵인하면서도 일본의 쇄국(즉 조공 거부)을 수용한 것 등의 사례를 들어, 청은 “상황 때문에 필요하거나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조공 체제의 관행을 기꺼이 변형시키거나 완전히 무시했다”고 하여, 최신 연구성과를 수용하여 통설에 변화를 주고 있다(117-118).
2장 “중화 세계의 재구성(1800~1870)”에서는 유럽의 중국 진출과 동서무역 서술이 상세하다. 특히 1760년대 전후의 광저우 무역체제 및 국가별 항구 지정의 관리무역 강제에 대해 1750년대 영국의 인도 합병과 영국 동인도회사 활동에 대한 안보적 대응이었다는 해석은 매우 새롭다(124). 또한 아편전쟁 훨씬 전에 이미 신장 및 중국 서남부 등 중국 국내에서 아편 경작과 거래가 번성했고, 관료들도 과세를 선호했다는 지적 역시 최신 연구를 수용한 서술이다(129). 아편전쟁 이래 서구와의 전쟁에서 유럽 측 전략 및 병력에 관한 서술이나(133-139),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활동 등이 다른 개설서보다 훨씬 자세하고 정보가 풍부하다(137-139, 195-200). 1855년 이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지배 확대를 미국 내전과 면화 공급 문제, 청과의 외교 문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특히 러시아 차르제국과 청 중화제국이 모두 실크로드 경제를 파괴했고 금일까지 중앙아시아를 후진화시켰다는 지적은 곱씹을 만하다(198). 이론 측면에서 과거의 제국주의, 반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나아간 점을 특기하고 싶다. 제국주의를 보다 유연한 정치 형태로 해석해야 하며 그 적용은 지역마다 다르므로, “제국주의의 역사적 구체상”에 대한 검토가 필요함을 지적하는데, 저자는 차별적인 사법권과 제도를 가진 “조계, 조차지, 식민지, 세력권”으로 구분하여 중국에서의 제국주의 형태를 분석하였다(150). 근대 중국의 “반식민지성”에 대한 제도적인 통찰이 돋보였다.
3장 “청 말의 곤경(1870~1900)”에서는 청 말의 사상 조류에 대한 설명이 주요 인물과 주장을 빠짐없이 다루며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청 말의 대외전쟁에서는 청불, 청일전쟁 등은 비교적 소략한 반면, 유럽과의 전쟁은 서술이 상세하다. 특히 의화단전쟁은 독일 세력권인 산둥성에서 발생해서인지 다른 개설서에 없는 독일 총독의 산둥 지배 방식과 이것이 초래한 지역사회 내의 갈등 등 새로운 정보가 많아 흥미진진했다(235-245). 청 말의 위기에 대해 저자는 그 원인을 “제도적 고갈”, “제도 변화와 혁신의 부재”(260)에서 찾았다. “불과 3만 명이라는 관료와 장교들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운영하는 것이 과거에는 주민들에게 이로웠지만” 19세기 말에는 중국이 행정, 재정, 군사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저자는 “왜 17세기에는 효율적이고 혁신적이었던 정치제도가 청 말에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그 까닭은 “황실, 관료 엘리트, 학자 엘리트, 상업 엘리트, 지주 엘리트들....기존 이해관계와 지대 추구 행위의 견고한 망은 일단 성립되자 제도 변화를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260-261). 서민을 희생하고 상인-관료만 이롭게 하는 기득권의 착취적인 제도적 체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 새로운 모색 역시 나타나는데, 개항장에서의 개혁, 혁명 담론과 운동의 형성을 논하면서, 저자는 20세기 내내 중국을 특징 지우는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정치적 동원의 새로운 시대”가 청 말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청 말 중국이 위기에도 불구하고 “굴욕”과 “수치”가 통합의 힘이 되었던 것, 그 결과 오스만, 러시아 등 다른 초기 근대의 육상 제국들이 19세기에 해체되었지만 오로지 중국만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독립체로 혁명 시기에 진입”했다는 점은 중국의 회복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회복력 덕분에 영토가 보존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변화를 지연시켜 중국이 치러야 할 비용은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265-266).
3.
2부는 신해혁명, 국민혁명, 사회주의혁명을 다루는데, 저자는 중국의 혁명들을 지구적 운동의 일부로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4장 “제국 뒤엎기(1900~1919)”는 제도 개혁이 정력적으로 시도된 청 말 “신정”에 대한 서술이 상세한데, 그중에서도 민법, 형법 등 사법 개혁, 국적법, 전국적 인구 조사 실시 등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 많다(276-286). 신정은 결국 1911년 청을 타도한 신해혁명을 초래하는데, 저자는 신해혁명의 최대 의미를 “중국의 20세기 전반을 형성해 갈 새로운 사회 집단들인 학생과 지식인, 노동자, 여성, 신흥 도시 부르주아지, 군인 등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271). 이후 새로운 중국이 상상되고 구성되는 과정이 중화민국 시기 내내 시작되었으나, 이러한 내부적 투쟁과 실험이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고 보았다(273).
중화민국 성립 이후 위안스카이 정부에서도 제도 개혁 관련 서술이 많은데, 고시제도의 재도입 및 공무원 승급제 등 제도적 혁신 노력을 강조했다(299). 중국과 유럽, 세계가 직접 접촉한 제1차 세계대전 부분의 기술 역시 자세하다(301-315). 특히 산둥성에서 벌어진 독일군과 일본군 간의 자오저우 전투의 규모와 의의는 다른 개설서에는 없는 내용으로 필독이다(302-303). 5.4운동 전야 세계 각 지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사상 조류를 지구사적 시각에서 서술하였고, 1919년의 “초국가적 연계의 창출”과 이를 가능하게 한 기술의 발전(2차 미디어 혁명)에 주목하였다(311). 저자는 5.4운동을 두고, 이집트, 인도, 한국의 운동과 비교하여 규모는 훨씬 작았으나 결과적으로 5.4운동이 다른 어느 국가의 운동보다 훨씬 국내 정치를 뒤흔들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316).
국공합작, 국민혁명과 난징국민정부 시기를 다루는 5장 “민국 시대의 재건(1920~1937)”에서는 소련의 역할이 강조된다. 북벌에 대해 저자는 “소련 군사 고문들은 장제스 원정군의 모든 부내에 배속되어 있었고, 소련 항공기와 조종사들이 적의 위치를 정찰하는 임무를 맡아 비행했다...그러나 군벌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영토를 철저히 방어했다”며, 북벌에서 소련 공군의 역할을 지적하고, 통설과 달리 군벌의 저항이 거셌고 피해가 컸음을 강조하였다(340). 훈정 시기 제도 개혁에서는 고시원의 관리 채용 방식과 공직자 시험(349-350), 1933년 민법 형법 등 사법 개혁과 3급 법원제, 변호사 제도의 성장(351-352) 부분을 주목하고 싶다. 난징국민정부의 군사 현대화에서 독일 장교의 적극적 활용도 특기되어 있다(355-356). 이 장에서 무엇보다 참신했던 것은 장제스의 신생활운동에 대한 평가이다. 저자는 “신생활운동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지만, 이 운동은 중국의 20세기 역사의 특징이 될 많은 대규모 정부 주도 대중운동의 첫 번째 사례였다”고 평가한다. 통설에서는 신생활운동이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과 비교되지만, 중국 자체의 1949년 이후 대중운동과의 비교가 더욱 흥미롭고”,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대중운동 방식에 신생활운동의 조직적 원형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357).
신생활운동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난징국민정부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도에 관해서는 1950년대 공산당이 활용하고 그 이후도 활용한 전례와 패턴 등, 중국 발전에 중요한 성과를 많이 남겼다고 평가하였다. 저자는 “모든 결점에도 난징정부는 확실히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에서 가장 효율적인 행정부였다.”고 총평했다(360). 나아가 난징국민정부는 일종의 중국식 발전 국가의 출현이었다고 보았다. 장제스의 군사 지향적 중공업 발전 우선 전략은 1950년대 마오주의 전략과 통한다(360-361). 또 난징국민정부 시기에 국유기업은 강화되고, 1940년대 초부터 이들 국유기업 부문을 “단웨이(單位)”로 불렀는데,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단웨이가 중국 사회 어디에나 있게 되기 거의 10년 전 국민당은 이러한 사회조직의 형식을 실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364).
동시기 중국공산당 지역인 소비에트 사회와 제도에 대한 검토에서도 제도적 접근은 이어진다. 1928년 펑파이(澎湃)의 하이루펑(海陸風) 소비에트에서 나타난 군중대회의 폭력성을 검토하면서, ‘작은 모스크바’를 자칭한 이 소비에트에서 발생한 참수형, 의례적 식인, 촌락 파괴 등 과격한 폭력에 대해 오히려 모스크바가 ‘목적 없고 무질서한 학살과 살해’를 강하게 거부했다고 지적하였다(376). 참수, 카니발리즘 등의 의례적 폭력성은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나타나는데 1928년처럼 초기 공산당의 사례는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시기의 진보적 사법 개혁의 경우, 신체형을 모두 폐지하고 남녀평등과 이혼 자유를 최대한으로 인정하여, 가장 급진적인 제도 개혁이 시도되고 있었다(382-383).
항일전쟁과 내전 시기를 다룬 6장 “전시의 중국(1937~1948)”에서는 시안 사변에 대한 평가가 참신하다. 저자는 “현대사에서 그렇게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거나 그 정도로 거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은 거의 없다...시안사건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태평양 모두에서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평가하고, “이 사건은 또한 중국에서 소련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부상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줬다”고 총평했다(397). 이 장에서는 국민당 통치지역, 공산당 통치지역, 점령 지역 세 구역의 지배 양태를 제도적으로 설명하고, 각 지역의 통치와 사회를 꼼꼼하게 비교, 검토하고 있다. 전시 충칭에 대해서는 “다당제의 가치와 중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토론”이 이루어진 측면을 높이 평가하였다(409). 한편 일반 개설서와 달리 일본 점령지의 통치 형태와 협력에 대한 분량이 많고 풍부한 것이 특징적이다(420-430). 일본 점령지에서의 핑딩산 민간인 학살사건, 생체실험 등 전쟁 범죄에 관한 서술을 놓치지 않은 한편(424-425), 1931년 점령 이래 일본에 대한 로컬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였고, 협력의 동기를 집단별로 상세히 분석하였다(423).
전시 강대국과의 관계 서술은 저자가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래너 미터의 『중일전쟁』(글항아리, 2020)의 시각과 유사하다. 소련 외에 지원 없이 외롭게 일본과 싸우던 중국이,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고 고립무원이다가, 진주만공격으로 영미의 본격적 지원을 받으며 처지가 바뀐 것은 맞지만, “영국과 미국은...중국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간신히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물자와 지원을 보낼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이 일본에 승리하도록 돕는 것은 분명히 서구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라고 평가하였다(435). 그리고 항일전쟁의 시작, 경과와 종결이 이처럼 국제적 맥락에서 좌우된 것처럼, 종전 이후 이어진 중국의 내전 역시 “결코 완전히 국내적인 것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중대한 국제적 차원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중국 내전이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미소 초강대국의 대리전이기도 했음을 지적했다(439). 그런 와중에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이다(444). 이러한 예상치 못한 조기의 공산당 승리는 거꾸로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배 정당성의 미약, 정권 상실에 대한 공포심을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부에 심게 되었다. 저자는 50년이나 지속된 혁명과 전쟁의 경험이 중국에서 상무적 가치를 확산시켰고, 1949년 신중국은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국가가 되었으며, 한편 “무질서에 대한 깊은 공포”를 각인시켰다고 말한다(450).
4.
3부의 7장 “사회주의 개조(1949~1955)”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공산당은 대중운동으로 승리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승리는 20년 이상 다양한 적에 맞서 군사적으로 버틴 결과로 전장에서 실현되었고, 공산주의 혁명의 본래 목적과 핵심 가치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깔끔히 선언하였다(463). “근본적인 정당성의 부재는 처음부터 공산당 통치의 특징이었다”(464)는 지적은 통설과 다르지만 현실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협적이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의 초기 유연한 도시 접수정책과 통치 전략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463-475).
건국 초기를 뒤흔든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한국전쟁 개입을 두고 중국과 소련의 줄다리기를 다루면서, 전투 개시 첫 6일 동안 소련이 공군 지원 약속을 지연시켜 중국 지원군은 홀로 연합군 및 국군과 싸웠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만 한국전쟁 사망자 통계에서 중국인 60만 명, 미국인 3만 6,000명 이상, 북한인 52만 명, 남한인 40만 명으로 집계하고 있는데(488-489), 한국전쟁 사망자 통계는 국가별로 차이가 너무 심한데 저자가 취한 중국인 60만 명은 중국 측 발표의 2배나 된다. 여하튼 한국전쟁이 사상사 숫자에서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가장 희생이 큰 전쟁이었다는 지적은 확실히 사실이다(489).
저자가 줄곧 추적하는 사법 제도 부문에서 1950년에 도입한 “인민 법정”은 대중운동 방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법 제도의 변형이다(496-497). 이런 방식으로 ‘인민의 적’으로 수십만 명이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지역별로 사형 규모가 사전에 할당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오가 “죽어 마땅한 반혁명분자가 인구의 0.1%에서 0.2% 사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집행되어야 할 사형 규모가” 사전에 정해졌다(500). 1950년에서 1962년 사이 12년 동안 거의 체포 후 처형된 숫자는 대략 160만 명이며, “노동 개조” 판결을 받은 400만 명 중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이 50만 명을 넘었다. 이에 따라 제도 면에서 수용소 및 처형 체계가 정교하게 갖춰졌으며, 대중운동을 위한 거민위원회, 단웨이, 부녀조직, 개인 인사파일 등 기층의 조직과 관리 방식이 고안되었다(500-506).
통설을 수정하는 저자의 분석이 눈길을 끄는 부분은 토지개혁에 대한 평가이다. 저자는 토지개혁으로 지주는 제거되었으나 빈농에게 돌아간 토지 분배가 늘지는 않았다며, “농촌의 불평등이 지속되었고, 중상층 농민들이 토지개혁의 승자로 떠올랐다”고 평가했다(520). 그 결과 늘어난 불만이 중앙정부가 곧바로 “집단화의 의제를 강행하기 시작한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521). 한편, 토지개혁 덕분에 “국가는 농촌의 과세 기반을 상당히 늘릴 수 있었다.” 또한 현지 출신이 아닌 외부에서 온 새로운 엘리트 간부가 토지개혁을 주도했으며, 결국 토지개혁의 주요 목표는 평등 분배가 아니라 “전통적인 농촌 사회 구조의 최종적 파괴”였고 공산당은 이에 성공했다(521).
8장 “대약진(1955~1960)”에 들어가기 전에 저자는 중국인들의 일상 모든 것을 규율한 호구제도를 상세히 분석하였다(525-528). 또한 가족과 혼인, 종교 정책, 민족 식별과 소수민족의 제도화 과정을 소개하는데, 사회주의 중국만의 새로운 집단 구분과 제도로서 계급 분류를 서술하였다. “홍오류”, “흑오류”의 계급 구분과 부모의 계급까지 기록하여 관리하는 개인 인사파일 제도를 분석하면서, 사회주의 중국이 “바꾸기 어려운 신분을 모든 사람에게 할당하는 새로운 공산주의적 앙시 앵 레짐을 무심코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534).
동유럽의 반소운동과 사회주의 위기, 쌍백운동, 반우파 운동에 이어 무리하게 추진된 대약진운동은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대기근을 초래했다. 저자는 대약진의 수확 실패와 기근의 원인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들과 똑같이 먹는 것”(569)을 보면서 이러한 “보편적 복지”로 생산 동기가 사라졌다는 것, 또한 대약진 기간의 빠른 도시화로 7천만 명의 비농업 인구가 추가로 생겨나면서 농촌의 공급 체계에 부담이 가중되었음을 지적했다(572-573). 그러면서도 최근 연구에서 대약진을 “홀로코스트”나 소련의 정치적 대량 학살인 “부농 청산”과 비교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차이를 지적했는데, “마오는 대약진을 시작할 때 인구의 일부를 죽이려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계획적인 대량 살인 사이에는 중대한 도덕적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도,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농촌과 도시, 농민과 노동자 중 어느 쪽을 지원해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마다 당과 국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것임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도시 지역에 분명한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이다(575).
이어지는 9장 “모든 것을 타도하기(1961~1976)”는 문화대혁명을 다루었다. 최신의 문혁 연구를 참조하여 통설에서 업데이트한 부분을 살펴보면, 마오의 라이벌들이 마오에 가한 위협은 실제 상당했다는 점, 문혁의 폭력에서 홍위병과 무투 같은 우발적 폭력보다 “계급 대오 정화” 캠페인과 같은 당 권력의 조직화된 폭력이 압도적으로 컸다는 지적일 것이다. 대약진 실패 이후 마오는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참석자 7천 명 앞에 공개적으로 자기비판을 해야 했고, 정책 결정에서 확실히 밀려난 결과 에너지를 “교육” 분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청운동(四淸運動)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그것인데, 이마저도 다른 지도자들의 견제로 농촌에서 반부패운동 수준으로 축소되고 1965년경에는 중지되었다. 따라서 마오는 그 대응으로 “도시”에서, 그리고 “군대”로부터 반격을 준비했다. 마오가 1964년 인민해방군에 있는 정치부 모델을 모든 정부 기구에 설립하도록 주장하여, 인민해방군에서 온 정치위원이 민정 기구로 침투하게 된 과정은 문혁의 전사로 중요한 지적이다(585-586). 문혁에서 군대와 린뱌오의 중추적 역할만큼 린뱌오 사건 이후 “중국의 사실상 모든 고위 군사 지도자들이 숙청되거나 체포되었다. 인민해방군은 정치와 대중으로부터 사라졌다”(610).
문혁 초기 단계에 사망자는 173만 명, 중상자는 7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문혁은 중국 사회에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 저자는 이러한 학살을 동반한 캠페인과 대중운동이 나타난 원인을 자신이 이자성(李自成)이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마오쩌둥의 사례처럼 공산당 지도부를 시작부터 괴롭혔던 뿌리 깊은 불안감(618)과 안정적 합법적 제도가 결여된 “당-국가의 취약성”에서 찾았다(622).
5.
마지막 4부는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 성공 신화를 다룬다. 마오쩌둥의 중국, 스탈린의 소련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도 아닌데 어쨌든 엄청난 성공을 거둔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을 “중국 수수께끼”로 부르며 해답을 찾았다. 10장 “개혁과 개방(1977~1989)”에서 저자는 중국 내부에서 문화혁명의 끝과 개혁개방 시작 사이는 불확실성의 시기였다며, 어떤 제도, 체제를 만들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점진적 제도 혁신과 빈번한 지역 실험을 통해 혼종적인 제도가 나왔다고 보았다. 특히 초기에 그 방향을 크게 규정한 것은 향진 기업의 성공이며, “아마도 정부는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그 결과 나타난 비국가 영역의 빠른 팽창이 중국을 시장 경제로 전환하도록 추동한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고 평가했다(657). 한편 “1980년대는 중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과감한 10년”이기도 했는데, 그 결과 나타난 1989년 톈안먼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이후 중국의 핵심적 정치 전략인 “경제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모토로 하는 “중국 모델”이 탄생했다(679).
11장 “전면적 전진(1990~2012)”은 1992년 덩샤오핑의 시장 지향적 개혁의 전면화 이후 G2로의 급성장을 다루었다. 공산당은 당 조직의 발전과 결속을 꾀하면서, 엘리트주의를 취하고, 현대적 공무원 체계를 성립시키며 능력주의를 채용했다(684-685). 기업뿐만 아니라, 성급 행정부들 사이의 경쟁 역시 강화했다. 저자는 “경제발전에 대한 이러한 경쟁은 중국의 공공 행정의 독특한 특징으로, 지방 관료들이 지방 엘리트들에게 덕을 보는 개발도상국 지방정부들의 행동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러한 관료들의 다수는 성장을 촉진하기보다는 자원을 추출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했다. 중국의 지방 관료들은 경제성장을 촉진함으로써만 자원을 추출할 수 있었다”(689)고 지적한다. 즉 지방 관료들이 단순 착취가 아니라 개발로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제도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1989년의 체제 위기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애국주의였다(698-709). 애국주의 교육 운동은 1991년에 시작되었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애국주의가 정부 정책의 부산물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구 자유주의 교육 받은 지식인까지도 애국주의에 동참하였으며, 이러한 대중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국치” 담론과 함께 커졌다. 저자는 지식인들 사이의 애국주의 고조를 소련의 붕괴 이후, 유사한 상황이 중국에도 생길 수 있다는 공포감이 지식인 사회에 만연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707). 경제 개혁에서는 1980년대와 달리 대형 국유기업 민영화의 실질적 중단과 국유 부문 강화가 나타난 것에 주목하였다. 1998년 이후 국유 부문은 2000년대에 높은 수익과 성장을 기록하는데, 이리하여 혹자는 ‘국가 자본주의’라고도 부르는 혼종적 경제 체제가 정착되었다.
마지막 “12장 야망과 불안: 동시대 중국”은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현재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 미래를 전망하였다. 일대일로, 자원 외교, 군비 강화, 위안화 강화 등 G2로서 대국주의적 대외 정책이 펼쳐지는 한편으로, 국내적으로는 고령화와 인구 문제, 농촌 이주 노동자 문제, 도농 및 소득 격차의 심화 등 위기 요소가 잠복해있다. 중국은 소득, 자산, 기회에서 “1990년대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의 하나”이다(751). 반면 사회 불만을 해소할 민주적 과정과 제도는 없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불만이 시위로 표출되는 “군체성(群體性) 사건”의 경우 대부분 국가가 놀라서 양보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민주적 절차의 부재가 분명히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불안의 심각성을 가져온 주요 원인이었지만, 바로 그 결함이 정부가 추문이나 사회 문제에 대한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도록 강요했다”(761-762).
저자는 1978년 이래 중국의 발전은 “세계 시장에 대한 개방적 접근과 자본과 상품의 무제한적인 초국적 흐름에 결정적으로 의존”했으며(782), “점진적이고 편의적인 정책, 역사적 유산 그리고 국제적 기회의 결과”였다고 보았다(788-789).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적 유산, “중국의 역사적 장점은 전근대 중국 제도의 상대적 정교함, 능력주의와 교육에 대한 강조, 복잡한 행정·경제 체계를 운영했던 경험” 등이다(789).
결론적으로 청 말 이래 중국이 직면했던 장기적 문제에 대해, 중국은 내내 고투했고 1978년 이후 역사적 유산을 바탕으로 제도적 해결책을 찾았다. 그렇지만 향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날 중국은 대기 오염. 수자원 부족. 지구온난화의 도전, 부패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790). 다만 중국은 전례 없이 너무 빠르고 불균등한 발전을 압축적으로 한 결과, 문제의 양상이 더욱 심각하다. 저자는 중국이나 세계나 모두 “더 온건하고 지속 가능한 현실 속에서 사는 것을 배워야 할 것”(790)이라고 주문하면서, 이 과제에 대한 제도 개혁을 찾을 것을 중국과 세계에 촉구하고 있다.
6.
서평의 기능은 여럿이지만, 평자는 비평보다는 저자의 의도를 가장 잘 요약하여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래서 학계의 성과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를 원한다. 특히 번역서이고 개설서인 경우는 더욱 비평의 몫은 이 서평을 읽고 저자의 의도를 알게 된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이 책은 혁명 사관과 담론이 시들해진 유럽학계의 현황을 반영하듯 다소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제도사적 접근을 하고 있지만, 최신 연구를 비롯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유럽학계의 연구성과를 잘 반영하고 있다. 각주 포함 900쪽이 넘는 책이지만 즐거운 독서였고 페이지마다 발견이 있었다. 무엇보다 술술 읽히도록 번역한 윤형진 교수의 공헌이 크다. 책 분량이 일반서적의 2배이니 서평도 2배가 된 것에 의뢰를 주신 학회에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