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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푸 9 - 호텔 옥상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도자기에 대해 생각하다!
2024년 5월 6일 코르푸 Corfu 섬에 도착해 카발레리호텔 Cavalieri Hotel 에 체크인후 올드
포트리스 요새 Old Venetian fortress 와 올드포트 Old Port 에 새 베네치아
요새 New Venetian fortress 를 보고 골목에서 레스토랑과 카페에 기념품 가게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올드타운을 나와 스피아나다 광장 동남쪽에 위치한 유서깊은 우리 카발레리 호텔
Cavalieri Hotel 에 옥상에 올라가니 360도 파노라마를 구경할수 있어 환상적입니다.
생맥주에 안주를 겻들여서 먹고 내려오면서 보니 도자기들을 많이 진열해 놓았는데,
예전에 터키 이스탄불의 톱카프궁전에서 본 중국과 일본 도자기에 또 독일
드레스덴에서 본 유럽 도자기가 떠오르니 문득 도자기의 유럽 전파에 대해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는 왕족과 귀족들은 식사를 할 때 금테 두른 은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지만 평민들은 나무 그릇
을 사용했는데..... 동양에서 중국 도자기에 이어 일본 도자기가 수입되자 모두들 열광했습니다?
흙그릇에는 굽는 온도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니 토기와 도기, 자기 및 도자기인데.... 이 중에 도자기는 점토를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의 총칭인데, 온도도 차이가 나지만 재료에 있어서도 도기는 흙(진흙,
찰흙) 으로, 자기는 규석과 장석 등 내화도가 높은 광물을 함유한 '돌' 가루 (고령토) 로 제작하는게 다릅니다.
언어별로 보면 영어는 ceramics, china, porcelain, pottery, earthenware 이고, 한국어
로는 도기(陶器), 도자기(陶瓷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한자는 陶瓷器, 중국어
陶瓷 táocí, 陶瓷器 táocíqì 그리고 일본어로는 陶磁器 とうじき, 瀬戸物せともの 입니다.
도자기는 중국이 서양에 수출한 주요 물품이니 실크로드나 배를 통해 운송 되었기 때문에 영어로
도자기를 china 라고 하는데..... 중국의 백자를 수입하지 않고 자체 생산하려는 노력 끝에
유럽에서는 동물의 뼛가루를 이용해서 하얀 색을 극대화한 본 차이나 (Bone china) 가 나왔습니다.
중국이나 한국 백자가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창백한 백색을 띤 데 반해 본차이나는 특유의 우윳빛 같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인데, 도자기가 주요 교역품으로 거래된 이유는 지배층을 위한 고급
도자기들은 단독으로 소중하게 운송 되었지만, 대중적인 도자기는 다른 교역품을 담은 채로 운송했습니다.
800~1000 ℃ 에서 구운 것을 '도기', 1100~1400 ℃에서 구운 것을 '자기' 라 하고, 합쳐 도자기라 하며 1000 ℃
내외에서 자기가 되는 온도에 도달하지 못한 발전 중간형 그릇을 석기 (stoneware, 炻器) 라고 하고,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이나 800도 이하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 또는 굽지 않은건 토기(greenware 라고 합니다.
또한 가마를 개방하고 산화해서 굽는가, 폐쇄하고 환원해 굽는가에 따라 색이 확연히
다른 경우가 많으니..... 고려청자를 예로 들면 개방해 산소를 공급하여
구우면 붉지만, 차단하고 일산화탄소를 생기게 하면 오히려 산소를 뺏겨 옥색이 됩니다.
실수로 깨뜨렸을 경우 파편이 상당히 날카로운지라, 과거에는 연싸움을 할때 연줄에 사금파리(도자기의 깨진
조각) 를 갈아 만든 가루를 풀 먹여 입히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 행한 압슬이라는 고문은 바닥에 사금
파리를 깔고, 무릎을 끓린 후에 무거운 돌을 얹거나 사람이 올라가 압박을 가해 고통을 주는 고문 이었습니다.
도자기는 단순 수공예일 뿐이 아니라 고대 부터 수많은 세계의 문명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던 예술의 정점 중 하나였기에, 유물이나 고미술품으로써 엄청난
가치가 있으니, 오래 전의 빗살무늬 토기는 원시적인 노천소성 기법으로 구웠습니다.
그런데 굽는 온도가 600~800℃ 밖에 안돼, 토기에 물을 담으면 쉽게 풀어져버리므로 사용에 제약이
있었는데..... 선사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같은 간단한 형태를
거쳐서 역사시대에 접어들면 가야토기, 신라토기 같이 토기도 정교하고 복잡한 형태로 발전합니다.
고대시대에 도기가 등장한 것은 구리를 제련하기 위해서 만든 가마가 나오면서 가능했는데 구리의 용융점
인 1000℃ 를 달성하기 위해 열의 방출을 막는 방법이 나오면서 흙도 높은 온도에서 구울 수 있게
되었으니 이렇게 구운 도기는 물을 담아도 흙이 풀어지거나 물이 새지 않았으니 고대 그리스 암포라 입니다.
문명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도기도 단순한 음식 보관용이 아닌 왕의 권위용이나 제사용으로 사용되었고
제작기술도 발전했으니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당시 고대 문명의 도기 발전의 궁극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도기는 물을 흡수하는 성질을 극복하지 못했으니 와인이나 고급 음식물을 보관하기 어려웠는데
중동에서 유약이 나오고, 중국에서 고령토를 사용하면서, 기존 보다 훨씬 섬세한 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중국에서 1300℃ 이상 온도로 굽는 가마기술 까지 개발되어 자기의 초기 형태가 제작됩니다.
초기에 등장한 자기는 원시적인 청자로 옥빛이 아니라 그저 '도기에 유약을 바르는 것이
목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빛깔이었는데 이후 기술이 발전하여 송대에 이르러 우리가
아는 형태의 청자가 나왔으니, 중국 도자기는 북방식 백자와 남방식 청자로 나뉘었습니다.
당나라 이후 송나라 때까지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두루 사용하였지만 송 휘종이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 고 명령하자 청자가 대유행하였고, 송의 귀족들도 청자를 애호하게 되었으니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강남으로 쫓겨난 것도 남방식 청자가 우세해지는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고려도 이런 영향을 받았으므로 청자 애호로 기울어졌는데 서해 침몰선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대부분
은 송나라의 청자이며..... 고려의 특산품이라 불렸던 상감청자는 도자기에 그림을 넣으려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나온 자기로 코발트를 사용한 청화나 철을 사용한 철화가 나오기 이전이었습니다.
도자기 위에 일반 안료로 그림을 그려 구우면 색이 변하거나 날아가기 때문에 "물감을 쓸수 없다면 색이
다른 흙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 이같은 고려청자를 만드는 가마들은 입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청자 생산에 용이한 환경인 전라남도 일대의 부안, 해남, 강진 등에 90% 가 몰려있었습니다.
송, 원, 명대 초반까지 중국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
했는데..... 당시 한국이 만든 물건 중에 외국에 수출할만한 고급 제품은
도자기와 인삼, 종이에 붓 정도 였습니다만, 실제로 도자기를 수출한 실적은 없습니다.
아시아 예술품 중에 최고가는 396억 원에 낙찰된 원나라 시기 청화백자 '귀곡하산
(鬼谷下山)' 인데..... 원(元) 은 세계제국으로 원 황제의 통행증만 보유
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베이징까지 안전하게 교역할 수 있는 시대 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우유와 양모를 귀하게 여기는 몽골인은 백색을 좋아했으며 원의 수도가 북방에 있는 관계로
북방식 백자가 우세해졌고, 중국에서는 하얗게 구워지는 백토와 기포를 줄여 소성시 투명하게 되는
유약이 나온지라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백자기술이 완성되니 원 황제 그릇은 청자가 아닌 백자로 바뀝니다.
이슬람 이전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은 중세 유럽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은그릇을 선호
했지만 무함마드가 무슬림 사이에서 누구는 나무그릇으로 밥을 먹고 누구는 금그릇,
은그릇으로 밥을 먹는다. 이건 계급 불화를 조장한다며 금그릇, 은그릇의 사용을 금지시켜 버립니다.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초기에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은그릇의 대체재로 유리 그릇을 사용하거나,
러스터웨어(Lustreware) 라고 도기 위에 금, 은가루를 입히는 기법으로 만든 도기 사용했으나
내구성이 별로 안좋았는데, 이때 중국으로 간 이슬람 상인들이 찾아낸 대체재가 바로 도자기 였습니다.
당송시대부터 이슬람인들은 중국에서부터 도자기를 수입했지만.... 송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청자 보다도
아직 기법이 미완성되어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 있는 백자를 더 선호했는데, 이 백자가 원대에 들어
흙 속의 철분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법이 개발되어 새하얀 백자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 대 히트를 칩니다.
서구 국가들도 기독교적 교리 때문에 백색을 숭상하는 편이었으니 국제무역에서도 백자의 우세
였는데.... 여기에 이슬람권으로 부터 전해진 코발트 염료(회청) 를 사용한
청화기법이 등장함에 따라 흰 바탕에 다양한 문양과 그림을 그리는 청화백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하얀 바탕에 검푸른 색이 조화된 특유의 아름다움은 동서양 문명권에서 황금이나 보석 못지않은 보물로
각광받게 되니 청화백자는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고품으로 자리잡았고, 원-명대에 꽃을 피운 중국
의 청화백자는 기술적 경지는 물론이거니와 미적으로도 초월적 수준으로 평가받아 전 세계를 제패합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려는 시도를 해왔으나, 13세기 이후 튀르키예 에서 치니
(Çini) 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을 뿐이며 그나마도 중국 도자기의 내구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는데, 금속세공기술로 구리그릇을 만들고 에나멜로 색을 칠한 다음
유약을 입히고 가마에서 구워내서 도자기 느낌을 낸 제품인 미너커리 (Minâ kâri) 를 생산합니다.
원나라 시절, 고려에 북방식 가마 기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고려의 도자기 기술도 크게 진보했지만,
14세기에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분청사기 형태를 한 청자만 제작 되었으며 고려 말기는
도자기 산지 남해안이 왜구에게 초토화되었고, 질 좋은 고령토도 얻을수가 없었으니 청자가 사라집니다.
백자는 세월이 흘러 15세기 조선시대가 되어서야 나오는데, 도자기를 만들고 연구하는 사옹원의
총책임자는 왕자들이 임명되었고 청화백자의 재료인 토청을 구하려고 왕실도 많이
노력했으니 그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급발전하여 18세기까지 절정을 이루나, 18세기
부터 양반 사대부의 취향이 놋그릇 쪽으로 바뀌고 19세기 세도정치 시기가 닥쳐오자 쇠퇴합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이후 부터 중국의 유약 기술을 받아들여 도기를 전국 각지에서 만들
었지만, 자기는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들이 납치해간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이
고령토를 발견해 자기를 만들면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으니
지금도 오래된 가마터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흔적이나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포로 송환때도 일본의 다이묘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조선 도공들을 가두고 숨기며 결혼시켜 자식까지
보게하는등 온갖 방법을 다해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했으니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였는데, 조선에서 도공은 천민 취급을 받았으나 일본에서는 기술자 대접을 받았습니다.
에도 막부는 조선 도공들이 만든 자기를 일본산 자기와 구분해서 이도 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도공들의 귀화를 불허했고, 자기 생산 이외에 다른 일을 하거나 거주지를
바꿀 수 없게 제한했으며 찻잔에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조선 도공도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조선인 도공들도 많았으니 1617년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종사관
이경직이 "부상록" 이라는 기행문에 남긴 기록을 보면, 이경직이 조선인들을 만나 돌아가자고 제안
했으나 "왜경(교토) 에 도착한 이후 와서 뵙는자는 연달아 있었지만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매우 적었다.
되풀이해서 간곡하게 타일러도 의혹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 (8월 22일)" 고 적고 있으며 12~13세 때
끌려왔던 창원 출신의 김개금은 "부모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타이름을 받고도 "20여년
이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저버릴 수 없다" 면서 귀국을 거부 했으니 처자식을 가지고 정착한 것 입니다.
의혹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는 말 처럼 조선에 대한 불신이 있었으니..... 막상 기술자들을 귀국
시켰으나 인조 3년(1625) 3월 회답사 정립 등은 갖은 고생 끝에 146명을 데려왔으나 "양식이
떨어져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 고 호소했으니.... 조선의 장인 들도 생계가 어려워진 때문 입니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선 일반 민가에서 쓰이는 수준의 막사발
이 일본에선 고위층들끼리 주고받는 선물로 쓰였고 현재도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지만 이는 오래된 낭설인데,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에서 기인합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물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밥사발이다.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밥사발이다.
아주 볼품없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다." 라고 평했고, 이것이 일종의 '정설' 이 되어 널리
퍼졌지만, 현재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은 반박당해 이도 다완을 막사발로 간주하는 일은 없습니다.
도자기 제작 기술이 뒤졌던 일본 전국시대에는 차를 따르는 데 쓰던 다기가, 특히 중국 다기가
매우 비쌌는데, 그중에는 성 하나 값에 맞먹는 것도 있었으니 일본은 어떻게든
자국에서도 도자기를 생산하려고 애썼지만,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 준할 수준의
자기를 제작할 수가 없어서 임란 이전까지도 자기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전유물 이었습니다.
일본 지배층들 사이에서 다도(茶道) 가 유행하자, 차를 마시는 끽다 (喫茶) 문화가 고급 문화로 자리
매김했고, 각종 기물들 역시 고급화 되어 값어치가 뛰었으니 점차 다례에 쓰이는 자기들이
화려해지고 사람들이 점차 그런 것들만 찾기 시작하자, 16세기에 센 리큐가 이런 풍조에
반발하며 '와비 사비' 라는 미적 개념을 수립하니 이도다완 같은 사기를 검소함의 극치로 재평가합니다.
지금도 도요지 터에서 자기를 쌓아 굽다가 무너진 흔적들을 볼수 있는데, 그릇 여러 개를 쌓아 구움은 중국과
한국이 모두 마찬가지이니 완(그릇) 은 하나만 올려 놓고 만들면 낭비인지라 쌓아서 굽는데, 국립중앙
박물관에 보물로 전시한 고려- 조선시대 다완에도 쌓아 굽다 보니 그릇에 남은 흔적을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 스타일 도자기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부산 왜관에는 일본 수출용 그릇 공장도 운영
되었는데 훗날 부산요(釜山窯)라고 이름지었으니 일종의 OEM 방식으로 조선 측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기술자를 차출해주면 왜관에서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에서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가져갔는데 일본 자기 기술력이 조선을 능가하면서 1717년에 폐쇄됩니다.
일본의 자기 기술은 임진왜란때 납치한 조선 도공들 덕분에 발전하였으며, 청나라의 침입으로 명나라
가 멸망하자 중국의 도공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여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중국 도요지
경덕진이 혼란에 빠지면서 17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일본 자기를 서양에 수출합니다.
네덜란드는 일본에 디자인을 수주하고 샘플을 보내는 등 일본 자기의 품질을 끌어올리고 값싸게 사가는 방식
으로 무역을 했으며 시간이 흐른 뒤부터는 편의를 위해 손잡이가 달린 잔도 제작했는데, 17세기 이후
일본이 서양에 수출한 도자기는 뜨거운 차와 찻잔에 익숙지 않았던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춰 제작한 것입니다.
유럽 도자기 역사는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열화 카피에 불과했지만 18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폴란드- 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 하에 마이센에서
자기 (porcelain, fine china) 를 제조하는데 성공하고 기술이 유럽 여러 나라에 퍼져
나갔는데 1760 년대 프랑스의 세브르 자기가 등판하기 전 까지 초기 유럽식 자기시장을 선도했습니다.
장인정신을 강조하면서 사승관계와 무형의 노하우 전승을 강조하던 동양의 문화와는 달리, 온갖 실험을
꼼꼼히 기록하는 서구 문화는 이런 제작 기술이 빠르게 퍼지는데 공헌했으며 여기에 에나멜 같은
동양에는 없던 색채기법 및 금채를 칠하는 방식이 등장하고, 르네상스부터 발전시킨
사실주의 양식이 가미되면서 도자기 품질이 역전 되었으며 영국의 본차이나도 이 무렵에 등장합니다.
중국산 도자기는 수백년간 유럽 도자기 시장을 독점해 왔고 유럽과 교류한 뒤 부터는 파미유 로제
를 비롯하여 서양의 회화 기법을 수용한 다양한 채색 도자기들을 수출했지만, 유럽에서도
도자기를 생산하고 일본 도자기가 도전을 해오자, 유럽 시장에서의 지분을 상당 부분 상실합니다.
그래서 점차 중국산 도자기를 대체한 유럽의 도자기들이 상류층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다만, 중국
자기는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여전히 높았기에 유럽 상류층들 사이에서 계속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근대 유럽 도공들의 중요한 업적은 대량 생산의 개발이니 도자기 종주국이었던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일찍이 분업화가 이루어졌었지만, 유럽에서는 여기에 도자기에 넣을 무늬를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했으니 유럽은 보편화된 예술인 동판화를 응용했는데, 가장 오래된 대량 생산 기법은
동판에 작가가 손으로 문양을 파고 액화시킨 코발트 안료를 홈 위에 붓고 롤러로 미는 것이었습니다.
초창기는 오직 파란색만 넣을 수 있었지만 이후 금속 안료를 개발해서 빨간색, 녹색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방법을 전사 인쇄라 하며, 기술은 이탈리아에서 나왔지만 상업적인 발전은 영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분업화와 효율화를 이룬 유럽의 자기 제작 체계는 산업혁명시기에 도요업계가 기계 공업을
도입하는데도 영향을 주어 도자기의 생산량과 생산 속도의 개선에 이바지했으니,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유럽의 도자기 회사들은 도자기를 시중에 저가에
공급해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계층의 식탁에도 양질의 자기가 사용될수 있게 합니다.
동서 문명 교류의 중심지에 있던 중동권은 중국의 자기를 국산화 하기 위해서 여러 왕조가 심혈을
기울였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때문에 그들의 기술은 늦은 시점까지 도기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으니 가장 큰 이유는 중동지방의 토질은 고령토가 나기 어려운 종류였던
것이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자신들 도자기의 품질을 인정받고 수출까지 한 나라가 튀르키예 입니다.
1470년 중국 명나라의 경덕진에서 생산된 당초문 청화백자와 1550~1570년 이즈닉에서 만든 도자기는 아주
유사한데..... 13세기무렵부터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도자기를 제작했으니, 이즈니크(İznik) 에서 생산한
이즈닉 치니가 유명하한데 중국산 도자기에 열광하던 요구에 맞춰 중국 도자기를 모방하면서 시작합니다.
코발트 염료를 사용하는 중국식 청화백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만, 코발트 염료와 다양한 색깔의 광물성 물감
을 직접 도자기 위에 그리고, 가장자리를 가느다란 붓으로 검게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굽는
점이 다르니 색깔이 매우 선명하며 겉에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서 굽기 때문에 광택은 진짜 자기와 비슷합니다.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도 서구화의 영향으로 유럽풍으로 바뀌었고, 프랑스 세브르 자기의
영향을 받았으니 이을드즈 자기 (Yıldız porseleni) 는 압뒬하미트 2세 황제가
돌마바흐체 궁전을 비롯한 유럽풍 궁전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사용하기 위해 취미
삼아 시작했다가 귀빈 선물등 목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면서 품질이 수준급으로 좋아집니다.
한국의 전통 도자기에는 대표적으로 선사시대의 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
백자 등이 있으니, 통일신라 이전까지 한국 도자기 기술은 조악한 수준으로 삼국은 토기를 생산했고
귀족층은 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같은 유기를 사용하거나 혹은 중국의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했습니다.
통일신라 중기부터 중국이 755년 안사의 난을 시작으로 혼란기가 계속되면서 중국의 도공들이
한국으로 망명해 도자기 기술이 전래되었고, 한편 중국에서 도자기 수입이
계속되면서 자체생산 수요가 생겨나 청자 초기 형태인 해무리굽청자 등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백자와 흑유자도 소량이지만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제작되었으며 시간이 지나 고려시대 중기에는 중국 청자
와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을만큼 완성도에 다다르게 되었으며 10~11세기에서는 송으로부터
다양한 제조기법이 소개되었고, 고려 도공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고려자기를 만들어 낼수 있게 됩니다.
고려청자에 이어 조선 백자로 발전하는데..... 중국에서 유행이 백자로 바뀐데다가
왜구의 침입으로 청자 생산지 강진등이 초토화 되었고 이후 조선은
청빈을 강조하면서 사치를 멀리하니 백자는 청자 보다 화려함이 줄어들게 됩니다.
백자는 재료부터 제약이 있으니 질 좋은 고령토로 만들어야 하는데.... '고령' 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있는 도자기의 총본산 경덕진의 고령산(高嶺山) 에서 유래했으니, 청자는
불순물 약간을 포함하는데 비해 백자를 만들려면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온도 면에서도 청자는 철의 제련온도인 1100 ℃ 이상 온도를 유지할수 있는 기술이면 만들수 있지만,
백자는 최고 1400 ℃ 이상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최고가를 경신한 조선백자는
그 가치가 표면에 그려진 붉은 꽃에 있었다고 하니 붉은 색은 진사라고 부르는 산화동으로
그려내는데 높은 온도에서 변색되지 않고 그런 붉은색을 나오도록 굽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랍니다.
조선 말기 도자기들은 침체되기 시작하는데..... 임진왜란 때 많은 장인들이 일본에 잡혀가
도제식으로 전수되던 제작기술의 맥이 끊긴 데다가, 임진왜란과 연이은 청나라의 침입
으로 국토가 피폐되어 경제가 침체된데다가, 호란 2번에 경신대기근 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조정에서도 비싼 청화백자 대신 철화백자를 쓸 정도였으니, 도자기가 침체되면서
양반들의 취향이 금빛으로 번쩍이는데다가 튼튼하기까지 한 놋그릇으로 옮겨가면서
도자기 수요까지 줄자 도자기 산업은 더욱 침체되어 사양화 되는데 다만 희귀성 때문에
열화품인 철화 백자나 전란으로 인해 탄생한 급조품인 달항아리도 수십억 원에 거래됩니다.
일반인의 눈엔 멀쩡해 보이는 도자기라도 장인이 마음에 안들면 거침없이 깨트린다는 말은
허언이니... 청화백자에 사용하는 코발트 안료는 질 좋은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을 통해 들여와서 매우 비쌌으며 관요에서 납품할 때도 뇌물로 그 갑절을 찔러줘야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도공들이 가마에서 안 터지고 나온 자기들을 깨버릴 여유는 없었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 부터 일제강점기 까지 한국의 도자기를 쓸어간 후, 중국의 도굴꾼 과
밀수꾼들이 세탁을 위해 한국으로 중국 도자기를 끌어오기 시작했으니......
중국에서는 도굴 등의 문화재 장물 매매는 심하면 사형까지 떨어질 수 있는 중범죄로 칩니다.
중국에서 전멸한 송나라 시대의 여요부터 장제스가 대만으로 탈출하면서 싸들고 가던 도자기까지 한국에서
찾아볼수 있는데, 세탁 보낸 도자기가 도리어 한국에서 사회 혼란기를 거치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집 구석이나 골동품점에 유통되었으니 최근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경매에서 이런 유출 도자기를 사들입니다.
현대에 몇몇 장인들의 작은 공방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에서 만든 공장제 도자기가 유통
되니 1위 '한국도자기' 를 중심으로, 형제기업인 'ZEN', 목포에 공장을 둔
'행남자기', 이천에 공장을 둔 '광주요', 여주가 공장인 'yido' 등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