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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1 (일)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문재인… 윤석열 '특급 도우미’
4월 25~26일 JTBC에서 방영된 문재인 대통령과 손석희 전 앵커의 특별대담(‘대담 문재인의 5년’)을 꼼꼼하게 지켜봤다.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현직 대통령이 퇴임을 보름 앞두고 어떤 말을 쏟아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최고지도자의 진솔한 소회를 기대했다. 하지만 ‘트루먼쇼’ ,‘달나라 대통령의 원맨쇼’라는 혹평이 말해주듯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이틀 내내 문재인 대통령은 참 솔직하지 못했다. 자기 방어 기제가 철저하게 작동했다.
“(소통은)의지의 문제이지, 장소의 문제는 아니다”란 말이 대표적이다. '광화문 시대' 공약 파기를 합리화하고,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실 용산 이전을 비판하는 맥락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기억하듯 ‘광화문 시대’는 단순히 장소에 대한 공약이 아니었다. '닫힌 박근혜와 열린 문재인' '불소통의 박근혜와 소통의 문재인'의 극적인 대비를 노린 장치였다.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과의 차별화를 위해 "대통령의 24시간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도 했다. 하지만 광화문 시대도, 24시간 공개도 제대로 지켜진 건 없다.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사과가 윤석열 당선인 비판보다 더 먼저, 더 진솔하게 나왔어야 했다.
한·일관계에 대한 언급에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양국 관계 악화에 대해 “우리 정부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달라진 것은 일본이다. 우경화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고 했다. 양국 갈등 심화의 배경에 '아베 신조(安倍晋三)'로 상징되는 일본 정치 우경화의 흐름이 깔려있는 건 맞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당시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곧바로 뒤집어지면서 갈등의 단초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머릿속에선 이런 불리한 기억들은 모두 지워진 듯 했다.
이번 대담을 보며 가장 크게 웃은 장면은 “한 번도 링 위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민주당 후보를 응원할 수 없었고, 입도 뻥긋할 수도 없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때다. 그는 대선과정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 걸 이렇게 억울해했다. 사실 '검사 윤석열'을 최후의 승자로 만든 1등 공신은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었다. 5년간의 실정과 내로남불에 등을 돌린 국민들의 정권교체 여론이 윤석열의 오늘을 만들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작 문재인 대통령은 대담에서 “(정권교체론이 이번 대선의 화두라는 건)일종의 프레임같은 것”이라고 우겼다.
솔직히 말해 대선 이후 윤석열 당선인의 모습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대통령실 용산이전, 자신들만 ‘잘된 인사’라고 우기는 초대 내각 인선, 정치적 배려나 예의는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려운 일방적 태도가 모두 도마에 올라있다. 취임 전 당선인 신분으로는 역대급으로 직무 지지율이 낮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방영된 문재인 대통령의 마이웨이식 인터뷰 이후엔 여론이 다시 윤석열 당선인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것 같다. 5년간의 지긋지긋했던 내로남불과 아전인수가 이틀간의 대담에 축약된 때문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윤석열 당선인을 찍었던 중도층이 "내 선택이 옳았다"고 안심할 근거를 또 문재인 대통령이 제공한 느낌이다. 윤석열 당선인을 야당 대선 후보로, 대통령으로 키웠던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하는 그 순간까지 '윤석열의 특급 도우미'역할에 충실했다.
“文 온다” …평산마을 “교통 혼잡, 사생활 침해” 우려
4월 30일로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만료가 D-10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 달 5월 9일 오후 6시 청와대에서 나와 서울 모처에서 밤을 보낸 뒤 5월 10일 국회에서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취임식에 참석한다. 취임식이 끝나면 김정숙 여사와 함께 KTX를 타고 울산역에 내린 뒤 13km가량을 차로 이동해 경남 양산시 평산마을 사저에 입주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3월 30일 불교계 원로들을 만나 “(퇴임 후) 자연으로 돌아가서 잊혀진 삶,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했다. 이달 4월 25일 청와대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선 “특별히 무슨 은둔 생활을 하겠다, 그런 뜻은 전혀 아니다”라면서도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특별히 주목을 끄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뜻대로 조용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입주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평산마을의 모습과 주민 분위기를 취재해 봤다.
○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평산마을
평산마을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 있다. 4월 28일 오후 경부고속도로 통도사나들목을 빠져나오자 유명 테마파크인 ‘통도환타지아’가 나타났다. 확장 공사가 한창인 2km가량의 도로를 지나니 45가구가 모여 있는 평산마을이 보였고, 문 대통령 사저도 눈에 들어왔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2020년 4월 10억6401만 원에 매입한 2630.5m²(약 795.6평)의 대지에 신축된 사저는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영축산에 안겨 있었다. 사저 설계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고 동창인 승효상 이로재건축사사무소 대표가 맡았고, 책을 펼쳐서 엎어놓은 모양으로 회색 박공지붕을 얹었다. 상아색과 회색을 조합한 벽면은 한옥을 연상케 했다.
사저 인근에는 방문객 수십 명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주말(4월 23, 24일)의 경우 하루 300명 이상이 다녀가는 등 문재인 대통령의 입주가 다가올수록 방문객도 증가하는 추세다. 울산 남구에서 온 50대 여성 A 씨는 “영축산에 등산 온 김에 사저를 찾았다”며 “정들었던 곳을 떠나 서운하시겠지만 새 이웃들과 편안히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마을 곳곳에는 ‘경축, 성공한 문재인 대통령님과 김정숙 여사님의 귀향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 주민은 “대통령과 한 마을에 살게 돼 자부심이 생긴다”며 “대통령 귀향의 기회를 잘 살려 지역이 발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문객 증가에 따른 교통 혼잡과 사생활 침해를 우려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방문객들이 마을회관 마당과 도로까지 주차하자 주민들은 ‘마을 안길 외부차량 출입금지, 평상마을주민 일동’이 적힌 표지판을 세웠다. 양산시 역시 도로 주변에 불법주차 금지를 알리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불법주차 단속을 하고 있다.
한 주민은 “문재인 대통령 내외의 선택으로 우리 마을이 역사적 장소가 됐다”면서도 “혼잡이 더 심해질 것이고 경호로 인한 불편까지 더해져 조용히 사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다른 주민은 “혹여 갈등의 단초가 될까 싶어, 주민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문 대통령의 입주에 대해) 말을 가급적 안 하려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4월 29일엔 주민이 아닌 보수단체 회원 40여 명이 평산마을 입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귀향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마을에 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수단체들은 앞으로도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지역 발전에 대한 의견도 엇갈린다. 사저가 있는 평산마을과 인근 지산·서리마을 상인들은 상권 활성화를 기대하는 눈치다. 반면 하북면 초입에 형성된 중심 상권 상인들은 “잠시 스쳐가는 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북면 전체 상권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북면의 한 음식점 주인은 “사저를 구경 오는 방문객이 늘었다지만 매출에 변화는 없다”며 “앞으로도 큰 기대는 없다”고 했다.
○ 들썩이는 부동산… “호가 너무 올라 거래 실종”
평산마을 일대 부동산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마을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평산마을은 우리나라 3대 사찰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통도사, 영축산, 통도환타지아 등 관광인프라가 있는 데다 대통령 사저까지 들어서면서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며 “카페가 빠르게 늘고 있어 부동산업계도 깜짝 놀라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동산 호가도 치솟고 있다. 평산마을과 지산·서리마을의 일반 자연녹지의 경우 현재 3.3m²당 호가가 250만 원으로, 대통령 사저 신축 사실이 알려지기 전(3.3m²당 130만∼150만 원)보다 두 배 가까이로 뛰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입주하면 가격이 더 오를 것”이란 기대감 탓에 부동산 소유주들이 지나치게 높은 호가를 제시하는 바람에 정작 거래는 실종 상태다. 하북면의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땅 주인이 호가를 너무 올리다 보니, 투자 문의는 많지만 매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개사무소 대표는 “전원주택 부지 매물이 간혹 나오지만 대부분 825m²(약 250평) 이상 규모”라며 “땅값만 5억 원에 건축비까지 하면 10억 원이 넘는데, 시골 주거지로는 너무 비싸다 보니 거래가 이뤄질 수 없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부동산 큰손들이 일대 땅을 연이어 매입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 부동산 업자는 “지금 커피숍을 짓고 있는 땅은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이 알려진 2020년 상반기(1∼6월) 순식간에 거래된 것”이라며 “외지 투자자들이 매물로 나온 땅을 싹쓸이했고, 이후에는 호가만 크게 오르고 거래는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 제2의 봉하마을?… 지역에선 “공간적으로 불가능”
문재인 대통령은 4월 25일 청와대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하루에 한 번씩은 시골까지 찾아온 분들이 고마워서 그분들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저는 그렇게는 안 할 생각”이라며 “일부러 그런 시간, 일정을 잡지는 않겠다”고 했다. 4월 20일에는 이낙연, 정세균 전 국무총리 등 문재인 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지낸 인사 등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며 “(양산 사저에서) 가까이 있는 통도사에 가고 영남 알프스 등산을 하며 텃밭을 가꾸고 개 고양이 닭을 키우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바람대로 ‘잊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한 양산시 공무원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 하루아침에 세간의 관심에서 지워질 수 있겠느냐. 대통령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치적 영향력이 발휘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 경남지역 정가는 6·1지방선거에서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경남 양산과 김해 표심에 문재인 대통령의 귀향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벌써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잊혀진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평산마을이 김해 봉하마을과 함께 진보 진영의 구심점이 될지도 관심사다. 봉하마을은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인기 방문지다. 문재인 대통령 사저에서 봉하마을까지는 차량으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사저는 제2의 봉하마을이 되긴 어렵다는 게 이 지역 사람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산자락에 있는 사저로 가는 길이 폭 4∼6m에 불과한 이면도로뿐이어서 방문객 차량이 몰리면 통행하기 쉽지 않다. 인근에 마땅한 주차장도 없을뿐더러 주차장 부지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양산시는 방문객이 몰려들 경우 인근 통도사 산문주차장(394대)으로 유도할 방침인데, 산문주차장은 사저와 1.8km가량 거리를 두고 있다. 노약자의 경우 걸어서 왕복하기 쉽지 않은 거리다. 마을 안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봉하마을처럼 되는 건 생각도 하기 싫다”며 “마을에 산책로가 조성되고 있지만 사저 주변에는 인파가 모일 공간도 없고, 차량 통행도 힘든데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고 말했다.
청와대 이름이 될 뻔했던… 수수께끼의 지명 '화령'
5월 10일, 드디어 금단의 문이 열립니다. 그것이 잘한 결정인지 아닌지는 일단 제쳐두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청와대(靑瓦臺)가 개방되는 것은 그곳이 실로 918년 만에 최고 권력자나 국가원수와 무관한 곳이자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됐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 그곳에 남경 궁궐을 세우기 전까지는, 백성 누구나 그 북악산 아래 자리에 마음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조선 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무과(武科) 시험을 보려는 백성들이 간혹 입장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청와대’란 세 글자를 발음해 보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국민과의 활발한 소통이란 이미지보다는 ‘권위’ ‘밀실’ ‘권력독점’ ‘구중궁궐’ 같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개인적인 경험 한 가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신문사 입사 전, IMF사태 직후 잠시 한 담배회사의 종로지점 사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회사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주 우아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습니다.
“A 영업사원 계시나요~?” 어디시라고 말씀드릴까요, 묻자 그 여성은 우아함과 도도함을 한층 높이고 권위와 단호함을 한 스푼 정도 섞은, 그러면서도 짧고 속도감을 갖춘 채 은근히 위에서 찍어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딱 다섯 글자를 발음했습니다. “청와댄데요.” 눈동자가 커진 제게서 전화를 넘겨받은 A사원은 통화를 이어가다 다소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이번 주까지는 밀린 대금을 좀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전화를 끊은 그에게 다가가 누구시냐고 물어봤습니다. “어? 응~ 청와대 담배가게 아줌마야.” 그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10년 전이었다면 반말로 전화했을지도 모르겠는걸.’
청와대라는 이름은 언제 생겼던 걸까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그 건물의 이름은 ‘경무대(景武臺)’였습니다. 이것은 1948년에 만들어낸 이름이 아니라 조선 말 경복궁 중건 이후 후원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었습니다. 원래 ‘지역’의 이름이었던 것이 ‘건물’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죠. ‘경복궁(景福宮)’의 ‘경(景)’과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에서 한 글자씩 따 왔다는 게 통설처럼 돼 있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궁궐 관련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어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에게 ‘경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게 말이죠. 조선시대에 사람들 시호로 많이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 자체로 ‘큰 계책으로 나라의 난리를 진압한다’는 뜻이 있어요.” 그렇다면 6·25 전쟁을 앞둔 시기에 걸맞는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옛 조선총독 관저였고 광복 후에는 미 군정 사령관의 관저였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집 이름을 ‘경무대’라 했습니다. 신생국 대한민국은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을 여유가 없었고, 이 대통령은 보수해서 쓰자는 건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일본산 전구는 모두 깨 버렸다는데, 상징적인 일제 잔재 청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1공화국의 독재가 심해지면서 ‘경무대’는 소통하지 않는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58년 김성환의 4컷 신문 만화 ‘고바우영감’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는 어떤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귀하신 몸 행차하십니까?’라며 인사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 ‘귀하신 몸’의 정체는 ‘경무대서 똥을 치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 만화‘고바우 영감’.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 만화‘고바우 영감’.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경무대’가 지금의 이름인 ‘청와대’로 바뀐 것은 1960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이름이 청와대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수립된 뒤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이 경무대에 거처한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겐 그다지 큰 권력도 없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에게서 경무대의 새 이름 후보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은 ‘작명인’은 언론인 출신으로 서울시사편찬위원회를 운영한 김영상(1917~2003)씨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인 김동규 서울대 신경외과학 명예교수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김영상씨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진언했습니다. “경무대는 역사가 깊은 이름입니다. 잘못된 정치가 어찌 집 이름 때문일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나 집 이름을 바꾸려는 윤보선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다고 합니다. 사실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윤보선 대통령 역시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김영상씨가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관저의 새 이름 후보는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①화령대(和寧臺). ②청와대(靑瓦臺). 우선 2번에 대한 설명부터 들어보죠. 관저 지붕을 덮고 있는 비취빛 청기와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영역할 경우 미국의 백악관(White House)에 대비될 수 있는 블루 하우스(Blue House)가 되니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워싱턴엔 하얀 집, 서울에는 푸른 집! 그러나 훗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블루 하우스’란 표기를 무척 싫어해 ‘Chong Wa Dae’로 쓰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집 지붕에는 언제부터 푸른 기와가 놓여졌던 걸까요? 그건 1939년 총독 관저를 신축할 당시부터였습니다. 증산교 계통 종교인 보천교 본당 십일전의 화려한 기와를 가져다가 덮었다는 겁니다. 지금의 청와대 본관은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새로 지은 것인데, 총독 관저였던 옛 청와대 건물처럼 역시 지붕을 푸른 색으로 했습니다. 그래야 ‘청와대’인 것이니까요. 구 본관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철거됐는데, 그 이유는 옛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철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 정기를 회복하자’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바로 그때 새 청와대 건물의 푸른색 지붕도 다 벗겨버리고 청와대라는 이름도 바꿨어야 균형이 맞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의 일은 그야말로 ‘주관적·선택적 일제 잔재 청산’이 아니었을까요.
다시 196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김영상씨가 제출한 두 가지 이름을 본 윤보선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청기와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재인 만큼 고유한 전통을 지닌 집이라는 뜻에서 청와대로 이름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 고려시대에는 청자로 기와를 만들어 쓴 일이 많았고, 조선 전기만 해도 경복궁에서 청기와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고고학 전공자 다운 안목이 보입니다만, 일제가 총독 관저를 지을 때 청기와를 썼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화령대’에 대해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화할 화(和)에 편안할 녕(寧)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몰라서 나온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화령’이란 명칭 자체가 뜬금없다는 얘기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청와대’ 대신 대통령 관저의 이름이 될 수도 있었던 ‘화령’이란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조선왕조가 개국한 1392년,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새 나라 수립을 승인해 줄 것과 국호(國號)를 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라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다? 이것은 형식적인 외교 조치일 뿐, 사실상 국호는 이미 ‘조선(朝鮮)’으로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조선’과 다른 이름 하나를 넣어 두 가지를 제시한 뒤 골라달라는 것인데, 그 이름이 바로 ‘화령’이었습니다.
‘조선’이야 오래전 존재했던 나라의 명칭이니 고개를 끄덕일 만했지만, ‘화령’이란 중국에서 보기에도 생소한 명칭이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걸림돌이 더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몽골제국의 두 번째 수도인 카라코룸은 한자로 화림(和林)이었고 중국어 발음은 ‘허린’입니다. 그런데 화령의 중국어 발음은 ‘허닝’이거든요. 이러니 화령이 아닌 조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얘깁니다. 그렇다면 ‘화령’은 천자국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결재파일에 넣었던 ‘버리는 카드’였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화령’은 나라의 이름을 지을 때 한 번, 국가원수가 사는 관저의 이름을 지을 때 또 한 번, 이렇게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서 두 번 등장했다가 번번이 버려진 비운의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조선’에 밀렸고 그 다음엔 ‘청와대’에 밀려났던.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명나라가 예상과 달리 ‘어? 이 이름도 참 좋은데’라며 버리려고 했던 카드를 집어든다면? 이 만약의 경우를 예상한다면 플랜 B 역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이름이어야 했습니다. 조선왕조가 아닌 ‘화령왕조’가 되더라도 별 문제 없이 괜찮아야 할 정도로 좋은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 그럼 ‘화령’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이름이었을까요? 그것은 함경남도 영흥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고려 때 지명이 ‘화주’였던 것을 1369년(공민왕 18년) 화령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였습니다. ‘아,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으로 삼았구나.’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한편으론 좀 이상하기도 합니다. 나라를 세운 첫 임금의 출생지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다? 지금의 개성 출신인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 이름을 ‘송악’으로 할 것을 고려했다면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얘기겠죠. 더구나 화주가 화령으로 바뀔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자랄 때 고향 이름도 아니라면 별다른 추억이 깃들 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화령’이란 지명은 고려 말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2004년 8월,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대장경(大藏經)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경의 실물이 공개됐습니다. 조병순(1922~2013) 성암고서박물관장이 소장했던 이 불경은 서체와 함차번호(일련번호)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 발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실시됐습니다. 같은 불경의 다른 일부는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도 있습니다. 연구 결과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이었으며 13세기 고려의 팔만대장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체 대백과사전’을 쓴 일본 학자 이지마 다치오(飯島太千雄)는 “사상 처음 발해의 대장경이 출현했고, 이는 발해에 당·신라·일본과 비견되는 불교문화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불경의 제목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華嚴經) 권제삼십팔(卷第三十八)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 ‘대화령국장’, 즉 ‘화령국에서 만든 대장경’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화령’이란 한 나라의 이름이었습니다. 발해는 후기의 역사 기록이 거의 사라져 많은 왕들의 시호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화령’은 역사 기록에서 유실된 발해의 또 다른 명칭이거나, 발해의 남쪽이었던 남경 남해부에 해당하는 정치세력의 이름이었을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더라도, 분명한 것은 ‘화령국’이 스스로 대장경을 만들어 인쇄할 정도로 독자적인 천하관과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화령’은 일개 지역의 지명을 넘어서서 ‘조선’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대사에 존재했던 옛 나라의 이름이었습니다.
서기 926년 거란에게 멸망당한 이후 ‘잃어버린 왕국’으로 여겨졌던 발해의 또 다른 국명(國名)이, 세월이 흐른 뒤 한국사의 미묘한 국면에서 예고 없이 두 차례 불쑥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화령대’가 될 수도 있었던 청와대는 1963년 제5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 이후 또 한번 이름이 바뀔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황와대’란 이름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던 것이죠. 푸른색보다는 노란색이 전통적으로 더 존귀한 색이고, 예전 황제는 황색 옷을 입었고 황궁에는 황기와를 썼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바꿔서야 되겠느냐”며 일축했다는 얘깁니다. 그는 대통령이 황제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5월 첫날에 찾은...... 신록이 짙은 옥녀봉
5월이 열린 첫날........
고욤나무
08:25 단구동 야산 옥녀봉으로........
백철쭉
남원로.......
자산홍 - 영산홍 - 백철쭉
이팝나무
천매봉길..... 원주시 단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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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주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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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운...... 층층나무
옥녀봉 들머리 81계단.......
명봉산 - 배부른산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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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 백운산 조망터.......
신록이 짙은 5월 첫날의 옥녀봉 풍경 속으로......
산사나무
10:03 해발 231m의 옥녀봉 정상에......
아카시아 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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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5월 첫날의 옥녀봉 능선길......
09:20 옥녀봉 날머리 능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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