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선물이라고 햄 한 세트와 참치 한 박스(小)를 배급 받는 것으로 추석을 열어 재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배급은 힘 빠지는 일이지만 내가 이깟 일로 기가 죽을 수는 없지요. 포스코 퓨처 엠 주식을 정리 하고 9월 수급비를 통장에 세이브하면 200만 원 정도의 추석 보너스가 될 것입니다. C-bar 미치것다. "공주야! 내일 주식 정리해서 언니 통장으로 입금해 주시라" "정말?" "okay. 형편 나아지면 다시 사지 뭐. 1년 동안 주식 공부 잘 한 거 같아"
-
알랭 바디우가 어머니랑 갑장(1937, 87세)이더라고요. 지젝과 함께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한 달 가까이 졸졸 따라다니고 있지만 호락호락한 노인네가 아닌 듯 싶어요. 우리 시대 양주동(1903-1977) 박사가 '자칭 국보'로 알려진 양반인데 필자와 알랭 바디우도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자칭 "현존 최고의 철학자, 나는 공산주의자다." 냅둬요. 이리 살다 죽게. 우리가 알다시피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2,000년 서양철학의 역사가 ‘존재’가 아닌, ‘존재자’에 치중함으로써 본질로부터 멀어졌다고 비판했어요,
-
하이데거는 이전 철인들이 이 같은 구분을 제대로 못하고 '존재' 탐구에 있어서 허우적 댔다고 보았어요.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겁니다. 주제가 아니니 패스. 나는 바디우 형님이 수학의 '집합론'을 끌여들어 구라를 칠 줄 몰랐어요. 바디우는 집합론을 존재론으로 간주해요. 수학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론'이었다는 겁니다.
-
'집합론'은 존재론적 상황의 질서와 모순, 그리고 동요를 설명하는 역동적인 존재론입니다. 그것은 탈이성과 해체에 맞서 ‘합리주의’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며, 사유에서 배제된 ‘혁명적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철학적 전제를 마련하는 데 바쳐진 노력이란 인상을 받았어요. 여러 철학자에 의해 부정된 ‘진리’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복원시키려는 치열한 몸짓 같아 보였어요.
-
그렇다면 알랭 바디우는 왜 수학을 존재론에 적용시켰을까? 수학 집합론에 나오는 공리로서 기존 존재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 같긴 해요. 그렇다면 수학(집합론)의 공리가 왜 기존의 존재론에 시비 걸 자격이 되는 것인가? 머리 지진 날 것 같아 또 패스. ‘집합 표시는 이렇게 합디다. ‘{ }’ 비로소 ‘바구니’ 양상으로 ‘존재’를 규정하게 된 것이지요. 무(無)까지 끌어들인 존재론입니다.
-
이렇게 해놓고 자체적으로 무모순점이나 결정 가능성이 있는지를 자체 검토에 나서게 되는데 집합 안의 원소는 유한하기 때문에 다른기표가 내 안으로 유입되어야 한대요. 텍스트가 내 안에 들어와야 내가 바뀔 수 있는 패턴은 로고스가 성령으로 나를 통치할 때 내가 성화 되는 원리입니다. 내가 성큼성큼 천국을 침노하지 않으먼 나는 결코 바뀌지 않아요. 근데 왜 하필 집합이론일까? 바디우는 수학의 도입을 통해 이런 인간 존재론의 한계를 확인코자 했을까요?
"철학은 새로운 문제를 발명하는 것이다(알랭 바디우)"
"Philosophy is the invention of new problems"
2024.9.11.wed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