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대 한의약연구소장 박종철 교수(부산약대 75학번)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산기슭이나 밭에 봄 벚꽃이 개화했다는 꽃 소식이 고속열차를 타고 상경하고 있다. 올 봄에도 바쁜 숨 고르며 꽃 마중 갈 땐 꽃도 원 없이 보지만 또 한가지, 흙도 구경하도록 권하고 싶다. 야산이나 들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하게 불그스름한 빛을 띤 흙이 있다. 암석이 화학적인 풍화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풍화잔류토로 이 흙을 우리는 황토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황토를 구성하는 광물에는 점토광물류가 약 60~80%를 차지하는데 여기에는 석영, 장석, 산화철광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점토광물의 종류와 함량에 따라 황토의 물리화학적 특성이 크게 좌우된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가소성, 이온교환성, 흡착성, 촉매성, 현탁성 등과 같은 특성을 알고서 황토를 좀더 가깝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최근 이를 이용한 황토베개, 황토모시, 황토양말, 향토내의, 황토이불 등의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지방의 한 농업기술센터에서는 황토양파, 황토마늘 그리고 식품회사에서는 어성초를 황토와 접목한 황토어성초까지 개발하기도 했다. 식품에도 황토를 접목하여 기능성을 증대시키고 황토의 약용적인 면을 부각시킨 이러한 상품이 출시되기도 하여 다양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 바이오 벤처기업이 선보인 황토담배 상품도 있어 더욱 흥미를 끈다. 담배에 함유된 황토성분이 가열되는 과정에서 다량의 원적외선을 방출되어 잎담배 속의 중금속과 유해물질을 상당 부분 제거해 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처럼 황토가 단순한 흙의 의미를 넘어서 동,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원적외선을 다량 방사한다고 하여 ‘살아있는 생명체’라 불리기도 하는 등 약효가 있는 흙으로 인식되고 있다. 발에 밟히는 흙이 대안적 삶을 주도하는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의보감에서도 황토로 휘저은 다음 위에 뜨는 누런 흙물을 ‘지장수’라고 하여 여러 가지 중독을 푸는데 효능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요즈음에는 이 지장수가 널리 알려져 얼굴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음식을 만들 때 이용한다고 한다. 특히 좋은 황토를 동의보감에서는 호황토(好黃土)라고 하여 설사와 이질, 열독으로 뱃속이 비트는 것 같이 아픈 증상을 치료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약에 중독된 것, 고기에 중독된 것, 버섯에 중독된 것도 풀 수 있는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황토뿐 아니라 다른 흙도 단순한 흙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약효가 있어 동의보감에서는 18종의 약용 흙의 효능을 각각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쉽게 지나쳤던 흙이 효능이 있다니 다소 의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번호에는 동의보감에 소개된 이들의 효능을 살펴보자.
대장금에 나오는 대사 한 부분을 지난호에 이어 다시 본다. 금년 3월에 종영한 대장금은 마의 시청률이라고 하는 50%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하고, 퓨전사극이라는 장르를 정착시켜 드라마의 영역을 확장시켰다고 하는 대장금은 드라마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떨리는 마음이 주체되지 않는 장금. 최상궁, 아무리 그래도 이번 것은 확실하다고 판단되는데…
대비: 이번 것은 정말로 판단하기가 어렵구나. …
대비: 이것으로 해야겠다.
보면, 장금의 닭 진흙구이를 가리키는데…모두들 술렁이고.
장금: (놀라고)…
최상궁: (분한데)…
대비: 특별한 재료 없이도 복룡간을 써서 애저에 맞서는 맛을 내었다는 것은 분명 보통이 아니다.
중종: 저도 그리 사료됩니다.
위의 대장금 대사에서 흙인 복룡간(伏龍肝)이 나온다. 장금이 대비에게 올린 닭 진흙구이를 복룡간을 이용하여 만들어 대비와 중종의 마음을 잡고 있다. 복룡간은 가마 밑의 아궁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가열 처리된 누런 흙을 말하는 것이다. 한방에서 성질이 약간 따뜻하며 맛이 맵고 독이 없다. 코피가 나거나 피를 토하고 그리고 대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치료하는데 사용한다. 종기와 독기를 삭히고 해산을 쉽게 하는 효능도 있으며, 어린이가 밤에 우는 증상도 치료한다. 단순히 흙에 지나지 않지만 이처럼 다양한 약효가 있다니 놀라운 사실이다.
이 외에도 동벽토, 서벽토, 적토, 백토 등의 흙이 약으로 사용된다고 동의보감에서 기재되어 있다. 즉 동벽토(東壁土)은 동쪽 벽의 흙을 말하는데 성질이 평(平)하고 독이 없다. 주로 설사, 이질, 곽란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 동쪽벽엔 늘 아침해가 쪼이게 되며 그 화기(火氣)가 세다. 그래서 남쪽벽의 흙을 쓰지 않고 동쪽벽의 흙을 쓰는 것이며, 제일 먼저 햇빛을 쪼이는 곳의 것을 긁어서 쓴다. 서쪽벽의 흙은 서벽토(西壁土)라고 해서, 토하는 것과 딸국질을 치료하는데 기를 내린다. 특히 해질 무렵에 햇빛이 비치는 벽의 흙을 쓴다. 적토(赤土)는 일체의 피를 많이 흘리는 증을 치료하다. 그리고 헛것을 없애고 가위에 눌리지 않게 한다. 소나 말한테 발라주면 온역(溫疫, 급?열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 백토인 백악(百惡)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쓰면서 맵고 이질을 멎게 한다. 이것을 백선토(白善土)라고도 하는데 오랫동안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5장이 상하고 여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재미있는 흙도 있다. 여름에 길 가운데 있는 뜨거워 진 흙인 도중열진토(道中熱塵土)는 여름에 더위를 먹어서 죽을 것 같이 된 것을 치료하고, 땅벌집 위의 흙인 토봉과상토(土蜂?上土)는 피부가 헐어서 상한 것을 치료하며 거미한데 물린 것도 낫게 한다는 것이다.
모래도 약이다. 우물밑의 모래인 장저사(井底沙)는 성질이 몹시 찬데, 끓는 물이나 불에 데서 상처가 생겨 아픈 것과 전갈에 쏘인 것과 가위에 눌린 것을 치료한다. 6월 강가에 있는 뜨거워진 모래인 6월 하중열사(六月河中熱沙)는 몸에 감각이 없고 잘 쓰지 못하거나 다리가 싸늘하면서 쓰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 모래를 가져다가 햇볕에 뜨겁게 되도록 한 다음 그 가운데 엎드리거나 앉는다.
재도 약으로 사용하니 더욱 흥미롭다. 대장간의 아궁이에 있는 재인 단철조중회(鍛鐵?中灰)는 아랫배 속에 덩이가 생긴 병증을 치료한다. 갑자기 생긴 아랫배의 덩이도 치료하는데 그것은 이 재가 쇠기운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아주를 태운 재인 동회(冬灰)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맵다. 검은 사마귀를 없애는 효능이 있는데 많이 쓰면 살과 피부가 진무른다. 그리고 상시회(桑柴灰)는 뽕나무 재로서 검은 사마귀, 무사마귀를 치료하는데 그 효과가 명아주 재보다 좋다. 붉은팥과 같이 삶아서 먹으면 부종이 잘 낫는다. 백초회(百草灰)는 음력 5월초에 아침이슬이 지기 전에 백가지 풀을 베어 그늘에서 말린 다음 태워서 재로 만든 것이다. 이 재는 암내를 없애고 쇠붙이에 상한 것을 치료하는 작용이 있다. 백초상(百草霜)은 풀이나 나무를 땐 아궁이나 굴뚝 안에 생긴 검댕이를 모은 것이다. 체한 것을 풀며 갑자기 생긴 설사와 이질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다.
당묵(唐墨)은 가마밑 검댕이로서 쇠붙이에 상한데 바르면 새살이 살아나고 피가 멎는다. 그러나 얼굴에 바르는 것은 삼가해야 하는데 검댕이가 살에 들어가면 글자를 새긴 것처럼 되기 때문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양상진(梁上塵)은 어린 아이의 연한 부스럼을 치료하며, 사람이 사는 집과 멀리 떨어진 높은 곳의 들보 위의 먼지를 거두어 체에 쳐서 쓴다. 동의보감 번역물을 읽으면 예전에 사용하던 말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정감이 있다.
이처럼 흙에 대한 효능과 치료법을 찾기 위해 허 준의 노심초사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손으로 흙을 쓸어보고 상처에 발라보기도 하고 베고 잠들거나 혀에 찍어 맛도 보았을 한의약 연구에 미친 한 사나이의 모습을 연상해 본다.
고대부터 농업국가를 이룬 우리와 흙의 관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흙에서 이처럼 다양한 효능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에서 흙의 가치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