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견디는 일입니다. 인생의 쓴맛도 견디고, 때로 참혹함도 견디고...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고통 앞에서도 희망하고, 슬픔 앞에서도 희망하고,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 앞에서도 희망하고...
살아 있는 하느님 나라
-최대환신부-
오늘 두 개의 비유는 짤막하고 구체적입니다.
그러면서도 탁월한 시어만이 줄 수 있는 생생함으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난 광경 그리고 빵이 누룩을 통해 풍성하게 된 모습을
떠올려 보며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담고 있는 생명력이 무엇인지
직감하게 됩니다.
일정한 법칙에 따른 규칙적인 성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돌보심과
부족하지만 정성을 다해 그 사랑에 인격적인 응답을 하는 마음들이
만들어 낸 사랑의 결실입니다. 근대 이후의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하느님을 일종의 탁월한 시계공으로서, 최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은 아버지시고 농부이십니다.
그분을 닮아가려는 신앙인들은 자라나고 확장된다는 것이 양이나 숫자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 주는 풍요로운 기쁨이라는 사실을
배워 나갑니다. 겨자씨가 자라 새들의 쉼터가 될 때를 흐뭇하게 떠올리며
땡볕에 거름을 뿌리고, 많은 이들을 배부르게 할 때 느낄 보람을 생각하며
뜨거운 화덕 앞에서 빵을 굽는 땀 흘리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다
-한기철 신부-
제가 다니던 본당은 신축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올 때까지 아직 외벽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무실도 임시로 합판을 가지고 만든 허름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마철에는 비가 들어와 온통 물바다가 되고 한겨울에는 꽁꽁 얼어붙곤 했습니다. 워낙 가난한 동네라 공사기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공사기간이 길다 보니 실질적으로 성당 일을 맡고 계시던 분들은 차츰 지치셨고 가끔 의견이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여느 날처럼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성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 전날 쏟아진 비로 대홍수가 나 임시 사무실 안까지 물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당혹스럽고 화도 나고 슬펐습니다. 저녁 미사를 위해 물을 바깥으로 퍼내고 있는데 저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신자 분들이 한 분 두 분 오셨고, 오시는 분마다 걸레와 먼지받이·물통·빗자루 등 필요한 것을 하나씩 들고 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연로하셔서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묵묵히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 순간이 좋다. 이대로도 좋다.’ 너무 훈훈해 잠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분명 하늘나라는 우리를 위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없다면 그곳은 존재할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겨자씨처럼 작지만 자라나 모든 것을 품는 사람들, 누룩처럼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지만 그로써 다른 이들의 존재를 풍성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시작도 과정도 그 결과도 모두
-김찬선신부-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저희 수도회 이름을
“프란치스코회”에서 “작은 형제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때 참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제회”라고 하면 사람들이 “작은 예수회”나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혼동을 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고,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성소자의 수도 줄어들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이름을 바꾼 것은
프란치스코가 수도회를 창설하며
원래 “작은 형제회”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작음을 추구하는 수도회의 회원이고,
제가 관구 봉사자 때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저는 자주 작은 형제로서 작음을 사는 데 실패를 하곤 합니다.
즉, 제가 하는 후원 단체들이 커지기를 바라고
제가 하는 미사에 많은 분들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하는 단체가 커지지 말아야 할까요?
커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늘나라는 커질 것이고
작게 시작하지만 커져야 하겠지요.
문제는 하느님 나라가 커지는 것과 내가 커지는 것의 차이겠습니다.
제가 하는 후원 단체가 저의 사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업이라면 당연히 커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혼동합니다.
내가 잘해서 이 사업이 커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느님 사업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것을 자기 자랑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자기를 위안 삼는 경우로서
“지금은 비록 작지만 나중에는 커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작은 자의 태도라면 좋은데
이 역시 성공주의나 성공에 대한 욕심의 불순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진다는 것,
성공이라는 것을 애초에 생각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하는 것이니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있을 뿐 결과에 내가 집착치 않습니다.
시작도 과정도 그 결과도 모조리 하느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구청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의 시간에 맞춰 방에서 나와 제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짐을 싣고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켜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운전하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강의 시간에 분명히 늦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당황스러웠지요. 몇 차례 더 시도를 한 뒤, 시간이 없어 결국 비싼 택시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뒤, 보험사에 연락해서 긴급출동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차의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었다고 하더군요. 배터리가 오래 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차를 운전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차를 운전하지 않더라도 가끔 시동이라도 켜줘야 하는데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런 점검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이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방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들이 아빠에게 만 원만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아빠는 “안 돼. 돈 없어.”라고 단오하게 말했지요. 그러자 아들이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요.
“아빠, 만 원만 주면 오늘 아침에 우유 배달원 아저씨가 엄마 보고 뭐라고 했는지 이야기해 줄게요.”
이 말에 아빠는 다급해졌고, 얼른 아들에게 만 원을 건넸습니다.
“여기 있다. 얼른 말해봐.”
아들은 냉큼 돈을 챙겨 도망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아주머니, 오늘은 우유 값 좀 주세요.”
아빠가 아들에게 다급하게 돈을 줬던 이유는 엄마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지요. 자신의 불신으로 인해 아들에게 속아 넘어갔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도 이러한 불신을 간직하면 간직할수록 자신의 믿음이 조금씩 방전되며 결국은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바로 굳은 믿음,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고, 그 나무는 자기 그늘로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자기 열매로 배부르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처음에는 작았으나 점점 커진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 믿음의 크기에 따라서 그 나라가 더욱 더 커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더욱 더 커져야 그 안에서 누리는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믿음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또한 그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고 오히려 방전시키려는 의심과 불신, 그리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을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소신을 보지 말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라.(리히텐베르히)
누룩처럼
- 신한열 수사-
프랑스 떼제에서는 연중 계속해 수많은 젊은이를 맞이하고 있다. 이곳 언덕에서 열리는 청년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1주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하루 세 차례 우리 공동체 기도에 참석한다. 소박한 식사에 청소나 배식, 설거지 등을 도우면서 유럽 기준으로는 그리 편안하다 할 수 없는 숙박 시설에서 지낸다. 그중에는 성경과 교회에 친숙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또는 거의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젊은이들 대상으로 성경 묵상을 인도하면서 나는 이렇게 자문한다. ‘이 말씀이 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 말씀이 어떻게 이들에게 힘과 용기, 위로를 주고 삶의 길잡이가 될수 있을까 ?’
놀랍게도 나는 주간마다 그들의 눈빛에서 하느님 말씀의 작은 씨앗이 심긴 것을 본다. 이 말씀이 젊은이들 안에서 자라 어떤 열매를 맺는지 내가 굳이 그 결과를 볼 필요는 없다. 바오로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아니시던가 ?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길과 말을 건넬 때, 우리부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살아갈 때, 겨자씨같이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바탕을 두고 하루하루 살아갈 때 또 이 세상에서 거짓과 불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직의 작은 촛불을 밝혀 나갈 때 하느님 나라, 곧 그분의 다스림이 다가오지 않을까 ? 사실 그분의 다스림은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이 세상에 다가왔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우리의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세상 안에 섞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겨자씨도 정원에 심었기 때문에 자라났고 누룩도 밀가루 반죽에 넣었기 때문에 부풀어 올랐다. 정원에는 벌레도 있고 돌멩이도 있다. 누룩이 제 역할을 다하면 반죽 속에 섞여 보이지 않는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누룩 같은 것이지 않을까 ?
어떤 사람
-김찬선신부-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씨앗처럼 작지만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에 의해 몇 배로 부풀어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줄기와 가지, 이파리와 꽃.
그것들이 다 각기 다릅니다.
느티나무는 꽃은 없지만 줄기와 가지가 품위 있고 어머니 같습니다.
소나무 역시 꽃은 없지만 그 곧은 기상이 남자와 같습니다.
꽃나무들은 어찌 그렇게 모양이 각기 다르고
꽃의 색깔들은 얼마나 기묘하고 심오합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씨앗 안에 가능성으로 있습니다.
씨앗의 현실은 작습니다.
씨앗의 현실은 볼 품 없습니다.
그러나 가능성은 대단합니다.
그 가능성을 하느님께서 씨앗 안에 심어놓으셨고
그 가능성을 하느님께서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씨앗이 이러할 진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훨씬 더 가능성이 대단합니다.
아니 무한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고 열매 맺고 꽃이 피기 위해선
이 씨앗을 땅에 뿌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다.”
어떤 사람이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고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다 했는데
그러면 어떤 사람이 씨앗을 밖에 버리지 않고
자기 정원에 정성껏 심고
어떤 여자가 누룩이 퀴퀴하다 하여 수처구멍에 버리지 않고
서 말이나 되는 밀가루 속에 집어넣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씨앗의 가능성을 믿고
누룩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처럼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그 누룩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비록 매우 작아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업이면
매우 큰 사업이 되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매우 작은 공동체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지향하면
매우 큰 공동체가 되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 운동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여도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불길처럼 타오르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다.”
우리 모두 오늘 복음에서 얘기하는 어떤 사람, 어떤 여자가 됩시다.
휴식 같은 친구
-전삼용신부-
1997년 탈옥하여 2년 동안 9억 8000여만 원을 훔쳤고 헬기와 군대까지 동원하여 그를 잡으려했지만 눈앞에서 13번이나 유유히 사라졌던 탈옥수이자 무기징역수 신창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생기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줬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새끼야. 돈도 안 가져왔으면서 뭐 하러 학교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사람은 본래 빈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에게서 무엇을 받지 못하면 어떤 누구에게도 무엇 하나 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창원과 같은 사람은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미움밖에 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녀가 결혼하려고 한다면 상대방 집의 무엇부터 물어봅니까? 양친이 모두 살아 계시냐고 묻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자신의 자녀도 잘 사랑해 줄 것임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범죄자들의 많은 경우가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신창원도 엄마가 자신이 8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못 받은 데다 학교에서도 칭찬 한 번 못 받아보고 자랐으니 그에게서 사랑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엔 아주 작아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나중엔 새들까지 와서 쉴 수 있을 만큼 커진다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즉, 하늘나라의 행복이 내 마음 안에 아주 작은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그것이 자라나면 다른 사람들이 내 행복한 마음의 영향을 받아 나에게로 와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힘들어하고 짜증 잘 내는 사람보다는 행복하고 기쁜 사람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누구나가 좀 쉬고 위로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에 섞으면 나중에 온통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이 비유 역시 하느님나라나 행복이나 사랑은 부풀어 올라 자꾸 커지는 성질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과 행복으로 충분하시지만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나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요즘엔 신창원씨도 이해인 수녀님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이해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를 한 번 읽어봅시다.
“이모님께
새장 같은 공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나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절망하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삐 날아온 사랑이 있었습니다. 꼬물꼬물 길게 늘어진 날필을 해독할 수 없어 암호를 풀 듯 30분을 매달려야만 했지요. 35년이 흘러 지금은 희미해져 버린 어머니의 향기 그리고 요람 같은 포근한 가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홍역을 앓듯 마음의 몸살을 앓을 때면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한 걸음에 달려오셨지요.
“사랑해요, 창원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죠? 우리 모두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이모님은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의 공간을 방문하여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을 중앙에서 두 팔 벌린 당산나무 같은 이모님.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 삶에 지친 영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수호수.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내리사랑만 베푸시다 지금은 알을 품은 펭귄의 헤진 가슴으로 홀로 추운 겨울을 맞고 계시는군요.
처음 이모님의 병상소식을 접했을 땐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지 않아요. 걱정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해빙이 되고 들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밝게 웃으시며 풍성한 품으로 절 부르실 걸 알기에 조용히 조용히 봄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2008년 9월 푸른 솔밭에서.”
신창원씨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나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해인 수녀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 주고 그래서 미움만 지니고 살았던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이해인 수녀님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나라입니다. 사랑도 행복도 내 안에 작은 씨앗으로 시작하여 이웃까지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의 씨앗을 먼저 키우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가진 것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 힘으로,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어주는 건 어떨까요?
<아까운 만원짜리 봉헌금>
-양승국신부-
틈만 나면 제가 저희 아이들에게 "너희들 제발 이 형처럼만 살아라"고 강력 추천하는 저희 집 출신 기숙생이 한 명 있습니다. 12살 되던 1990년에 와서 2000년까지 저희 집에서 살았으니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저희와 함께 착실히 보낸 모범생입니다.
단 한가지 머리가 잘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그렇게 착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집에 있으면서 꾸준히 노력한 끝에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목공기술을 열심히 배워서 지방기능경기대회까지 나가서 입상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취직을 했습니다. "너무 착해빠져서 남에게 이용만 당하면 어쩌나?"하고 걱정들이 대단했었는데, 직장에도 잘 적응했습니다.
안 그래도 많이 보고싶었던 아이가 수도원 미사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쓸데없이 돈 쓰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도 아이는 동생들과 선생님들을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한 보따리나 사들고 왔습니다.
봉헌행렬 때의 일이었습니다. PC방에 가느라 봉헌금을 다 까먹어버려 봉헌하러 나가지 않는 주변의 동생들을 본 아이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천원짜리는 하나도 없고 만원짜리만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짠돌이로 소문난 아이는 눈물을 머금고 몇 명의 동생들에게 봉헌하라고 만원짜리 하나씩을 건넸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꿈에서나 볼 듯 말 듯한 만원짜리를 하나씩 손에든 동생들은 남들 보는 눈도 있었기에 아쉬움을 접고 그 돈을 봉헌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그때 당시의 흐뭇했던 정경이 떠올랐습니다. 10년 전 처음 저희 집에 도착했을 때의 그 꼬맹이 중에 꼬맹이가 그렇게 어엿한 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기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당시 제일 키도 작았고 나이도 어렸기에 매일 형들에게 치여 고생하던 그 안쓰러워 보이던 아이가 그렇게도 건장한 젊은이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뿌린 겨자씨-육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날이 성장해 가는 아이들, 나날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노력은 사실 지극히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작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노력에 하느님 은총의 손길이 더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 안에 긷든 그 무한한 가능성들이 꿈틀거리며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실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누군가가 시작한 단 한번의 작은 선행이 밑거름이 되어 수많은 영혼들이 아픈 상처를 달랠 수 있는 안식처가 되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 위로의 말이 생명을 불어넣는 보약이 되어 죽음의 길을 걸어가던 한 생명을 살려내고,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큰 일꾼이 되게 합니다. 한마디 격려의 말에 자극을 받은 아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듯이 꿈을 이루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순간 쉽게 할 수 있는 한마디 격려의 말, 한번의 따뜻한 위로, 한번의 미소, 한번의 친절들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씨앗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여행 중에 부모가 아이들의 요구를 전부 들어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여행의 목적지까지 가기가 상당히 힘들 것 같습니다. 휴게소에 들릴 때마다 “이거 사줘, 저거 사줘.”라고 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면 어떨까요?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될 것입니다. 또한 먹는 것을 아이들이 좋아해서, 계속해서 응석을 부린다면 어떨까요?
“아빠, 저기서 우회전하면 피자 가게가 나오는데 거기 들렀다 가요.”
“저 길로 가면 정말로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요. 거기도 들러야 해요.”
이렇게 계속되는 응석에 부모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너무 심하다고 싶으면 이렇게 말하지요.
“안 돼!”
여행의 최종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 ‘안 돼’라는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지금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서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여행길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생길에서 어떻게 하고 있나요?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만을 주님께 내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안 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들이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당장 내 계획과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낙담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신다고 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옳은 것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해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가슴 아프지만 ‘안 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겨자씨는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던 식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는 급속하게 퍼져서 다른 채소에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밭에다가 아예 심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를 밭에다가 심었다고 합니다. 또한 다음에 나오는 누룩 역시 그렇게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지요. 이 누룩은 부패의 상징으로 일상생활에서 불결한 것으로 표상되곤 했거든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이야기되는 것을 통해서 가장 거룩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더없이 크신 일들이 거창한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들을 위해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일상의 삶 한 가운데에서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한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안 돼’라는 주님의 메시지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삶의 누룩
-이수철 신부-
누룩이 상징하는 바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온갖 누룩으로 가득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의 따뜻한 친절,
부드러운 미소가 내 마음을 기쁨으로 부풀게 하는 마음의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사소해보이는 꽃 한 송이 역시 영적 깨달음이 되어 내 마음을 행복으로
부풀게 하는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흐린 여름 날 정원에 핀 크고 환한 해바라기를 보며 쓴 글입니다.
“해님 닮아/ 크고 환한 둥근 얼굴/ 해바라기/ 주변이 환하다.
주님 닮아/ 크고 환한 둥근 마음/ 주변이 환하다.”
바로 해바라기 한 송이가 나에게 영적 깨달음으로 마음을 행복으로 부풀게 했던
행복의 누룩이었던 것이지요. 또 이렇게 주변을 환히 밝히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 곧
공동체에 누룩 같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삶의 누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누룩은 주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 주변을 사랑으로 부풀게 하고
기쁨이 가득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누룩 같은 사람, 바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겨자씨의 행복
-노미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권정생 선생님이 쓴 동화 「강아지똥」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이 생겨났다고 슬퍼하던 강아지똥은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를 만나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알고 기뻐한다. 어느 비 오는 날, 마침내 민들레의 뿌리 속에 스며들어간 강아지똥은 너무나 행복하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도 가장 작다고 한다. 그 작은 씨앗 하나가 제 몸을 썩히고 싹을 틔워 그 몸으로는 작아서 생각도 못할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새들의 보금자리를 이룬다. 그래서 겨자씨는 행복하다. 누룩도 그렇다. 제 몸을 썩여 냄새나는 곰팡이를 피워 마침내 맛난 빵을 만들고 술을 담그고 된장을 담글 수 있다.
겨자씨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누굴까? 내가 만난 공부방 선생님들이 그랬다. 인천의 만석동, 송림동 산동네 판자촌에서 살면서 온몸으로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던 이들. 나는 전교조 해직교사로 그들과 함께 지내는 특권(?)을 누린 적이 있다. 판잣집 좁은 방에 순대 한 접시, 동태찌개 한 냄비만 놓고도 얼마나 웃음과 기쁨이 넘쳐났던가. 정부의 도시개발로 그 동네가 없어질 때까지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을 하며 근근이 살면서도 아이들과 함박웃음을 나누던 그들이야말로 겨자씨와 누룩 같은 사람들이었다.
대학 시절 잠시 동안 예수의 작은 자매회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청치마에 머릿수건, 샌들 하나가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하루 종일 파출부로, 공장 보조로 일하고 돌아온 수녀님들은 수제비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행복해했다. 밤이 되면 손을 잡고 둥글게 서서 찬송을 드린 후 잠자리에 들었다. 천사가 따로 있나! 가진 게 없어도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행복한 이들, 여기가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어찌 보면 그분의 행위는 참 소박하다.
-고병수 신부-
제주도에 ‘우도’란 아주 작은 섬이 있다. 제주도의 성산 일출봉항에서 뱃길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섬이다. 요즘 이 섬에 천주교 신자가 급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남자 같은 여장부 선교사 때문이란다. 그분은 어느 곳에 가든 그 지역 공소를 활성화시키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어떤 데서는 그 지역에서 유명한 무당을 입교시켜 신자로 만들어 무속신앙이 유독 강했던 그 지역에 전교의 씨앗을 활짝 피우기도 했다.
이런 그가 우도에서 그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실력이란 말씀의 은사나 놀라운 치유 은사가 아닌, 집이나 밭에 가서 청소해 주고 김매주면서 땀 흘리며 일해주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그저 성당을 한번 찾아주는 것이란다. 하지만 이게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인위적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다. 한 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식당 앞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고 있는 것이었다. 주인이 고맙고 황송해하자 그분은 그게 별거냐는 듯 고마우면 성당에 한번 들르라고 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어김없이 성당을 찾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분의 행위는 참 소박하다. 하지만 작디작은 겨자씨가 싹이 트고 자라나 큰 나무가 되듯이 이처럼 작고 소박한 그의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나아가 그 사람에게 신앙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을 넘어 그 지역에까지 천주교에 대한 인상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는 크고 거대한 일에서 비롯되기보다는 보잘것없고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어린아이의 가능성을 듣는 것
-최영균 신부-
겨자씨를 실제로 보면 정말 작습니다. 손톱 끝만큼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래서 겨자씨가 그렇게 큰 나무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디 겨자씨뿐이겠습니까. 우리 삶에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하고
또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죽어갑니다. 어린아이를 보면서 우리는 그 아이를
지금의 그 아이로서만 바라봅니다. 꽃으로라도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는 말은
오늘 복음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어린아이가 바로 인류를 구원한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마굿간의 구유에 놓여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아이로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가난하고 볼품없는 목동들만이 그 어린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경배합니다. 목동들은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밤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 귀는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이 귀는 밤중에도 역시 활동 중이고 듣고 있습니다.
요하킴 에른스트 베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듣는 것은 전형적인 남성적 특징을 갖는
‘보기’ 와 다르게 여성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들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귀가
제공하는 것들을 받아들입니다. 듣는 사람은 분명히 더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 안에서 태어나게 될 하느님의 아이를 더 잘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겨자씨가 공중의 새들이 깃들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현우 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겨자씨 한 알에서 싹이 돋고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모습을 말씀하시며, 그 한 알의 겨자씨가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누룩이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모습을 말씀하시며, 그 누룩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겨자씨라든지, 누룩이라든지 하는 것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실 생활에서는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예수께서 살아가던 시대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씨앗에서는 싹이 돋고 자라나 나무가 되는 것이고, 누룩으로 부풀어진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이러한 일상적인 사건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해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르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던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십니다. 현실 생활에서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수 있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발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일상적인 것들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특별하고 거창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히 접할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나라이며, 우리 일상 속에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지금 당장 우리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다 자란 나무가 아닌 그 씨앗과 같고, 다 부풀어 오른 반죽이 아닌 그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밀가루에 섞여있는 누룩처럼, 하느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나라이며,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고 부풀어 오르는 나라입니다.
씨앗에서 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또 누룩을 넣은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자라나고 부풀어 오를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을 닮아 지니고 있는 그 사랑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낼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씨앗이 썩어야 싹을 낼 수 있고, 누룩이 섞여야 반죽을 부풀릴 수 있는 것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뜨리고, 나 자신을 썩도록 내어 줄 때, 나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스며들어감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커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내어 놓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우리 앞에 펼쳐주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리 대단한 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를 죽이고 썩어나게 하는 일이 그리 거창하고,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비록 조그마한 것에서 시작하였지만, 결국에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커지는 것처럼, 우리의 작은 사랑의 실천도 그토록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크도록 이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씨앗과 누룩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씨앗은 땅 속에 심어져야 하고, 누룩은 밀가루 속에 섞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자녀는 자녀로서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는 자리에 있고,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사랑을 주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세상을 보다 더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세상에 사랑이 가득함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로서,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아멘.
- 이압돈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펼쳐지는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나라, 우리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할 때 기준으로 삼는 나라입니다.
그 곳처럼 이 땅에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나라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천당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 곳은 어떤 곳 일까하고 상상해 봅니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평화로운 하늘 풍경에 봄날의 들판을 연상케하는 그림으로 그려봅니다.
영성가들은 빛이 가득한 곳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만담가들은 행복이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 나라를 세상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느님 나라를 그 어떤 때 보다 행복하고, 즐겁고, 평화로운 나라로 상상합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은 상태를 그려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다." 혹은 "따스한 봄날과 같은 곳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으며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하시며 건넨 말씀이
겨자씨 한 알을 뿌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거나, 밀가루 서 말 속의 누룩에 비길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라나는지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 나라는 고정되어 있거나,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이곳을 떠나 그 곳으로 가야하는 딴 세상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가 있는데 그곳이 천국이란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가야 한단다”하는 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 한 알이 자라는 것처럼 시작은 보잘것없고 약해 보이지만,
자라고 나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또한 작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에 섞여서 그 밀가루 온 덩이를 풍성하게 부풀려
부드럽고 맛있는 빵이 되게 하듯이 그런 작용을 하는 나라입니다.
겨자씨가 뿌려졌을 때 공중의 새들이 쪼아 먹어버리면 겨자씨는 없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 자라면 그 공중의 새들이 쉬는 안식처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보잘것없어 하느님 뜻이 시작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쪼아 먹어버리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잘 자라면 그들조차도 그 안에 깃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작은 양의 누룩처럼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시작되면
온 세상이 풍성하게 되어 맛깔스런 세상이 된다는 겁니다.
하느님 뜻이 내 생활에 끼어들어 섞이는 것이 부담스럽고 혼란스럽다고 느낄지 모르나
그로인해 더 풍성하고 맛깔스런 삶이 되게 만드는 것이 하느님 뜻이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공중의 새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한 때의 식사로 겨자씨 한 알을 삼켜버린다면 안식처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내 생활에 하느님의 뜻이 끼어드는 것이 싫다면 작고 딱딱한 삶에 머물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뜻이 작용하면 풍성하고 부드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므로
변화되고 자라나는 역동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신 하느님 나라는 잘 갖추어진 선진국-천당이 있는데
그곳으로 이민가자고 꼬득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이 비유로 알려주신 까닭은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자라나고 변화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좇아 하느님의 뜻을 듣기만 하고 키워가지 않거나,
내 생활에 하느님이 끼어드는 것을 꺼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키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작고 수수한 외모, 크고 화려한 겉모습을 찾는 눈, 작은 것 안에 담긴 진리
-이성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 작아 쓸모없어 보입니다. 그 겨자씨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아주 소중하고 귀한 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처음부터 화려하거나 크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작고 수수하게 시작합니다. 화려하고 크게 시작한다면, 그 속에 담겨 있는 진리보다 겉포장에 매혹되어 그 속의 진리를 놓치기 십상입니다. 겉모습에 동요되지 않고 그 속의 진리를 보는 사람의 눈은 복됩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듯,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쉬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박하게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권력도 명예도 돈도 없었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소박한 목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전 세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진정으로 알아보는 눈은 복됩니다.
진리는 겨자씨처럼 작고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진리의 겉은 소박하나 속은 알차고 보석처럼 찬란합니다. 겨자씨 속의 하느님 나라도 시작은 소박하나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온 세계의 쉼터가 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은 소박하고 수수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말씀은 보석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영롱하고 찬란한 보석입니다. 아버지, 저희에게 당신의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생명이 있으면
-최명숙 목사-
관상용 청거북 새끼를 기른 일이 있습니다. 어항에 넓적한 돌들을 넣고 물을 채우고 나서 청거북 네 마리를 넣었습니다. 그후 청거북들은 내가 다가가면 내 쪽으로 모여들어 밥 달라는 듯이 유리벽에 나란히 앞발을 올리고 서 있습니다. 어느날 내 방에 찾아온 손님에게 거북 자랑을 하자 손님이 어항 안을 들여다보더니 한 마리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분명히 네 마리가 있다고 했고, 손님은 아무리 찾아도 한 마리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서 확인을 해봤지만 거북이는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잠시 어항 안을 들여다보는 사이 돌 밑에서 기어나온 거북 네 마리가 나란히 앞발을 들고 나를 향해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인을 알아보고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거북이를 보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언뜻 보면 눈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의 그 눈으로 어떻게 주인과 주인 아닌 사람을 식별할 수 있었을까요?
미물에 지나지 않는 새끼거북이지만 생명이 있기에 그 작은 눈으로도 분별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이겠지요? 티끌보다도 작은 겨자씨지만 생명이 있으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부피를 초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그렇게 생명력 있는 천국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작지만 하늘씨앗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 같고, 한없이 미약한 것 같아도 생명력 있는 천국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천국으로 이루어 가는 큰 역사가 일어날 것임을 믿습니다. ●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양승국신부-
<기적 같은 평화로움의 비결>
한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본업은 봉사입니다. 특기도 봉사입니다. 취미 역시 봉사입니다. 여기저기 어려운 시설만 골라 다니십니다. 여러 일들 가운데 꼭 필요한 일, 굳은 일, 때깔나지 않는 일만 도맡아서 하십니다.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힘들어하는 사람 보면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자주 다녀가시지만 언제나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다녀가십니다. 차라도 한 잔 대접하려고 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너무나 착해빠져서인지, 아니면 너무 열심히 봉사하셔서 그런지 병이 나셨답니다. 내일 아침 수술에 들어간답니다. 부디 수술이 잘 되고, 경과가 좋아서 그 좋아하시는 봉사 계속할 수 있게 되길 기도드립니다.
제가 생각할 때 꽤 심각한 병인데도, 조금도 심각한 기색이 없습니다. 저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그랬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남 이야기하듯이 태연하기만 합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 ‘기적 같은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분 내면에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의 나라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그분의 위로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주실 상급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하는 의문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문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풍성함, 하느님 사랑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따뜻한 봄볕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소리 없이 녹이듯이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 실수와 과오들이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참혹하리만치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고통이나 좌절, 분노, 끝도 없는 방황... 이 모든 괴로움들이 크신 그분의 위로 앞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부드러운 그분의 손길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이승에서부터 최대한 만끽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또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려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와 닿는 현실이 아무리 팍팍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김성규 신부 -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현시대를 가리켜 ‘자기 PR(Public Relations) 시대’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튀어야 산다’는 말도 나왔으며,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고 희귀한 것만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등’만을 치켜세우고,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매스컴도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다. 공부나 대학도 일류, 기술도 일류, 운동도 일류, 심지어 도둑질이나 사기도 일류가 되어야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날 수 있는 세상이다.
이 판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소개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의당, 하느님의 나라는 광대무변하니 아무래도 그렇지. 겨자씨와 같다니. 아뿔싸. 겨자씨가 땅에 뿌려진다(마태 13, 31-32에서는). 겨자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씨앗이 스스로 뿌려질 곳을 택하여 뿌려지는 법이 없다. 바람에 날리든, 사람이 땅을 갈고 뿌리든, 씨앗이 뿌려지는 데는 씨앗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다. 자기는 좋은 씨니 좋은 땅에 뿌려 달라거나, 자기는 귀한 씨니 싹이 잘 트게 해 달라거나, 소출을 많이 낼 수 있도록 충분한 거름을 달라는 등의 ‘청원기도’를 올리는 법이 없다. 씨앗이 길바닥이든 돌밭이든 가시밭이든 기름진 땅이든 뿌려진 자리에서 뿌려진 대로 자랄 뿐이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놓고 언제 싹이 돋나 어떻게 자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과정을 맨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파란 싹이 돋아나 밭을 가득 채운다. 새싹은 농군도 모르는 사이에 자란다(참조. 마르 4, 26-29). 하느님의 나라도 그렇게 우리 마음 안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마음 안에서 소리없이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자라고 있다.
아,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시다. 아, 이제 누군들 하느님의 나라를 모를까 보냐?
-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무슨 성과를 거두어야 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주님의 사명에 참여해야 하며, 주님의 자유를 나누어 지녀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자기 몸에 안고 태어나며 그 씨앗은 점점 자란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상에서의 생명을 끝낸 다음 이미 들어가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모든 인생에 뿌려져 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모든 이들 안에 뿌려져 그 안에서 자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 이 세상 안에 뿌려져 자라고 있다.
천국을 이야기한다면서 지옥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운 사람, 악한 사람을 만들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을 멀리하고 있다.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미운 사람을 만들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불의한 자를 만들고, 선을 강조하면서 악을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마음으로 선과 악, 밤과 낮, 밝음과 어둠을 대하게 한다. 세상을 창조 그대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을 갖게 한다. 선과 악, 밀과 가라지를 가리는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도(마태 13, 30) 살게 한다. 선과 악을 가리실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누룩은 밀가루를 만나야 제 가치를 발휘한다. 그러나 누룩은 누룩일 뿐이며, 밀가루는 밀가루 일 뿐이다. 누룩을 가져다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 사실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리며 혼자서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 그분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면서.
<자기 정원에 심었다>(루가 13,18-21)
-유광수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지난 주일 젠 베르데와의 만남에서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사람들은 젠 베르데의 삶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한 자매가 "나는 당신들이 공항에 내릴 때부터 줄곧 당신들 가까이에서 보았는데 한결같이 모두들 밝고 웃는 모습이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젠 베르데 단원들 중에 한 자매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우리 각자가 체험한 하느님을 늘 기억하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음에 간직하고 관리하고 있다. 이런 우리들의 노력이 우리가 체험했던 하느님에 대한 체험들이 식지 않고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생활들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늘 기쁘고 웃으면서 생활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성모님도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1)라고 하였듯이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혜 또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들을 잊지 않고 늘 마음 속에 간직하며 생활한다면 늘 기쁘고 감사드리며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도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서 건설되거나 체험되는 것이 아니다. 겨자씨란 가장 작은 것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큰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을 수 있는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것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껏 가꾸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 겨자씨나 누룩그 자체로는 아무런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가장 작고 나약하고 무기력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와서 깃들일만큼 되려면 씨앗 자체가 썩어야하는 고통과 누룩이 밀가루 속에 파묻히는 수모를 겪어야 비로서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작은 겨자씨는 말씀이요,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는 것은 말씀을 "자기 마음 속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말씀을 받아들였으면 그 말씀이 잘 자라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잘 가꾸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잘 가꾸지 않으면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크게 자랄 수 있는 씨앗이라도 잘 가꾸지 않으면 자랄 수 없다. 내 마음 속에(자기 정원에) 심어 놓은 말씀의 씨앗은 무엇인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 어떻게 가꾸고 있는가? 잘 자라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말씀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가에 달려 있다. 말씀의 씨앗을 심어 놓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말씀의 씨가 내 안에서 자라게 하려면 정성껏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그런 노력을 하는 이유는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람으로써 말씀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자라면서 거기에 맞게 나도 자라기 위함이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내 삶이 말씀으로 변화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내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냥 나의 나라로 머무는 것이지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가 되겠느냐? 누룩을 밀가루 속에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듯이 그렇게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모습을 온통 말씀으로 부풀어 오르게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점차적으로 내 존재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즉 겨자씨와 같은 작은 말씀의 씨앗이 내 마음 안에서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만큼 크게 자라야 한다.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 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83,5)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 온갖 보람있는 것, 일체의 가치 있는 것은 모두 노력의 산물이요, 피땀의 결과이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우리는 많은 노력의 땀을 흘려야 한다. 꽃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어야 한다. 이러한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아니 할 때, 우리의 꽃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벌레가 끓어서 꽃은 피지도 못하고 버린다.
사람은 저마다 심는대로 거둔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날 까닭이 없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둔다. 콩을 심었는데 팥을 거두는 일이 없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팥을 심고 콩을 거두려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심지 않고 남의 심은 것을 탐내고 빼으려는 심술궂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기가 심는대로 거둔다는 인생의 대진리를 믿고 우리는 이 진리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 요즘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과 인생관과 가치관은 병들고 허망하다.
저마다 인생을 쉽게 살려고 한다. 노력없이 성공하려고 한다. 또 노력의 땀을 흘리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허망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벼락 성공, 벼락 출세, 벼락 부자, 벼락 감투를 꿈꾼다. 그것은 모두 벼락맞을 생각이다.
인생은 결코 쉽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살아지는 인생은 행복할 수도 없고 또 행복하다고 해도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공(功)든 탑이라야 무너지지 않는다. 나의 땀으로 쌓은 성공이 확실하고 나의 땀으로 건실한 행복이 오래 가고 나의 땀으로 이룩한 인생이 참되고 알차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선민이 될 수 있다."고 토마스 제퍼슨은 말했다. 일을 많이 해서 "손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이 식탁의 제일 상좌에 앉아서 따뜻한 밥을 먼저 먹을 수 있다."고 톨스토이는 외쳤다.
아름다운 집은 가만히 앉아서 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고 내부 치장을 아름답게 꾸밀 때 비로소 아름다운 집이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동안 숫한 말씀의 씨앗을 뿌리셨다. 그 말씀을 내 정원 안에 심어 놓고 잘 가꿀 때 하느님의 나라가 만들어 가는 것이지 아무 씨앗도 심지 않고 달라고 해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쉽고 안이하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는 것 같다.
지금 내 마음의 정원 안에 무슨 씨앗을 심었고 그것을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느님의 나라는 말씀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을 잘 가꾸 이의 몫이다.
내가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와 누룩이 되어야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병마에 사로잡혀 굽은 허리 때문에 몸을 펴지 못한 채 18년을 살아온 한 여인을, 그것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고쳐주셨다. 이 치유사건은 율법의 멍에를 지고 수백 년을 살아온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 구원의지의 암시적인 표현이다. 이는 곧 예수님의 강생으로 말미암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계시하시려는 하느님 나라는 신비(神秘) 그 자체이다. 신비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고자 비유를 학습도구로 삼으신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의 소재는 겨자씨와 누룩이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 가장 작은 씨이지만, 밭에 뿌려져 성장하면 그 어떤 나물종류의 푸성귀보다 크게 자란다. 최고 3m까지 자란다고 한다. 루가는 여기서 ‘큰 나무’가 된다고 했으나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그러나 하늘의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려면 푸성귀가 나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종국(終局)에 세상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 쇄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 있다. 누룩도 마찬가지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룩이지만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리게 만든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것들 같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능력은 필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낸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작디작은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면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장엄하게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하느님 임재(臨齋)의 표징으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또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아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지만 사도들의 복음선포가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제자단의 배반은 물론 선인과 죄인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스스로 성장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누룩과도 같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뿌려진 씨 가운데는 열매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가 되면 추수의 기쁨도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들 안에는 하느님의 숨은 힘이 현존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새긴 것을 행동으로 증언한다면 그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다. 그는 곧 큰 푸성귀(나무)가 되기 위해 밭에 뿌려진 겨자씨요, 빵이 되기 위해 반죽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룩이다. 그러나 여기에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겨자씨와 누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땅에 뿌려져야 하고,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이 저절로, 또는 자기 힘으로 땅과 반죽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 일만큼은 사람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겨자씨를 땅에 심고 누룩을 반죽 속에 넣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 나라 건설의 협력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고, 교회이며, 바로 우리들이요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박애주의로,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타(僞他)적 봉사정신으로, 교만을 겸손으로, 표면적이고 향락적인 관능을 내면적이고 영원한 순결로, 시기와 질투와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겨자씨로 땅에 묻혀 푸성귀가 되고, 누룩으로 세상의 반죽에 들어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발효시키는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