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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색종연초경작연혁사(黃色種煙草耕作沿革史, 1936년) 』 에서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 碑文》을 옮깁니다. 바로 이어 나오는《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碑文筋書》도 함께 싣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
이 碑도 일제시대에 세웠졌다는 이유로 온갖 수난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용산동 예전 전매청 자리에 있다가 살미면 노루목 부근에 있다가 지금 건국대 충주 캠퍼스 인근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 구내에 있는 것이 확인된다.
「 이 비석이 만들어진 것이 1936년 가을이었으므로, 얼추 잡아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9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때의 일이다. 처음 세워진 장소는 충주신사(忠州神社, 사직산 소재) 경내였다. 해방 이후에는 1973년 10월에 이르러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 구내(충주 용산동 소재)로 옮겨졌다가 다시 지난 2006년 5월 23일에 조합사무실 매각과 관련하여 통칭 ‘노루목 노변공원(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394-4번지 국도변)’으로 일시 이전되었으며, 그 이후 2011년 3월에 ‘황색종 연초경작 백주년 기념비’가 건립 제막될 때에 새로운 비석과 짝을 맞춰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된 내력을 지녔다.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 참고.」
이 碑에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책에 소개된 적도 없었고 껄끄러운 문제니 알려고들 하지 않았다. 아래 인용하는 碑文이 실제 그대로 기념비에 새겨졌는지 의문인데, 엽연초 생산은 충주지역 鄕土史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소개한다.
『 이 기념비는 시초일이 1936년 4월 26일(아래에 설명한다.)로 되어있고 1936년 9월 23일 현충주시 문화동 사직산에 건립하였으나 1973년 10월 10일 충주시 용산동339번지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 구내로 이전 복원하였고 2006년 5월에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고,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 설립일이 1913년 5월 1일이며, 우리나라 황색종 재배 유래는 1912년에 충주에 사직출장소를 개설하고 251명의 경작인에게 황색종 14.7ha(1인당 5.9a) 경작 자재를 무상으로 공급하여 촉탁경작을 시킨 것이 우리나라 황색종 재배에 시초이며 기념비의 전통을 이어받아 황색종 산지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이 비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이 기념비 옆에 세운 <황색종25주년기념비 이전복원기>에 기록하고 있다.』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블로그에서 인용.
「이 기념비는 시초일이 1936년 4월 26일로 되어있고」라고 <황색종연초25주년기념비 이전복원기>에 나온다고 씌여있다. 『 황색종연초경작연혁사(黃色種煙草耕作沿革史, 1936년) 』에 보면 아래 사진이 나온다.
황색종연초경작25주년기념비건설地鎭祭상황
(소화11년 4월 29일 천장の가절당일거행)
지진제(地鎭祭)는 지신제(地神祭)이며 건물기공식이라 한다. 천장절(天長節)은 天皇誕生日을 말하며 당시 천황인 히로히토(裕仁)의 생일인 4월 29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따라서 1936년 4월 29일이 건물기공식이며 시초일 운운은 이 날짜를 말할텐데 1936년 4월 26일은 잘못 적은것 같다.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황색종연초경작25주년기념비>
충주신사경내 景勝之地域에 건설했다고 씌여있다.
碑文을 썼다는 안세이 세이이치로(安井誠一郎)氏 사진.
초대충주출장소장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氏
(황색종연초경작창시공로자) 사진.
경성지방전매국 충주출장소竝同所 직원 사진.
竝同所라 쓴 것은 용산동에 있었다는 충주출장소와 직원 사진이란 뜻이다.
<원문>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碑文》
國策立而庶政畢, 產業興而府庫盈, 民始安堵樂業。 猗我總督施政以來, 二十有五年, 治具畢張, 專賣制度之實施, 亦有十六年于玆, 煙草耕作之功, 最顯著者矣。
蓋朝鮮之有煙草, 始於光海朝時, 自本邦轉來, 稱淡婆姑, 人皆嗜吸, 遂至盛行。 云朝鮮之於黃色煙草之栽培往於明治三十九年 自韓國政府財政顧問部, 廣行調查之際, 朝鮮之風土, 酷恰似於北米主產之地, 其於耕作, 認其適好, 試植于京城府內, 爲其嚆矢者矣。 翌四十年代, 設該部出張所于平安南道 成川郡 三德面之岐倉, 試作實施中, 同四十一年四月三十日夜半, 突然暴徒之來襲, 放火, 竟被不慮之禍, 廳舍烏有所員, 亦被慘死, 遂至於事業之一時中絕矣。 更於同四十二年, 慶尙北道 大邱府 又翌年, 忠清南道 大田, 而各設置司稅局 煙草試作場, 而試作各種煙草與黃色種, 益認其良績, 以黃色種產地之構成, 議歸合一, 以忠州爲中心, 竝其附近一帶, 確定最適之地。 於同四十五年, 開設朝鮮總督府度支部司稅局出張所于忠州, 至於專行黃色種煙草之耕作, 而於大正二年 一月, 本種煙草耕作者, 協設煙草耕作組合, 勵其斯業之改良發達, 與耕作者之福利增進, 企圖基礎產地之育成。 與斯業之發展矣, 然因其耕作者之作法之未鍊, 與各種原因之重疊, 未遂喚起耕作之高潮, 故由此, 政府年々特加指導獎勵之, 致當業者, 亦積硏鑽之功, 漸穫利潤, 遂至於耕作之旺盛發達矣。
粵自大正十年七月, 朝鮮專賣令之實施, 官亦隨其時勢之進展, 伴其適切之施設, 邁進耕作之改善, 而善導扶掖, 以致效績之逐年向上。 其聲譽嘖々於東亞矣。 由此耕地漸至澎湃, 現在產地至於忠州、陰城、槐山、堤川等四郡, 三十有二面, 其耕作面積, 超越二千町步之多, 以致形成槿域無二之一大產地矣。 其於耕作者之福祉增進及地方經濟之發達也, 其效績果何如哉! 嗚呼, 間田轉成珍土, 消煙化爲黃金, 向所謂產業興而府庫盈, 民其安堵樂業, 者實此言也。 蓋本種之耕作, 創意者, 即前朝鮮總督府技師, 正五位勳六等岡田虎輔氏也, 而與其司稅局出張所開設同時, 莅兼所長以來, 迄于大正七年之間, 嗜嘗非常之苦難, 確立完全之基礎, 其偉功顯於斯土地, 方民之所以欽仰, 而深銘其德者, 此也。 其後當任及關係者等, 相繼盡瘁, 益加奮勵, 以致今日之隆盛, 實不勝感激不已者矣。
於焉本種煙草之耕作開始, 今當二十有五周年, 而玆卜今日, 建立此碑, 銘記斯業發展之由來, 以作永世之記念云爾。
昭和十一年九月二十三日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會
前朝鮮總督府專賣局長 正五位 勳三等
安井誠一郎 撰
<표점>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 碑文》
國策立而庶政畢, 產業興而府庫盈, 民始安堵樂業。 猗我總督施政以來, 二十有五年, 治具畢張, 專賣制度之實施, 亦有十六年于玆, 煙草耕作之功, 最顯著者矣。
蓋朝鮮之有煙草, 始於光海朝時, 自本邦轉來, 稱淡婆姑, 人皆嗜吸, 遂至盛行。 云朝鮮之於黃色煙草之栽培, 往於明治三十九年, 自韓國政府財政顧問部廣行調查之際, 朝鮮之風土酷恰似於北米主產之地, 其於耕作, 認其適好, 試植于京城府內, 爲其嚆矢者矣。 翌四十年代, 設該部出張所于平安南道成川郡三德面之岐倉, 試作實施中, 同四十一年四月三十日夜半, 突然暴徒之來襲, 放火, 竟被不慮之禍, 廳舍烏有, 所員亦被慘死, 遂至於事業之一時中絕矣。 更於同四十二年慶尙北道大邱府, 又翌年忠清南道大田, 而各設置司稅局煙草試作場, 而試作各種煙草與黃色種, 益認其良績。 以黃色種產地之構成, 議歸合一, 以忠州爲中心, 竝其附近一帶, 確定最適之地。 於同四十五年, 開設朝鮮總督府度支部司稅局出張所于忠州, 至於專行黃色種煙草之耕作。 而於大正二年一月, 本種煙草耕作者協設煙草耕作組合, 勵其斯業之改良發達與耕作者之福利增進, 企圖基礎產地之育成與斯業之發展矣。 然因其耕作者之作法之未鍊與各種原因之重疊, 未遂喚起耕作之高潮。 故由此, 政府年年特加指導獎勵之, 致當業者亦積硏鑽之功, 漸穫利潤, 遂至於耕作之旺盛發達矣。
粵自大正十年七月朝鮮專賣令之實施, 官亦隨其時勢之進展, 伴其適切之施設, 邁進耕作之改善, 而善導扶掖, 以致效績之逐年向上, 其聲譽嘖嘖於東亞矣。 由此耕地漸至澎湃, 現在產地至於忠州、陰城、槐山、堤川等四郡三十有二面, 其耕作面積超越二千町步之多, 以致形成槿域無二之一大產地矣。 其於耕作者之福祉增進及地方經濟之發達也, 其效績果何如哉! 嗚呼! 間田轉成珍土, 消煙化爲黃金。 向所謂「產業興而府庫盈, 民其安堵樂業」者, 實此言也。 蓋本種之耕作, 創意者即前朝鮮總督府技師正五位勳六等岡田虎輔氏也。 而與其司稅局出張所開設同時, 莅兼所長以來, 迄于大正七年之間, 備嘗非常之苦難, 確立完全之基礎, 其偉功顯於斯土地, 邦民之所以欽仰而深銘其德者, 此也。 其後當任及關係者等, 相繼盡瘁, 益加奮勵, 以致今日之隆盛, 實不勝感激不已者矣。
於焉本種煙草之耕作開始, 今當二十有五周年, 而玆卜今日, 建立此碑, 銘記斯業發展之由來, 以作永世之記念云爾。
昭和十一年九月二十三日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會
前朝鮮總督府專賣局長 正五位 勳三等
安井誠一郎 撰
<번역문>
국책이 서매 서정이 제대로 갖추어지고, 산업이 일어나매 국고가 넉넉해져, 백성이 비로소 안돈하여 생업을 즐기게 되는 법이다. 아, 우리 총독께서 시정하신 이래 25년 동안 치적이 널리 펼쳐졌으니, 전매제도를 실시한 지도 어느덧 16년이 지난 지금, 담배 경작에 대한 공로야말로 가장 돋보이는 바이다. 무릇 조선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광해군 때의 일로, 본국(日本)으로부터 전래되어 '담바고'라 불리며 사람들이 모두 즐겨 피워 마침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황색종 담배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메이지 39년(1906년), 한국정부 재정고문부에서 광범위하게 조사할 당시 조선의 풍토가 북미의 주산지와 흡사하여 경작에 매우 적합함을 확인하고 경성부 내에 시험 재배를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듬해 40년대에는 해당 부의 출장소를 평안남도 성천군 삼덕면 기창에 설치하고 시험 재배를 실시하던 중, 동 41년 4월 3일 한밤중에 갑작스러운 폭도의 습격을 받아 방화로 인해 뜻밖의 화를 입어 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직원들 역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여, 마침내 사업이 일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다시 동 42년에 경상북도 대구부, 그 이듬해에는 충청남도 대전에 각각 사세국 연초시작장을 설치하여 각종 연초와 황색종을 시험 재배함으로써 한층 뛰어난 성과를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황색종 산지 단지화에 대한 논의가 하나로 모여 충주를 중심으로 그 부근 일대를 최적지로 확정하였다. 동 45년에는 조선총독부 탁지부 사세국 출장소를 충주에 개설하여 비로소 황색종 담배의 전문적인 경작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어 大正 2년(1913년) 1월, 본 품종의 담배 경작자들이 협력하여 연초경작조합을 설립하고, 본 산업의 개량 발달과 경작자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며 기초 산지의 육성과 산업 발전에 힘썼다. 그러나 경작자들의 재배 기술이 미숙하고 여러 원인이 겹쳐 경작의 활성화를 충분히 끌어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정부가 해마다 특별히 지도와 장려를 더하고 당사자들 역시 연구와 노력을 거듭한 끝에 점차 이윤을 얻어 마침내 경작이 왕성하게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大正 10년(1921년) 7월 조선전매령이 실시되자, 관(官) 역시 시세의 진전에 맞춰 적절한 시설을 갖추고 경작 개선에 매진하며 선도하고 지원함으로써 성과가 해마다 향상되어 그 명성이 동아시아에 자자해졌다. 이로 인해 경작지가 점차 크게 확대되어, 현재 산지는 충주·음성·괴산·제천 등 4개 군, 32개 면에 이르고 경작 면적은 2,000정보(町步)를 초과하여 한반도 내에 둘도 없는 대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경작자의 복지 증진과 지방 경제 발전에 미친 성과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아! 놀려두던 땅이 보배로운 토지로 바뀌고, 사라지던 연기가 황금으로 변하였으니, 이른바 '산업이 일어나 국고가 넉넉해지고 백성이 안돈하여 생업을 즐기게 된다(間田轉成珍土, 消煙化爲黃金。 向所謂「產業興而府庫盈, 民其安堵樂業'는 말이 참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무릇 본 품종 경작을 처음 고안한 이는 전 조선총독부 기사 정5위 훈6등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 씨로, 사세국 출장소 개설과 동시에 소장을 겸임하여 도임한 이래 大正 7년까지 비상한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견뎌내며 완벽한 기초를 확립하였으니, 그 위대한 공적이 이 땅에 뚜렷하여 지방민들이 존경하고 그 덕을 깊이 새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후 당임자 및 관계자 등이 손을 이어 진력하고 더욱 분발·격려하여 오늘의 번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감격을 금할 길이 없다. 이에 본 품종 담배 경작을 시작한 지 이제 25주년을 맞아, 오늘을 택하여 이 비석을 세워 본 산업 발전의 내력을 기록함으로써 영원한 기념으로 삼고자 한다.
昭和 11년(1936년) 9월 23일
황색종 담배 경작 25주년 기념회
전 조선총독부 전매국장 정5위 훈3등
안세이 세이이치로(安井誠一郎)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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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碑碑文筋書》
朝鮮ニ於ケル黃色種煙草ノ栽培ハ明治三十九年時ノ韓國政府財政顧問部ニ於テ各般ニ亙リ調査ノ結果朝鮮ノ風土ハ北亞米利加主産地ニ能ク酷似シ居ルヲ以テ本種ノ栽培ニ必然適當スルモノト認メ京城府內ニ試植セルヲ以テ其ノ嚆矢トナス。 越ヘテ同四十平年平安南道成川郡三德面岐倉ニ同部出張所ヲ設ケラレ之ガ試作實施中偶同四十一年四月三十日ノ夜半一團ノ暴徒ノ爲不意ノ放火襲擊ニ遇ヒ事務所ハ灰燼ニ歸シ剩ヘ局所員ノ悲慘ナル橫死ヲ遂ゲタル者アリテ遂ニ一時事業中絶ノ已ムナキニ至リシガ更ニ同四十二年度尙北道大邱府ニ又其ノ翌年忠淸南道大田面ニ司稅局煙草試作場ヲ設置セラレ各種煙草ト共ニ黃色種ヲモ試作シ急成績ノ確ナルヲ認メ本格的ニ黃色種産地ノ構成ニ議ヲ進メラレ其ノ結果忠州ヲ中心トスル附近一帶ヲ最適地ト確認サレ同四十五年ニ於テ總督府度支部司稅局出張所ヲ忠州ニ開設シ專ラ黃色種煙草ノ耕作試驗ヲ行フコト、ナレリ而シテ翌大正二年一月本種煙草耕作者ニ依リ忠州煙草耕作組合ヲ設立シ銳意耕作ノ改良發達ト耕作者ノ福利增進ニ努メ只管基礎産地ノ育成ト斯業ノ發展トヲ企圖シタルガ當初耕作者ハ本耕作法ニ馴致セザル等種々ノ原因重疊シ容
易ニ耕作熱ヲ喚起スルニ至ラズ以來政府ハ每年能ク適切ナル指導ト獎勵鞭撻ヲ加ヘラレ一面當業者モ亦漸次研究工夫ト經驗トヲ積ミ相當ノ利益ヲ擧ゲ耕作熱益旺盛ヲ來シ殊ニ大正十年七月政府ニ於テ煙草專賣令實施セラル、ヤ當局亦時勢ノ進運ニ適應スル耕作諸般ノ施設改善ニ邁進シ耕作者ヲ善ク誘導扶掖セラレシヲ以テ耕作成績遂年向上シ其ノ名聲東亞ニ噴々タリ耕作地域及面積亦漸次擴張シ現在産地ハ忠淸北道忠州、陰城、槐山、堤川ノ四郡三十二箇面ニ跨リ耕作面積二千十九町步ヲ超ヘ鮮域唯一無二ノ鞏固不動ナル大産地ヲ形成スルニ至リ耕作者ノ福祉增進及地方經濟ノ發達ニ寄與スル所甚大ナルモノアリ抑本種耕作ハ前朝鮮總督府技師正五位勳六等岡田虎輔氏ノ創意ニ係ルモノニシテ司稅局出張所開設ト同時ニ所長ヲ兼任シテ以來大正七年ニ至ル迄幾多ノ苦難ヲ嘗メ其ノ基礎ヲ確立セラレタルモノニシテ其ノ偉績ハ地方民ノ齊シク欽仰スル所ニシテ深ク其ノ德ヲ偲ブト共ニ本産地ノ發展施設ニ關シ歷代當局者ガ多大ノ努力ヲ盡サレタル結果漸ク現今ノ如ク隆盛ヲ來シタルヲ思ヘバ轉感激ニ堪ヘザルモノアリ茲ニ本日ヲトシテ此ノ碑ヲ建立スルニ當リ本種藥煙草耕作發展ノ由來ヲ銘記シ之ヲ永世ニ記念スルモノナリ。
昭和十一年九月二十三日建之
黃色種煙草耕作二十五周年記念會
<번역문>
《황색종 담배 경작 25주년 기념비 비문 개요(筋書)》
※筋書란 줄거리, 개요(槪要)를 말한다.
조선에서의 황색종 담배 재배는 명치 39년(1906년) 당시 한국정부 재정고문부에서 다방면에 걸쳐 조사한 결과, 조선의 풍토가 북아메리카의 주산지와 매우 혹사(酷似)하여 본 품종의 재배에 필연적으로 적당하다고 인정하고 한성부(京城) 내에 시범 재배를 한 것을 그 시초로 한다.
이어 동 40년(1907년) 평안남도 성천군 삼덕면 기창(崎倉)에 동 고문부 출장소를 설치하고 시작(試作)을 실시하던 중, 우연히 동 41년(1908년) 4월 30일 한밤중에 일단(一團)의 폭도(暴徒)에 의해 뜻밖의 방화 습격을 받아 사무소는 잿더미로 돌아가고, 나아가 국(局) 직원 중 횡사하는 비참한 자가 발생하여 결국 일시적으로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동 42년도(1909년) 경상북도 대구부 및 그 이듬해 충청남도 대전면에 사세국 담배 시작장을 설치하고, 각종 담배와 함께 황색종도 시작하여 그 성과가 확실함을 확인하였다. 이에 본격적인 황색종 산지 구성을 논의하여, 그 결과 충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일대를 최적지로 확정하고 동 45년(1912년) 총독부 탁지부 사세국 출장소를 충주에 개설하여 전적으로 황색종 담배의 경작 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대정 2년(1913년) 1월, 본 품종 담배 경작자들에 의해 충주담배경작조합이 설립되어 경작의 개량·발달과 경작자의 복리 증진에 힘쓰며 오로지 기초 산지의 육성과 본 사업의 발전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초기 경작자들은 이 경작법에 익숙하지 않은 등 여러 원인이 겹쳐 쉽게 경작 의욕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후 정부는 매년 적절한 지도와 장려·채찍질을 가하였고, 한편으로 업자들 역시 점차 연구·구상과 경험을 쌓아 상당한 이익을 거둠으로써 경작 의욕이 점점 왕성해졌다. 특히 대정 10년(1921년) 7월 정부에서 담배전매령을 실시하자, 당국 역시 시세의 진전에 적응하여 경작에 관한 제반 시설 개선에 매진하고 경작자들을 잘 인도하고 부식하였다. 이에 따라 경작 성적이 해마다 향상되어 그 명성이 동아시아에 떨쳐지게 되었다.
경작 지역 및 면적 또한 점차 확장되어 현재 산지는 충청북도 충주, 음성, 괴산, 제천의 4개 군 32개 면에 걸쳐 있으며, 경작 면적은 2,019정보(605.7만평)를 넘어 조선 내에서 유일무이하고 공고 부동한 대산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으니, 경작자의 복지 증진 및 지방 경제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무릇 본 품종의 경작은 전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정5위 훈6등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 씨의 창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세국 출장소 개설과 동시에 소장을 겸임한 이래 대정 7년(1918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그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그 위대한 업적은 지방민들이 함께 흠모하는 바이다.
그 덕을 깊이 추모함과 동시에, 본 산지의 발전 시설에 관하여 역대 당국자들이 다대한 노력을 다한 결과 마침내 지금과 같은 융성을 가져오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감격을 금할 길이 없다. 이에 오늘을 기해 이 비를 건립함에 있어 본 황색종 담배 경작 발전의 내력을 명기하여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쇼와 11년(1936년) 9월 23일 건립
황색종 담배 경작 25주년 기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