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 카페
정 구 민
달빛 별빛 새소리 모여 시를 읽는 새소리 카페입니다
바람 한 줄 나뭇잎 한 줄기 넣어 저으면
구름이 새파랗게 번집니다
고운이슬처럼 써 내려간 방울새
상큼한 표지 글 박새
감미로운 대화체 소설 촉새
콩나라 팥나라 콩새
쇠박새 진박새 오목눈이 딱따구리 악단들
숲속 식솔들의 나라
구봉산 마루에 휘파람 고였습니다
바람둥이 바람
벌나비 춤
꽃구름 꽃비 함박눈까지
등산길 모퉁이 돌아
새소리카페 글꽃 말꽃 구름꽃 햇살꽃 한 숟가락씩 넣은 유리잔
차 맛은 산매화 닮아
새소리카페 단골손님 산새와 재잘거리며
위작도 거짓도 모르는 글 쓰고
자연 잎들에 적힌 글 무한으로 읽으며
새 카폐 앉아 환경시 씁니다
어느새 창가에 걸터앉은 새벽달
목 짧고 혀 짧은 새들
지구멸망 두렵다
두견새가 웁니다
---이서빈 외 남과 다른 시쓰기 동인 {덜컥, 서늘해지다}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라는 것은 철학의 중심 과제이고,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까라는 것은 과학의 중심 과제일 것이다. 철학은 삶의 목표와 그 정책을 수립하는 이론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고, 과학은 삶의 목표와 정책을 추구하는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철학과 과학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혹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둘이 아닌 하나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철학이 과학을 하위수단(보조수단)으로 삼았을 때는 그래도 좀 더 행복한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오히려, 거꾸로 과학이 철학의 목을 비틀고 그 모든 삶의 목표와 정책들을 말살해버린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과학은 왜, 사는가를 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과학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도 묻지 못하게 한다. 과학은 오직 탐욕과 돈벌이 자체가 목표가 되었고, 돈이 된다면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 자연과 반자연 등, 그 어느 것도 따져 묻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오직 돈이 된다면 장기이식이나 이종교배, 부모형제간의 소송전과 문화유산의 파괴, 바다 밑의 자원의 채굴과 만년 설산의 파괴 등, 그 무엇이든지 다 저지르고 본다. 철학의 시대가 가고 과학이 철학의 목을 비틀어버린 시대는 무목표, 무책임, 무의지의 시대(자연파괴의 시대)이며, 역사의 종말의 시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은 모든 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이며,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다 품어 기른다.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은 너무나도 반인간적이고 두려움과 공포, 또는 재앙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종의 균형의 차원의 문제이지, 인간 무시의 차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뭄과 홍수, 지진과 해일, 화산의 폭발과 전염병의 창궐, 풍년과 흉년 등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자연의 법칙에 반기를 든 인간의 도전은 오늘날의 지구촌의 재앙 자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은 “달빛 별빛 새소리 모여 시를 읽는 새소리 카페”이고, “바람 한 줄 나뭇잎 한 줄기 넣어 저으면/ 구름이 새파랗게 번”진다. 방울새는 고운이슬처럼 써 내려가고, 박새는 상큼한 표지 글을 자랑한다. 촉새는 감미로운 대화체의 소설을 쓰고, 콩새는 “콩나라 팥나라”에 대한 글을 쓴다. “쇠박새 진박새 오목눈이 딱따구리 악단들”은 “숲속 식솔들의 나라”를 이루고, 구봉산 마루에는 딱따구리 악단들의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진다. 바람은 바람둥이고, 벌 나비는 춤을 춘다. “꽃구름 꽃비 함박눈까지/ 등산길 모퉁이 돌아”오면 “새소리 카페”는 “글꽃 말꽃 구름꽃 햇살꽃”이 핀다. “차 맛은 산매화를 닮아” 있고, “새소리 카페 단골손님인 산새”와 “위작도 거짓도 모르는 글”을 쓴다. 정구민 시인의 몸과 마음은 더없이 맑고 깨끗하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의 상상력으로 받아 적으며 ‘남과 다른 시쓰기의 동인’으로서 그의 ‘환경시’를 쓴다.
모든 철학, 모든 과학은 자연철학의 한 분야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은 ‘인간 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은 물론, 자연에 도전하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돈이 자연과학자들을 고용하여 인간을 대청소하는 것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戰法’일 것이다. 돈이 인간의 삶의 목표이자 행복의 수단인 것 같지만, 돈은 자연의 충복이며, 자연이 고용한 저승사자라고 할 수가 있다.
정구민 시인의 [새소리 카페]는 자연철학의 대서사시이며, 자연의 입장에서 이 지구상의 이상낙원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아아, 하지만, 그러나 정구민 시인의 [새소리 카페]는 실낙원이 되었고, 정구민 시인은 “두견새”가 되어 너무나도 “지구멸망이 두렵다”고 운다.
의대생 2천명 증원은 너무나도 근시안적이고, 미래의 인력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의사의 부족은 오늘날의 중국처럼 인공지능 병원을 설립하면 된다. 간단한 진료와 처방을 인공지능병원이 처리하면 동네병원이나 종합병원의 의료인력은 대폭 축소될 것이고, 둘째, 네덜란드나 스위스처럼 적극적인 존엄사를 채택하여 가족과 국가의 부담이 되는 노인들의 행복한 삶을 마련해주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