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기도 1222. 성찰(省察)(241116)
요세비
반성하고 뉘우치고 새롭게 되기로 각오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 했다는, 나를 죽이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없앤다는 것은 나의 기준, 가치, 존재까지 버릴 수 있는 철저한 이타적 기준, 즉 절대적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런 기준을 더 높이거나 넓히거나 날카롭게 하는 칼 갈이 같은 수련의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준이 두리뭉실 하면 결과도 각이 없어집니다. 이리 생각하면 이 것도 맞고, 저리 생각하면 그것도 맞고 하면 기준은 모호 해지고 판단도 모호해지지요.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야 된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자기 나름의 보편적이면서 가치 지향적이며, 고귀한 모범적 기준을 만드는 일이 반성이고 성찰이고 기도이고 신앙인 것입니다.
‘내 탓이오’라는 슬로건으로 자기반성을 하자는 운동이 천주교에서 시작되어 사회운동으로 이어진 90년대 말의 신뢰회복 운동이 있었지요. 어느덧 30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네 탓이 더 많아지고 너의 문제가 더 크고 너 때문이라는 풍조가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듯 합니다. 툭하면 고소 고발이고 자신의 문제를 남의 힘을 빌어 객관화 시켜서 우위를 점유하려 하며 이기려는 가지려는 욕심의 색깔이 지배하는 한 우리의 공동체 정신은 퇴색되고 흐려질 것입니다. 특히 지도층이 그러면 안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귀족의 의무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이웃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의무감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사회적 지도층 등 영향력이 큰 사람들은 더 큰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감을 가져서 공동체 안에서 역할과 지위에 맞는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사회가 더 나아지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