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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회장님의 카톡에서]
🌺 조분순 칼국수집 🌺
수원 권선동에 조분순 칼국수 라는 이름의 식당이 있는데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혼자서
쉬엄 쉬엄 칼국수를 밀어 팔아 손님도 띠엄 띠엄,
그러나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들 내외와 대학생 손자 손녀가 와서 도와
손님이 북적인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소금을 한줌 넣어 물을 붓고 반죽 기계에 넣으면 골고루 잘 섞이면서 얇게 밀어 서너번을 왕복, 곱게 두루말이로 나오게 한다.
이 두루말이 뭉치를 국수로 뽑아 간밤에 끓여 놓은 국물 가마솥에 넣고 애호박을 잘게 썰어 넣고 긴 국자로 휘저으며 끓인다.
국수를 그릇에 담고 김가루와 쑥갓을 고명으로 위에 얹어 쟁반에 내놓으면 평일에는 손님들이 들고가서 먹고 여자 손님들은 빈그릇을 씻어놓고 간다.
주말에는 손님이 밀려 할머니와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 다섯명이 정신없이 일한다.
토요일 한바탕 점심손님이 끝날 즈음이면 용주사 신도회 무량심 회장이 차에 열무와 얼갈이 고추 들을 잔뜩 싣고 운전기사와 들어온다.
아들이 작은어머니 오셨느냐고 반기며 무량심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한다.
수원지방법원 판사인 아들 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식당에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어머니를 돕는다.
그러지 않아도 자꾸 손님이 느는데 법원 사람들 까지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주말 점심때면 난리를 치른다. 어떤 때는 손자 손녀 대학생 친구들이 몰려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1970년, 화재로 집을 잃은 조분순 모자가 팔달문옆 천막에 노숙을 하며 채소 좌판으로 연명할 때 용주사 신도 무량심이 권선동에 가게를 얻어주고 국수장사를 시켰고 아들 정현섭을 공부시켰다.
수원고 출신 정판사, 조할머니 국수집 아들 정현섭판사의 소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어머니를
도와 국수를 팔고 밤이면 수원역과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을 돌며 찹쌀떡을 팔던 소년이다.
소년은 야간대학을 나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어머니를 기뻐서
울게 만들었다.
정판사는 무량심을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며 극진히 모신다.
이제 그만 가게를 접고 쉬라고 정판사가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저 보살님이 저렇게 정정하게 내집에 와서 맛있게 먹고 가는데 어떻게 그만두느냐, 끝까지 할란다 고 한다.
어떤 여자 손님이 칼국수를 끓이는 정판사를 보고 선비같이 귀골로 생긴 사람이 고생한다며 막일하는 사람 손이 어찌 그리 고우냐고 하자 제가 아이들이 많아 월급으로는 대지를 못합니다고 하며 싱긋이 웃는다.
조분순 칼국수식당 앞에는 대형 옹기 단지 하나가 뚜껑이 닫혀 있고 비닐로 싼 종이 안내문이 붙어 있다.
'쌀 읍는 사람 조곰씩 퍼 가시오, 나중에 돈벌면 도로 채우시오, 조분순식당'
어머니가 쓴 글씨인데 아이들이 새로 컴퓨터로 출력해다 준다고 해도 정판사는 그냥 두라고 한다. 처음에는 오가는 사람들 화제가 되고 퍼가는 사람도 많더니 요새는 밤에만 한두명 퍼 간다.
하늘같은 은혜를 베풀어 준 무량심에게 국수장사 수익금으로 얼마씩이라도 갚아야 한다고 가지고 갔더니 무량심이 운전수를 시켜 큰 단지를 식당앞에 가져다 놓게 하고 그 돈으로 쌀을 부어놓으라고 시켰다.
한때는 단지가 달랑달랑 바닥 긁는 소리가 날 때도 있었고 넘쳐서 옆에 봉지 쌀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김문수 도지사가 국수를 먹고 나가다 슈퍼에서 한포대를 사서 메고 와 부어놓은 적도 있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쌀을 퍼가지 않는다.
가끔씩 독 밑바닥이 드러날 때가 있는데 고약한 심성으로 퍼가는 사람을 어쩔수 없으나 권선동 주민들이 뚜껑을 열어보고 쌀봉지를 들고 와 부어놓는다.
국수 수익금으로 쌀을 채울 일이 없어 어머니는 이제 그만 단지를 치울까 무량심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넉넉하고 좋은 세상이 이리 빨리 올 줄 꿈에도 몰랐다.
정판사는 은퇴하면 용인에 장만해 놓은 땅에 집을 짓고 두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계획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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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이야기 ♥
(최우수작)
첫사랑이 그리운 아침이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쳤는지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다소 이른 시간인데도 아내는 벌써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오늘따라 밥 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애들 둘이 결혼을 해 다 나가고 우리 부부만 살다보니 나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는 거실에서 잔다.
각자의 곳에서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를 누워서 보다가 따로따로 잠들고 깨는 시간도 다르다.
우리 부부는 밥을 먹는데도 식탁을 마다하고 거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는다.
아내도 나도 말없이 밥만 먹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늘그막이니 아내와 별로 할 말도 없기에 방송을 봐가면서 밥을 먹으니 서먹하지 않아 좋다.
마침 방송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
‘늘 푸른 인생’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키가 작은 유명한 사회자가 나와 시골에 사는 칠 십 된 노인 부부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아내와 또 결혼 할 거요?”
남편이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야지. 다른 여자라고 별수 있겠어. 그래도 살아본 여자가 좋지.”
사회자가 반대로 아내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 할 거예요?”
그러자
아내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손을 내저으며 경악을 한다. 절대로 지금의 남편과는 결혼을 안 한단다.
사회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대답이 걸작이다.
어디 가서 어떤 놈을 만나도 지금의 남편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것이다. 방청객 모두가 배를 쥐고 웃었다.
나는 밥을 먹는 아내를 슬쩍 곁눈질로 보다가 이내 물었다.
“당신은 어때?”
“나도 저 할머니와 똑 같아.”
아내는 주저하지도 않고 단숨에 대답했다.
혹시나 했던 나는 아내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먹던 수저를 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살아가며 뭘 그리 잘못을 했다고?
저 할머니처럼 다시 태어나면 나를 개비한다고? 바꿔봤자 별수 없어. 고르고 고르다 뉘 고르고 말테니까.”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뒤에 대고 구시렁거렸다.
“그깟 농담도 못 받아들이고 꼭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라고....! "
농담이라는 말이 살짝 들렸으나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방에서 아내의 진심이 뭔지를 생각하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면서 힐끗 아내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아내는 예전과 별 다름이 없이 우산을 챙겨주었다.
오늘이 아내 생일이라는 걸 미리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 놈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다 망쳐놓은 것이다.
저녁에 외식을 하자고 하려다 아까 한 말이 괘씸해 그냥 나왔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애들을 돌려보내고 책상에 혼자 앉아 있자니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몸이 선득거렸다.
이제 올해만 지나면 평생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을 맞는다.
서글픈 마음에 커피 한 잔을 타 마시며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옛 추억이 활동사진마냥 펼쳐졌다.
진한 커피향이 코끝에 와 앉으니 마음까지 차분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 말고 다른 여자는 알 틈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첫사랑과 평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똑같이 교육도시라 불리는 공주 금강 가에서 살았으나 서로의 동네는 좀 떨어져 있었다.
우리가 만날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3학년이었지만 처음부터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72년 6월 6일 현충일 날이었다.
공휴일이기에 집에서 예비고사 공부를 하다가 심난한 마음에 금강가를 걷고 있었다.
그 때만해도 공주의 금강은 이름 그대로 비단을 펼쳐놓은 듯 물이 맑고 아름다운 강이었다.
그 해에는 날이 가물었기에 물이 강 전체로 퍼져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강가 한쪽으로 몰려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강 가운데는 넓게 모래톱이 생겼고 강가로 흐르는 물은 깊어 사람이 건너 모래톱에 갈 수는 없었다.
‘공부하기 지겨운데 저 백사장에 발자국이라도 찍으며 걸어봤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고 3은 공부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잠시 아름다운 마음을 먹으며 강가를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구 없어요? 사람 좀 살려주세요.”
강가 바위에서 빨래를 하던 아주머니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내가 언덕 밑으로 달려 내려가 보니 물속에 사람 하나가 빠져 몇 번인가를 솟구치더니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여자의 산발된 머리가 맑은 물속에서 훤히 보였다.
순간 두려움과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지려고 들어갔다가는 둘이 같이 죽는다.’
금강이라는 물가에 살았기에 어려서부터 엄마가 주의를 주려고 늘 하던 말이었다.
그렇다고 수영을 할 줄 아는 내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망설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옆에서 애타는 엄마의 절규에 못 이겨 나는 엉겁결에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더니,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애의 힘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여자애를 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했다.
내가 살기 위해 여자애를 떼어내야 했는데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를 끌고 헤엄쳐간 곳이 바로 강 가운데에 드러난 모래톱이었다.
뛰어 들어간 쪽으로는 물살이 너무 세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모래톱으로 나간 나는 너무 지쳤기에 한참을 백사장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여자애가 누워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물에 젖어 속살이 훤히 비쳤으나 여자애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학생, 가슴을 누르고 안 되면 입을 맞춰 인공호흡이라도 좀 시켜 봐.”
건너편에서 외치는 어른들의 질책에 못 이겨 여자애의 봉긋한 가슴에 손을 대보니 왠지 내 가슴이 먼저 뛰었다. 가슴을 몇 번 누르다 이번엔 입을 맞추고 숨을 몰아넣었다.
처음 시작할 때만 묘한 기분이 들었지, 여러 번 가슴을 누르고 입을 맞추다보니 처음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만에 여자애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창피한지 본능적으로 풀어진 블라우스를 여미며 수줍어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 가운데 백사장을 걸어 아래쪽으로 한참을 내려와야 했다.
아래쪽은 강물이 넓게 흘러 정강이에 닿을 정도였으니까 쉽게 건널 수 있었다.
조금 전 생각대로 하얀 백사장에 둘만의 발자국이 찍혔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하늘에는 하얀 백로 한 쌍이 날며 내릴 곳을 찾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여자애는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너 몇 학년이니?”
“중 3이에요.”
고 3이었던 내가 그날 중 3이었던 그 애와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다만 강 한가운데 드러난 모래톱에 둘만의 발자국을 찍으며 힐끔힐끔 그 애를 보니 조금 전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때와는 딴판으로 예뻤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학교에 갈 때면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너는 그 때 금강에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예비고사날이잖아요. 시험 잘 보세요.”
그녀는 찹쌀떡을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의 응원 덕분이었는지 예비고사에 합격해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그녀는 고 1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고등학교와 우리 대학은 같은 동네에 있었으니 우리는 오고가면서 가끔씩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중 3일 때보다 많이 성숙해 있었고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다가다 한 번씩 만나다보니 언젠가부터 그녀가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한번 만나자고 해볼까? 그래도 대학생이 어찌 고등학생을…….’
대학생이 고등학생과 어울린다는 건 어쩐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망설이다가 시간만 지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소망과 현실의 괴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충남의 시골로 발령이 나 3년의 세월이 흘렀다.
3월의 첫 출근날 신임교사의 인사가 있었다.
이제 겨우 교사 3년차인 나는 신규 발령을 받아 온 여선생님의 예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공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오후에 그녀가 우리 교실을 찾았다.
“선생님 댁이 공주시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 모르시겠어요? 미선인데요.”
나는 처음 본 여자이고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그녀는 나를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자신을 모른다고 하자 여간 실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금강에서 빨래를 하다 물에 빠진 자신을 건져준 남학생이 있었다고 했다.
소녀는 자신을 살려준 그 남학생이 그리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후
그녀는 그 남학생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학교 가는 길목에서 기다린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했다.
어쩌다 그 남학생을 멀리서라도 보는 날이면 마치 자신의 몸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10살이 넘어도 부부가 되지만 당시 중 3과 고 3의 간격은 너무나 컸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감히 그 남학생 앞에 얼씬거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한 해가 지나자 차이는 더 벌어져 남학생은 공주교육대학의 대학생이 되었고
자신은 겨우 고 1이라서 그냥 애만 태우며 남학생을 지켜볼 뿐이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다른 고등학교 남학생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어도 자신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단다.
오직 자신을 살려준 그 남학생 생각뿐이었단다.
그렇게
혼자 짝사랑으로 애를 태우며 남학생을 지켜본 지 얼마 후 남학생은 훌쩍 공주를 떠났다고 했다.
2년제였던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발령을 받아 서산의 어느 초등학교에 선생님으로 근무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남학생을 만나려면 자신도 공주교대에 입학을 해야 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죽어라고 공부를 했단다.
결과 공주교대에 입학했고 주위의 친구들이 미팅이다, 연애다 희희낙락해도 자신의 마음은 오로지 한 곳에 꽂혀 있었다고 했다.
비록 짝사랑을 하는 처지였으나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불결하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운명이란 참 묘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임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한 곳이 바로 여기이고 그곳에는 첫사랑인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그 때 중 3이었던 학생이 바로 선생님?”
풋풋한 중학교 때 얼굴과 성인이 되어 화장품으로 덧칠해 놓은 얼굴은 딴판이었으니 알아 볼 수 없었다.
예전에
이름을 묻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이름도 몰랐었다.
또 대학 1학년과 고 1의 간격이 자랄 때는 무척 컸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자 3년의 간격은 그깟 것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지려고 물에 들어가면 같이 죽는다.’
엄마 말씀 또한 맞는 말이었다.
나는 물에 빠져 죽기 살기로 매달리던 그녀에 코가 꿰어 40여 년째 같이 죽고(?) 있으니 어른들 말씀 새겨들어야 하겠다.
추억의 실타래를 다 걷고 나자 결혼 당시 아름답던 미선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이 당신 생일이잖아. 어디 분위기 있는 곳에 가서 둘이 저녁이나 먹자고!”
식당에 나타난 아내의 블라우스 한쪽이 다 젖어 속살이 비쳤다.
“예전 물에 빠졌을 때처럼 섹시한데?”
그러자 아내가 눈을 하얗게 흘기며 환갑이 넘어 주책을 떤다고 핀잔을 했다.
“애들이 올 때마다 우산을 다 가져가서 우산살이 2개나 부러진 것을 쓰고 와서 그래요.”
우리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와 우산을 찾았다.
“누가 내 우산을 바꿔갔네.”
아내가 식당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자,
손님도 다 가고 없는데 그냥 남은 것을 쓰고 가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뛰면서 좋아했다.
“앗싸. 새 우산으로 바꾸겠구나.”
식당을 나온 아내가 우산을 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가 바꿔온 우산은 살이 거의 다 부러져 한쪽으로 완전히 처지는 것이었다.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아내는 화를 내며 우산을 땅바닥에 내 팽개쳤다.
“조금 전 내 우산은 그래도 살이 2개밖에 안 부러졌는데”
아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더 좋은 우산으로 바꿨다고 입이 찢어지더니, 그것 봐! 바꾸면 더 좋을 줄 알았지?
결국에는 뉘를 고르잖아. 그러니까 첫사랑을 믿고 내세에도 그냥 나랑 결혼해. 텔레비전에 출연했던 할아버지 말처럼. 그래도 살아본 놈이 더 낫지 않을까?”
나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머쓱해진 아내는 하는 수 없이 내 우산 속으로 기어들어오더니 나를 꽉 잡았다.
예전 물속에서 나를 놓으면 죽는다는 듯 붙잡고 매달리듯이..
나는 소녀를 안고 백사장으로 기어오르듯 아내를 꼭 껴안았다.....♡
🎎 몇번을 읽어도 가슴 따뜻한 얘기입니다. 즐겁게 잘 익은 인생을 즐기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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