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16.水. 맑음
매혹魅惑된 삶.
박물관博物館과 미술관美術館은 도서관圖書館과 어떤 점에서는 다르지만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특히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면 도서관이 갖는 특성과의 유사성類似性은 순도純度가 매우 높아진다. 그 장소들에서 큰 즐거움을 얻어내기까지에는 부지런함과 끈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생각을 한다. 그곳에서는 아는 만큼, 또는 알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의 정신적 쾌감을 얻어가기 때문인데, 그 열심熱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매혹魅惑이라고 본다. 단순히 상식이나 지식을 쌓거나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관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매혹되어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을 향한 부지런함과 끈기는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우러나오듯이 남들이 미처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를 맡아가며 그 내재된 가치價値를 오롯이 향유享有할 수 있는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럴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매혹이라는 말은 사막의 오아시스나 청춘의 첫사랑이라는 말처럼 그야말로 고혹적蠱惑的이다. 무엇인가에 매혹당할 수 있고, 누군가를 매혹시킬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명력 가득하고 찬란한 영혼의 숨쉬기이던가!
오래된 낡은 인연因緣들.
‘실크로드와 둔황-혜초 스님과 함께 하는 서역기행’
이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올해 4월3일까지 열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다음 두 가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1975년 5월의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평소 습관대로 책방에 들러서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던 중 재미있는 제목을 붙이고 있는 책이 한 권 눈에 띄었다. 그 책이 바로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이었는데, 어떤 스님께서 인도를 다녀와 쓴 여행기 수준의 책이었다. 저자가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책 내용도 여행기를 벗어나지 않을만한 정도였기에 전혀 세간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겠지만 나에게는 매혹 그 자체였었다. 그 책에는 둔황의 천불동 막고굴과 실크로드에 있는 오아시스의 도시 누란 등이 약간 언급되어 있었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은 인도印度에 할애되어 있었다. 중인도의 엘로라, 아잔타 석굴과 불교의 8대 성지, 히말라야 산록에 있는 아시람Ashram(요가수행을 하며 거주하는 곳)들과 티베트의 수도 라싸 이야기는 온통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이 작은 사건은 그 뒤로 십여 차례에 걸쳐 책에서 읽어보았던 현장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순례를 다닌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1980년 9월, 잠시 다른 지방에 나가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쓰러지셨다는 급보를 받고 고향인 K시로 부랴부랴 돌아가 대학병원 응급실로 직행을 했다. 병원 측에 병실을 신청해놓고 응급실에서 대기를 하는 며칠 동안 아버님 침대 옆에 앉아 간호를 하며 틈틈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과 일본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둔황敦煌 등이었다. 그런 뒤로 사기열전은 평생에 걸쳐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틈틈이 꺼내보는 수신修身의 교과서가 되었고, 둔황은 앉은 자리에서 연거푸 세 번을 읽어본 두 권의 책 중 한 권이 되었다.
‘조행덕趙行德이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호남湖南의 시골에서 서울인 개봉開封으로 올라온 것은 송(宋)의 인종(仁宗) 때인 천성天聖 4년(서기,1020년) 봄의 일이었다.’로 시작하는 둔황은 마치 내가 잊고 있었던 내 전생의 기록을 되찾은 것처럼 나를 매료魅了시켰다. 그 책을 읽은 뒤로 가상 역사소설 ‘둔황’ 속의 주인공인 조행덕의 삶이 분명 어느 시기 전생의 내 삶의 한부분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고, 인도와 실크로드Silk Road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세 번의 만남.
내가 기억하는 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하는 실크로드.서역문물전은 세 번에 걸쳐서 있었다. 그 첫 번째가 1986년 8월20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의 구 중앙청 건물로의 이전 개관식 기획전으로 오타니大谷光瑞 탐험대가 3차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원정.수집해온 서역 유물들을 전시했었고, 두 번째로는 1991년도 가을 기획전의 하나로 20세기 초 4차에 걸친 독일 투르판 탐험대의 서역북로 수집품으로 독일 베를린 국립인도박물관 소장의 중앙아시아 유물 가운데 엄선한 것으로서 중앙아시아의 문화, 역사, 미술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유물전시회였고, 세 번째로는 금번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올 4월3일까지 전시하고 있는 ‘실크로드와 둔황-혜초 스님과 함께 하는 서역기행’이 그것이다. 내가 다행스럽게도 세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은, 더군다나 이번에는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행덕의 불심佛心과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을 인도 처녀 닐루빠 딸라띠의 기도祈禱 덕분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한다.
혜초 스님과 함께 하는 서역기행.
순례승巡禮僧과 구법승求法僧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3월15일 오전11시부터 실크로드와 둔황 전 해설을 맡아주신 친절하고 성실한 김종선 해설사 님(女)께서는 굳이 구법승이었던 당나라 고승 현장玄獎법사와 비교해가면서 혜초 스님을 순례승이라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경전에 얽매이지 않고 허공처럼 자유로운 깨달음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가며 열사의 땅을 돌아다닌 혜초 스님이야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의 경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진정한 수행자임을 말의 행간行間에 숨겨놓고 있음에 분명했다. 깨달음을 향한 대 자유인大 自由人의 걸음걸이를 1300년 전의 혜초 스님께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글을 통해 내게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누구는 샤갈의 그림을 보고서, 누구는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서, 또 누구는 도스또예프스끼를 읽고서 운명의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앞에서 거대한 운명의 힘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당신이 여기에 와서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自由다.
(- 매혹魅惑된 삶. 실크로드와 둔황敦煌 전-)
첫댓글 작가의 촉은 피부 한 겹을 벗겨 놓은 듯 예민하고 과민하다.
작가의 감성은 바짝 마른 화선지같아 스치는 이슬에도 제 전부를 적신다.
나의 둔탁한 감성과 느슨한 열정이 초라하다.
그래도 감정이입이 200% 이상 잘 표현된 글을 읽을 수 있으니 나는 운이 좋다.
둔황, 조덕행의 삶 그리고 혜초 스님의 깨달음과 자유를 향한 순례에 긴울림님이 매혹 당했다면 ~~ 혜초스님을 매혹시킨 순례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언가에 매혹당한 삶은 행복하겠죠.. 단, 매혹을 유발시킨 대상과 의미가 通 했을 떄 ~~ 잘 읽고 갑니다.
메혹적인 인연에 거듭되는 인연~~! 그곳에 가서 오감(五感)을 통해 느껴보고 싶을 뿐~~!조선 최초의 세계인~~! ~~! 최초의 여행작가....그저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그 먼길을...우리 것~~! 우리가 간직해야 할 보물들..ㅠㅠ그곳에서 만난 긴 우~~울림님~~!
무슨.... 광고문구같습니다.
한국인의 자부심을 키워주고 우리의 역사속에 살아있는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이제사 관심갖고 알게 됨에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천년세월을 넘어 넘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매혹되고 . . . 그저 우러러볼 뿐입니다. 긴울림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