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별과 참별
남자들 세계에서 군대얘기를 꺼내면 "또 그 얘기냐? 는 구박을 자청하는 짓거리가 된다.
하지만 할 얘기는 해야 되겠다.
요새 전화기꼬리에 박정희와 육영수 사진을 달고 다니며 국방장관 한 번 해 보려다 물 먹은 김병관과, 그와 육사 동기라는 김관진을 보면서 떠 오른 생각이다.
김병관의 경우는 "똥별"이라고 부르기조차도 역겹다.
김병관이 어떻게 별을 4개씩이나 달았는지 그게 궁금하고, 김관진을 보면 싸움(전쟁)을 하지 못해 안달하는 독 오른 싸움닭을 보는 기분이다.
필자는 군대를 1968년 3월에 나가 1971. 2월에 제대했다.
만 35개월이 넘었으니 6.25이후 최대 장기간 복무를 했다.
1968. 1. 21 북에서 내려 보낸 김신조씨를 포함한 31명의 특수부대 공비들이 "박정희의 목을 따려고"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실패한 사건 때문에 복무기간이 늘어나서 그랬다.
위 "박정희의 목을 따려고"는 내가 얘기를 살벌하게 꾸며대기 위해서 한 표현이 아니라 무장공비 일원 중 생포된 김신조씨가 그날 저녁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기자회견장에서 걸걸한 북한 억양으로 고대로 내 뱉은 말이다.
하루 종일 심문해서 김신조씨의 말투를 알았을 터인데 생방송에 그 말을 여과 없이 고대로 내보낸 것은 박정희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것이라고 판단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 피가 나고, 알이 배기고, 이가 갈리는('PRI' 라는 사격훈련을 당시 훈련병들이 그렇게 불렀음) 훈련을 6주간 받고, 영천육군정보학교 피교육생으로 들어가 전투정보사병 코스(CIE= Combat Intellignce Enlist) 교육을 8주간 받고, 부산에서 제일 높은 장산서편 기슭에 있는 육군정보학교에서 교무과(보병부대의 정보작전과와 일반학교의 교무과 기능을 합친 부서)에서 정보서기병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정보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대부분은 방첩대, 보안대, 보안사를 떠 올리는데 그런 데로도 풀릴 수 있지만, 교육내용은 비밀문서를 취급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주 교과목이다.
이미 두 분이 이 세상분이 아닐 것이나 당시 두 분의 장군중 한분은 실명을 그대로 쓰고 또 한분은 익명으로 쓰기로 한다.
육군정보학교에서 피교육생으로 교육을 받을 때 육군정보학교장이 경북영천지구 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최영성>이라는 준장이었다.
우선 정보학교의 식사가 논산훈련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깨끗했고 식사량도 논산훈련소보다는 훨씬 많고 밥에 쌀과 보리가 섞인 것이 5:5정도였다.
당시 졸병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때로 밥의 양이 갖는 의미가 지금과 같이 먹을 것이 넘쳐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논산훈련소의 밥이라는 게 말이 밥이지 당시 졸병들이 "짬밥"으로 불렀듯이 오늘날 길거리 음식물쓰레기 통 속의 음식물 찌꺼기만도 못 했고 그것마저도 턱 없이 적게 주었다.
당시는 군과 사회에서 공공연히 회자되던 말로 하사관은 등짐으로, 장교는 찦차로, 장군은 트럭으로 대놓고 졸병들이 먹을 것을 빼내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 정보학교의 깨끗하고 넉넉한 밥의 양에서 이미 학교장의 군 생활 방식과 인품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 여름 이다보니 졸병들 저녁밥에서 식중독사고가 발생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병들이 토하고 싸고 하면서 몸져누웠다.
학교장이 직접 의무병들을 데리고 다니며 졸병들 팔에 주사기를 꼽고 밤을 새워가며 간병을 했다.
사택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부대장의 부인과 딸, 그리고 노모까지 피교육생들 내무반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졸병들이 이마를 짚어보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 주면서 극진히 간병을 했다.
장군의 늙은 어머님은 자신의 아들 최영성 장군을 부르면서도 반드시 "하시게!"하는 존대어를 썼다.
그 말 한마디에서 가정교육을 읽을 수가 있었다.
장군과 그 식솔들과 의무병들의 헌신적인 병 수발로 그 다음날 모든 피교육생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그 뒤로 들은 소문에 의하면 그 최장군은 준장으로 군 생활을 끝냈다는 어렴풋한 소식을 들었다.
또 한분의 상관인 장군이 필자가 육군병기학교에서 상관으로 2년 반 동안 모셨던 육군병기학교장 000대령이다.
당시는 병기병과에서는 육군병기감이 준장이나 소장으로 최고 계급이고, 그 밑에 1, 2군 사령부 병기참모가 고참 대령이나 준장이고, 그 밑으로 육군병기학교장이 병기병과에서는 그 다음 서열로 4위였다.
육군병기학교장은 T/O상으로는 <준장>이 학교장을 하게 되어 있으나 모두다 고참 대령이 학교장으로 와서 수완이 좋은 사람은 별을 달고 1,2군 병기참모로 나갔고, 손금이 굵은 사람은 육군병기학교장이 군 생활의 마지막 자리였다.
그 000대령을 별을 달아주기 위해 부대 내를 흐르는 계곡에 돗자리를 깔고 졸병들은 한 여름에는 무수한 개와 닭을 잡아야 했다. 주말마다 김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가서 교육을 받고 있는 병기병과 영관장교들을 버스 한 대씩 실어다 계곡물에서 개 잡고 닭 잡아 접대를 했던 것이다.
여름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는 000대령이 뻔질나게 김해육군대학을 다니며 병기학교 졸병들이 배를 줄인 것으로 요정에서 그들을 접대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000대령은 필생의 꿈인 별을 달고 병기학교에서 몇 달 있다 1군 병기참모로 갔다.
그 000장군, 인물은 훤칠하고 연설을 기가 막히게 잘 했고, 음성도 아나운서 뺨치게 매우 좋았다.
40년도 넘은 것을 어찌 그리 생생하게 기억을 하느냐는 반문이 있을 줄 안다.
그때 필자가 더러 장군의 연설문 초안을 잡아주었던 특별한 인연이 있어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학교장의 관사가 정문 바로 옆에 있었다.
000장군과 부인 사이에는 항상 집안 싸움하는 소리가 밖으로 들려왔고 졸병들 사이에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루는 별을 갓 단 신장군의 세단차가 정문을 빠져 나갈 때 정문에 보초를 서는 위병이 앞에 총을 하고 "충성"하면서 허공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적었던가 보다.
그 위병, 대령 때와 비슷한 크기로 장군에 대한 허접한 예를 갖추었다고 바로 영창 행을 당하여 1주일인가 한 달간 영창살이를 해야 했었다.
대령 계급장을 별로 바꾸어 준 값으로 영창살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제일은행에 다니다 군에 들어와서 필자의 조수가 되어 병기학교에서 군 생활을 마친 후배가 복직을 하여 서울에서 반갑게 만나 필자가 제대 한 뒤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000장군은 소장까지 진급하여 육군병기감까지 역임하고 전역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을 듣는 필자의 기분이 씁쓸했다.
거기서 준장으로 군 생활을 마친 최장군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누가 "똥별"이었고, 누가 "참별"이었는지는 읽은 분들이 판단하시라!
과연 현재 군에서 별을 달고 있는 사람들, 참별은 몇이나 되고 똥별은 몇이나 될까?
똥별이 다 떨어지고 99.9% 참별로 꽉 찰 때 통일도 될 것이다.
첫댓글 1968년도 그 당시에 병사들의 소지품 식량 이라던지 담배 등등 군 간부들이 많이 챙겨지ㅐ요 참으로 곧은 군장교 참별 이야기 이네요
와라바시 말번 군번...
예, 동감 합니다
폐쇄사회라 그런지 지금은 어느정도 정화가 됐다고는 하나 똑 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