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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마타이오 복음
( 마타이오가 기록한 예수 일대기)
세관장인 마타이오는 세무직 직업으로 보아
그 당시 유대를 식민지로 삼은 로마어(라틴어)와 유대 사회에서 사용하는 아람어 같은 글을 아는 사람 이었다.
오랜 옛날 부터 전하여 내려 오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 60/75-130/165) 에 의하면,
마타이오는 예수의 말씀을 아람어로 쓴 것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 제목 : (카타(뜻 : --에 의한) 마타이온)
馬太 중국식 발음 : 마타이
(예수 : 히브리어 '예호슈아'의 헬라식 발음)
(예수아 : 히브리어, 예수스 : 헬라어, 뜻 : 여호와가 죄에서 건져냄 )
( (죄에서) 건져냄을 뜻하는 단어 : 호쉐아, 예호슈아, 예슈아, 예사야 )
아람어로 메시야 히브리어로는 미시아(구세주),
헬라어(그리이스어)로 크리스토스 이며,
이름이 아니라 '(올리브) 기름 부었다'(건져내는 사람)는 뜻의 맡은 일(직책)의 이름이다.
즉 예수 크리스토는
'죄에서 건져내는 사람 예수' 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크리스토인 이라는 단어는 3 번 나온다.
( 행 11 :26, 26:28, 페트로 알파 4:16 )
유대인들에게
다른 세 복음서 보다 구약 성경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구약 성경 구절을 가장 많이 인용하여,
즉 예수가 메시야 임을 입증했다.
예수의 사람의 조상 족보를 유대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부터 기록 하였다.
( 마1:23/사7:14, 마2:5-6/미5:2, 마2:14-15/호11:1. 마2:17-18/렘31:15. 마2:23/사11:1,
마3:3/사40:3, 마4:4/데바림8:3, 마4:6/시9:11-12, 마4:7/데바림6:16, 마4:10/데바림6:13,
마4:14-16/사9:1-2, 마8:17/사53:4, 마11:10/말3:1, 마12:17-21/사42:1-3, 마13:14-15/사6:9-10,
마13:35/시78:2, 마15:7-9/사29:13, 마21:4/즈카르야9:9, 마21:42/시118:22, 마22:44/시110:1 )
주후 6 세기 무렵 로마의 수도 원장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 470년 -544년 )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다가 크리스토가 태어난 해를 시작하는 해로 잡아서,
AD(Anno Domini, 라틴어: 주님의 해)가 오늘날 까지 쓰이고 있다.
AD, BC 개념을 처음 들여온 사람은 8 세기 무렵 영국의 역사학자 버드( Bede, 672/3-735)로
자신의 기록에서 BC와 AD로 나누어서 사용하였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왕은 헤롣 대왕(BC37-BC4) 이었다.
헤롣 대왕의 2 남 헤롣 안티파(BC4-AD39, 루카 3:1, 23:7-12, 마르코 6:16-28, 마 15: 1-12)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예수로 부터 여우라 불리어졌고, 십자가 처형 앞서서 심문도 하였다.
마르코 복음 662 구절 가운데 600 여개가 마타이이오 복음에도 있다.
마타이오는 기본적으로 마르코의 양식을 따르면서 상세한 자료를 더하여,
마르코 복음의 약 2배에 달하는 마타이오 복음 1069 절을 기록하였다.
마타이오는 예수라 이름지어 부르기를 '다뷛의 자손' 이라고 10번 사용했다.
마르코와 루카는 합해서 7 번 사용했다.
예수는 헬라어로 가르치지 않고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사도 요한의 헬라어 문체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특색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사도 요한은 아람어와 헬라어 2 개 국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스라엘 나라 설명 ***
신약시대 때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여서 로마에서 유대에 보낸 총독이 다스렸다는 사실을 알고서 읽어야 이해하기 쉽다.
북쪽 아시아(시리아)와 남쪽 아프리카를 동쪽의 "왕의 대로"와 서쪽의 "지중해 바닷가 길"로 이어주는
좁고 기다란 나라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동에서 서로 잘라보면, 서쪽에 완만한 지중해 해안 평야가 있고 이어 중앙산지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중앙산지에는 예루살렘(해발 790 미터) , 헤브론(해발 927 미터) 같은 이스라엘 중요 성읍들이 있다.
중앙 산지를 넘어가면 내려가는 지형이고, 계속 내려가면 요르단강 협곡에 도달한다.
이곳은 해수면보다 400m 아래로서 지구 상에서 가장 낮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 요르단의 가파른 고원으로 다시 올라간다.
이스라엘 동서 단면도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잘라보면, 북쪽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산’이 있다.
해발 2,236m인 헤르몬산의 년간 강수량은 1,600mm 로서, 항상 푸르른 지역이다.
헤르몬산의 물은 급하게 내려가면서 해수면 아래 -210m에 있는 갈릴리호수에 도달한다.
갈릴리 호수의 물은 ‘요단강’을 흘러서 최종적으로 해수면 아래 -418m에 있는 사해에 이른다.
사해에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라엘 국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네게브사막’이 있다.
네게브사막 남쪽 끝에 ‘에일랏(Eilat)’ 이라는 항구도시가 있는데 년간 강수량이 24mm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의 국토 모양은 남북의 길이가 500km인, 길고 뾰쪽한 나라이다.
이 작은 나라의 년간 강수량이 최북단은 1,600mm이고, 최남단은 24mm로 그 차이가 아주 크다.
간추린 이스라엘 역사
<#성경의예언들>
이스라엘, 예루살렘, 유대인은 왜 멸망했나
솔로몬 성전 건축: (952 B.C.)
바벨론에 의해 파괴: (587 B.C.)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 (515 B.C.)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 성전을 모독: (168 B.C.)
유대 독립군 마카비 혁명: (166-160 B.C.)
헤롯 성전 재건: (20 B.C. ~ A.D. 26)
헤롯 성전 최종 완공:( A.D. 67)
예루살렘 멸망: (A.D. 70)
<유대 1차 반란 전쟁(66-73)>
67년 강도단인 시카리(Sicrrii),
극우저항단체인,
열심당(Zealots)이 연합하여 내란
67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만 병력 이끌고 예루살렘 진군
70년 봄 그의 아들 타이투스가 이끄는 4개 군단 예루살렘 포위
70년 8월 30일 전쟁 종식되고,
약 10만 여명의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로마의 콜로세움을 건축하는 노예로 전락
73년 마사다 최후 항전.
<제2차 유대전쟁(132~135년)>
랍비 아퀴바와 바르코크바의 승전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 A.D.)의 분노,
유대인 마을 985개를 초토화하고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60만 명 이상 살육 하였다.
시오니즘에 의해 1948년 5월에 이스라엘 독립 때까지
거의 2,000년 동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신구약 성경에서
구약에서는 '유다'로 표기하고
신약에서는 "유대" 로 표기했다.
유대는 헬라어로 '유다이아' 로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돌아 온 다음 부터,
사람들에 의해 다시 세운 지역으로,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직경 약 40 킬로 도 되지 않은 작은 지역 이었다.
어떤 책에서는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람 가운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다고 예레미야가 처음 예언 했으므로,
' 유대' 인이라고 첫번째 불려졌던 사람은 예레미야 라고 했다.
인구도 BC522 년 즈음에는 약 2 만명을 넘지 못했다.
다음 부터 차츰 커져서 BC440년 느헴야 시대는 약 5 만명,
알렉 산더 BC331년 때는 남쪽 이두메에도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신약 시대에서 유대는 요르단강 서쪽을 로마가 3개(갈릴라이아,사마리아, 유대)로 나누어
유대라 불렀다.
‘유대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의 Jews는 어원적으로
히브리어 ‘예후다’(유다)의 파생어 ‘예후디’(유다 사람; 에스테르서에 43회)에 기원한 것으로
야콥의 4째 아들 이름으로,
유다 땅 (다음에는 유다 지방) 출신을 유대 사람(Judean)이라 불렀고,
이것이 헬라어로 ‘유다이아’로,
다시 라틴어 ‘유대우스’, 결국 중세 영어의 Iewe에서 오늘의 Jew로 음역되었다.
한글성경이 구약에서는 ‘유다인’으로, 신약에서는 ‘유대인’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32회 사용된 ‘히브리’(이브리)라는 단어의 어원을
아브라함의 조상 ‘에베르’(창 10:21)나,
혹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에베르) 카나안으로 온 조상 아브라함이나(예호슈아 24:2, 3),
고대근동의 용병으로 떠돌아 다니는 것을 한 집단 난민인 하비루(Habiru)와 연계 한다.
(창 14:23; 삼상 13:3, 7; 14:6-7, 특별히 14:21절은 또렷이 이스라엘인과 히브리인을 구별하고 있다;
29:3; 요나 1:9 참조).
이 용어가 주로 외국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하는 별칭과 비웃는 의미로 사용된 것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참조. 창 37-50장; 출 1-15장, 삼상).
신약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헬라파’(헬레니스테스)와
구별된 ‘히브리파’(헤브라이오스) 유대인의 경우에서처럼(행 6:1),
주로 언어적인 측면에서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코린도 베타 11:22; 특히 ‘이스라엘’과 구별된 ‘히브리인’, 필맆포서 3:5).
따라서 ‘히브리어/아람어로’(헤브라이스티, 요 5:2; 19:13, 17, 20; 20:16; 계 9:11; 16:16; 참조.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현대히브리어로 ‘이브리트’)라는 표현이 이를 더 뒷받침해 준다.
고전 히브리어(Classical Hebrew)인 고대성경히브리어(Archaic Biblical H., 주전 10-6세기),
표준성경 히브리어(Standard Biblical H., 주전 8-6세기), 후기히브리어(Late H., 주전 5-3세기),
사해문서 히브리어(Dead Sea Scrolls H., 주전 3 - 주후 1세기),
미쉬나 히브리어(Mishnaic H., 주후 1-3/4세기)의 변천을 지나
중세 히브리어(Medieval H.), 특히 티베리아히브리어/마소라히브리어(Tiberain/Masoretic H.
주후 7-10세기)를 거쳐 19세기 초 독일의 ‘하스칼라’(Haskalah,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엘리에젤 벤 예후다(Eliezer Ben-Yehuda, 1858-1922)가
1881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와서 특별히 ‘제2차 이민’(Second Aliyah, 1904-1914)의 탄력을 받으며
미쉬나 철자법에 세파르디(Sephardi) 히브리어 발음을 기초로
‘현대히브리어’(Modern H. 혹은 Israeli H., New H., Standard H., Israeli Standard H. 등 다양하게 불리움)
을 창안하고, 영국 통치 아래서는 1921년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공용어로 채택되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지금까지 유대인의 공식 언어가 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기 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9년 텔아비브(요페)에 60 여 가정 250명의 유대인이 도착 하였다는 기록이
2020년 현재 텔아비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안에 남아 있다.
1948년 까지 이스라엘(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렸던 나라들
로마(70-313년)/비잔틴(313-636)/아랍(636-1099)/십자군(1099-1291)/맘루크(1291-1516)/
오스만 터어키(1516-1917)/영국(1917-1948) 1948년 5월 이스라엘 나라를 세움.
1894년 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현재의 땅에 세울 것이라는 것을 꿈도 꾸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나름대로 각 나라의 풍습에 물들어 가면서 살아들 갔다.
1894년 10월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출신 드레프스는 장교 였지만
단지 유대인 이라는 이유 때문에 엄청 억울하게 감옥 살이를 하였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시오니즘 운동을 하였다
1 차 대전이 끝이 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이 다스리고 있었다.
2 차 대전이 한창일 때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프랑스 , 도이칠란드 등
유럽 여러나라에서 반 유대 사상이 나타 났다. 특히 히틀러는 600 만명 이라는 엄청난 유대인들을 학살 하였다.
2 차 대전이 끝이 나고 1947년 유엔에서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땅에 세운 다고 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나라를 텔아비브(요페 ) 박물관에서
이스라엘 초대 수상 베구리온이 선포 하였다
텔아비브 시내 인구는 405,300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텔아비브(뜻 : 봄의 언덕, 에즈켈 3:15 에서 만든 이름)의 규모는 커졌고 ,
2007 년 중동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가 되었다
나라가 세워 지자 마자 중동 국가들과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도록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자기들이 돌아 갈 땅이 없으니까.
1968년에는 동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자리)도 빼 앗았다.
그리하여 2018년에 이르렀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국가 나라를 선포할 때 인구는 80만명 가까이 였으나,
2022년 이스라엘 인구는 960 만명으로
계속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남북 길이 500 킬로 동서 길이 90 킬로 북위 30-33 도 (제주도 33 도)에 놓여서,
여름은 기온이 높고 건조한, 비가 적게 오는 기간이 계속되고,
12월에서 3월 사이 겨울은 약간 따뜻하면서 지중해 쪽에서 편서풍이 불어서
비는 서쪽에 뿌리고 동쪽에는 거의 비를 뿌리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이다.
동쪽에는 4월과 9월 사이 사막 열풍이 불어 오는 예루살렘 남쪽 40-130 킬로 길이의 유대 광야이다
연간 강수량 500-700mm
(건조지역 300-400mm,사막250 mm미만, 갈릴라이 800-1,000mm,
예루살렘 800mm 사해 주변 50 mm미만 ),
이스라엘은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논 농사는 없고 밭 농사 뿐이다
땅은 석회암 지대가 되어서 천연적인 동굴이 많다
성경에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번 나온다.
시리아-아프리카 지진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80-100년 마다 큰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으로 많은 유적들이 파괴 되었다.
시편 46편 3절에서 (지진 다음에 쓰나미 현상으로 지중해) 바닷물이 솟굳치고 뛰놀아 밀려 오거나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겁낼 것 없다. (셀라)
(참조: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 현상이 닥쳐도 겁날 것 없다는 뜻)
예수 당시에 로마에서 이스라엘에 보낸 총독 폰티오 필라토가 머물렀던
지중해 옆의 행정수도 카이샤레이아도 2014년 현재 지진으로 다 부서지고 일부 시설만 남아 있었다.
지중해 옆의 카르멜 산에서 약 40 킬로 남쪽에 건설한 카이샤레이아에는
카르멜 산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도교 흔적도 남아 있다.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겨울의 우기 때 물을 받아서 저장 하는 곳이 많이 있으며,
빗물을 모아서 빗물 모으는 방법도 엄청 많이 있다.
풀과 나무가 거의 자라지 못하는 (사막 비슷한) 남쪽 지역의 광야(황무지) 70 % 이다.
모쉐의 출이집트 시대 법궤를 만든 쉬타 나무는
건조한 기후에 살아 갈 수 있게 뿌리가 70 미터 정도 내려 간다고 한다.
유대인의 절기 달력은 우리나라 음력과 거의 같다고 한다
초막절(7월 15일)은 우리 나라 음력8 월 15일 추석과 같은 날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는 9월 -12 월 겨울 철 이라서 나뭇 잎은 다 떨어지고 풀만 파릇 파릇하다고 하였다
그 때에 내리는 비를 이른비라고 성경에는 이야기 한다.
우기라 하지만 내리는 비의 양이 적어서 우산은 쓰지 않고
큰 모자만 쓰고 다니면 좋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에는 비가 적게 내려서 그런 비를 맞으면 좋다고들 한다고 한다
내가 이스라엘에 2014년 12 월 달에 갔는데
그런 풍경 이었다
건기는 2-7 월 달인데
보리나 밀을 그 때에 추수 한다고 하였다
그 비를 늦은 비라 하였다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으로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 쪽 나라들의 무력에 시달려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 키워 갔다.
아라비아 예멘에서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의 가자 항구 까지 6 개월정도 걸리는 향로 길이 옛날 부터 있었다.
이스라엘 남쪽 지방에만 매 30 킬로마다 "아브닷" 이라는 목욕도 하면서 쉬어 가도록
향로길 대상들을 보호해 주고 세금을 받는 곳이 5 군데나 있었다"
아브닷"에는 낙타를 몰고 향로와 유향을 싣고 가는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여러개의 방들이 마련 되어 있었다.
갓 태어난 예수를 찾아 왔던 동방 박사들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왔다.
참조 : 이강근 성지 여행.
면적은 약 22,000 kM2 로 한 반도 면적의 1/10 밖에 되지 않지만,
남북 길이가 약 500KM(서울-부산 거리), 동서 폭은 약 100 KM 미만으로 좁고 기다랗게 생겼다
요페(뜻:아름다움)는 텔아비브로 편입 되었고, 이스라엘의 주요 항구가 되어 있다
바닷 길로 오는 모든 것들은 이곳으로 들어 온다
솔로몬 시대와 그앞의 세대 에도 그러하였다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질 때에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던 사람들이 이 항구로 들어 왔다
국토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중해 바닷가쪽으로는 느린 경사를 이루고,
요르단강(뜻: 단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강)쪽으로는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꾸불렁한 요르단강 길이 약360 KM(직선 거리 약190 KM)이다.
지중해 옆의 옛 항구 이었던 곳은 남쪽 가자에서 북쪽 지돈 까지
2017년 현재 좋은 휴양시설이 많다
즉 예루살렘에서 예리코 까지 거리는 32 KM 이지만, 높이 차이는 1,000 미터 이다.
고대 이스라엘 도로는 2 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는데, 국제도로인 '지중해 바닷가 길'과,
요르단강 동쪽으로 남북으로 남쪽 홍해 옆 에시온게벨에서 북쪽 다마스쿠스 까지
'왕의 대로' (King's Way)가 구약 성경에 여러번 나타나 있다.
예멘에서 지중해 연안 로마 시대에 (지중해 바닷 가의 이스라엘 행정 수도 카이사에르)항에서
바닷 길로 향료를 실어 나르던 낙타로 2 달반 걸렸다.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관문 텔아비브(욮페)에서 자동차로 동쪽으로 약 1 시간을 달리면,
해발 800 미터에 위치한 예루살렘(뜻:평화)에 도착하고,
거기서 자동차로 약 30 분 정도 달리면 지구에서 가장 낮은 해발 -300 미터에 위치한 예리코가 나타나고,
거기서 남동쪽으로 가면 해발 -400 미터에 위치한 사해가 보인다.
예리코는 오아시스 이다.
예리코 주위에 대추야자 나무들이 많고,
예리코 지역에서 일하였던 엘리사 물이 그 옆으로 많이 흘러 가고 있다.
2014년 현재 예리코는 고고학적 발굴을 하느라,
흙더미와 둘러친 울타리 밖에 다른 것은 볼 수 없다
2014년 예리코 인구는 약 2 만명이다. 팔레스타인이 많이 산다.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사해 바닷속 약 20 미터에 위치해 있다.
지중해에서 불어 오는 편서풍이 서쪽 지중해 바닷가 지역에는 넉넉한 비를 뿌려주지만,
해발 600- 1,000 미터의 서부 산악 지대를 넘지 못하고 동쪽으로 가면서 사라진다.
보통 90 %의 비를 서쪽에 뿌리고, 나머지 10 %의 비를 동쪽에 뿌린다.
이런 편서풍과 남쪽에서 불어오는 힘센 더운 바람 때문에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동쪽에 유대 광야가 만들어 졌다.
뛰넘절이 있는 양력 4 월 부터 초막절이 있는 10 월 까지는 건기이기 때문에
풀이 잘 자라지 않고 10월 초막절(추수 감사절)이 지나면
이른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풀을 잘 자라게 한다.
헤르몬산(해발 +2760 미터), 에발산(해발 +940 미터), 그리짐산(+854 미터)
(에발산 꼭대기와 그리짐산 꼭대기 거리 2.4 KM)
우리 나라로 치면 위도가 제주도(33도) 보다 남쪽(예루살렘 32도)이기 때문에, 겨울에도 대한민국보다 따뜻하다.
사해는 해발 -400 미터에 위치하기 때문에 12월에도 사해에 들어갈 수 있다.
사해 근처도 거의 같은 기온으로 12월에도 건조하고 따뜻하다.
예루살렘은 지대가 높기 때문에 겨울에 가끔 눈도 온다고 했다.
이슬람 지배하에서 평화롭게 살던 유대인들과 아랍이 갈등하게 된 것은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2000년 동안 눈물 흘리며 남몰래 기도하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질 때가 왔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였다.
1897년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헤르츨은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 참석하였지만, 점차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 영국으로부터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925년 3월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천 명이었으나,
1933년에는 23만 8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갑작스러운 유대인의 증가는 아랍인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시온주의는 더욱 불붙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날마다 먹는 것은, 밥이 아니라 빵이다.
가운데가 텅 비어 있어 거기에 온갖 다른 것들을 넣어서 먹을 수 있다
헴버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스라엘에는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벼 농사가 없다.
기존 성경에 "떡" 으로 번역 해 놓은 것은 1900년 대 초에는
조선에서는 떡은 쉽게 알 수 있었으나 빵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쌀 가루를 만들어서 떡을 해 먹기는 쉬웠으나
밀을 재배하여 가루로 만들어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비가 적게 오기 때문에 논이 없고 밭 밖에 없다.
성경에도 밭은 있어도 논이 없다,
쌀 농사는 강수량이 연간 1000 밀리 이상 내리는 곳에만 가능하다.
2014년 현재 인구
(유대인 600만명(75%), 아랍인 160 만명 (21%),러시아인 100만명, 드르드족 기타 40 만명)
종교 : 유대교 80%, 이슬람교 15 %, 크리스토교( 2 %, 로마 카톨릭, 그리이스 정교, 개신교)
언어 :히브리어(공용어), 아랍어(공용어), 영어
2014년 현재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의 예수가 태어난 곳 옆에는,
히에로니무스(영어 :제롬 Zerom AD347-420) 를 기념하는 곳이 있다
성경을 구약은 히브리어와 (헬라 시대의 세계어인 헬라어) 70인 역에서 라틴어로,
신약은 (헬라시대 세계어인) 헬라어에서 로마 시대의 세계어인 라틴어로 번역했다.
다시 (로마에서 사용하는) 라틴어에서 영어, 독일어,프랑스어로 번역 되어 세계로 퍼졌다.
마타이오 복음 맨끝에 말라키에서 신약시대 까지 약 400 년간 이스라엘 중간사를 덧붙였다.
(참조: 성경과 관련된 6 개 제국 1.이집트. 2. 앗시리아, 3. 바빌로니아,4. 페르시아, 5. 헬라,6. 로마)
# # # # # # # # # # * * 마타이오 복음 1장
(참조 : 저자 마타이오는 세관장 이어서 복음서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다
데나리온, 코드란테(로마 동전 1/16 데나리온(마5:26),금전(금돈 크리소스:25 데나리온(마10:9), 앗사리온,
쉐켈, 탈란토 = 6,000 데나리온, 데나리온(노동자 하루 품삯)
*** 예수 크리스토의 (사람) 족보 ***
1. (하나님이 우상을 섬기고 살던 지역 메소포타미아에서 불러내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뷛의 자손인 예수 (헬라어로는)크리스토(히브리어로는 메시아,구세주)의 (사람) 족보이다.
2. 아브라함이 이사앜을 낳게 했고,
이사앜은 야콥을 낳게 했고,
야콥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게 했고
3. 유다는 (유다의 맏아들 엘의 마누라이었던) 타마르에게서 페레즈와 제라를 낳게 했고
페레즈는 헤즈론을 낳게 했고,
헤즈론은 람을 낳게 했고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게 했고,
암미나답은 나흐숀을 낳게 했고,
나흐숀은 살몬을 낳게 했고
5.( 예호슈아가 슅팀에서 두 사람을 스파이로 보낸 가운데 한사람) 살몬은
(예리코성의 술장사)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게 했고
(당시 나이 많은) 보아즈는 ( 나오미의 죽은 아들 마흘론의 미망인 모압여자) 룯에게서 오벧을 낳게 했고
오벧은 예샤이를 낳게 했고
6. 예샤이는 다뷛 왕을 낳게 했다.
다뷛은 (헷(힛타이트) 출신 장군) 우리야의 아내이었던 (밭쉐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게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