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 가삼현 사무총장과의 인터뷰. 2002년 월드컵 준비기간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영입을 주도적으로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진 그는 대한축구협회 국제국장을 거쳐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가 총장은 이 인터뷰에서 '본프레레 감독 시절 기술위원회가 특정 스트라이커를 대표팀에 뽑지 말라는 이야기를 감독에게 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존 :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해달라.
가 : 대한축구협회 (KFA)의 사무총장이다. 국제부에서 10년 넘게 일했으며 월드컵과 2001년 컨페데레이션스 컵을 조직하는 일도 담당했었다. 현재는 국제업무뿐만 아니라 마케팅, PR, 매스컴과 같은 총괄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업무는 대회와 관련한 것들이다.
한국의 “미스터 풋볼”인 것 같다.
(미소를 지으며) 꼭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다. 난 공을 잘 차지 못해서…
KFA가 그동안 이룬 업적의 하이라이트는 2002년 월드컵이었나?
지금까지는 그렇다.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2002년 이후의 문제에 대해 KFA가 힘든 성과를 거두고 나서 너무 여유를 부린 건 아닌지 생각한다. 이에 동의하는가?
2002 월드컵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조직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매우 성공적인 시간이었고 우리 팀과 국민들 또한 행복했다. 전문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나면 기대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정부, 언론, 팬과 한국사회, 모두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버렸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한국 축구의 저변과 발전에 대한 배경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우리 대표팀이 그동안 다른 나라 대표팀들과 얼마나 많이 비교 대상이 되어왔는지 당신도 알고 있을거다. (하지만) 둘 간의 차이는 크다. 축구의 문제만이 아니다. 과거의 한국 스포츠는 오직 엘리트 체육 시스템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모든 스포츠가 열악한 저변을 갖고 있고 선수들의 숫자도 제한되어 있었다. 많은 것들이 엘리트 선수에게만 집중되었었기 때문이다. 유소년 축구부터 프로선수의 레벨까지 성장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나라의 팀들이 클럽 시스템이 아닌 학교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 중이다. 클럽 팀들을 위해 대회와 각종 토너먼트를 소개해 도입하고 있으며 수 백 개의 클럽 팀들이 이에 참여하려 하고 있다.
2002년, 국가대표팀은 KFA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그 이후로 이루어진 지원은 같은 수준이었나?
2002년 월드컵까지는 프로팀과 선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좋은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대표팀의 월드컵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월드컵 대표팀의 훈련캠프가 며칠 동안 진행되었었는지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K리그를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연기하기도 했었다. 거의 모든 게 완벽했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사람들은 “우리는 월드컵 4강 팀”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부분 축구 선진국의 시스템을 따랐고 전에 갖고 있던 규정을 여러 번 고쳤다. 작년에도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대표팀에 소집되는 날짜를 계속해서 줄여나가기 위해 다시 규정을 수정했다. 이제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규정은 FIFA의 것을 따르고 있다.
우리 선수들은 이번 주말 경기 (이란 전)를 위해서 이틀이라는 시간밖에 얻지 못했다. 이것이 FIFA의 공식 경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란 선수의 소집은 우리 선수들 보다 더 빨리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란전은 스케줄이 재조정된 경기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FIFA의 룰을 따른다. 요즘은 이러한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심지어 2006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도 선수들을 함께 소집하지 못했었다. 과거에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선수들을 한 달이나 두 달 동안 소집하는 것도 가능했었다.
2006 월드컵의 막바지 준비과정에 있었을 때, 우리는 3~4주의 훈련캠프를 차리기 위해 K리그 클럽들과 길고도 어려운 협상을 진행했었다. 그 뒤로는 FIFA의 공식 소집일 이외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표팀을 위한 시간을 단 하루도 더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은 대부분의 나라들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 상황에 대해 불평을 하자는게 아니다. 그저 우리의 기준이 유럽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상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의 기대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사람들은 선수들을 2~3달씩 소집할 수 있던 시기에 얻었던 결과를 아직도 기대하고 있다. 현 대표팀 감독은 큰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 대표팀의 감독조차도 부산대회에 출전할 선수들을 소집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감독은 19세가 된 좋은 선수들을 선발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프로팀에 소속되어 경기에 나서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많은 팬들은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해 경험을 쌓기를 바랬고 우리는 선수들이 해외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박지성과 이영표 같은 유명 선수들의 대부분이 해외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국내리그도 문제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코엘류 감독이 떠난 이후 감독을 선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본프레레 감독을 선임하기 전, 기술위원회는 너무 공격적인 자세로 이 문제에 대해 접근했었다. 많은 인물들을 영입대상에 올렸고 공식면접도 가졌었다. 메추, 스콜라리, 귀네스, 아일랜드의 매카시도 만났다.
KFA가 이 사람들을 전부 만났었단 말인가?
그렇다. 6~7명 정도되는 많은 사람들이었고 이는 일반적인 방식의 구인(求人)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계 정상에 올라본 경험이 있는 스콜라리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면접을 본 6~7명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좋게 생각할 리가 없다.
본프레레는 애초 명단에는 없었던 것 같다.
맞다.
왜 본프레레가 선임되었던 것인가?
본프레레는 이용수 교수가 위원장으로 있던 2000년의 리스트에 있었다. 우선적으로 에메 자케와 히딩크를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고 또 다른 두 명- 앙리 미셸과 본프레레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후보자를 갖고 있었으나 자케와 히딩크 그리고 본프레레를 생각했었다. 공식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내부토론을 가졌었기에 이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케를 먼저 만났고 그 다음에 히딩크를 만났다. 그리고 작업을 종료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본프레레와 앙리 미셸이 그 다음 순서였다.
결국, 본프레레가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의 감독도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당시에 그는 1996년의 나이지리아 올림픽 대표팀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음 번에도 그는 우리의 리스트에 있었고 40~60명 정도 되는 후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본프레레는 감독직에 지원한 한 사람 중 하나였다. 우리에게 오고 싶어하는 몇몇 감독들이 있었다. 추천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고 스콜라리처럼 기술위원회에 의해 선정된 사람도 있었다.
본프레레가 자신이 감독직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는 아시아에서의 감독직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다. 2004년 당시, 우리는 브루노 메추를 영입하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메추는 우리의 첫 번째 카드였지만 그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발표되었을 때는 아주 끔찍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발표를 했던 당일, 그는 내게 전화를 해서 하루에 100통 이상의 전화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메추는 무척이나 초조해했고 결국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는 마음을 바꿔 카타르 팀으로 가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기술위원회는 감독 선임과정과 후보자들을 비공개로 감춘 채 일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5~7명 정도의 다른 후보자들을 갖고 있었고 지명도가 떨어지는 감독들을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북유럽 출신의 감독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게 누구인가?
정확히는 말할 수 없다. 북유럽 출신의 감독들 그리고 동유럽 출신들, 남부 유럽 서유럽, 모든 사람들을 만났다. 기술위원장은 서유럽 출신 감독의 영입을 강력히 원했었다. 또한 동유럽과 북유럽 출신의 젊고 유능한 감독들도 만났었다.
왜 서유럽 출신인가?
서유럽 출신들이 다른 지역 감독들보다 좀더 영리하고 적극적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영어를 할 줄 아는 감독을 만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만났던 두 명의 젊고 유능한 감독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미 시간은 6월 하순으로 흐르고 있었고 7월 중순에 아시안 컵을 치러야만 했었다. 명망 있는 좋은 감독을 얻기 위해서는 유로 2004가 끝나는 시점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두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아시안 컵에서 좋은 경기를 펼치지 못할 경우 그게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위원회는 더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아시안 컵 이전에 감독을 선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정들이 너무 촉박하게 이루어졌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메추는 연봉문제로 감독에 선임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인가?
그와 나 사이에서는 연봉 문제가 거의 합의됐었다.
그렇다면 왜 그가 감독이 되지 못했던 건가?
내 의견은 이렇다. 메추는 엄청나게 많은 전화를 받고는 매우 초조해졌다. 그의 부인은 세네갈 출신인데, 그녀 역시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자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슬람 교도들과 많은 흑인들이 있는 중동에서만 살아보았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메추도 어떤 이유를 이야기했을 것 같다.
그는 다른 팀으로부터 높은 연봉을 제안 받았었다.
본프레레는 KFA의 부족한 지원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었다. 그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본프레레 감독은 KFA가 히딩크 감독에게 해주었던 지원과 비교를 했던 것 같다.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2002년 이후 선수들의 소집일수에 대한 규정을 바꾸었다. 본프레레 감독은 몇몇 기술위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기술위원장과의 관계가 그랬고 그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곤 했었다. 감독이라는 자리에는 많은 권리가 주어지지만 감독은 선수 선발과 코치진의 선발에 대해 위원회와 상의를 해야만 한다.
(가삼현 총장은 내게 비공개로 이야기했지만 그 뒤 공개 인터뷰 상황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으니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2004년 12월 독일 전을 앞두고, 위원회는 본프레레에게 특정 스트라이커를 선발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술위원회 위원장이 본프레레와의 면담을 요청할 때면 본프레레는 항상 내게 동행을 요구했다.
기술위원회는 본프레레가 고려해 볼만한 몇몇의 좋은 선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선발되지 않았던 박주영, 현재 대표팀에 있는 오범석과 같은 선수들이었다. 김영철도 당시에 선발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한국의 많은 감독들이 대표팀에 필요한 좋은 자원들이라고 여겼던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본프레레 감독은 그들을 선발하지 않았다. 기술위원회는 감독에게 이 선수들을 한번 테스트해보라고 추천했었다. ‘수비가 약하니까 이 선수가 필요할 것 같다.’ ‘재능 있는 좋은 스트라이커인 박주영을 한번 써봐라’
이것은 선수에 대한 추천이었다. 위원회는 결코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만족할 수 없을 거요!” 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위원회는 감독이 그 선수들을 체크해보았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당신이 감독이고 외국에서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며 지도자 생활을 한다면, 그러한 제안을 거절한다는 게 어려웠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가?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선수들을 결코 뽑지 않았다.
기술위원회가 개입되는 것은 흔한 일인가?
기술위원회의 멤버들은 외국인 감독이 선수들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부의 멤버들은 전직 감독들이다. 그들은 특정 선수에 대해서 오랜 기간 동안 알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독이 그 선수들에 대해 좀 더 알게 된다면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위원회가 그렇게 많은 선수들을 추천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선수가 진짜로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몇 명을 추천했던 것이었다.
외국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KFA의 추천이 압박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솔직히 얘기하면 그랬던 것 같다. 아마 본프레레 감독은 그것을 일종의 압박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 본프레레는 결코 ‘no’라고 대답한 적이 없지만 그 선수들을 선발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히딩크나 아드보카트의 경우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no’라고 이야기를 했다. 본프레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추천 받은 선수들을 선발하지 않았다.
본프레레가 사임하지 않았다면, 그가 해임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확실하게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는 사임하기 전에 많은 사람과 상담을 했으며 위원회도 미팅 가질 계획이었다.
당신 생각에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나는 기술위원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②편에서 계속
번역: 조건호 (스포츠 전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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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프도 결국 희생양이지 ㅉㅉ
본프레레 코엘류.. 최대의 희생자
아스콜라리 대박아깝다 최고명장을...솔직히 기분나쁘겟다 브라질우승으로이끌엇는데 6~7명중의 후보라니 아 스콜라리한테 올인하지
스콜라리 우리 대표팀한테 관심은 보였는데, 축협이랑 안 맞았데요..
어째든간에 스콜라리는 몸값이 허벌라게 비싸서 ..
그 뽑지말라던 공격수는 누구였을까 .....
옛날에 ㄴㄱㄷ 라고 소문은 있었는데........... 진짤까.........
남궁도요?
2002년도 본프레레가 안된게 천만다행이네............
기술위..........................................................................
기술위원회가 존듀어든 압박하는거 아니여 ㅡㅡ ㅋㅋ
이관우선수는 그런일없겠지...
스콜라리 ..아깝네
메추가 진짜 아깝네.... 역시 언론이... ㅉㅉ
우리가 모르는 비리들이 있겠지,, 선수 기용과 부족한 지원,그리고 코치,스탭들과의 불화. 본프레레가 왜 자진 사퇴했을까? 네티즌 난리 치지 축협해서 압박하지, 성적은 갈수록 부진...
듀어든 이사람한테 돈 주고 칼럼 좀 안맡겼음 좋겠어요. 돈 아까움
존듀어든씨 칼럼 가서 글 다시한번읽어보세요.
당신이 칼럼 한번 써보셈ㅁ
낚시즐
메추가 왔으면 대박인대 아 스벌 톨아이 새키들
헉~ 스콜라리????????????????? 그런 명감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