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영시모음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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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에 부치는 편지
지소영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듯이
원하는 것 모두 가질 수 없는 정당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였다
너와 나의 현실이고
어찌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마음 또한 소유물이 아니기에
아픔과 괴리로 혼란하기도 했었다
좋은 생각을 늘 추구하지만
미완이기만 하여
다스리지 못하는 욕심으로 자신을 소비했다
이 자만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우리의 내일은 기약도 없고
바람처럼
무덤을 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작은 진실 하나 있었다면
마지막 떠나는 길 위에서
희망이 되었을 터인데
우리의 영혼에
깨끗한 순결 지켰다면
삶의 지표가 되었을 것을
부족하여
여려서
서투르기만 하여서
부와 가난의 경계를 서성거리며
벽을 허물지 못했다
사랑과 미움을 풀어 안고
신처럼 거북이처럼
짧은 길을 긴 그림자 지어내며
느릿느릿 착각하며 걸어 왔다
다시 찾아 온 이 가을에
너에게 쓰고 싶은 편지
지난날의
회색 빛 하늘을 잊고
뜨거웠던 여름을 버리며
사랑했던 시간
하얀 벽에 걸고
흐르는 그리움으로
울기도 한다
내 안 따스하게 스며진
너의 체감이이 가을의 거리에
전해 질 때마다 나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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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에 쓰는 편지
지소영
당신의 정의로운 웃음 건너
굵은 소나기를 보았지요
밤과 낮 분수처럼 쏟아 내던 열정도
당당한 세월을 낮출 수는 없었어요
이별도 만남도 태연히 포장했던 당신의 겸손
이방인의 눈물이었습니다
어제는 지나갔지만
용서한다면서도 돼 올라오는 아픔에
세뇌당하지 마세요
우리의 삶은 반란하지 않습니다
내 몫은 저에게로 돌려주십시오
노을처럼 타는 가을을 바라보니
우리가 부끄러워집니다
내 눈높이로 사랑하고
가진 것으로 나누어도 충분했던 것을 몰랐습니다
온전치 못하여 넘어지고
슬픈 상처 끌어안아 더 힘들지만
이제 재활용은 그만 하겠습니다
당신의 의지만큼 나도 살고 싶었어요
잊히지 않는 것들
묻을 수 없는 것들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죄책감과 사랑은 엄연히 다르잖아요
삶의 보편적인 이유로 또는
내가 낮아지지 않아
끝간 벼랑을 달리지 마세요
파란 낙엽처럼 피우지 못하고 떨어져야 하는
슬픈 인연이었다 해도
아쉬워 미련을 부여잡지 마세요
이제 무공해 연못에 우리만의 황금 물고기를 키워요
말하지 않아도
장애인인 우리는 저하된 기능 서로 보이잖아요
끊기지 않는 운명처럼
아름다운 공감은 고귀합니다.
가을이 돌아오면 몸 앓이를 하겠지요
비와 바람, 별과 하늘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들만 생각해요
지우기 연습도 함께하고요
젖은 옷을 벗고 이리로 와 보세요
우리가 불가사의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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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망의 꽃
지소영
봄비 적시는 새벽이면
하얀 그늘 드리우는 둥근 하늘
나란 기억
행여 달무리로
당신의 언저리에 머물까
세월 흐르면 잊혀지고
조바심하던 마음마저
썰물 된다지
내가 보고싶지 않냐고
묻고 싶은 얼굴은
외진 눈빛 보내와
신음으로 꽂히고
양지 한켠 모닥불 지피는 봄은
아지랑이 연기되어
얇아지는 너를 흔들며
내 눈물을 퍼가는데
긴 기다림 매화꽃봉우리는
설레임 터뜨리고
내 마음 갈망의 꽃인가
그들과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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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감사하는 당신의 향기
지소영
세월 속에서 잃어 가는 것들이 많지만
때로는 비와 바람을 보내시어
한 걸음 물러서서 돌아보게 하십니다
가진 것이 많아 홍수처럼 넘치고
누림에 익숙해져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교만을 알도록
기도 길을 주셔서
새벽을 빛 차게 하십니다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결정에도
큰 혜안이 되지 못한 실망 대신
따뜻한 지원으로 배우게 하십니다
살면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탐욕하고
베푸는 것에 인색한 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감사가 없어도
나눔으로 선한 달빛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가진 것을 일구고 노력하는
근면과 지혜를 주십시오
보고 듣고 느끼는
천 개의 응원을
날마다 기억나게 하시는 오늘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계시어 '나만'에서
깨고 나오는 기적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당신은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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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울 창가의 그리움
지소영
떨어지다가 끝내는 풀밭에 주저앉았다
땅 가까이 스미어
눈감고 재웠던 빨간 이야기들까지
창을 미니
기다렸다는 듯 품에 안기더라
알아 왔던 진실
삐걱거렸던 나눔
달력의 숫자만큼 돌아와 활자체를 불리고
어디엔가 너만의 보존을 찾고자
생채기로 그었던 정리되지 않은 기록들이
음성 녹음으로 귓전을 맴돌기도 한다
어긋난 여름은 기차를 탔고
간이역에서 얼었던 그날의 겨울은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세상 속으로 숨었다
봄 햇살 같았던 가슴
흔적으로 두지 않겠다
부정맥으로 계단을 오르지 못하게 했던
죽음 같던 무호흡도
운명이라며 널 되묻지 않겠다
내게로 오는 바람 그대로
막지 못하는 겨울비 그대로
눈 내리는 창가에서
묵언으로 조용히 손을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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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백해줘서 고마워요
지소영
고백해줘서 고마워요
정직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두 개의 얼굴을 봅니다
자꾸 놓아주기 싫고 아쉬워지는 것들에게 현혹되어
뒤뚱거리곤 했습니다
이미 지나가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인정하도록 해요
이별은 혼자만의 사슬입니다
그때 그 시절은 바래어가고
더 칠할 수도
싫다고 지울 수도 없어요
슬픈 인연의 날개 저으며 비가 되기도 하고
비둘기처럼 소리 없이 울기도 하지만
서러울 이유 하나
더 사랑할 수 없었던 나를 후회하는 일입니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서 여기까지 오니
우리가 뿌렸던 진실은
더디게 더디게 파란 잎으로 자랐습니다
날마다 지하수 한 컵씩 들이키고
토스트에 구운 빵 한 조각 나누는 일에
행복한 당신의 음악, 덤인냥 얹어 주세요
치렁치렁 걸쳤던 보석도
명품 코트도 이젠 무겁기만 합니다
평범한 청바지를 걸치고
손 체온 맞잡고
먼지나는 시장길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상추를 꺾으니 뽀얀 젖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설렘 같아요
방울 토마토가 사랑의 환희처럼 빨갛게
입안을 물들여요
과거 때문에 초라한 현실을 더 비교하지 마세요
어제와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아요
운명 같은 이 시간을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요
어제가 그리움이라면
내일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는 꿈일지도 모릅니다
성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균형을 잃지도 말자고요
있잖아요
어둠에 그냥 물들어가듯
바위틈에 부딪히는 물결처럼
자연스러운 사랑의 마찰에 예민하지 마세요
당신,
고백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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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냥 당신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지소영
가을비가 추적추적
당신을 찾아가는 길만큼 단내를 흘립니다
내게로 오는 길만큼 해초 내음을 섞입니다
나는 그냥 당신을 알고 있을 뿐이지만
당신이 그냥 그리울 뿐이지만
바람 한잠 자면 그 곁에서 눈을 감고 싶고
비구름 햇살에 승복하면 그냥 녹아 스미고 싶습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아도
함께 하는 사람을 닮아가듯
호흡도 닮아갑니다.
기다리는 침묵도 달랠 줄 압니다.
오늘은 당신을 불러 봅니다
내 가슴에 흐르는 피만큼
빨갛게 익는 당신의 가슴이 느껴지네요
이런 푸념에도 우리가 낮아지지 않고
따스히 바라보게 하심은
무언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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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흐린 독백
지소영
후회보다 사랑을
아쉬움보다 아낌없이
나보다 당신 먼저
그러고 싶었는데
돌아보면 욕심이고 이기였고
성숙하지 못했다
나에게 자만했고
작고 소소한 것으로 행복하자
입술로만 되뇌는
가난한 가슴
포장에만 급급해하지 않았는지
안다고 하면서도 모르는
엄마의 자비로 베풀지 못하고
세월을 거슬리진 않았는지
진실은 아끼고
나를 닫고 살지는 않았는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동쪽 하늘에
남루한 어제를 씻으며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나는
슬픈 훈련과 설익은 비를 맞고 있다
연습이 없는 인생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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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대에게 가는 길
지소영
햇살이 좋아 당신의 산을 오릅니다
바람이 감미로워
당신의 심장을 두드립니다
빗소리에 촉촉이 당신을 음미하며
눈을 감아도 봐요
낯이 익은 손 향으로 날개를 빚고
밀어내지 못한 어둠 속에서
다정한 밀어를 도란거립니다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이면
마음으로 오는 향기는 빛으로 부풀려요
꺼내 보이지 못해
숨겨 둔 그리움은 아픔으로 지직거리고
어제가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하고
가슴 속 파도를 거릅니다
무분자의 설레임
겹겹이 세우노라면
물 끝에서 번져오는 무제의 연가
그대와 내가 닿지 않아 서러울 섬에
모랫깃마다 바다색 비밀
그림자로 드러누이고
우리의 언어를 불려서
부르지 못한 노래를 보냅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에는
물안개 저리도 떠나지 못하고
씻어내지 못하여
버거운 고백으로 되뇌이는 메아리
내 영혼의 빗장을 여오니
주인이 되어 주세요
그대의 시선에
진 포도 넘치도록 부어 드리오니
나만의 꽃잎을 허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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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리운 기억의 수채화
지소영
주어진 삶의 시간 속에서
보고 싶은 갈망
숙제처럼 가슴 한쪽에 밀쳐 두고
마음만 채찍하며 살아가게 되네요
당신도 그러한가요
구석구석
은밀하게 나누어주시는
그대 달콤한 영혼의 노래
귀 기울여 내 가슴에 담지도 못하고
아침과 밤을 멀미하듯 보내는 눈물스러운 날들
그대 용서해 주실 거지요
때로는
하루가 고장 난 시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허황한 꿈을 꾸어도 봐요
해질 무렵 어둠이 내리는 산야에
당신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오늘 그대에게 보내는 특별한 선물이야'하며
환한 하늘을 보내는
당신의 뜨거운 포옹을 받고 싶어요
지친 하루가 백양나무 숲을 지나왔던
그때의 은빛 노래로
한 아름 채워질 것 같거든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짧아서
듣고 싶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도
말 한마디 따스하게 건네지 못하는 아쉬움
나만의 아픔만은 아닐 거예요
당신도 내 마음을 느낄 것 같아서요
비껴만 가는 현실
그리움도 온 길을 되돌아오다가
길을 잃곤 해요
바람이 짓궂게 방해도 해요
자동차 열쇠를 차안에 둔 채 문을 잠그고
밖에서 떨기도 해요
남아 있는 기억의 수채화에
나도 모르게 하얀 물감을 많이 섞었나 봐요
그대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당신을 읽을 수 있었던 축복
목이 타도록 되뇝니다
항체가 아주 작아졌어요
에너지가 낮아져서 당신의 그림자도 바래어졌어요
미안하다는 말만하게 되네요
전화로도 닿지 않고
편지를 쓰지도 못하고
문자로도 눌러지지 않아 답답해요
그분이 주신만큼의 흔들리는 배에서
울렁거리면서도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내 침묵이 게으름이라 탓하지 마셔요
느려 보이는 걸음이 서럽다 하지도 마세요
내 영혼의 비틀거림이 가난하다고
외면하지도 말아 주세요
살찐 꽃잎 도톰히 대문에 걸어 두오니
그대, 내가 가지 않아도
친한 걸음으로 문을 두드려 주세요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잖아요
변명처럼 들리는 바람의 소리로
안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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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리운 사람에게
지소영
그냥 지나치기만 하다가
봄 아침, 함초롬히 젖은 우체통을 열었습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이지요
두툼해진 일기장은 서랍에 가두어 두고
그날그날 현실에만 급급했습니다
손가락을 건드리면 당신을 들을 수 있고
이름 한 자만 불러도 내 곁인 양 달려와 줄 터인데
그러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평안하시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아픔 숨기고
인내로 견디기 위해 동분서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머뭇거리게도 하네요
폭우가 있었고, 비행기가 추락했고
자녀가 가족을 해치는 거친 광야의 현장에서
다루기 어려운 슬픔으로 힘들어하시지는 않는지요
우리의 삶에는
드러내지 못하는 작은 마음의 집이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라 해도 어느 부분을 가려야 하는 것처럼
사랑이라 해도
입김을 나누는 건 잠시의 순간일 때가 잦습니다
그리움이 때로는 타인이 되는 것처럼
오늘은 잠구어 두었던 가슴의 빗장에
열쇠를 끼워 봅니다
녹이 슬었는지 삐거덕거리네요
지나온 삶은 진실이었는지
견고했던 울타리를 풀며 돌아봅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가끔 웃음도 지어지고 그늘도 드리워지곤 했습니다
닫힌 내 마음의 반란인지
누군가 내가 필요할 때
그의 곁에 있었는지
사사로운 것에 목숨 걸며
외면했던 이웃은 없었는지
높았던 벽돌을 한 장씩 내려봅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날을 위하여
내 모습 그대로의 미소를 보냅니다
뜻 없이 흘려버릴지도 모를 당신에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한마디
보고 싶기도 했고 그립기도 했었다는
그 한마디 듣고 싶은 것도
나의 욕심인 것 같아 두려워지는 오늘입니다
당신의 향기가 그리웠습니다
선한 눈빛이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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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지소영
여름 뜨거운 날
태양만큼 빛나던 눈빛이 생각나
코발트 바다를
뒤적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출근길 페리(Ferry)를 탈 때마다
파도의 숨결을 보내면
바다처럼 감성을 터치하는 문자로
더 깊게 내 마음을 헤아리는
영혼이 맑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봄 날
추위가 조심스레 파랗게 물러가던 날
봄처럼 스치어 지나갈 바람을
덥석 함께 잡은
선물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새벽바람을 부딪히며
은혜의 언어를 철석거리며
신의 울타리에서
우리는
목청껏 웃고 울며 교감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또 겨울
또 봄
순례하는 질서안에서
눈길 가는 곳마다
그만의 색깔이 덧칠 되는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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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운 한 사람 있습니다
지소영
세상의 모든 소리
훈련한 것처럼 모두 삼키고
무서운 단절 속에서도
그리운 한 사람 있습니다.
벼랑과 물길에 미끄러지고
하늘도 바다도 들리지 않는
어떤 갈림의 끝에서도
반딧불처럼 영혼을 깨우는
한 사람 있습니다
아플 때
쓸쓸할 때
허허로운 웃음으로 길을 메꿀 때에도
그 한 사람으로
핸들을 꼭 잡을 때가 있습니다
저만의 자태로 초연히
한가지 수채화로 멈춘 가을
그에게 용해되어 소속이 없어져도
한 사람을 닮고자 옷을 벗습니다
지금까지 통독해준 당신이 감사해서
미립자로 엉기었던
흐리고 맑았던 날에 적응할 수 없어
그로 파생되었던 눈물이
용서와 사랑이 되는 그 순간에도
성스러이 한 사람을 들입니다
쳐지고 나약해진 날개로도
비상하는 꿈을 심으며
당신이 읽는 내가 내가 아니어도
내게 보인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 해도
신처럼 투영되는 혼
아름다운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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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다림은 길이 되어
지소영
기다림 길이 되어
그대에게로 가는 날들
추억이 종종거리는 마을 어귀에
아지랑이 꽃물결은 흘러 지나고
바래지 않는 맑은 하늘에는
사랑이어 좋을 빛
눈에 괸 멍에의 자리
외진 마음 솎으며
멀어질까 봐 무명실 꿰는
영혼이 숨을 쉬는 나라
나무가 되어
그늘이 되어
서로 보듬는 우리의 세상
흔들리며 아파하며 물레를 돌린다
한발 늦어 잎이 지고
한발 앞서 꽃이 되고 싶었던 마음
찻잔에 타서 마시며
한 모금씩 비워내는 운명
목줄기를 지나며
다시 그리움으로 채워지고
숙명이라며 떠나지 못하는 날개
창가에 퍼덕이는 새 한 마리로 너는 있다
깃털 모아 둥지 세우며
걸어라
날아라
손발 씻기던 꿈같던 긴 행진
한 톨 두 톨 올리던
그대 가슴의 샘물
초록 두레박은 나지 않은 길을 내고
초승달 둘러앉은
작은 별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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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다림의 계절
지소영
등을 켭니다
정결히 기름을 갈고
심지를 털어 내니
당신은 금빛 불꽃이네요
긴장한 허리로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며
물레질 둘둘 홍색 옷을 입힙니다
긴장한 허리로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며
물레질 둘둘 홍색 옷을 입힙니다
비둘기 모자에
광채를 보셨나요
소명을 다하는 여자
묵묵히 지켜보시는 당신은
나의 신랑입니다
사막의 샘물은
그만의 기다림을 알지요
어린 감나무같이 당신을 높이며
땅을 연모하는 비처럼
성감대 구석구석 황홀의 건드림
당신의 아리아를 연주하며
기다림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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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깊어만 가는 것들
지소영
누구나 그러하다지만
이 가을만큼만 할까
햇볕을 가로막고 물빛 하늘을 내닫는 안개 터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좋았던
젊음, 낙엽들이 깊다
그대에게 업혀 기대었던 삼백육십 날은
가고 또 온다 하고
숨은 유배지에서도 빨갛게 익은 사연
해풍으로 깊어진단다
시간마다 파도는 사람을 태워 나르고
내가 건너 탈 자리는
날마다 예약 매진이라 하고
내 안에 깊어만 가는 것들
어디로도 넘지 못하는
지구별의 진통이다
어둠에 정지되고
솔바람에 눈을 뜨는 거리마다
사람의 인연은 둥둥 뱃고동을 울고
여기가 우리의 만날 땅이던가
마른 풀은 뿌리 지키며 힘줄 솟고
때마다 눈치껏 찾아오는
노을의 변신이 깊어 간다
그대 투전의 용사가 되어 주오
내 작아져 그대에게 스미는 날
가로등 햇살에 말없이 숨거두듯
못다 한 투쟁의 몫 보호하시리라
내 후년 즈음에는
살아 있는 사랑 하나로 포동포동해지고 싶다
피보다 진한 운명으로
이별은 없기다
철없이 자란 유전자의 손과 발 칭칭 동여매고
가파른 세상 둥글게 둥글게 묶어 내자
물이 넘치고 산이 낮아지고
그의 바른 정의 채 치며
소원하는 만큼 서로 깊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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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꽃 빛 하늘
지소영
네가 좋다
세상 때가 무거워 고개 떨군 나를
파란 바람으로 세워 준다
위선에 헐고 짓무른 영혼에
꽃 빛 하늘 물들인다
막막한 삶의 항로 꽃 등 들고 나타나
빛 바래지 말고 희망을 꿈꾸란다
그래서 나는
부끄럼 없이 너에게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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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에게 보내는 편지
지소영
해 구름을 밀어내도
바람을 붙잡아도 정처 없네요
알았던 만큼 무너지고 떨어지는 허무
그대여
내 그대의 영혼도 마음도 훔치고 싶었던
기억을 걷습니다
손을 맡겼던 길을 돌아가 걷습니다
발자국마다 달려나오는
올곧았던 이야기 그리고 희망
가지마다 매달았던 맑은 영혼
그 사랑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견디었던 탁한 세상
남은 자들을 무참히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마를 맞대고 부끄럼 잊고 운다 한들
상흔이 사라질 리 없고
가난해서 아팠던 정직을 꺼내어봐도
약한 어설픔뿐
우리에게 채워질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지만
무지개 피기를 기다리는
외로운 나를
그대 두려움에 가두어 주소서
선한 버팀을 지켜 달라
두 손 모으겠습니다
우리도 가끔
내보이고 싶기도 하고
자랑하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고개 숙이고 나를 비운 시간은
결코 우리를 낮아지게 하지 않아요
그들이 다스리지 못한 건
우리의 정의입니다.
우리, 깨실 한 모과차로 보습을 시켜요
건조한 피부에 값나가는 화장품도 칠해요
사진첩 겹겹이 예쁜 꿈을 심어요
내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예약해두지 않아도
우리는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19》
내 가을의 그대에게
지소영
먼 길을 오는 동안
모르면서 알면서 허겁지겁 달려온 세월로
그대 앞에 섭니다
당신을 이만큼 알게 되었구나 놀라게 되네요
숲도 바다도 우리에겐
참 좋은 스승이었지요
곱게 내리는 주름비
가벼운 웃음으로 받치는
서로가 되어 가을 앞에 서 있습니다
급히 토해 내던 빛나던 열정도
나와 다른 생각의 세상에게
쉽게 화살을 겨누었던 내 젊음도
푸른 하늘 앞에 경건히 서 있습니다
☆★☆★☆★☆★☆★☆★☆★☆★☆★☆★☆★☆★
《20》
다시 그대에게로 가고 싶다
지소영
바라보면 아득한 수평선
올려다보면 산보다 높은 하늘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군요
끝도 시작도 모른 채
거센 비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길
찾을 수 없고
부서지는 영혼, 붙들어지지 않아요.
약속도 남기지 않고 멀어진 사람
초췌한 모습이 아리게 합니다
측은히 늘어진 어깨
파리해진 눈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기차를 몇 번씩 보내고
우두커니 빗속에서 귀앓이를 시키는 전쟁
보고 싶습니다
나만의 슬픔이었던 지난 기억도
아픈 추억도
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처럼
온몸을 고문합니다
이유를 묻지 말아 주세요
내 기다림 아신다면
길 하나 내어
비처럼 흘러오시옵소서
☆★☆★☆★☆★☆★☆★☆★☆★☆★☆★☆★☆★
《21》
당신과 그렇게 살고 싶어
지소영
보물처럼 감싸고도
행여 문틈으로 스민 바람에
마음 다칠까 더 조바심하는
당신과 그렇게
사무치도록 남은 삶의 아쉬움 덩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며
목이 멜 때까지
한 이름 당신을 부르며 그렇게
우리에게 내린 선물 같은 시간
느린 열차에 몸을 싣고
산과 들 평화로이 적시는 비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게 작은 목소리로도 꿈결같이
세상이 높아 응어리진 자국
세월로 녹슨 미소로도
너는 내 영혼이라며 무언으로 느끼며
우리 날의 끝에서 함께 눈을 감고 싶은
당신과 그렇게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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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더 사랑하고 싶다
지소영
사람 속에서
사람이 그립다
땀에 풍덩 잠겼는데
더 땀을 흘리고 싶다
너의 소리가 들려도
너를 또 부르고 싶다
얼마나 더 가라앉아야
온전히 빠질까
얼마나 더 소리쳐야
목소리가 죽을까
잘 포장된 유리상자 속의
군중속에서 비틀대는 착각
표절된 진실은 혼돈하며
살얼음을 탄다
얼마나 더 빨리 달려야
바람을 느낄수 없을까
얼마나 더 나태해져야
흙냄새가 싫어질까
사랑을 하면서도
널 더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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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행
지소영
오늘의 한마디가
여운 있는 향기로 남았으면
오늘 나누는 웃음이 훗날
즐거움으로 돼 올려졌으면
오늘의 손 잡음이
따스한 그리움으로 설렘이 되었으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외로울 때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우리였으면
이름만 불러도
아픔이 작아지는 인연이었으면
계절이 바뀌는 창가에 서면
제일 먼저 손편지에 그리는 보고 싶음이었으면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짧게 형식적으로 보내던 안부가
이제는 세월만큼 길어지고 싶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부담이었고 아까웠던 시간
한가로이 가슴을 보이는
편안함이었으면 바랍니다
해 그름따라 파란 순은 돋고
밤에도 온실처럼 자라서
아침을 기다리는 잘 익은 인내로
순종처럼 다가오는 계절을 마중하고 싶습니다
말 없어도 우리의 동행이
노을처럼 지평선 너머로 눈을 맞추고
바닷내음이 우리를 출렁거리게 했으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성공보다
서로에게 익숙한 냄새로
행복이란 말을 자주 하는
어린아이의 눈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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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봄비 내리는 창가에서
지소영
당신의 창문이 보이지 않아
비가 되었습니다
창호지 뒤로 아련히
웃풍처럼 흔들리는 것들을 보며
온돌의 따뜻함에 잠들고 말았던 기다림
색 없는 봄비였습니다
너의 줄기 사이로 내밀었던 봉오리
연두색 희망에 포장하듯 물을 주기도 하고
행여 꾸겨질까
오른팔을 조심스레 받치고
떨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날들
어딘가에서는
상앗빛 추억
소라의 고동처럼 들리고
첫사랑처럼 잠 못 이루던 타임머신의 그 자리에서
아직도 너로 나인 소망 한그루
바람처럼 그리움으로 불고 있습니다
갈 길을 보고
돌아올 길을 그려 보고
되돌려야 할 길을 빗질해 봅니다
가슴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소중한 빛깔로
색칠을 하면서
미완성 작품이지만
불안한 그림자이지만
울퉁불퉁한 당신의 바다가 거친 파장이었던 이유도 배웠고
기대일 언덕 없는 외로움도 알았습니다
우리라는 따스한 언어에
당신도 나도, 그도 그녀도
당당한 진실로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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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봄은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지소영
슬픈 계절을 밀어내느라
봄비는 자작거리며 온다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깨무는 입술이
파란 하늘에 듬성듬성 반점을 떨어트리며 온다
그립다는 말은 외면되어
노을에 짓이기는 붉은 마음
바람 부는 거리를 돌고 돌다가
풋사랑처럼 다시 조여오는 몹쓸 이 그리움
그대에게 가는 길은 진눈깨비가 되어
얼룩지고 녹여지고
춥기만 해서
동면했던 숲은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있었고
속삭이던 내 사랑은 아름다운 흔적만 남기고
가슴 깊숙이 지지 않는 별이 되어 산다
정직한 세월에 부딪혀
다치고 아픈 사람의 마음이지만
봄은 어김없이 약속처럼 오고야 만다
내 분신이 된 그리움과 함께,
유난히도 소란했던 한 해
양지 녘에서
잊히지 않은 가냘픈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아도,
막무가내 기다리기만 하는
초록의 의지를 상기하지 못해도,
골목길로 쫓겨나는 잔재, 힘없는 걸음에
연민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슬픈 연가를 읊는다
아직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사랑의 밀어
살아 있는 것들에 반항하는 상흔
대장장이가 되어 쇠붙이를 달구며
그에게 합성할까
미로에서
봄 싹마저 검다고
외면하는 심장을 지져볼까
통통 불은 젖 줄기를 대고
봄 밭을 찧으며 돌아오는 것들
잔 설도 버티다 땅 밑에서 항복하고
높은 산도 일어나
일 층까지 무릎 꿇는데
하늘 저편 어둠은 밤보다 우직이
등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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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봄의 환희
지소영
봇물 터트리는 봄의 환희에
눈이 먼다
숨기고 감추었던
우리들의 비밀도 모두 터진다
우리
나신으로 만나면 안 될까
우리
용서로 안아주면 안 될까
서로에게 부끄러움 없고 싶다
태초
가장 완전한 인간도
에덴의 동산에서
세상 유혹을 건드렸듯이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의 존재에
선악과가 보였었다면
나도 죽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아프기 위해 너를 만나지 않았다
내가 부유하기 위해
너를 손잡은 건 더욱 아니었다
모자람끼리 위로해 주고
어설픔끼리 눈물 흘리며
보듬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기적을 만들고 싶다
나의 나를 몇 개씩
우리 안에 가두고 사는 세상이라 해도
그들을 순화시키는 진실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한계를 몰라 방황했고
어떤 수식어도 찾을 수 없을 때
고립은 죽음이란 걸 알았다
부재한 것들 속에서도
외면하는 사람들을 믿고 싶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어
소통 없는 소통으로 떠밀려 왔지만
아기는 모태에서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아도
선한 욕망으로 울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 물들듯이
서로 푸르러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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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빈 찻잔을 채우며
지소영
커피 향처럼 은근히 쓴맛을
고백을 할까
허락되었던 삶에
게을러 녹이 슬었다고
허함을 이야기할까
지나고 돌아보니
내가 마신 술은 세상보다 독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마다
쓸쓸했던 그림자
사치였다고 그 어느 날을 모른다 하리
빈 찻잔에 하얀 우유를 채운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풀어 넣는다
더러는 기다렸다는 듯 녹고
더러는 버티는 알 수 없는 외로움
굵은 숟가락으로 톡톡 덩어리를 깬다
남은 길, 저만치 끝이 보인다
새 잉태에 흥분했던 그날들
아, 인생은 꽃망울 터지는 날만은 아니었던 것을
사랑이라 외친 입술뿐인 위장은
파랗고 괴로운 족쇄였다
화롯가 놋그릇에 하얀 김이 보글거린다
달리기만 했던 세월처럼
오늘은 커피 한 잔과 당신을 마주 앉아
가슴의 빗장을 뜯고 싶다
못이 깊어 뽑아낸 자리가 횅하다
팔 한 뼘의 곁에서도
침묵으로 외면했던 고문
이제 용서해 달라고,
살아온 이야기들, 수평선의 너그러움으로
온화하게 마시며 손을 잡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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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사랑에게
지소영
기다림이라는 것
우리가 연필로 쓰는 그리움인가 봐
보고 싶다는 말
굳이 하지 않아도 가슴에 피는 안개꽃 같은 것
꼭 안으면 한 움큼으로 안기는 그런
수많은 날을 보내면서도
듣고 싶은 한마디
보내지도 보내오지도 않는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을
기침으로 파란 하늘을 빨갛게 찧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계절에 걸러 본다
마른 진 걷어 내듯
지우개로 문지르며 그리움을 들어낸다
아직 떠내어지지 않는 강한 접착제
팔이 무거워지고 풀썩 주저앉고 만다
저만큼에서
첫눈처럼 줄줄 녹아 흐르는 소리
너도 나만큼 눈두덩 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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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랑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지소영
파도가 높은 날에는
너의 생각으로 두려움을 이겼지
폭우에도 너의 물기 어린 표정으로
버틸 수 있었다.
어떤 안개비가 가득히 내리던 날
너를 잠시 알아볼 수 없었을 때
허우적거린 손을 붙잡은 너의 투정은
끝을 모르는 철부지였지
참 예뻤던 진달래 같은 너
가난이 전설 같은 연민으로 내게로 올 때
너의 부유도
백합 같던 너의 몸도
눈감으면 사라지는 추억이 되고 마는 것을
어찌 그리도 질퍽거렸을까
사랑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숨은 봄 만해도 좋으니
별빛으로 밤마다 안부하는 그를
거부하지는 말아다오
형식과 위선에 익숙하여
진실을 쉽게 왜곡하는 무리에게
물들지는 말아다오
문득문득 창가에 스치는 그림자만 보여도
환희처럼 가슴에 촛불이 켜지고
길을 가다가
너를 닮은 승용차의 불빛으로도
급정거를 하곤 한다
과거는 잊힌다고 해도
오늘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구나.
어디에서건 인기척마다 흠흠 거리는 나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내가 쇠퇴하기까지의 기다림이다
내 영혼의 뜨락에
너의 손을 빌려
솔향으로 담장을 올리고 싶은데
어느 방향으로 팔을 뻗칠까
방향계가 자꾸 원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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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살면서 그리워하면서
지소영
늘 일상에 묶이고
늘 내 안에 갇혀
휘청거리는 모습
서러운 바람 되어
구름 모은 하늘을 돌아 오릅니다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잊었다 하며 쉽게 돌아서고
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인내하지 못하고
쉬운 포기를 합니다
외진 마음이 되는 고독을
앞서서 따라가지 말아요
차라리 우리 빛나는 저 별나라를
닮고 싶은 어린아이의 꿈을 가져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숨겨 접힌 나를
안았다 떨어트리곤 합니다
그립다고 부르면 생소한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밀려오는 안개처럼
기약 없이 흩어지는 잔재들
우리의 두 손은
밀물과 썰물에 담근 채
심연의 바다를 유영하나 봅니다
그 언제일까 진실의 깊은 날개로
당신과 나의 그리움 이야기가
온 세상을 사랑한다며
천둥으로 우르릉거릴 때를
기다립니다
살면서
그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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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삶과 사랑
지소영
하늘도 구름도
평화입니다
그들을 머물리는 산과 숲은
투명한 뜀뛰기
떠나는 자는 흔적을 지우고
남은 자
강물처럼 흘러도
내 몫은 거친 바람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
그대 닮은 향스런 별빛처럼
세월에 앙금이 된 미움과 원망은
그들 그림자의 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루지 못한 약속도
절망도
파도가 되어
끝이 없는 꿈으로 철석이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내게 남겨진 이 고통까지도
감사하면서
살아 숨 쉬는 날까지
언 언덕에서도
봄비처럼 스미어
그대에게로 흐르겠습니다
☆★☆★☆★☆★☆★☆★☆★☆★☆★☆★☆★☆★
《32》
약속
지소영
약속은 희망입니다
꿈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행복합니다
당신이 계시기에
나는 오늘도
내 존재를 확인합니다
누구인가 나를 기다려 주었고
나 역시 그대를 기다렸으니까요
그대와 나, 마주함이 이리도 좋습니다
밤이면 밤대로
낮이면 낮인 채
그냥 좋은 그대
소곤거리며 웃으며 오늘을 감사합니다
작고 조용한 평화가
당신의 자리에서 빛나는 것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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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늘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
지소영
찬비 돌아드는 거리에
머뭇거림 없이 걸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꺼내고 보면 무형이 되고 마는 것
그래서 침묵은 아픔을 동반했고
표현하지 않았던 것들은
비참한 억지가 되었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영혼을 투약했고
몸살처럼 도지는 지병
수도 없이 태운 것들은
쓸쓸히 내 동글어지고 있습니다
합리와 변명과 비관
내 당당한 경계 밖이었습니다
외계인처럼
맞지 않는 문법이었습니다
방사선 관통한 줄기에
녹아버린 피부를 짜깁기하며
죽어간 사랑의 잔재들에
파란 비타민을 풀 먹입니다
철없는 비움
바보스러운 동정
흔들린 그 세월은
한 장의 지폐처럼
무디게 뜯기고 있습니다
사랑은
화를 내어도 연기를 내어도
기다리는 것이라 하여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애처로이 순복했습니다
바람처럼 지붕을 헝클고
더디 간다고 수용하지 못하는 앞선 걸음에
헛되이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언젠가는 떠난다는
이별가도 포장한 사치였군요
오늘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의 사랑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란 진액을 채취하게 되면
다시 후회 없는 그림을 그릴 겁니다
갈망의 촛불을 켜고
성경처럼 당신은 나의 신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혼돈과 머뭇거림은 없을 겁니다
아려오는 한쪽 흉통이
뒤범벅되어 이제는 내 힘으로 차를 몰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절대로가 될 수 없는 것을요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미워도
좋은 것만큼 미운 만큼
흥정이 되지 않는 것 있잖아요
잊겠습니다
모질었던 고문
외경스러웠던 선과 악의 미소를.
산기슭 돌아 나온 나무소리 물소리를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초보자의 수채화 옆으로 시내길 하나 내어
마음을 보냅니다
뉘엿거리는 저녁 해 사이로 종소리 걸리면
여행객으로 들었던
꾸미지 않은 하얀 침대가 생각납니다.
☆★☆★☆★☆★☆★☆★☆★☆★☆★☆★☆★☆★
《34》
온유의 꽃
지소영
하루가 비바람에 젖어 눈이 시려워 와도
둥근 달을 가슴에 담을래요
그도 깜깜한 그믐에 소리 없이 찬 벽 뒤에서
애통해 했었던 기억을 알기 때문이에요
내일이
잿빛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어도
불안하다고 하지 않을래요
흔들리는 만큼
가슴에 일렁이는 둥근 심장의 또다른 에너지를
느끼기 때문이에요
행복
기쁨
사랑
그들은 당신의 맑은 두눈에
동그란 햇살을 받고 있어요
잇살 좋은 미소로 그려지고 있어요
솟아나는 봄이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열심히
앞만보고 살았어도
세상 소음이 무겁게 짓누르고
가슴 한 쪽에 자리하고 있는 아픔의 무게가
커지기만 할 때
당신께 도움을 청합니다.
둥근 정직으로 회복의 길을 걸어보세요
돌아온 삶을 마지막처럼 돌아보세요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는지
빚진자로 살지 않았는지
기억 나세요
단막극처럼 주인공이 되었던 삶의 자락마다
신처럼 당신은 어떤 신화를 만들어 내었었는지
별을 헤아리며 달렸던 이방인의 땅에서
익숙하지 못한 삶의 틈이 낯설었을때
파도가 둥글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당신께 부여된 존재의 의미를
신실히 고민해 보세요
보이기 위해 입혀진 옷을 걷어 내고
동그란 병에
동그란 입김을 담아보세요
당신의 삶에 동그란 온유의 꽃이 필거예요
동그란 향기가
당신의 이웃으로 날개처럼 나를 것입니다.
☆★☆★☆★☆★☆★☆★☆★☆★☆★☆★☆★☆★
《35》
존재의 이유
지소영
가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에
따스하게 묻어오는 목소리로
손잡는 사람 있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생소하지 않은 단어하나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한마디에
깊은 애정으로 떨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느끼지요
가끔 육신의 고통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내디디지 못할때
등 뒤에서 살며시 밀어주는 사랑의 말,
우리는 늘 기다림이었어도
외로움은 우리의 행복이었지
그 때문에 다시 태양을 봅니다.
세상에서 만난
모래알 같은 사람들 중에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는 힘으로
감격하고 산 세월이 있어
우리는 내려 앉는 눈두덩으로
시야가 좁아져도
작은 동굴 속 의지로운 동무로 보배로웠다고
평안의 가슴을 고릅니다
안개가 걷힙니다
밤사이 불었던 바람이 가라앉고
새벽종 소리가
아이에서 할머니까지의 귀를 맑게 울립니다
우리들의 생각속에 정화수 한 그릇 담으면
작은 물결만큼 흐르는
사랑으로 젖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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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소영 시인님의 아름다운 시선물 한아름 감사드립니다
한주도 알차게 꾸리시구요 김용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