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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후 종형제 부부들과 펜션에서 1박 (2016. 09. 03) 子路曰(자로왈).“桓公(환공)이 殺公子紏(살공자규)어늘, 召忽(소홀)은 死之(사지)하고 管仲(관중)은 不死(불사)하니 曰未仁乎(왈미인호)인저.” 子路(자로)가 말하였다. 桓公(환공)이 公子 糾(공자 규)를 죽이자, 召忽(소홀)은 죽었고 管仲(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管仲>은 仁하지 못할 것입니다.
子曰(자왈).“桓公(환공)이 九(糾)合諸侯(구(규)합제후)호되 不以兵車(부이병거)는 管仲之力也(관중지력야)니 如其仁(여기인), 如其仁(여기인)이리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兵車(武力)를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仁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仁만 하겠는가! (紏 : 고할 두, 여기서는 이름 규, 살필 규) -논어 헌문 17장
今釋(茶山의 해석) 자로가 “제나라 환공이 공자 糾(규)를 죽이자, 소홀은 糾(규)를 위해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이로 보아 관중을 仁德(인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제나라 환공은 아홉 차례 제후와 결합하여 맹세할 때 완전히 예의로써 서로 규합하고, 병거를 사용하여 협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복종하지 않은 제후가 없었던 것은 모두 관중의 힘이었다. 이것은 바로 소홀의 살신성인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관중의 不仁(불인)함에 대한 자로의 비난에 관중이 환공을 도와 이룬 업적이 소홀의 인덕과 같음을 말해주고 있다.
朱註(朱子의 집주) 按春秋傳에 齊襄公無道한대 鮑叔牙 奉公子小白奔莒하고 及無知 弑襄公에 管夷吾召忽이 奉公子紏奔魯러니 魯人納之未克하여 而小白入하니 是爲桓公이라. 춘추전을 상고해보면, 齊나라 襄公(양공)이 無道(무도)하자, 포숙아가 公子(공자) 小白(소백)을 받들고 거(莒)나라로 망명하였으며, (양공의 사촌인) 無知(무지)가 襄公(양공)을 시해하자, 管夷吾(관이오 : 관중)와 召忽(소홀)은 공자 紏(규)를 받들고 魯나라로 망명하였었다. 노나라 사람들이 공자 紏(규)를 齊나라로 들여보냈으나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小白(소백)이 들어가니, 이가 바로 桓公(환공)이다. 使魯殺子糾而請管召하니 召忽은 死之하고 管仲은 請囚러니 鮑叔牙 言於桓公하여 以爲相이라 子路 疑管仲忘君事讐하니 忍心害理하여 不得爲仁也라. 齊桓公(제환공)이 노나라로 하여금 공자 규를 죽이게 하고 관중과 소홀을 (제나라로) 보내줄 것을 청하자, 소홀은 죽고(자살하고) 관중은 檻車(함거)에 갇히기를 자청하였는데, 포숙아가 환공에게 말하여서 정승을 삼게 하였다. 자로는‘관중이 (자기가 모시던) 군주를 잊고 원수(제환공)를 섬겼으니, 차마 하지 못할 마음으로 의리를 해쳤으니, 仁이 될 수 없다고 의심한 것이다.
九는 春秋傳作糾하니 督也니 古字通用이라 不以兵車는 言不假威力也라 如其仁은 言誰如其仁者니 又再言以深許之라 蓋管仲雖未得爲仁人이나 而其利澤 及人이면 則有仁之功矣라. 九(구)는 춘추전에 糾(규)로 되어있으니, 감독한다는 뜻이다. 古字(옛 글)에 (九와 糾는) 通用되었다. 兵車(병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위엄을 힘을 빌리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如其仁(여기인)은‘누가 그의 仁만 하겠는가’라는 말이다. 또 두 번 말씀 하여서 깊이 허여하셨으니, 관중이 비록 어진 사람(仁人)이 될 수는 없으나, 그 이로운 혜택이 사람들에게 미쳤으면 仁의 功이 있는 것이다.
家苑 註(가원 이윤숙 선생의 집주) <家苑 註 1> 관중은 제환공이 춘추시대의 첫 패자가 되도록 보좌한 신하로서 죽은 지 100여년이 넘도록 최고의 현명한 재상으로 소문 나 있었다. 공자는 앞서 제환공에 대해 ‘正而不譎(정이불휼 : 헌문편 16장)’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이에 의협심이 강하고 강직한 자로가 제환공이 발탁한 관중은 자기가 모시던 공자 규를 좇아 자살한 소홀과 달리 살아서 다른 군주를 섬겼는데 이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가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자로가 관중을 중용한 제환공까지 은근히 빗대어 말한 것이다. 공자는 ‘葵丘之會(규구지회:앞의 ’공자의 제환공과 관중에 대한 평가의 역사적 배경‘ 해설 참조)’를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도록 한 것 자체가 관중의 공적인데 이것이 ‘위정자의 어진 일’이 아니면 지금 시대에 누가 이와 같이 어진 일을 했느냐며 내심 되묻고 있다. ‘九合諸侯(구합제후)’의‘九合’에 대해 사마천은 史記 「齊太公世家」의 제환공 35년편에서 제환공의 말을 인용하여 “兵車之會三 乘車之會六 九合諸侯 一匡天下(병거지회삼 승거지회육 구합제후 일광천하)”라 하여 글자 그대로 ‘三兵車六乘車(삼병거육승거)’라 하여 ‘제후들과 아홉 번 회합했다’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당나라 때의 張守節(장수절)은 史記正義에서 春秋左傳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정벌을 위해 회합한 三兵車로 ① 魯莊公13년(齊桓公5년) 봄에 북행에서 회합을 갖고 송나라의 난리를 평정한 일(會北杏以平宋亂) ② 魯僖公4년(齊桓公30년)에 채나라를 침략하고 마침내 초나라를 정벌한 일(侵蔡 遂伐楚) ③ 魯僖公6년(齊桓公32년)에 정나라를 치고 신성을 포위한 일(伐鄭 圍新城也)을 꼽았다. 친선을 위해 회합한 六乘車로는 ① 魯莊公14년(齊桓公6년)에 견땅에서 회합을 가진 일(會于鄄) ② 魯莊公15년(齊桓公7년)에 또다시 견땅에서 회합을 가진 일(又會鄄) ③ 魯莊公16년(齊桓公7년)에 유땅에서 동맹을 가진 일(同盟于幽) ④ 魯僖公5년(齊桓公31년)에 수지에서 회합한 일(會首止) ⑤ 魯僖公8년(齊桓公34년)에 조땅에서 맹세한 일(盟于洮) ⑥ 魯僖公9년(齊桓公35년)에 규구에서 회합한 일(會葵丘)을 들고 있다. 반면에 주자는 春秋左傳 희공26년 편의 말(아래 <참고>글)을 인용하여 ‘糾合’으로 해석하면서 “九는 糾가 되니 展喜(전희)의 말과 종족을 규합한다는 종류가 또한 그 증거라. 설명하는 자가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바로 아홉 번 제후들을 회합했다고 하는데, 숫자에 이르러서 환공의 회합이 아홉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또한 인하여 병거(전쟁)로써 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평화회담[衣裳之會, 혹은 衣冠之會]이 아홉 번이고, 나머지는 군사회담[兵車之會]이라고 하니 공곡(公羊子와 穀梁俶, 곧 이들이 지은 春秋公羊傳과 春秋穀梁傳)이래로 다 이런 설명을 두었으니, 가히 지나친 空論(공론)이라 할 만하니라”고 하였다 (朱子曰九之爲糾니 展喜之詞而糾合宗族之類 亦其證也라 說者不考其然하고 乃直以爲九會諸侯라하니 至數하여 桓公之會 不止於九則又因不以兵車之文하고 而爲之說曰衣裳之會九요 餘則兵車之會也라하니라 公穀以來로 皆爲是說하니 可謂鑿矣라)
사실 春秋左傳을 살펴보더라도 제환공의 회합은 9번에 그치지 않는다. 제환공 43년간의 치세동안 때때로 평화회담을 가지면서 전쟁 억지책을 폈고, 회합과 맹세가 잘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응징책을 폈으니 주자의 설명이 합당하다. 糾合은 鳩合(구합)이라는 말과도 통하는데, 九合은 곧 鳩合을 표현한 것으로 ‘비둘기처럼 평화적으로 모여 鳩首會議(구수회의)를 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九라는 숫자는 자한편 13장의‘九夷’에서 설명했듯이 태양수 九의 의미로 밝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九合諸侯’는 곧 평화회담을 말하는 것이기에 공자가 바로 뒤에 ‘不以兵車’라 붙였으며, 뒤의 헌문편 19장에서는 ‘一匡天下’했다고 말한 것이다. 18장은 17장에서 공자가 자로에게 한 답변을 이해하지 못하였거나 또는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긴 자공이 다시 공자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자로가 관중에 대해 자신의 인군을 섬기다 따라 죽지 않은 ‘不忠(불충)’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자공은 한발 더 나아가 ‘不忠에다 變節까지 한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스승인 공자가 이런 인물에 대해 ‘如其仁’이라 하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家苑 註 2>제양공의 몰락과 제환공의 등극 춘추좌전 魯莊公8년편에 齊侯(제후)인 襄公(양공)이 대부인 連稱(연칭)과 管至父로 하여금 葵丘(규구)땅을 지키게 했는데 오이가 한창 열리는 음력 7월에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떠날 때에 양공은 다음해 오이가 열릴 때에 교체시켜 주겠노라고 약속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교체시켜 줄 것을 청했으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亂을 도모했다. 제나라 僖公(희공)의 同母弟(동모제)인 夷仲年(이중년)이 아들인 無知(무지)를 낳으니, 희공이 총애하여 의복과 대우를 적자와 같이 해주었으나 희공의 아들인 양공이 군주가 되자 그들을 내쳤다. 그래서 연칭과 관지보가 무지와 결탁하여 난을 꾸며 양공을 죽이고 무지를 군주로 세웠다. 처음에 양공이 군주가 되었을 때에 정치에 떳떳함이 없었다. 포숙아가 이를 보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교만하여 난리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하고 공자인 소백(희공의 서자)을 받들어 乾땅으로 달아났다. 난리가 일어남에 관중과 소홀 또한 공자 규를 받들어 노나라로 달아났다. 다음해 봄에 대부인 雍廩(옹름)이 무지를 죽였다. 여름에 노나라 장공이 제나라를 치고 공자 규를 들여보내려고 했으나 소백이 먼저 들어가 임금(桓公)이 되었다. 가을에 노나라 군사가 제나라 군사와 乾땅에서 싸워 노나라 군사가 패했다. 포숙아가 군사를 거느리고 노나라에 가서 말하기를, “공자 규는 군주의 肉親이라 데려가 죽일 수 없으니 죽여주기를 청합니다. 관중과 소홀은 원수이니 청컨대 인수하여 마음대로 죽이겠나이다(請受而甘心焉).”고 하였다. 이에 공자 규를 生竇(생두)에서 죽임에 소홀이 자살하였다. 포숙아가 관중을 인수받아 제나라 땅인 堂阜(당부)에서 풀어주었다. 그리고 환공에게 돌아가 고하여 말하기를, “관이오는 고해(高傒, 齊卿인 高敬仲을 말함)보다 정치를 잘하니 재상으로 삼는 것이 가합니다.”라고 하니 환공이 그대로 따랐다.
1, 桓公殺公子糾(환공살공자규) : 다산은 “환공은 아우이고 공자 규는 형”이라며, 그 근거로 《사기》를 들었다. 2, 曰未仁乎(왈미인호) :《논어》나《맹자》의 문장을 예로 보면, 사실을 열거하거나 평론을 할 때, 평론하는 말 앞에 반드시 ‘曰(왈)’자를 쓴다. 여기에서의 ‘曰(왈)’자 이전은 자로가 진술한 말이고, 이 ‘曰(왈)’자로써 자로가 아래의 ‘未仁乎(미인호)’의 물음을 끌어낸 것이다. 그래서 ‘未仁乎(미인호)’는 ‘仁(인)이라고 칭할 수 없다’라는 뜻이 된다. 3, 九合諸侯(구합제후) : 아홉 차례 제후를 회합하다. 다산은 “《곡량전》에 의하면 제나라 환공이 주제한 회맹은 실제로 열한 차례였는데 아홉 차례라고 한 것은 北杏(북행)과 陽穀(양곡)의 회맹은 제외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4, 如其仁(여기인) :《주주》에는 “如其仁(여기인)이라는 것은, 누가 그의 仁(인)한 것만큼 仁(인)하겠느냐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산은 “誰(수) 자의 삽입이 명백하지 않다. 자로가 소홀의 살신성인만 알고 관중이 仁(인)으로 천하를 덮으려 한 공은 모르므로, 공자가 관중이 비록 죽지 않았으나 소홀의 죽음과 비견하다 할 만하다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碧 松(智 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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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이나 왕도나 다 무력입니다. 권력이나 폭력은 인이 아닙니다. 어떻게 힘을 안 쓰고 다른 사람, 다른 나라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자 숙제일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데 인이 있고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