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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생
-금산 출신---전주사범 졸업
-1972년 <수필문학> 추천
-유고수필집[산의 소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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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 출신(1931-1975)
유고 수필집[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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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교사가 본 진웅기 수필가 스토리
진웅기 선생님
교직생활에서 스쳤던 많은 얼굴들이 있다.
그 중에는 버리고 싶은 얼굴도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얼굴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얼굴로, 1959년 금산군 금성초등학교 초임지에서 만났던
진웅기(陳雄基)선생님을 들고 싶다.
새내기 교사 시절에 나에게 각인된 그의 인상은,
참으로 선량했다. 그는 조용했고 온순했으며 다정다감했다.
사람이 선하면 아이나 어른이나 가슴에 오래 남는가 보다.
그는 글씨를 옥아 예쁘게 썼고 그림을 참 잘 그렸다.
말을 할 때는 입놀림을 가볍고 또랑또랑하게 했고
중키에 체격이 마르지도 않았고 눈동자가 갈색이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항상 이마로 흘러내렸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고 하늘색 넥타이가 항상 비뚤했다.
그는 먼 하늘을 응시하면서 사유했고, 길을 가면서도 사유했다.
잠을 자면서도 몽유병자처럼 누군가와의 대화를 했다.
그는 자기를 알기 위해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꿈의 분석’ 같은 심리학 서적을 열독하기도 했었다.
그는 잔잔한 유머를 즐겼다. 누가 공격적인 말을 하면
손짓으로 ‘핑’하면서 탁구공처럼 받아 넘기곤 했었다.
자유당 정권시대,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고 하야성명을 냈다.
그 이튿날이었다. 아침에 직원들이 교무실로 출근들을 하고 있었다.
진웅기 교사가 성큼성큼 걸어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는
벽에 걸려있는 모로 찍은 이승만대통영 존영을 일별하고는
일언반구도 없이 의자에 올라 대통령 사진을 뜯어 내렸다.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는 끝났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아무도 감히 생각 못하는 돌출행동이었다.
아침 직원조회 시간에 노교장이 뒤집힌 대통령 사진을 내려 보고는
누가 내렸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바로 마주앉아 있는 진교사 얼굴 표정을 살폈다.
그는 붕어처럼 눈만 껌벅껌벅했다.
그 때부터 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그 싯점만 해도 정치상황이 반전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분위기였었다.
그는 정말 용기가 있는 교사였다.
진교사는 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언론인으로
말을 타고 다녔다. 그가 목로에서 술잔을 비울 때면 울었다.
어려서 죽은 딸이 측은하다고 가슴을 쳤다.
양지 바른 곳에 제비집만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울었다.
자기는 부모와 같이 살지 않고 죽은 딸아이와 같이 살고 있다고
아파했다. 아내가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도탑지 못했던지
그는 이불 짐을 싸들고 학교 부근으로 셋방을 얻어 나오기도 했었다.
그는 가난해서 방 얻을 돈이 모자라, 내가 빌려준 적도 있다.
양처럼 순한 그는 평생을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와 2년 동안 근무했고 나는 군대에 갔었다.
5.16혁명이 일어나고 행정개편이 일어나면서
전라도 땅이었던 금산이 충청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도가 달라 그와 소통이 소원해지게 되었다.
그는 편지를 보낼 때 마다 발신주소를 충남으로 써 놓고는
못마땅했던지 두 줄로 긋고는 ‘충남’을 ‘전북’으로 고쳐 보내곤 했었다.
그 후 어느 날,
모 월간지에서 진웅기란 작가가 칼럼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금산에서 같이 근무했던 진웅기 선생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인가 하고
‘독자의 난’에 문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아! 아! 그가 그림을 잘 그렸던 내가 따르고 좋아했던
그 진웅기 선생이었다. 그는 의젓한 수필가로 등단했던 것이다.
교직을 그만 두고 문필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는 1972년 ‘수필문학’지에 ‘숫자들의 표정’으로 등단했다.
25년 동안 번역가로 ‘릴케시집. 시와 그의 인생’ ‘유태인의 천재교육’ 등
90여권의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 또한 한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야기가 있는 漢字’ 등의 한자교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언젠가 진웅기 선생의 근황을 알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그가 2005년 4월 75세로 타계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아호가 鎭山이고 1931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주사범을 졸업했는데 그 사범학교를 졸업한 소설가 최일남, 하근찬,
이규태 같은 걸출한 문인들과 엇비슷한 동년배이기도 하다.
나는 얼마 전에 금산을 여행하면서
진웅기 선생에 대한 추모 정으로 묘소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가 잠든 묘소를 알고 싶어 ‘금산신문사’로 전화 문의를 했더니
그의 묘소를 잘 모른다면서 그 아들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다행히 강원도 원주에 살고 있다는 아들과 연락을 하게 되었다.
묘소가 진산에 있는데 뜨내기로 가서는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시골 길에 자신이 없어서 묘소찾기를 포기했었다.
그의 아들이 그의 유고 수필집 ‘산의 소리’를 내게 보내주었다.
소설가 조정래선생이 그 수필집 발문에다 이런 표현을 썼다.
“진웅기 선생은 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맑은 수필가였다.
성품이 그랬으므로 글 또한 진솔하고 고아했다. 과장없고
치장없고, 담담하되 깊이 있고 울림 큰 글들이 진선생 글의
특징이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의 글은 늘 혼자서사유하면서 내면의 세계를
수채화를 그리듯 썼다. 고독이 있고 곱고 맑은 글이다.
어찌보면 그는 논어에 나오는 인(仁)에 가까운
강의목눌(剛毅木訥)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나무처럼 질박하고
우직하게 살면서 때로는 의연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나의 단편적인 생각일까.
아무튼 그는 나의 교직생활에서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은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 진웅기선생의 유고 수필집 '산의 소리'이다. 나는 이 책을 구하려고 했지만 절판이 되어
입수하지 못했었는데 다행히 원주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이 보내주어 소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