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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이름에서 넓히다. 지키다. 의지하다 세계 속 신라로
세계관.미래관이 깃든 장보고 이름에서 느끼는 국보급 상징
●청해진의 군사기지, 기지(奇智)를 발휘하다
청해진의 군사기지의 군사.보급.수송.통신.해양 거점이 된 기지(基地)는 활동성 있게 뻗어나가는 기운의 ‘기지(氣地)’ 로, 발돋움하는 ‘기지(企地)’ 로, 일어나는 ‘기지(起地)’ 로, 뛰어난 ‘기지(奇地)’ 로, 훌륭한 ‘기지(琦地)’ 로서의 기지(奇智)를 발휘했다.
군사기지는 무역기지로서의 전략(戰略)을 구사한 전략은 온전하게 한 ‘전략(全略)’ 으로, 펼치는 ‘전략(展略)’ 으로, 나아가는 ‘전략(前略)’ 으로, 부유하는 ‘전략(賟略)’ 으로, 성하는 ‘전략(闐略)’ 으로, 전하는 전략(傳略)으로서 기지의 역할을 띠었다.
기지적인 전략, 전략은 전술(戰術)로서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이나 방법을 쓰며 군사와 무역을 추진했다. 이런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 청해진은 세계 최고의 군사기지, 무역기지로서의 훌륭한 장소이다. 군사거점(軍事據點).무역거점(貿易據點)이라는 거점, 군사와 무역 활동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지점으로서의 역할을 띠었다.
청해진 거점은 신라 군사.경제의 거점으로서 신라국토에서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중심 지점으로서의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원을 집중 투자해 효율을 높이고, 주변 지역에 파급 효과를 미치도록 하는 중심 도시인 ‘거점도시’ 였다.
무역에서 검점 도시는 허브.준허브에 버금가는 제3 중심 지점으로, 신라는 당.일본.동남아 등을 거점으로 삼았다.
청해진의 군사거점은 강력히 요새화되어 각종 무기로 무장되고, 타진지로부터 보호를 받는 진지 내의 중요지점이다. 작전 성공을 위해 점령되는 지형상의 요충지, 강력히 방호된 방어진지로, 고립되어도 일정 기간 동안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진지다.
청해진의 무역거점은 국제무역 거점으로 화물을 바로 수입하거나 수출하지 않고, 일정 기간 머물게 하며 흐름을 조정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국제무역 거점이다. 국제물류론에서는 거점을 단순 보관 장소가 아니라, 관세 처리 시점과 물류 흐름을 조절하는 장치로서의 국제무역 거점이며, 그 역할을 청해진이 담당했다.
청해진은 국제무역 거점으로서 ▲수출 중신 구조 ▲부가가치 활동 허용 ▲재수출 거점 기능 ▲관세납부 유예 ▲검사.분류.보관 중심 ▲통관 전 단계 관리 등으로 국제무역 확대하기 위한 물류 허브였다.
청해진 국제무역 거점은 FTZ와 Bonded Area로 화물이 머무는 공간이지만, 운영 목적과 물류 흐름이 다른, 무역 전략을 확장하기 위한 FTZ 공간으로서, 통관 절차를 안정화하기 위한 Bonded Area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띠었다. 국제무역에서 거점 선택이 단순한 장소 선택이 아니라, 비용.시간.리스크를 설계하는 결정이라는 점이다.
청해진 국제물류 기준은 목적으로 무역 활성화와 통관관리, 주요 기능으로 가공.재수출과 보관 검사, 성격으로 전략 거점과 행정 거점, 활용 흐름으로 수출 중신과 통관 중심으로 수행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군사기지로 출발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역기지로 담당하게 했다. 청해진을 〈혁신성장〉 거점으로 구축했다.
장보고가 자신의 본이름 궁복의 궁(弓)을 궁극(窮極)으로 ‘국제무역’ 에 초점을 두었다.
장보고는 정부의 지원 하에 완도 청해진 혁신 거점 설립을 위해 인허가 등 행정 절차, 산업발전을 위한 정책 및 인프라 등을 지원하고, 원활한 사업 추진을 위한 상호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청해진을 세계 최고 수준의 물류.혁신 역량을 토대로 통일신라가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선점하는 데, 장보고라는 이름을 내세워 크게 기여했다.
●해상로 병목 구간 전략술
장보고는 무역에 있어서 해상로를 개척, 그는 병목 구간을 형성해 이 해상으로 물류를 하게 만들었다. 당.일본.동남아 등으로 연결하는 대표적인 해상 물류 병목 구간, 이른바 초크 포인트로 불린 해상로를 열어났다.
이 지역을 통행해만 무역을 할 수 있게 했으며, 이 해상로를 이용하지 않고 다른 해상로로 물류하게 되면 단호하게 제제를 가했다. 안전한 해상로를 제공하면서 선원과 선박의 안전, 해양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가장 안전한 해로와 항만으로 만들며, 이를 이용하게 했다.
장보고가 병목 구간을 만들어 놓은 이유 중 하나가 안전과 질서이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해로를 사용하게 하여 모든 길은 장보고로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라가 놓은 해로로 통과하게 만든 것이다. 해상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해양 안전을 위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장보고의 공격성은 공격(公格)이었다
군사.무기를 통해 상대를 공격(攻擊)하는 폭력.강압.비윤리적의 야만성(野蠻性)을 드러내는 장보고가 아닌, 군사.무기 쓰기를 위협적인 것보다는 해양 안전과 질서, 그리고 무역이 안전 속에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한 공격(公格)하는 신사적(紳士的)으로 대하며 해상을 지배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해상왕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 바다 민족들의 국가가 그저 정쟁과 약탈, 노략질만 하던 장보고인줄만 알고 있다.
장보고와 그 후예들인 해안 사람들은 그저 다른 선박이나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은 재물로 살아간 기생충 같은 존재이었을까?
장보고에게 당한 당.일본.동남아, 장보고에 당한 선원들은 자기들의 철친지 원수들에 대하여 그렇게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것은 사실인가?
오늘 날 많은 역사 기록과 유물에서 판단한 것으로는, 그런 역사적 서술에 대하여 상당히 바꿔봐야 한다는 것들이 반론으로 나오고 있다. 실상은 바다 민족들은 비로 거주지의 기후 여건으로 농사는 짓지 않았지만, 그 대신 실트로드를 중심으로 한 상업(商業)에 상당히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보고도 평소에는 자기 땅에서 나는 소산, 즉 짐승 가죽이나 인삼 등을 비롯하여 비단길 상인들이 가져오는 여러 서구 문물들을 가지고 당.일본.동남아와 무역을 하였다. 그것이 노략질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수지(收支)가 더 많았다.
장보고는 단지 무역을 위한 바닷길을 장악하기 위하여 당과 일본, 동남쪽으로 진군했을 것이고, 그 위치에 있던 당.일본 해적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장보고는 주로 비단길에 위치한 당나라에 온 해적들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해적들에게 비단길 우역으로 이익을 보며 축제한 금들을 내놓으라 하였다. 해적들은 신라 바다를 점령하는 것보다는 일부 물건을 주거나 비단길 무역의 주권을 장보고에게 주는 것이 낳고, 이득이 되겠다고 여긴 게 마음이 더 편했다.
이런 과정에서 “장보고는 해적이었다. 공격성이 강한 사자다” 라는 안 좋은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야만성을 드러낸 장보고가 아닌 신사적인 매너로 해상무역을 추진했고, 해양 질서를 바로 잡았고, 바다를 지배했다.
대한민국 역사에 들이댄 이념의 칼날, 그 야만의 역사를 넘어 장보고를 향한 시선은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홀로 구르지 않는다. 신라의 약사는 중국(당나라)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당.일본, 그 나라들의 혁명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당나라의 혁명은 신라인들에게 만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해적들의 침몰로 신음하던 신라와 달리, 당나라 신라방에 거주하고 있는 신라인들에게 혁명은 생존의 문제였다. 해적과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울 무기와 조직이 절실했던 그들에게 해적 소탕, 침략자 방어를 외치는 장보고는 유일한 연대(聯隊) 대상이었다. 이것은 신라 정치운동사가 붉은 깃발과 조우(遭遇)하게 된 필연적 배경이다.
신라 독립운동사는 이렇듯 당나라뿐 아니라 일본, 당나라의 역사와 중층적(中層的)으로 얽혀 있다. 이 복잡한 연결고리를 무사한 채 신라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해상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장보고에 대해 약탈자로 취급하지 않는가? 장보고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해로를 개척한, 바다의 안전과 질서를 회복시킨 해상왕이다 아니다 물건을 약탈한 노략질을 한 해적왕이다 하는 소모전이 이어진다. 이는 과거를 ㄷ아시의 맥락이 아닌, 현재 권력의 입맛에 맞는 교훈으로만 취사선택하려는 ‘역사적 무지’ 의 소산이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동기는 해적들로 인한 불안전한 바다를 안전하게 선박들이 항해 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무역으로 신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하겠다는 마음에서 군사기지.무역기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둔 것이다. 청해진은 위협적으로 ‘절멸의 위기’ 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닌 평화적으로 ‘평온(平穩)’ 을 불러들었다.
이러한 국제정새의 냉혹함과 불가피성을 이해해야 우리 신라독립운동사의 분열과 고난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다. 당나라의 힘이 미쳤던 신라의 장보고에게 당 정책은 경직된 이념이 아니었다. 장보고에게 이념은 국권 회복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위한 ‘희망의 언어’ 이자 유효한 무기였을 뿐이다. 혼돈의 시대를 살다 간 선친들을 요즘의 좌파 대 우파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단죄하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역사가 홀리오 발데온은 “성공이든 실패든, 과거를 아는 것은 콤플렉스 없이 현재를 대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부끄러운 자화상을 멈춰야 한다. 특히 장보고의 폄하적인 언어는 삼가야 한다. 이념의 색안경을 벗고, 제국주의의 야만에 맞서 치열하게 연대했던 그 시대의 중층적인 진심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역사적 예의(禮義)다.
해적은 인간이 아니었다. 야만을 드러낸 그들을 처단하는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다. 야만인으로 기록되기도 한 장보고의 진짜 모습, 대한민국사상에 갇힌 세계관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신라의 황혼(黃昏)과 대한민국의 여명(黎明)을 열어준 장보고, ‘장보고를 다시 위대하게’ 하자.
장보고의 공격성은 ‘공격성(公格性)’ 이었다. 국가나 사회의 일을 한 세운 ‘공격(公格)’ , 나라에 공을 세운 ‘공격(功格)’ . 비치는 ‘공격(貢格)’ , 이비지한 ‘공격(龔格)’ 을 해보였다.
●궁성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장보고, 궁복 이름에 빛난다
장보고의 본명 궁복(弓福), 활 궁(弓)은 장보고가 영암 선암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주변의 성(城)은 말해주고 있다. 궁성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를 어진 복덩이라고 여겨, 그를 ‘궁복(弓福)’ 이라 하였다.
장보고는 자신의 본 이름인 궁복의 궁(궁)자를 그가 바다를 지키는, 무역을 한 ‘해상제국(海上帝國)과 해양도시(海營都市)’ 를 세우는 데, 장책과 전략.전술로 사용했다. 궁은 끌 인(引)으로 사람이 활로 이끌어가겠다는 마음으로 궁(弓)자의 모양을 참고해 신라는 당과 일본, 동남아 등지를 상대했다.
‘활과 화살, 병사, 병기가 이미 안전하니 선봉을 앞세워서 길을 열며 진격하라!’
弓矢戎兵戎車旣安以先啓行
궁시융병융거기안이선계형
궁형(弓形)으로 디귿자형(ㄷ)의 기(己)는 ‘어떤 것들을 다스린다’ 는 뜻으로, 당나라를 신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며, 기억자형(ㄱ)을 한 포(勹)는 ‘두 손으로 물건을 감싸 안는다’ 는 뜻으로,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을 신라는 다시 일본과 동남아등의 세계로 진출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활처럼 굽은 모양의 궁형으로 청해진의 정책과 전략.전술로 삼고 군사와 무역을 추진했다.
‘높은 자리 사양하고, 궁거에 오르니 벗들이 나를 두려워하도다.’
高謝弓車畏我友朋
고사궁거외아우붕
장보고는 그의 주특기인 활을 솜씨가 뛰어나 두려워하는 벗들이 많았을 정도로, 그는 조정에 있는 벼슬아치보다는 진영(鎭營)에서 근무하는 것을 좋아했다. 활 솜씨로 유명한, 궁술의 명인인 ‘후예(后羿)’ 의 신화처럼 궁거(弓車)였다.
장보고가 〈궁거〉 로 자신을 돋보이려고 한 것은 ‘궁복(弓福)’ 이라는 자신의 본명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 했고, 이미지이자 상징성인 자신의 이름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고 했고,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선암과 활성산과 궁성산의 기운을 이어가려 했다. 궁복은 ‘어진 사람’ 을 뜻하며, 어진 궁수(弓手)로서 신라를 지키고, 나라를 확장시키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고 추앙받기를 바랐다. 위에서부터의 출세가 아닌, 아래서부터 출세를 하겠다는 장보고의 출세공식이었으며, 겸손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영암 선암)에서 17세까지 살면서 마을 앞 출렁이는 바다를 보고 많은 꿈을 꾸었다. 그는 바다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며 출렁이는 바다에 자신의 생각도 함께 출렁거리게 했다.
그는 왜 물결이 치는가?
이 말을 바다에 던지면서 출렁이는 물결에 자신의 인생철학, 자신의 미래, 자신의 생동성을 물결과 동일시(同一視)했다. 그는 “바닷물이 높이 파도를 치거나, 세차게 물결을 이는 것은 내 마음도 높게 세차게 해지는 상태이다.” “바다가 잔잔해지면 내 마음도 잔잔해 짐이다” 라고, “저 물결은 분명 희망의 물결이어니” 하며, 그는 자신의 마음의 물결로 바다의 물결을 일으켰다. 물결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이 컸다.
장보고는 물결 속에 희망이 있고, 미래가 보인다고, 물결에 자신의 마음을 띄웠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망망대해에 자신의 몸을 맡겼던 것.
그런 그는 자신의 궁복의 궁(弓)을 자신이 가야할 길의 지도, 방향과 목표지점으로 삼았다. 궁(弓)은 단순한 한자를 넘어 자신이 꿈꾸는 세계, 미래를 열어줄 궁(弓)으로서 장(張)과 보(保)와 고(皐)를 내세우며, 청해진에서 자신만의 진지(陣地)를 구축하고, 진영(鎭營)을 두어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무역교류 육성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 구축
장보고는 청해진이 추진하는 무역을 통해 당나라와 일본, 동남아 지역들과 무역교류 육성을 위한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의 신라 거점을 구축했다. 신라 무역 육성과 글로벌 협력 확대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이다. 그는 청해진에 본보거지를 두고 당.일본.동남아와 신라 유망 무역산업을 위한 오픈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양국은 신라가 운영하는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 무역 신규 거점을 완도 장좌리 일대에 청해진 해상도시를 건립해 글로벌 무역사의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 신라 기업과 협력해 해외에 진출하게 했다. 또한 해당 프로그램의 당 외 거점으로는 일본. 동남에 두고 활발하게 진행했다.
장보고가 운영하고 추진으로 출범한 ‘국제자유무역’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이다. 유망 국제무역을 선발해 사무공간과 창고 등 무역 인프라를 제공하고, 무역개발(T&D) 협력과 멘토링, 투자 유치 연계 등을 지원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무역 스타트업들의 누적 투자 유치 규모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넘어섰으며, 수많은 무역진출 개척 프로그램이 추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규 검점은 신라국제자유무역 청해진에 설치, 오픈이노베이션 센터 완도에 들어서게 했던 것.
양국은 입주 기업 선발과 육성 등 운영 전반을 공동으로 추진하게 했다.
그런 협력은 신라의 사외 스타드업 육성 프로그램인 청해진 아웃사이드가 무역산업 생태계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게 했다. 청해진 아웃사이드는 000년 청해진에서 시작된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이후 당과 일본, 동남아 등으로 확대됐다.
장보고는 “당.일본.동남아 등 여러 나라들과의 협력은 국제 거대한 시장의 개방적인 무역 역량을 통해 신라 유망 무역에 성장의 기반을 제공하는 계기가 될 것” 이라며 “상생 협력 본보기 확산을 통해 신라무역의 지속 가능한 성장 지표를 확보하겠다” 고 하면서 신라의 우수한 인재를 보유한 무역기술 혁신 중심지로 부상하며, 신라 거점이 무역에 필요한 자원과 전문성, 국제교류를 제공하는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청해진과 장보고 함수관계
청해진은 ‘맑은 바다에 진(鎭)을 친다’ 는 뜻이다. 장보고는 확장을 위한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장보고는 신라의 국방비 부담 수준이나, 방위산업 발전 정도, 국제적 군사력 순위 등 객관적 상황에 있어서 국가 방위에 우려할 상황이 아니도록, 그는 청해진을 통해 신라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는 데 노력했다.
청해장 해진보 청해진고라는 청해진과 장보고를 함성하는 글로 두 관계를 설정하며, 두 관계에서 오는 의미를 함수관계로 푼다.
청해장(淸海張)은 ‘바다를 맑게 하여 신라의 영토로 확장시키겠다’ 는 것이다. 바다를 맑게 한다는 것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불안조성, 무질서, 파괴 등을 해결한 빛이 맑고, 사념(邪念)이 없고, 탐욕(貪慾)이 없는 바다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그릇된 생각을 갖거나,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일을 바로잡겠다는 데 청(淸)이다. 바다를 그런 청으로 만들어 영토나 무역을 확장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해진보(海鎭保)는 ‘바다에 진을 쳐 보호한다’ 는 것이다. 바다를 안전하게 하여 신라 국민의 생명은 물론, 신라가 국제무역항구로서 해외로 진출하도록 진을 쳐 보호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마음이다.
청해진고(淸海鎭皐)는 ‘청해진을 통해 호령하고, 그러면서 높은 위치에 오르게 한, 그런 인물이 되겠다’ 는 것이다. 청해진고는 바로 장보고, 청해진 대사를 말한다.
●신라.당.일본 삼각편대 연대
장보고가 왜 무역에 열을 올렸을까? 이런 궁금함을 가져보게 된다. 왜 그랬을까? 물건에 욕심이 나서 탐나서 그랬을까? 이걸 빼앗아 다른 나라에다 팔려고 했을까? 별의 별 추측과 판단을 해보게 된다.
장보고는 ‘무역(貿易)’ 이라는 달콤한 얘기를 자주했다. 그것도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 을 제시했다. 신라의 물품을 해외로 수출하고, 해외 상품을 신라로 수입하는 중계무역(中繼貿易)을 구상했다. 이런 일을 염두하고 그는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그는 자신의 안에 공감을 얻고 허락을 받아 추진했다.
장보고는 신라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하면, 신라가 안정 속에 부흥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무역을 통해 당과 일본 등의 나라들과 전략적 파트너로서 관계를 맺어 평화를 지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신라가 세계 중심 세력으로 부활할 수 있다고 봤다.
신라는 해로 개척을, 당은 무역 항구를, 일본은 해로 지도를 내놓는 등의 이렇게 형성되면 해상붐과 나라붐이 동시에 일어나고 경제의 부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이런 구상이 새로운 정치.경제.사회 프레임을 짜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장보고는 나라의 미래와 운명은 무역에 달려져 있다며, ‘무역으로 나라와 동맹을’ 이런 슬로건 아래 무역으로 평화(平和)를 이루려고 했다. 그는 무역확대가 국가 간 상호의존(相互依存)을 높여 전쟁을 회피하도록 만든다는 신념을 갖고, 무역의 평화 이론을 제시하며 무역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무역이 평화를 담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정학적 갈등과 보호무역이 확대되며 그 효과가 약화될 수도 있는 점을 예견하고, 그는 무역에 철저한 연구와 집행으로 신중했다.
그런 것을 염두하고서 그는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이 커질수록 전쟁으로 무역이 던절될 때의 손실이 커져 군사 충돌을 피하려는 동기가 생긴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무역이 곧 평화다’ 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신라 주변국과의 경제 통합과 나라간 영토 다툼 이후의 자유주의(自由主義)와 국제경제(國際經濟) 질서가 무역 확대와 평화 연관성을 보여줬다.
무역이 평화를 만든다. 평화가 무역을 만든다. 이런 논리에서 장보고는 신라의 평화는 〈무역〉 에서 찾았다.
장보고는 교역 확대가 오히려 군사 충돌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그는 군사와 함께 무역을 도시에 추진했다. 그게 청해진(淸海鎭)이다. 진(鎭)은 ‘진압하다. 물건을 두다’ 라는 뜻이다.
●장보고의 달콤한 거래, 신라의 따뜻한 유혹
“물건이 국경을 넘지 않는다면, 군인들이 넘을 것이다.”
무역과 평화는 강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역이 평화를 상당한 수준으로 촉진시킨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점을 장보고는 파악하고 국제개방무역(國際開放貿易)이 평화를 두드러지게 장려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에게 더 큰 시사점을 제시함에 〈무역이 평화를 장려하고, 국가를 번영시킨다〉 는 유의마한 실증적 증거를 제공해, 신념을 가졌다.
장보고는 이런 일에 말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촉진하는 무역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장보고는 신라 중계무역에 대해 〈달콤한 거래〉 라고, ‘달콤한 상업-Sweet Commerce’ 로 상업이 폭력을 교환으로 치환(置換)하는 완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상업+무역은 파괴적인 편견을 치유하며, 상업이 있는 곳엔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엔 상업+무역이 있다” 라고 주장했다.
징보고는 신라무역 달콤한 거래에 ▲평화적 상호작용 ▲온화한 영향, 그리고 ▲따뜻하고 화합하는 더 많은 것들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상업으로 인한 사회적 이득의 일부로 여겼다.
장보고는 상업=무역은 제각기의 개인들을 통합시킨다는 믿음으로 무역은 그들을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며, 개인들을 위한 장(場)을 만들고, 참여시킴으로써 ‘평등(平等)’ 에 기여하게 했다.
시장 접근을 거부하는 것은 지역사회 내에서 개인들을 계층화하고 소외시키는 효과를 불러와, 시장 접근 거부는 최소화했다.
장보고는 무역은 협력적(協力的)인 과정이며,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보고, 국경을 넘어 더 큰 무역을 지향하는 정책은 ‘번영(繁榮)과 평화(平和)’ 를 위한 길을 만든다고 설파했다.
장보고의 달콤한 거래, 신라무역 정책 추진 이념은 『무역 장벽은 고립(孤立)을 뜻한다. 고립은 증오(憎惡)를 낳고, 증오는 전쟁(戰爭)을 낳고, 전쟁은 침략(侵略)을 낳는다』 라는 정의를 내리고, 그는 “무기를 동반한 침략은 우리 도시들을 파괴하지만, 무역 선박의 침략은 상품의 자발적인 교환을 제공, 즉 침략 없는 자우무역을 추진하게 된다” 고 강조했다.
장보고는 당나라의 관계 개선의 시작도 〈무역〉 이었다. 이처럼 무역은 〈평화〉 의 도구로 봤다. 왜냐하면 무역은 하면 할수록 서로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양국이 서로 자유롭게 각자가 잘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物件)을 수출하고, 수입하면 혼자서 자급자족(自給自足)하려고 할 때보다 더 다양한 물건을 더 많이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어서 생활이 윤택해지고, 그만큼 더 많은 지원과 선택이 생기고, 영화로운 삶을 누리기 때문이다. 자본이 그만큼 채워지면, 속에서부터 윤기가 나온다고 본다. 그런 윤택함과 단백하고 단단함이 참으로 부러워지게 했다. 장보고는 무역산업에 있어서 “나는 윤택해지기로 선택한다” 고 했다.
신라는 장보고의 무역 정책으로 부를 축적해, 그만큼 윤택해지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행복한 미소를 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고 했다. 그는 “더도 말고 내년에도 올해와 같으라고 기도해 보렵니다” 라고 했다.
나를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것은 무역이었던 것.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자유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일, 바로 진정한 삶을 사는 일이다. 장보고가 추진하는 무역, 그 받는 이익에 의해서 그 사회는 그만큼 윤택해지거나 법다워졌음이 틀림없다. 사회가 윤택해지고 이웃들이 삶이 윤택해지고 법다워지는 것은 모든 백성이 바라는 일이다. 그 바라는 바가 실현되었다면, 그 자체만으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내가 하여야 할 일인데, 내가 미처 해내지 못하였을 때 어느 누군가가 해냈다면, 나는 그분에게 깊이 감사하고, 그 공덕 쌓은 일을 함께 기뻐하여야 한다』 는 장보고의 무역 정책에 백성들은 찬사의 박수를 보냈다.
글로벌 경제화한 세계는 이전의 어느 시대 때보다 더 자유로운 국가 간 무역으로 외국사람들과의 더욱 가까워졌고, 상호 존중하는 마음이 높아졌다. 사람들은 자유와 개인의 소유권 존중을 바탕으로 한 국제간 무역거래가 쌍방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 국가의 부(富)를 증진시킨다는 사실을 장보고는 깨달았다.
더 부자가 되고 싶으면 다른 나라와 더 자주 무역을 해야 한다고 장보고는 주장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많은 국가가 자본주의 생성기에 절대주의 국가가 취한 경제 정책의 중상주의(重商主義)의 자기 나라의 문화나 전통, 국민적 특수성만을 가장 우수한 것으로 믿고 유지.보전하며 남의 나라 것을 배척하는 ‘경제적 국수주의(國粹主義)’ 를 버리고, 전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유무역(自由貿易)으로 성공한 나라를 꼽으려면 분명 첫 손으로 〈신라〉 이어야 한다. 장보고의 달콤한 거래, 신라무역...
‘신라는 어느 나라보다 무역을 통해 현재를 융성(隆盛)하게 하고, 미래를 발전시켜야 한다’ 라는 장보고의 무역 정책과 정신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 신라는 세계에서 대외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이기 때문에, 무역은 신라인의 생활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었고, 글로벌 경제가 침체되면 신라의 경제도 침체된 매우 취약한 경제구조를 보이는 듯하면서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제 성장을 보여줬다.
‘무역은 평화를 낳는다. 평화가 무역을 낳는다.’
장보고의 신념, 그런 사고로 국제자유무역을 추진했고, 그는 무역을 위한 ▲잘 정리된 바다 질서 회복 ▲안전한 평화로운 바다 지향 ▲원활한 해로 개척 확대 ▲활발한 무역 증진으로 〈해상도시〉 를 건국해 훌륭한 개척자, 혁신가, 선구자의 탁월한 리더자로서의 ‘해상왕’ 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 생활이 모두 정치다. 우리의 꿈, 희망이 모두 경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은 요리에 관심이 없다고, 배만 부르면 된다고... 불을 지핀 사람도, 재료를 고른 사람도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나 불이 꺼진 날, 냄비가 타들어 간 날, 재료가 한쪽으로만 쏠린 날이 오면 그들은 놀란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식탁을 두드린다. 그래도 여전히 말한다. 자신은 요리 같은 건 모른다고... 도시는 늘 움직이는 시계 같다. 초침은 보이지 않지만, 분침은 사람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럴 때 시간이 느리게 간 골목, 계절을 건너뛰며 늙는 공간, 즐기고 싶은데 즐길거리는 줄어들고, 사람은 늘어나는 데 쉴만한 곳은 줄어들고, 누군가는 시간을 관리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개인의 선택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장보고는 이런 현실에 〈희망의 파도〉 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파도를 만들지 않았다고, 나는 그저 떠밀려 왔다고, 하지만 바다는 늘 누군가의 손짓을 기억한다. 파도는 아무렇게나 일지 않는다. 멀리서 조용히 흔들린 선택들이 모여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에까지 밀려온다. 그때 사람들은 물이 갑자기 성질을 부렸다고 말한다. 바다가 원래 그렇다며 웃어넘긴다. 웃음은 파도보다 가볍다. 파도는 늘 웃음 속에 일으킨다. 신라파도는 성난 파도가 아닌 부드러움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물보라를 만든다. 장보가 만든 파도는 더 그렇게 보이고 느껴진다.
장보고의 파도는 장파(張波)로 파문을 낳았다. 보결(保洯)로 물결을 일으켰다. 고해(皐海)로 바다를 만들어냈다. 파문(波紋)은 ‘확장(擴張)’ 이라는 퍼져감이며, 물결(水洯)은 ‘수호(守護)’ 라는 지킴이며, 바다(海洋)는 ‘전달(傳達)’ 이라는 부름이다. 이 파도는 ‘희망(希望)’ 이라는 주제로 파도를 쳤으며, 이 파도는 〈해파랑〉 으로써 신라에서 당과 일본, 동남아 등지로 미치게 했다.
신라 해파랑은 에너지원에 따라 그 높낮이나 위력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데, 진바람에 의해 일어나는 파문이다. 이 해파랑은 모래 등의 퇴적물을 쌓아 갯벌, 모래 등을 형성하듯이 신라 해파랑은 물건을 청해진에 쌓게 했다. 간혹 해파랑이 퇴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곳을 깎아내어 만이나 곳 같은 지형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주로 모래톱을 형성하는 해파랑이었다. 해파랑은 ‘풍랑, 너울, 삼각파, 사각파도, 조파, 진파, 로그 웨이브’ 등으로 파도를 일으켰다. 이 파도는 간혹 상태가 안 좋을 때 일으켰다. 주로 잔잔한 파도, ‘에메랄드 빛 바다의 잔잔한 파도’ 처럼 영롱하고 반짝임을 보여줬다.
신라 골목의 간판은 해매다 바뀐다. 신라를 호령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친다. 선구자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혜성(彗星) 같이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던 것, 그런 것을 보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고 말한다. 신라무역을 새롭게 제시하며 미래의 먹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라는 밥의 온도, 길의 경사, 의지의 높이, 문화의 거리 하루의 피로 속에 섞여 있다. 그것은 거창한 이름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 늘 생활의 옷을 입고 슬그머니 들어온다. 그래서 모른다고 말하기 쉽다. 그래서 외면하기 편하다. 그러나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다. 누구나 신라의 공기를 마시고 환경에 접하며 살아가고, 그 길을 걷고, 그 시계 아래에서 나이를 먹는다. 말하지 않아도 선택은 이미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 삶이여서 장보고는 고민하며 생각해내기를 〈신라무역 백성행복〉 이라는 카드를 껴내 들었다. 이 카드를 당과 일본, 동남아 등지로 제시하며 “우리 협상합시다.” “우리 무역합시다.” “우리 상생 발전합시다.” “우리 무역으로 번영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갑시다.” “우리 문화를 꽃피웁시다” 라고 통상무역(通商貿易)에 당당히 나섰다.
나라와 나라사이에 물건을 서로 사고팔거나 교환하는 무역(貿易)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무역이란 우리가 매일 걷는 길 위에, 매일 마시는 물속에, 매일 앉는 식탁 위에 이미 스며있다. 그 길과 식탁과 물길을 안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로써 백성들의 삶도 편안해지고, 백성들의 하루도 윤택해지고, 백성 모두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고, 신라는 번영(繁榮)한 나라가 된다. 이런 믿음을 갖고 추진한 장보고의 〈신라무역 백성행복〉 정책 구현은 신라를 부강하게 한 일로 기억에 남는다.
●건덕 궁복, 국두 장보고 우수한 유전자
가장 똑똑한, 가장 영리한, 가장 우수한, 가장 탁월한, 가장 뛰어난, 가장 훌륭한 이런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최고의 피(血)를 물러 받은 사람으로 볼만하다.
건덕이라는 인물로 본 궁복(弓福), 궁복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영암 선암마을’ 에서 칭한다. 궁복이 어진 제왕으로 볼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의 궁복에 대한 예칭(譽稱)이다. 궁복과 관련된 바위에 ‘건덕(乾德)’ 이라는 칭호를 붙여준 마을사람들이다. 이 것은 선암마을에서 궁복이 탁월한 장보고라는 인물을 배출했다는 징표(徵表)다.
국두라는 인물로 본 당나라에 갔었던 장보고, 장보고라는 이름은 그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볼 정도로 우수한 장수로 성장하거나 여러 환경을 조성했다고 해서, 또는 완도 청해진에서 해양 질서, 무역 증진 등 탁월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서 마을사람들의 장보고에 대한 예우(禮遇)다. 이것 또한 궁복이 장보고로서 뛰어난 인물이 이 고장 선암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적인 설에 궁복.궁파.장보고라는 한 인물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 진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장보고의 탄생 비밀은 이곳 영암 선암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건덕암(乾德岩)은 선암마을사람들은 이 바위와 연관 설을 인정하고 사실로 믿고 있다. 그리고 국두암(國頭岩)은 선암마을에서는 부두(埠頭) 역할을 띤 이 바위와 인연 설에 긍정하며, 궁복은 이 바위에서 배를 타고 떠낫다고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수궁이 갈만한 설에 궁복.궁파.장보고라는 한 인물에 대해 바위가 전하는 전설적인 역사에 역사적 사건.인물에 대한 전승이 구전.문헌.증거물과 결합해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영암 선암마을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의 탄생지는 미확인 된 채 궁금함을 자아내고 있다. 100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장보고의 탄생지는 미확인 상태다. 허나 선암마을에서는 궁복으로 태어난 장보고의 탄생지라고 전한다. 그 신빙성은 전승의 근거는 지명.유적.인물 등으로 경로를 확인하게 해주고 있다.
『영암 선암 지역 장보고 전설의 존재양상과 역사적 변동단계에 관한 연구』 , 이런 제목으로 규명해 볼 때 건덕암과 국두암을 기반으로 둔 장보고 탄생지는 궁복이라는 이름과 연관성들이 있는 전남 ‘영암 선암마을’ 에 전승(傳承)된다. 건덕암, 국두암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텍스트이다.
궁복.궁파.장보고는 역사에 전설이 된 인물이다. 영암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마을과 바위, 역사적인 장소들이다. 장보고는 바다를 제패한, 무역의 선진화를 추구한 신라 1000년 왕국으로 만든 전설의 해상왕이라고 부를만하다.
영암 선암마을에서 궁복.궁파로 알려진 장보고와 건덕암.국두암에 얽힌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9세기에 해상을 지배하고, 찬하를 호령하고, 강력한 군사집권 체제를 구축했던 장보고, 그는 세상 모든 것을 가졌던 군주의 해상을 지배한 제왕이었지만, 단 하나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 이었다.
장보고는 자신 이룩한 거대한 바다 제국(帝國)을 영원히 다스리고 싶어 했고, 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술사(術士)와 병사(兵事)들을 불러 모아 해상왕에서 장수왕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장수는 생명유지이면서 군 통솔자, 무역대표였다.
장보고가 이런 희망을 가졌던 것은 정치적 해석으로 ‘강력한 해양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성함을 부여하려던 시도(試圖)’ 였다. 탐험적(探險的) 측면에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거대한 계획(計劃)’ 이였다. 인간적 축면에서 ‘죽음 앞에 한없이 나약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인 갈망(渴望)’ 이었다.
장보고는 결국 자신이 원한 일을 이루지 못하고 근무 중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신라를 넘어 해외 영토 확장과 영원한 생명과 삶의 영생(永生)의 장수왕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기록과 전설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인간의 욕망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질문에 던지고 있다.
당나라였던 중국 수주에서는 ‘군사(軍事)’ 로서의 공이 새겨지고 있고, 완도 청해진에서는 군사.무역으로 인한 ‘해상왕(海上王) 장보고’ 라는 인물로 기록되고, 영암 선암에서는 궁복이 어린 시절의 흔적이 있는 ‘건덕암(乾德岩)과 국두암(國頭岩)’ 이라는 바위 명칭으로 역사가 되고, 문화유산(文化遺産)으로 전해진다.
선암동건덕지궁복유
船岩洞乾德之弓福有
선암해국두지궁파현
船岩海國頭之弓巴現
선암마을에는 높은 제왕의 궁복이 존재하고
선암바다에는 나라 황제의 궁파가 나타났다
선암마을의 두 바위는 궁복은 ‘건덕(乾德)’ 으로, 장보고는 국두(國頭)‘ 로 기록되고 있다. 이 두 바위의 전설은 대한민국 역사의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한 원한이 서린 통곡의 바위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1000년이 지난 후에, 궁복과 장보고의 흔적(痕迹)을 말해주고 있어, 그에 대한 감추어진 역사를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해준 것 같아 어쩜 바위가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더 역사를 전하고 있고 사실적인 기록이요,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더 끼치고 있고 역사를 말해준 듯하다. 값져 보인다.
건덕여서 장보고는 ‘건장(乾張)’ 하다. 국두여서 장보고는 국보(國保)이다. 장보고는 덕과 두를 갖추어서 ‘두고(頭皐)’ 이다. 이런 인물을 기록해둔 곳이 영암 선암이니, 선암은 영암의 성지(聖地)로 여길만한 곳이 아닌가 한다. 장보고에 대한 순례(巡禮) 길은 선암에서 시작하여 중국 산둥반도와 완도 청해진에서 마친다.
●건은 창조.원동력.생명의 시원 상징
“건원(乾元)은 만물의 시작이다.”
하늘이 만물을 낳고 쉬지 않고 운행하듯, 건괘는 엄추지 않는 생명력과 주체적 시작을 말한다.
“스스로 빛을 발하되 하늘처럼 겸허하라.”
건괘(乾掛)의 힘은 강함 그 자체가 아니라, 바름.지속.책임에서 완성된다. 시작할 수 있는 용기, 끈까지 가는 인내, 높이 올라갈수록 낮아지는 태도 이 셋이 함께할 때 건괘의 참된 덕이 드러난다고 했다.
궁복.궁파인 장보고를 군자이자 큰 인물로 상징했다. 그는 물속에 잠긴 ‘잠룡(潛龍)’ 의 때를 기다리는 시기, 세상에 드러난 ‘현룡(見龍)’ 의 재능이 나타나는 시기,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 의 사명을 수행하는 시기의 용으로 그는 강하되 무례하지 않는, 높되 독주하지 않는, 앞서되 시기를 살핀 진정한 리더, 진정한 창조자로서 늘 하늘의 이치를 닮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되 조금하지 않았던 장보고, 힘을 가지되 남을 누르지 않았던 장보고, 성공 속에서도 스스로를 경계했던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나는 지금 날아야 할 때인가?” “아니면 하늘을 바라보며 준비할 때인가?” 그는 시기를 잘 파악해 때가 됐다고 싶으면 비상했다.
건(乾), 붉은 빛은 음이 섞이지 않은 순양의 빛이며, 건의 존엄성과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 상이다.
궁복.궁파.장보고를 보기를 건덕(乾德)리라고 본다. 건은 잠룡이 드디어 활동무대에 등장한다는 뜻이다. 그는 기운이 상승할 때 조심하는 자세를 취하며 도약의 기회를 노렸다.
그는 성실하게 내실을 다져 새로운 시도를 했다. 날아올 준비를 하며 숨고르기를 한 후 비상을 시도했다.
장보고는 드디어 비룡(飛龍)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경지에 올랐다. 최고의 기량(技倆)을 발휘하며, 최고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위로 나온 멋진 ‘비룡건(飛龍乾)’ 이다.
영암 선암마을에 있는 궁복.궁파.장보고를 상징하는 건덕암(乾德闇)은 맘추지 않는 우주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건은 순수한 양(陽)의 기운이며,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얹힌 ‘중건(重乾)’ 의 형상은 에너지가 복제하듯이 끝없이 솟구치는 ‘생명의 원천’ 을 바위로 시각화(視覺化)한 것이다. 건덕암으로 시각화한 바위는 궁복.궁파의 장보고를 무형(無形)의 모습으로 나타낸 ‘비구상화(非具象畵)된 동상(銅像)’ 이다.
공자는 상정(象傳)에서 건괘를 보고 ‘천행건(天行建) 군자이자강불식(君子以自强不息)’ , 하늘의 운행(運行)은 굳건하니, 그 생명력(生命力)을 본받는 존재는 스스로 강하게 하여 쉬지 않는다는 뜻으로 평했듯이, 선암마을 사람들도 궁복을 낳게 해준 거북바위를 무한한 생명력을 지녔다하여 ‘건덕암(乾德岩)’ 으로 불렀다.
에너지라는 무형의 건(乾)이 물질이라는 유형의 기초를 닦는 순간의 ‘운행우시(雲行雨施) 품물류형(品物流形)’ 으로 하늘의 기운(빛)이 구름과 비처럼 흘러내려 만물이 각자의 형태를 갖추게 한 게 〈건덕암〉 이다.
건(乾)은 ‘생명력’ 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하늘 천(天)은 하늘의 형체를 그린 글자라면, 하늘 건(乾)은 하늘의 ‘성격과 본질적’ 기능을 의미한다.
겅장하여 쉼이 없다.건은 끊임없이 만물을 창조하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건은 하늘.아버지.군주.우두머리.둥근 원을 상징한다. 건덕은 웅크려 숨은 상태로부터 밖으로 드러나 비약(飛躍)의 과정을 거쳐 극한에 도달아 다시 원상으로 복귀한다는, 이른바 극긎반(極則反)을 보여준 바위이다. 궁복이 장보고로 크게 출세하여, 그 혼(魂)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표시로 거북바위를 건덕암을 배를 타고 갔던 국두암과 함께 모셨다.
‘위로 나오다’ 는 뜻을 지닌 건(乾)은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거늘, 기필코 쓸모 있으리라(天生我材必有用).
선암마을사람들은 하늘이 장보고에게 재능을 주었다며, 궁복은 장차 큰 인물로서 성장하고 출세할 것이라고 믿었다. 역시 기대하는 대로 궁복이 장보고로 큰 인물이 되어 마을사람들은 바위에 ‘건덕(乾德)’ 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붙여줬다.
건덕은 ‘건원(乾元)’ 으로써의 의미를 같이한다. 원(元)은 ‘시작이고, 크며 우두머리’ 로서 주제하고 통괄한다. 건원은 ‘만물의 시작’ 이다. 장보고가 위로 나와 우두머리로서 군림하였으니 ‘건덕(乾德)’ 이라는 뜻을 부여했다. 장보고가 ‘세상을 통괄’ 해 궁복과 관련된 바위를 ‘건덕암(乾德岩)’ 이라고 불린 이유다. 하늘의 성정(性情), 타고난 자질의 경향성을 띤 장보고이기에 그에게 ‘건(乾)’ 이라는 성스러운 단어를 붙어준 것이다.
궁복을 얻게 해준 바위가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크게 출세를 했으니, 이 바위를 두고 위로 나와 〈세상의 어진 사람〉 이 됐다하여 ‘건덕(乾德)’ 이라는 바위 명을 붙여주는 마을사람들의 궁복.궁파.장보고를 향한 사랑, 그리고 기도(祈禱)가 참으로 거룩하다.
또한 선암마을 앞에 있는 배를 정박한 ‘부두(埠頭)바위’ 를 선창 부(埠)를 나라 국(國)로 바꿔 ‘국두암(國頭岩)’ 이라고 한 것은 이 부두(埠頭)가 궁복이 이 부두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궁복으로 산둥반도에 있는 신라방(新羅坊)를 찾아 여기서 머물다가 곧 서주의 무령군(武寧軍)에 입대하여 소장(少將)으로 진급해 위세를 떨쳤다.
그러면서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와 교역이 성하였던 산둥반도와 장쑤성 등 신라인의 왕래가 번번하였던 곳에 있었던 신라인의 집단거주지를 신라방이라 하며, 이곳에 세운 사찰은 ‘신라원(新羅院)’ 이라 하였다. 신라원은 당나라에 머물렀던 신라인의 신앙(信仰)의 지처이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예배 처였다.
신라원은 흥덕왕 때 장보고가 산둥반도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대표적인 절이다. 이 절은 해외 포교원(布敎院)의 구실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국인 신라와의 연락기관 구실도 하였으며, 신라에서 당나라로 간 승려는 물론, 일본의 승려들도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이런 일을 한 장보고이기에 그에 대한 칭호는 높아지게 되고 우러러 보게 됐으며, 그래서 장보고가 이 부두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갔다고 하여 부두(埠頭)를 ‘국두(國頭)’ 로 하였다.
건덕암은 전남 영암 선암마을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궁복.궁파인 장보고의 탄생설화는 완도가 아닌 〈영암〉 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함이다.
●장보고의 해외진출 정책, 별을 그리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무역을 통한 해외진출지도는 별(星)을 그리는 모양새다. 신라를 중심으로 위로는 발해, 좌로는 당, 우로는 일본, 아래의 좌로는 유럽, 우로는 동남아 지역 등으로 진출하는 해양무역지도를 그리며 진출했다.
나라간 지역 간의 교환, 즉 수출입으로 구성한 나라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실크로드나 바닷길을 통해서 대규모로 무역을 한 ‘국제무역(國際貿易)’ 을 〈신라를 거점도시 중심〉 으로 집중하며, 무역정책을 길게 ‘합리성.경제성.효율성 중심’ 으로 배치했다. ‘신라별정책을 추진하다’ 라는 슬로건으로 별모양을 그린 무역지도를 그려내는 보급선을 통해 해외무역을 진행했다. 특히 당과 일본에 좌우 날개로 보고 이 두 나라에 집중하며, 신라무역이 비상(飛上)하도록 신경을 썼다.
장보고가 ‘무역성(貿易星)’ 을 그리는 무역을 고집한 것은 무역 파트너이자 동반자로 보고 신라를 비롯해 당.일본.동남아 등 여러 지역이 별처럼 반짝이는 모습을 그리자는 생각으로 ‘별 지도-Star Guidance’ 를 그린 〈스타 트레이드-Star Trade〉 를 추진했다. 무역성의 별 지도는 별처럼 떠오르고 빛나는 무역으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무역은 그 나라 경제의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무역이 없으면 석유를 들어올 수도 없고, 반도체를 팔수도 없어 대한민국 경제가 무너지게 된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바다를 개척해서 조선업과 해운 산업을 발달시키는 이유도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이다.
이런 점을 1000년 전에 이미 실천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바다 사나이 ‘장보고(張保皐)’ 다. 그는 국제무역에 있어서 필요한 사람들끼리 필요한 재화(財貨)나 용역(用役)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가를 주는 것으로 거래방식을 추진했다.
무역과 연관성 나라들끼리 ‘아시안연합’ 같은 공동시장내지는 〈완전경제통합체〉 를 창설, 직접적인 경제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유무역협정 같은 양자 간 무역자유화나 세계무역 같은 다자간 무역자유화에 대해서도 열을 올릴 정도로 장보고는 이미 지금처럼 무역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한 국가가 물길을 이용해서 자국의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의 해양력(海洋力)을 갖추어 ▲조선 능력 ▲상선의 수 ▲해운 거점의 수 및 하역량 ▲무역 해양과학 및 해양 자원 확보 능력, 그리고 이 모든 활동으로 나타나는 이익과 물길을 수호(守護)하고 타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해군력(海軍力)을 갖추고 추진했다.
장보고는 이 범주 내에서 무역을 추진했으며, 무역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해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정치적 이익을 창출해내는 해군력과 함께 아주 독보적 위치를 점하게 했다.
장보고는 국제무역에서 정부나 국제기구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제도의 ‘자유무역(自由貿易)’ 을 추진했다. 그는 국제 시장을 ‘자유시장화(自由市場化)’ 하며 물건은 국가 간에 자유로이 교역(交易)하게 했다.
장보고는 무역에 있어서 재화나 용역을 국내의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저렴한 기격’ . 국내에서 생산된 물품에 국한되지 않고, 해외에서 생산된 여러 상품에도 접근이 가능한 무역을 통해 보다 다양하고 넓은 선택의 폭을 가지게 한 ‘넓은 선택의 폭’ , 가 나라마다 보유한 다른 자원 등을 보유하지 않았지만, 다른 물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자원이 필요한 나라들에게는 무역이 불가피한 만큼 무역을 통해 외화(外貨)를 받고, 그 외화를 이용해 필요한 천연자원들을 매입하게 한 ‘자원의 차이’ , 무역을 통해서 시장의 규모는 커지게 되고, 수요는 증가하게 되면서 생산자들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 달성’ ,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품의 품질을 올려서,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에게 더 낮은 가격으로 더 좋은 생산품을 공급하는 더 효율적인 생산의 ‘기업 간의 경쟁’ , 재화나 용역에 특출 난 국가들은 그 재화나 용역의 생산에 대한 전문화를 거쳐 가장 효율적으로 자원을 이용하여 생산을 한 ‘효율적인 자원 배분’ , 무역을 통해 외화를 보유할 수 있고, 그 외화는 여러 방면으로 쓰인 ‘외화 수입’ 에 집중했다.
장보고의 별모양 무역지도, 무역성은 무역 현상이나 투자 흐름을 한눈에 정리한 지도형 자료이다. 무역지도를 별모양으로 시각화해 별 아이콘을 쓰는 방식으로 무역을 했다.
무역의 거래 상승, 하락을 지도에 색.아이콘으로 표시해 지역별 흐름을 한눈에 보는 방식의 빨간별은 상승, 파란별은 하락으로 정리하는 데, 별모양 포인트로의 무역성을 그리기도 했다.
장보고는 신라와 거래하는 나라들이 하나의 ‘거대한 별’ 로서 떠오르게 하겠다는 신념으로, 신라를 거점 중심으로 하여 당.일본.동남아.유럽 등지로 무역을 확대시켰다.
출렁이는 파도 없으면
바다가 아무 소리 낼 수 없는 것처럼
먼 데서 바라봐주는 장보고가 없으면
바다가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속 깊고 넓은 신라가 없으면
아무도 청해진을 봐주지 않는 것처럼
마주 본 장보고 없으니
내 목소리는 머무를 곳 없어
신라의 청해진 장보고의 바다를
다시금 그려본다
●장보고 이름 다시 새겨보다
궁복으로 세상의 태어나서 어진 사람으로 성장, 기대하게 했던 그는 이름 값을 한다는 말처럼, 그는 궁복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해돼, 마을사람들은 그를 보고 궁복이 뭔가 해낼 큰 인물로서의 성장하지 않을까하는, 예사스럽게 보고 있었다.
그가 궁복이라는 이름이 어찌나 기운을 탔는지, 그는 마을을 박차고 떠났다.
“아 난 지금 내 자리가 너무 협소해!”
“난 이곳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들이 없어 보여!”
“공간이 너무 좁아!”
“큰 공간이 필요해!”
“내 꿈을 펼치는 큰 공간을 찾아 가자!”
~하며 궁복은 정년 친구랑 함께 신라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그들은 보모에게 말씀드리고 마을 앞에서 바위부두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났다.
중국 산둥반도, 당나라 쓔저우에 도착해 이미 신라인들의 정착촌인 ‘신라방’ 에 머물려 당나라에서 일할 것을 궁리한다, 그들은 갈고닦은 무예(武藝) 솜씨를 발휘하기 위해 군인을 모집고 있는 ‘무령군(武寧軍)’ 에 입대했다.
궁복은 자신의 이름을 〈장보고〉 로 개명하여 무령군 군사로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는 개명에 어떻게 지으면 좋을까? 많은 생각들을 해됐다. 그는 현명하게 활을 의미하고 넓힌다는 ‘장(張)’ , 지키고 돕는 ‘보(保)’ , 사회 질서와 안정을 위한 고요의 ‘고(皐)’ 라는 단어를 선택해 새롭게 작명(作名)했다.
그렇게 지어진 장보고에 대한 이름에 그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자신의 생각한 것들을 향해 매진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무령군에서 큰 공적을 세운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고국 신라로 들어와 완도 청해진에서 바다 질서와 안정을 회복하며 무역이라는 일에 큰 업적을 남겼다.
만약 그가 궁복과 장보고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 우리가 그를 훌륭한 인물로 보지를 안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이 많지만, 회사명 담게 큰 업적을 일으킨 회사들이 많지만, 장보고처럼 아름다운 이름, 훌륭한 일을 해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고 본다. 조선시대에는 이순신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 이순신보다 500년 앞서 훌륭한 일을 해낸 인물에는 ‘장보고’ 를 빼놓을 수 없다.
이순신이 자신의 이름을 조선 브랜드명과 작전명으로 삼았듯이, 장보고도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명과 전략으로 삼고 이행했다.
장보고라는 이름에 모든 철학과 이상, 꿈과 희망, 비전을 담은 이름은 〈장보고〉 라는 이름보다 더 의미 있는 이름이 있을까 싶다. 장보고는 나라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세계를 향한 시각이 얼마나 크게 그렸으면, 장보고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생각해보면 경의를 표하게 된다.
정말 ‘장하고, 보물이고, 고상함’ 이 깃든 장보고다.
●시궁창에서 별을 보다
청해진의 시궁창, 화살과 활. 창을 보관 정비하던 비창(備倉)의 현실이 매우 암담하지만. 장보고는 시궁창 훈련을 실시했다.
시궁창은 물이 빠지지 않은 진흙, 즉 몹시 더럽고 썩은 환경을 말한다. 청해진에서 시궁창 냄새가 진동한다, 그 악취가 맡은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냄새 고약한 시궁창, 수챗물이 잘 빠지지 않아 질척질척한 곳의 청해진이었다.
시궁창 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 그런 시궁창에서도 쥐가 자신의 삶의 터전인양 잘 견디며 살듯이 청해진에는 쥐 같은 사람이 득실거렸다.
청해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살고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라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나 비루한 일상이지만, 현실이 비록 비천할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숭고한 목표나 이상향을 가졌다. 시궁창 속에서도 삶을 지탱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녔다.
육체나 처지는 시궁창에 있을지언정, 영혼만큼은 높은 곳을 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눈앞의 이익이나 생존 문제를 넘어선 예술, 진리, 사랑과 같은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장보고였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했던 것,
모두가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현실, 시궁창 속에 있지만, 누군가는 그 절망에 맴돌게 되는 반면, 누군가는 더 높은 가치, 별을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 살고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라에 장보고는 ‘시궁창에서도 별을 보다’ 라고 화살과 활, 창을 다른 일로 고난의 삶이지만, 분명 희망의 빛을 보는 아름다운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줬다.
시궁창 냄새가 누군가에는 고약하지만, 누군가에는 고소한 향기였다. 장보고의 시궁창 환경, 그 전략적 환경은 무시무시하면서도 안전을 기했다. 장보고는 물건을 빼앗은 해적들에게는 아주 위협적인 시궁창이 되게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을 지켜주는 ‘시궁창(矢弓槍)’ 으로 하게 했다.
●장보고를 기리는 선암마을 건덕암, 국두암
마을사람들은 현명했다. 궁복이 장차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 것임을 예견했다.
“저 얘는 분명 덕을 갖춘 제왕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다.”
장보고로 성장한 것에 대해 마을사람들은 임금을 뜻하는 건(乾)과 어짐을 뜻하는 덕(德)의 ‘건덕(乾德)’ 이라는 칭호를 붙어줬다. 또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뜻한 ‘국두(國頭)’ 라는 칭호로 그를 보게 했다.
건덕과 국두라는 칭호를 붙여준 바위가 마을을 지키면서 한 인물을 상징하며, 전하는 전설적인 바위에 마을사람들은 영험하게 보고 추앙(推仰), ‘신격화(神格化)’ 한다. 전남 영암에 이런 궁복.궁파.장보고와 관련된 바위가 있다는 게 1200년 전 역사의 진실을 느껴볼 수 있어, 영암 선암마을은 〈궁수자리〉 를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라 본다.
●선성, 궁성, 장성은 성웅으로 빛나다
신선이 조성하는 ‘신성(神城)’ 은, 활로 만든 ‘궁성(弓城)’ , 궁성은 장보고로 이루어진 ‘장성(張城)’ 으로 성을 구축했다. 1200년 전에...
그 성(城)은 무너지지 않고 영원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다. 성웅(聖雄)으로...
신성이 존재한 선암마을, 그리고 영암, 궁성(弓城)이라는 성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장성(張城)으로 1000년을 이어가고 있는 궁복.궁파.장보고에 대한 인물역사는 우리에게 존경의 인물로 다가온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궁복.궁파.장보고에 대한 역사적 서사이면서 ‘성물(聖物)’ 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왜 그런 성물에 대한 서술은 다루지 못했는지, 수수께끼로 남을 뿐이다. 마을사람들은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며, 금쪽같은 내 새끼 복덩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궁복은 어진 복덩이라며, 그가 정년과 당나라에 가서 훌륭한 장수(將帥)가 된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신라로 들어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 ‘대사(大使)’ 로서의 바다를 지켰고,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고 들려준다. 신라는 장보고 때문에 한 시대를 화려하게 만든, ‘신라의 빛 찬란하게 이어졌다’ 자랑한다. 찬란한 빛의 신라는 장보고가 연출했다며, ‘바다, 금빛 풍요를 부르다.’ ‘무역, 신라의 부흥으로 펼쳐지다.’ ‘신라, 시간의 흐름 속에 공존하다.’ 장보고작품이 신라의 빛 찬란하게 이어지게 했다.
신성은 ‘신명(神明)’ 가 아닌가 한다. 하늘과 땅의 신령으로 재림(再臨)했다. 궁성은 ‘궁명(穹明)’ 이 아닌가 한다. 하늘에서 내려준 성물(聖物)로 나타났다. 장성은 ‘장명(匠明)’ 이 아닌가 한다. 우두머리로 군림한 제왕(諸王)으로 통치했다.
“궁복이 태어남은 월출산 큰바위얼굴이 기운을 불어줬기 때문이요, 궁파가 성장하는 것은 자라난 환경이 신비스러움 때문이며, 장보고가 해상왕으로 명성을 떨치는 것은 바다의 물결이 선암에서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해될 만큼, 선암의 영암은 영험한 기운이 넘쳐난다. 그가 만약 섬사람으로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과연 그가 우리가 일고 있는, 해상왕이라는 역사적인 인물로 보게 됐을까?
해상왕이라는 영예스러운 칭호를 얻게 된 배경에는 영암 ‘월출산(月出山)’ 이다. 월출산 구정봉의 〈큰바위얼굴〉 은 장보고의 이미지페이스임을 다시 한 번 말해둔다.
통일신라 때는 ‘월나악(月奈岳)’ 이었던 월출산은 ‘달이 나오는 산’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라 때부터 국가에서 제사를 지낸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월출산은 영험한 기운이 서려져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산(靈山)이 있는 고장에서 장보고는 궁복(弓福)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의 근처에는 궁수들이 훈련하는 훈련장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궁복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궁복이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다면, 그는 활을 쏘던 군사의 궁수(弓手)가 되지 않았다.
“궁복이 장보고로 큰 인물이 되게 마을이 영암 선암이다” 라고 들려준 설(說)은 선암마을에서는 마을에 있는 바위를 하나는 탄생에 관련 ‘건덕암(健德岩)’ 과 하나는 배를 타고 갔다고 하여 ‘국두암(國頭岩)’ 이 있어서 그렇게 본다. 특히 친구인 정년과 친한 사이였다는 설도 있어, 선암마을이 장보고 관련설이 다분하고 신빙성(信憑性)을 더한다.
●장보고의 장(張)의 弓, 보(保)의 人, 고(皐) 白
장보고의 이름 한자에서 장(張)의 부수 ‘궁(弓)’ 과 보(保)의 부수 ‘인(人)’ 과 고(皐)의 부수 ‘백(白)’ 의 궁.보.백은 〈활이 사람을 빛나게 하다〉 라는 풀이가 된다.
활을 만드는 장인 관점에서 활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혼(魂)과 맥(脈)을 담아 후대에 전하는 사명으로, 이를 통해 사람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키우고 빛나게 한다.
전통 활 무술 관점에서는 활을 쏘는 자세와 마음가짐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와의 경쟁으로 집중과 정돈을 통해 내면의 빛(성장)을 이끈다.
장보고는 이를 알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활이 사람을 빛나게 하다〉 라는 장보고의 이름에서 그려지고 있는데, 이런 한자를 자신의 이름으로 했다는 것은 상당한 깊은 철학(哲學)과 탁월한 예지(銳智)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한자어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갑골문(胛骨文)을 통해 극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심오한 비밀이 담겨져 있음은 알았을 때 깜짝 놀라울 뿐이다.
정말 장보고라는 이름에는 많은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다. ‘확장하다(張). 지키다(保). 위치에 있다(皐)’ 라는 것과 ‘안에서 조이고 밖으로 평창하다’ 또는 ‘장건(張騫).장비(張飛)’ 등 장씨 성을 가진 훌륭한 인물, ‘인보제(人保制)’ , ‘고요(皐陶)’ 등과 ‘활이 사람을 빛나게 하다’ 라는 이런 의미와 정신이 담겼다는 게 세상의 작명가들도 이런 깊은 뜻이 담긴 한자로서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는 이름인지는 과연 알고 있을까하는 장보고의 이름 선택,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장보고라는 이름에 우리는 그의 이름이 세계 중신에서 빛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보고가 보여준 성과를 토대로 다음 세대의 창작자, 개척자, 혁신가, 행동가로 더 큰 꿈을 더 넓은 무대에서 더 빠르게 펼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의 참 모델, 그는 세계적인 룰모델이 되어주었다. 그의 이름 궁복과 장보고로서...
장보고는 떠나고 없지만, 그의 이름은 남아있다.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빛나는 활약을 펼쳐준 신라대표주자로 신라의 참 모습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큰 감동과 자부심을 선사했다. 그의 투지와 업적은 분명 누군가에게 희망과 꿈이 됐으리라 본다.
장보고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 선암에서 ‘궁복(弓福)’ 이라는 이름으로 활을 다루는 사람으로 자라, 그는 당나라에서 가서 다시 ‘장보고(張保皐)’ 라는 이름으로 활을 다루는 사람으로 빛났다. 그는 다시 신라로 들어와 역시 활이 사람을 빛나게 하는 일에 종사하며, 세상에 명성(名聲)을 떨쳤다.
장보고(張保皐)의 한자, 궁(弓)과 인(人)과 백(白)은 〈활이 사람을 빛나게 하다〉 라는 뜻이라니, 활로 가장 빛났던 사람은 장보고가 아닌가 한다.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에도 〈활을 보이다〉 라는 뜻이 담겨있다. 복(福)자의 부수는 ‘보일 시(示)’ 다. 궁복의 궁시(弓示)는 〈활을 보여주다. 활 쏘는 솜씨를 보이다. 활 잘 쏘는 실력을 드러내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활을 잘 쏘는 실력을 보인 궁복이 활로 가장 빛난 장보고로 큰 인물이 됐다는 것을 그의 이름에서 유추(類推)해볼 수 있다.
장보고(張保皐)의 이름 보(保)의 인(人)와 고(皐)의 백(白), 인(人)과 백(白)을 합치면 ‘맏 백(伯)’ 이 된다. 맏 백(伯)은 ‘우두머리’ 를 뜻한다. 귀족.관직.존칭.기족관계(백부 등)에서 자주 쓰인 한자다. 장보고가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서의 우두머리〉 라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백(白)이 귀족.관직.존칭을 뜻하는 맏 백(伯)을 기록하는 데 쓰였다.
장보고라는 이름에는 여러 해석이 나오는 데, 이렇게 의미 있는 이름은 드물다. 이름 중에 최고의 작명이 아닌가 한다. 장(張)자의 장(長)은 ‘길다. 크다. 거대하다. 낫다. 우수하다. 뛰어나다. 영원하다‘ 라는 뜻 외에도 〈우두머리, 최고책임자. 권한자〉 와 어른, 장인. 자라다 등도 담겨져 있다.
장보고의 장보고의 보(保)는 갑골문에서는 ‘人(사람)子(아들)’ 로 ‘아이를 안아 보호한다’ 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보(保)’ 의 지키다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보(保)의 부수 사람 인(人)변을 빼면 ‘어리석을 태(呆)’ 이다. 태(呆)는 입 구(口)와 나무 목(木)자를 합친 합성자다. 두 요소 중 상대적으로 발음이 가까운 목(木)이 발음 기호다. 구(口)는 의미 요소로 ‘맛’ 이라는 뜻의 미(味)자를 떠올리게 되는 데, 呆=未는 구(口)를 의미 요소로 해서 ‘맛보다’ 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니다(未)의 뜻이나 간체자(簡体字)로 가차(假借)돼 많이 쓰여 글자 모양도 변해 맛보다의 ‘미(味)’ 라는 본뜻을 담당께 했다. 보는 ‘맛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未)자는 갑골문에서 나뭇가지가 아래로 뻗은 나무의 모습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다. 태(呆)는 ‘가지가 무성한’ 것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무성한 나뭇가지가 먹을 만하다’ 라는 뜻이다.
장보고의 보(保)는 사람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맛보다. 즉 ‘무르익어 만물의 맛이 든다’ 는 뜻으로, 몸소 겪어 보다는 것이다. 목(木)자가 갑골문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은 나무 모양’ 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로써, 나라를 지켜 안정과 질서를 뿌리내려 평화와 번영의 가지를 뻗게 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장보고가 되겠다는 뜻으로 쓰인다.
장보고의 고(皐)의 부수 흰 백(白)을 빼면 열 십(十)자에 두 이(二)가 두 번이나 들어간 글자로 나타냈다.
십(十)자는 ‘한 일(一)’ 과 ‘뚫을 곤(丨)’ 으로 합쳐진 한자다 십(十)은 세계를 상징하는 ‘거북의 십(十)자 무늬’ 는 상나라 사람들의 공간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세계는 수평적 공간 개념인 ‘五(동.서.남.북.중앙)’ 에 수직적 공간 개념인 ‘상(上)과 하(下)’ 를 합친 일곱 방위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숫자 일곱을 거북의 십(十) 무늬로 나타낸 것이다.
열 십(十)은 칠(七)과 그 모양이 비슷해 상나라 사람들은 거북의 배껍질무늬를 숫자 ‘칠(七)’ 로도 쓰기고 했다. 숫자 칠(七)은 이 ‘세상’ 을 상징하는 수로서 고대에는 7을 3, 5와 함께 성스러운 수로 여겼다, 칠(七)과 비슷한 십(十)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 를 상징하는 ‘거북의 십(十) 무늬’ 다. 십(十)은 조상신(祖上神)으로서 신(神)의 형상으로 봤다. 십자가(十字架)가 그런 형상이다.
하늘(一), 떵(二), 사람(三), 십(十)과 백(白)이 그려진 고(皐)는 〈거룩한 하늘.땅.사람의 신으로 빛나다〉 뜻이 담겨져 있어, 장보고는 고(皐)를 신의 형상으로 보고, 자신을 신처럼 부각시키고자 했다.
두 이(二)자는 갑골문에서는 ‘하늘(天)과 땅(地)’ 을 함께 표현한 글자이다. 석 삼(三)은 하늘.땅.사람을 표현한 글자이다. 삼(三)의 가운데 작대기를 세워놓은 모양인데. 하늘과 땅에서 사람이 존재하고, 그 사람은 神=十으로서 하늘과 땅, 즉 세상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고(皐)는 〈하늘.땅.사람, 신으로서 빛나다〉 라는 거룩함을 전한다.
그리고 ‘넉 사(四)’ 는 둘(二)의 두 배(X2)로 넷을 표현했다. 갑골문에서 넉 사(四) 횡으로 그은 한 일(一)자 네 개를 연속적으로 그어 나타냈다. 입 구(口)자도 한 일(一) 내 개를 그어 만들어진 한자라고 볼 수 있다. 일(一)자가 이(二)자가 되고, 이(二)자가 삼(三)자가 되고, 삼(三)자가 사(四)자가 되는 모양새다. 구(口)자가 아닐 미(未), 맛 미(味)로 변천과정을 거쳐 의미를 같이 한다. 맛보다는 ‘느끼다. 겪다. 받아들이다. 새기다. 내 것으로 만들다. 보이다. 증명하다. 입증하다. 보중하다. 보장하다. 검증하다. 논증하다. 확보하다. 보유하다. 소유하다. 보호하다. 돕다. 수호하다. 옹호하다. 변호하다. 두둔하다. 비호하다. 유지하다. 관리하다. 지속하다. 지탱하다. 뒷받침하다. 뒷바리지하다. 후원하다. 지원하다. 원조하다. 보조하다. 구호하다. 구원하다. 구조하다. 구난하다. 구출하다. 구휼하다. 이롭게 하다. 더해주다. 누리다’ 라는 의미로 확대된다.
一.二.三.四는 가장 쉽게 선을 긋거나, 작대기를 잘라서 헤아리거나. 손가락을 꼽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렇듯 장보고도 이(二), 삼(三), 십(十)이 들어간 ‘언덕 고(皐)’ 라는 한자로, 자신 꿈꾸고 희망한 구역(신라.당.일본.동남아 등과 해양 등)을 선(線)을 그려(표시) 차지하고, 지키며 지배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장보고는 고(皐)라는 한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세상을 지배’ 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는 활을 잘 다루는 우두머리라는 것임을 이름으로 자신의 이미지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의 권위(權威)를 말해주고 있다. 장은 ‘수장(首長), 참모장(參謀長)’ 이라는 것임을 시사한다.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少將)으로서의 대장(隊長)으로 있었으니, 장보고라는 이름에 걸맞은 직(職)을 맡은 셈이다. 그리고 그는 청해진에서 군함의 우두머리인 ‘함장(艦長)’ 으로 있어, 이 또한 장보고의 이름다운 역할을 수행했다.
장보고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충분히 성장했고, 대성(大成)하여 명성(名聲)도 얻었고, 큰 직책(職責)도 맡았다. 그는 꽃길만 걸었다. 이름값도 얻었고, 경력(經歷)도 쌓았고, 명예(名譽)도 누렸고 부(富)도 쌓은 그다. 그는 ‘유방백세(流芳百世)’ ,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한다. 장보고는 ‘탁린청류(濯鱗淸流)’ ,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었다. 그는 ‘명불허전(名不虛傳)’ , 이름이 날만한 까닭에 이었다. 장보고는 말이 아름다우면 그 울림도 아름답다는 뜻으로 ‘언미향미(言美響美)’ , 인격이나 행동이 훌륭해 자연히 명예도 얻었지 않나 한다.
사주(四柱)에서 사람은 태어난 시(時)나, 관상(觀相)으로 그 사람의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어떤 일을 할 인물인지를 미리 알아 볼 수 있다. 사람의 이름으로 보고도 그 사람에 대한 성향이나 성장을 파악해볼 수 있다.
장보고는 9척 장신의 신체로 얼굴형이 장군감이다. 이름도 참 잘 지었다. 특히 그의 이름에서 풍긴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다. 파악해봤듯이 그런 이름에 의하여, 그는 큰 인물로 성장하고 출세하여 평민(平民)에서 상류층(上流層) 그 이상의 명성(名聲)을 얻었고 누렸다. 권력(權力)이면 권력, 명예(名譽)면 명예, 재물(財物)이면 재물 모든 것을 얻은, 화려하고 풍족한 인생을 보낸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재물 복을 가져다주는 ‘사자(lion)’ 가 새겨진 금반지를 끼는 듯하다.
진.선.미, 사랑, 지혜, 자유, 평등, 부, 명예, 권력 등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의 대표적 유형들인데, 장보고는 이 것들을 다 갖추고 얻은 것,
장보고, 그의 이름은 고귀하고 고급스럽다.
고귀한 뜻의 아름다운 자, 고귀한자의 ‘Lydia’ , 고귀한 성품의 ‘Adelaide’ 와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이름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Victoria-승리자’ , 중세 왕비의 ‘Eleanor-빛나는 자’ , 독일 귀족의 ‘Adelaide-고귀한 성품’ , 오드리 헵법의 ‘Audrey-고귀한 힘’ 이런 이름처럼 장보고도 품격이 있어 보인다.
장보고는 의미 중심의 ‘고귀함’ , 이미지 중심의 ‘왕실.귀족.고급스러움’ 과 발음.조화의 리듬이 ‘자연스러움’ , 이런 작명(作名)의 그 고귀(高貴)함이 묻어난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훌륭한 사람의 사회적으로 고귀한 사람이 되어라.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옥같이 고귀한 존재가 되어라. 항시 경사스러운 일이 함께하고 사회에 나가 높은 지위에 오르라. 항시 올바른 길을 걷고 옥처럼 귀한 존재가 되어라. 남에게 좋은 일을 권하여 돕는 훌륭한 사람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라. 이런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징보고, 이렇게도 훌륭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다.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에서 一.二.三.四의 한자를 찾아볼 수 있다. 신을 상징한 십(十)자도 있다. 장보고에 보여준 한자들은 자신의 마음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선(視線)-Beautiful Gaze’ 이 참 곱고 멋지고 예쁘다. 놀라움.기쁨.흥미를 가지고 바라본 장보고처럼, 우리도 그렇게 그를 바라본다. 고운 시선의 장보고, 그 시선에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설렘 한다.
장보고가 궁복으로 태어난 영암 선암, 선암의 선의 시옷(ㅅ)이 사람 인(人)으로 만물을 낳는 ‘어질 인(仁)’ 을 말하고, 암의 미음(ㅁ)이 입 구(口)로 더 느끼게 해주는 ‘지(知)’ 가 아닌가 한다.
궁복.궁파.장보고, 그 이름의 한자는 Letter가 아닌 ‘Character’ 다. 그의 이름에는 나라에 대한 사랑과 바다를 지배한 인류 역사가 살아 숨 쉰다. 그 이름 한자 하나하나에는 수천 년 문명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다. 장보고의 영혼(靈魂)이 담긴 이름이다. 한자! 무한한 창조력의 세계를 엿보게 만든 이름이다. 한자에는 의식주.생로병사.신체를 통해 배우는 살아있는 한자이다. 궁복.궁파.장보고라는 이름의 한자에서도 그런 것들을 배우게 됨이다.
궁복.궁파.장보고, 그 성격,개성의 캐릭터-Character, 성품의 페셔널리티-Personality, 특징의 ‘캐릭터리스틱스-Characteristics’ 가 잘 드러난다.
●넓히다로 만난 장(張)과 해(海)
장보고의 베풀 장(張)은 ‘넓히디. 크게 하다’ 라는 뜻이다. 청해진의 바다 해(海))는 ‘넓다. 크다’ 다. 장은 ‘해(海)’ 를 의미하고, 바다는 ‘장(張)’ 을 의미한다.
장보고, 자신의 이름에도 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는 푸른 바다에 진영(鎭營)을 설치했다. 바다 전망이 좋은 곳의 섬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다. 방어.감시와 무역을 위한 목적으로 그런 시설을 세웠다.
장은 성씨지만, 해(海)자와 연관성이 있음을 살펴볼 때. 장(張)은 바다(海)를 넓게 하고, 바다는 장(張)을 넓혀 크게 히는 바다에서 청해진이 진(鎭)을 통한 ‘진압하겠다’ 는, 〈바다지배사상〉 이 풍겨난다. 진(眞)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 오면서 철을 소유한 종족이 구리만 가진 종족을 지배할 수 있었다. 쇠(金), 참(眞)이 ‘진압(鎭壓)하다’ 는 의미로 쓰인 역사의 배경이다.
장보고의 청해진, 장(張)은 쇠(金)이요, 해(海)는 참(眞)이며, 쇠(화살.칼.창)로 바다를 진압한다.
●장보고의 이름에서 보인 확장력, 억지력, 상승력
장보고(張保皐)의 이름 ,한자에서 보여주는 정치적.경제적.사상적 개념은 신라 정책을 넘어 세계적인 글로벌정책이다.
장(張)의 의미에서 보여주는 ‘넓히다’ 는 '확장력(擴張力)-Extensionality' 이다. 장보고가 추진한 확장력은 무역을 기반을 한 확장이다. 그는 바다를 통해 신라영토지도를 새롭게 그려나갔다. 당나라에서 배운 군사기술과 전술을 신라 청해진에서 그 진가(眞價)를 발휘했다.
장보고가 해양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군사력 덕분이었다. 그는 청해진 대사로 오르자마자, “신라 해안과 바다는 내가 책임진다” 라는 강항 의지를 갖고, 바다 질서와 안정에 나섰다. 그러면서 무역을 추진했다. 국제교류다. 그 교류는 당.일본.동남아 등 관계 설정으로 평화롭게 세상을 함께 열어가자는 평화주의 원칙에서 교류했다. 물론 각종 물품으로 삶의 진전이 있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자가 나라의 물품을 서로 교류했었다. 상생발전을 도모한 것이다. 그런 일로 인하여 이렇게 신라 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는 군사력 덕분이었다.
그는 집 앞에 바다만 신라해양지도가 그려졌던 것을 몇 배의 넓은 바다로 신라해양지도를 그려나갔다는 게, 그가 담당한 군사력도 주요한 역할을 띠었지만, 무엇보다도 해양영토 만큼은 높이 평가를 받을 만하고, 당나라 지역까지 일부 차지하는 영토를 넓혀나간 만큼은 주요한 업적으로 남는다.
장보고는 『냉전의 지정학적 동아시아 지역의 구성, 신라 광역 질서 이론 중심으로』 라는 연구 논문을 제시하며, 당.일본.동남아.태평양 등 주권국가의 영토를 넘어선 새로운 국제법적 단위로서 광역-Grossaum(큰. 대단한) 개념을 재안했다. 광역은 개별 국가가 갖는 공간적 제한이나 지나친 확장력을 극복하고자 제안된 개념으로서 기존의 광역지도를 장보고 시각의 새로운 지구적 지역주위의 영토적(領土的) 단위이다. 세계를 ‘지구(地球)’ 라는 공간개념과 지구적 차원에서 보고자하는 시각의 변화를 드러냈다.
장보고의 관역 이론은 소수의 지역적이고, 문화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권력불록들 간의 전지구적이며, 평화적으로 형성될 균형의 기능성을 제공하며, 신라에 의해 주도되는 단국적 세계질서에 대한 다원적(多元的), 현실적(現實的) 대안을 제안했다.
장보고의 영토 확장정책은 ‘민들레 홀씨’ 다. 〈또 다른 시작, 민들레 홀씨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리지다〉 라는 제목으로 민들레가 꽃을 피워 바람에 홀씨를 날리듯이,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민들레의 놀라운 영토 확장력, 자기를 희생하며 대를 잇는 본능처럼 장보고도 신라 영토 확장정책에 민들레처럼 해보였다.
고구려는 우리 역사의 자부심이다. 드넓은 만주 대륙과 요동지방을 석권하고, 당시 세계 최강국가인 수나라와 당나라를 연이어 격파하였다. 불행히도 내부의 불 분열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명말 당했지만, 그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그런 놀라운 공적을 후세에서도 장보고라는 인물이 해상무역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그가 펼친 영토 확장과 국가 발전 신라의 가징 두드러진 특징은 강력한 영토(領土) 확장력(擴張力)이다.
신라의 성격과 발전을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로 나누어 분석하며 각 오행(五行)이 신라 역사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살펴보면 이렇다.
신라가 통일신라로, 바다를 점령한 것은 ‘목(木)’ 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목(木)은 성장(成長)과 확장(擴張)의 기운을 지닌다. 신라는 초기부터 강력한 군사력(軍事力)과 외교력(外交力)으로 주변 국가들을 압도하고, 영토를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특히 신라의 왕과 장보고는 목(木)의 기운을 극대화하여 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신라의 국력은 이 시기에 절정을 달했다.
목(木)의 기운은 신라의 군사력 성취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력(經濟力), 문화력(文化力)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각추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며, 군사적 승리와 함께 국가 내 외부의 다양한 자원을 확보하는 등 목(木)의 기운이 적극적으로 발휘했다.
그러나 신라의 영토 확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지속적으로 확장될 수 없었다. 내부적인 문제와 외적인 압력으로 인해 점차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木)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해지면서 성장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군사적(軍事的) 열정과 문화적(文化的) 성장 화(火)의 기운은 신라에서 군사적 열정과 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군사적으로 매우 강력한 국가였으며, ‘화(火)’ 의 기운이 이를 뒷받침했다. 목(木)의 기운 다음으로 강했다.
특히 김유신과 장보고의 업적은 신라의 군사력과 화(火)의 기운을 대표하는 사례로, 이들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 전력을 펼쳤고, 궁정을 확장하여 강력한 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러냈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에, 장보고는 해상무역에 큰 공을 세웠다.
화(火)의 기운은 또한 신라의 ‘문화적(文化的)’ 발전에도 기여했다. 신라는 불교와 유교, 도교를 받아들이며, 문화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신라의 불교 미술과 금장식 등은 신라의 예술적(藝術的) 업적을 대표하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화(火)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군사적 우위와 문화적 성장 외에도 정치적(政治的)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귀족(貴族) 중심의 정치구조 신라는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인 국가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고,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한 점에서 ‘토(土)’ 의 기운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토(土)는 ‘안정성(安定性)과 질서(秩序)’ 를 나타내는 기운이며, 이를 통해 ‘정치적 체제를 구축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신라는 초기에 왕권이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권력을 분점(分占)했다. 이로 인해 신라는 귀족제적(貴族制的)인 성격이 강했고, 왕권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이 있었다.
신라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성하는 데 실패하고, 귀족들의 권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토(土)’ 의 기운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가 내에서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특히 후기에 이르러 신라는 귀족들의 분쟁(紛爭)과 내부적인 갈등(葛藤)으로 인해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군사력 지원과 경제적 발전 ‘금(金)’ 의 기운은 신라에서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발전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신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외침에 대비하고, 국력(國力)을 키워 나갔다. 금(金)의 기운은 이를 지원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개마무사(介馬武士)로 대표되는 신라는 철제 무기와 방어 시설, 군사적 기술의 발전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축적하고, 군사적 우위를 겸했다. 특히 장보가 청해진을 통해 군사와 무역을 추진한 예이다.
그러나 신라는 군사적 승리를 계속 이어가면서도, 내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신라는 멸망할 때까지 중앙집권식 왕권체제를 이루지 못했다. 또한 신라의 경제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집중되었고, 이는 ‘금(金)’ 의 기운이 비효율적으로만 발휘된 측면도 있었다.
외교적 융합과 전략적 균형 ‘수(水)’ 의 기운은 신라의 외교와 전략적 균형을 담당했다. 신라는 수나라와 대립, 당나라와의 협상 등 외교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수(水)의 기운은 신라가 외교적 상황을 잘 관리하고, 외부의 압력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역학을 했다. 특히 신라는 전략적으로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자국의 이익을 유지하고, 국토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수(水)의 기운이 후반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실리보다는 형식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된 측면도 있었다. 신라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 중요한 동맹(同盟)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후고구려의 압박에 의해 멸망을 맞이했다.
장보고가 신라 해상 영토 확장력이 강한 것을 볼 때 ‘목(木)’ 의 기운이 가장 강했다. 특히 김유신의 업적에서 드러나는 군사적 승리와 영토 확장, 그리고 장보고의 해상무역의 해양 확장은 ‘목(木)’ 의 기운에 의한 성과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중앙집권식 국가를 완성하지 못하고, 귀족제(貴族制)를 유지한 점에서 토(土)의 기운은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당나라와 후고구려와 외교 관계도 불편 하는 등의 주변국들과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수(水) 기운도 부족했다는 증거다.
신라는 초기부터 족장(族長) 중심의 정치체제였고, 이후 귀족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분점이 되며,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신라의 정치 구조는 토(土)의 기운이 부족하고, 우후죽순적인 목(木)의 귀족체적인 성격을 가진 특징을 보였다. 장보고가 추진하는 사업에도 그런 귀족체적인 정치 구조로 인하여 어려움이 따랐고, 결국에는 그는 그런 세력들에 의해 암살(暗殺)당하고 말았다. 장보고의 해상을 통한 〈무역확장력〉 만큼은 큰 공적으로 남는다.
장보고의 보(保)는 ‘억지력(抑止力)-Deterrence’ 이다. 상대가 공격 행동을 하려 해도, 그에 대한 반격.위험이 두려워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으로 국제정치.전쟁과 방어 등 억지력으로 국가 간 갈등을 막았다.
장보고는 〈신라지키기〉 일환으로 청해진을 두어 강력한 군사기지를 구축하여, 무역에 진출했다. 그는 강한 군사력을 갖춰 군사기술과 무기 보유 배치로 상대국의 공격(攻擊)의 의사나 행동을 제안하게 만들어 전쟁을 억제했다.
억지력, 신라의 강력한 군인.무기.전술 등 군사력은 냉전시기부터 강력한 무기와 군사를 보유국들과 동맹국을 포함 세계 모든 다른 국가 간 마찰이 발생하여도, 상호확증파괴(相互確證破壞) 논리에 그런 군사력이 오히려 국가 간 확대 전쟁을 막아주는 힘의 의미지만, 일단 너무 강해서 상대의 행동을 억제하거나 지지하는 이상의 힘이 있다면, 전부 ‘억지력(抑止力)’ 으로 쓰인다. 신라도 그런 억지력으로 균형과 방어, 안정을 기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이라는 군사기지로서의 억지력에 대해 청해진이 행하는 충돌은 전면전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억지력 재설정 게임’ 에 가끼웠다. 강하게 치고, 크게 말하고, 그러나 넘지 말아야할 선은 서로 인지하는 구조로 행했다.
신라 억지력 재설정 개임이란 무엇인가? 장보고가 보여준 억지력, 억지력의 기본 구조는 “네가 이 선을 넘으면 내가 감당 못할 비용을 주겠다” 는 실제 충돌 이전에 신호-Signaling의 경쟁으로 시작되었다.
왜 재설정인가?
역사적 충돌은 기존 균형을 흔들었다. ▲대리세력 중심이 직접성 상승 ▲국지적 타격이 상징성 강화 ▲군사 충돌이 경제 에너지 위험 확대 등에 있어 양측 모두 이렇게 묻는다.
장보고는 청해진이 “우리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그 선을 다시 그리는 과정이 재설정이다.
청해진이 왜 전면전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가?
신라의 계산은 ▲신라 장기 지상적 여력 부족 ▲글로벌 재정 정치 부담 ▲목표는 정권 붕괴가 아니라 억지 복원이라는 계산법에 진행하게 했다.
장보고의 계산은 ▲체제 생존 최우선 ▲해협 봉쇄는 자해적 카드 ▲상징적 보복+내부 결속이 더 현실적이라고 나름의 계산 방식으로 추진했다.
해적이 신라를 침범했다고 해서 그 나라까지 공격하는 것은 무리다. 무역을 해야 하고, 해안(海岸) 완전 봉쇄는 국제 경기 충격을 가하고, 당.일본.동남아까지 직격이 된다. 따라서 이곳은 실행 카드가 아니라, 〈협상( 카드〉 에 가까웠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통해 침략자(侵略者)로 이용한 것보다는 방어보호자(防禦保護者)로 활용하는 등의 게임이론 관점, 치킨게임이다. 이 구조는 전형적이 치킨게임으로 먼저 피하면 체면 손상, 끝까지 밀면 충돌, 그래서 보통은 〈강한 충돌→제한적 보복→비공식 협상〉 으로 수렴했다.
징보고는 청해진 대사로서 국제 질서에 염두하고, 균형을 이루려고 했고, 안정을 기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억지력 재 정렬 과정에 나선 채 강하게 말하고, 강하게 치지만, 선을 넘지 않으려는 계산, 전쟁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협상의 전 단계일 가능성이 높은 방향으로 청해진 역할에 충실했다.
억지력(抑止力), 한쪽이 공격하려고 하여도 상대편의 반격이 두려워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힘을 기르고 키운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조정(朝廷).호족(豪族) 더 넓은 억지력 재정립, 당,일본 견제 역할을 띠었다.
장보고는 고(皐)의 ‘성장력(成長力)-Growth Force’ 을 보여줬다. '성장이 곧 생존이다' 라는 구호로, 확장력과 억지력으로 신라를 성장시켰다.
장보고는 “나를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왜 이렇게 일이 어려울까?” “의욕과 노력은 충분한데, 성과는 제자리걸음일까?” “한때는 꽤 괜찮은 실력을 올렸었는데, 왜 어느 순간 그저 그런 결과물만 만들어내는 걸까?”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이런 고민에 맞닥뜨렸다.
장보고는 이런 식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래 해보는 거야!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다” 라로 용기와 의지를 갖고, '성장력‘ 을 내세웠다.
성장력, 장보고는 그 해답으로 ‘성장(成長)’ 을 제안했다. 당장 오늘이 힘겹고 내일이 불안한데 먼 미래를 좇는 일을 계속하긴 어렵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 장보고의 넓힌다는 장(張)의 ‘확장력(擴張力)’ 과 지킨다는 보(保)의 ‘억지력(抑止力)’ 으로 목표를 꾸준한 〈성장〉 으로 잡았다.
장보고는 ‘할 수 있다’ 는 긍정적인 사고로, 당장 실천 가능한 일을 해나가며 하루를 보냈다. 매일 한 걸음씩만 앞으로 나아갔다. 차근차근 원하는 것을 얻으며 손쉽게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자신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막연한 성공이나 열정, 노력이 아니라 ‘성장(成長)’ 이고, 일과 인생을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성장의 힘-Growth Power’ 이라고 봤다.
장보고는 신라 잠재성장력, 그 성장성은 인력, 기술력, 토지, 자본과 군사, 무역 등 이용 가능한 모든 생산자원을 동원해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생산능력으로 신라부흥에 이바지했다. 해상무역의 폭발적인 호황으로 생산요소가 정상수준 이상으로 사용돼, 실질성쟝률(實質成長率)이 잠재성장률(潛在成長率)을 크게 웃돌게 했다.
신라는 장보고의 해상무역 정책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 경제의 특정 국가의 경제 규모의 성장잠재력(成長潛在力)을 나타내는 지표로, 실질국내총생산의 연간 증가율을 백분율로 표현한 성장력은 세게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장보고의 역할로 해상무역의 활발한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급격히 경제 성장을 경험하며,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 8~9세기에 신라의 기적이라 불리는 국제무역(國際貿易)은 신라 경제를 단기간에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았다. 당시 신라는 수출 중심의 경제 모델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며, 특히 제조업과 관련된 산업들이 빠르게 발전했다. 공산품, 식품 등의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며, 신라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는 고도 경제 성장기 동안 주요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기술력과 인프라를 확장하며,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신라 경제는 높은 교육 수준과 기술력, 뛰어난 인프라 덕분에 빠른 성장을 이룬 것뿐만 아니라, 혁신적(革新的)인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세계 시장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장보고가 추진한 청해진들이 글로벌 시장에 성장하며, 신라 경제를 이끌었다. 또한 신라는 항해술(航海術) 같은 첨단 선박과 운행 기술, 각종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신라를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대국(貿易大國)으로 자리 잡았다.
장보고(張保皐), 장=확장력, 보=억지력, 고=성장력 등식은 신라천년에 기여를 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정책은 유효하다.
장보고는 신라성장 자극기(刺戟期)는 언제일까?
‘유전(遺傳)보다 더 강한 힘, 신라성장력에 바로 지금이다’ 라고 즉시 추진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 새긴 ‘장-확장력과 보-억지력’ 에 의해 ‘고-성장력’ 을 탄력적.지속적으로 일구어냈다.
장보고는 자신이 추진하는 무역정책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100%는 최고점이 아니라, 시작점” 이라며 “150%에서 200%까지 성장세를 이룬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장보고무역 展은 ‘장소제한 무, 시간제약 무, 물품제약 무’ 의 3무(無)로써 ‘교류증진 유, 성과지속 유, 수익창출 유’ 3유(有)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가능성에 의지를 보인 것이다. ‘張-유리, 保-지속, 皐-최고’ 에 확신했다.
장보고는 그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네이밍전략으로 복합적인 안보 위협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집중적으로 숙달했다. 청해진군사기지 지휘아래 지휘관과 참모들은 다양한 영역의 능력을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연합.합동작전 수행 절차를 발전시켰다. 그런 발전 속에 국제자유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해갔다.
그는 청해진에서 신라와 당.일본.동남아 전 해역에서 〈장보고무역 展〉 을 펼쳐보였다. 청해진의 상호운용성과 전술적 능력을 현장에서 강화하는데 중점을 뒀다. 지휘소 연습과 야외 기동훈련을 연계해 실제 상황에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군사.무역 전술.전략기량을 숙달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무령군 소장으로 진행했던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 청해진에서도 국제자유무역을 위한 당.일본.동남아도 함께 참여해 신라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을 위한 국제사회의 의지를 보여줬다.
이런 일에 신라 각 진영에서도 방어적(防禦的).전술적(戰術的), 전략적(戰略的) 성격을 평가하기 위해 참관했다. 장보고가 추진한 청해진은 신라에 대한 어떠한 도전과 위협도 동맹(同盟)이 압도적인 의지와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해양평화지도를 준수하는 가운데, 신라와 동남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守護)하겠다는 동맹의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 됐다.
선암과 서주는 ‘선서(宣誓)’ 다. 그 맹세는 당과 신라의 ‘약속(約束)’ 이다. 그 약속을 통해 주변국들과도 좋은 관계로 진전되게 했다. 완도 청해진에서 ‘완진(完振)’ 하게 했다. 이 ‘장-확장력, 보-억지력, 고-성장력’ 에 의한 일이다.
장보고의 그의 확장정책의 ‘장악력’ , 무기와 물품의 ‘보유력’ , 높은 수준의 ‘고도력’ 은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해양무대, 장보고의 추진력과 성과력은 대단하다.
장보고는 해양무대 연출가라고 해야 할까?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설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가장 먼저 콘셉트를 설정한 후 시안(試案)을 만든다. 그 다음 도면 작업과 더불어 세트장의 모양, 크기, 색깔, 디자인 등을 정하고, 도면대로 세트장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제작 감리와 현장 세팅을 한다. 평균 작업 소요 시간은 무대마다 다른데, 가령 무역진출처럼 매일 운행하는 무대의 경우에는 밤과 새벽 시간에 작업이 이루어진다. 매일 보여 주어야하기에 작업은 하나를 진행하면, 다음 운행을 준비한다.
해양무대는 ‘상상력(想像力)과 창의력(創意力)’ 이 중요해진다. 기존에는 구조적인 실현 가능성과 설치, 해체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췄다면,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기본적인 3차원적인 이해(理解)도 하는 장보고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갖추며 추진했다.
●장보고의 수학 공식, 덧셈.뺄셈.나눗셈.곱셈
장보고는 국제 무역에는 ‘나라, 물품, 교역, 뱃길’ 등을 더했다-合. 해적 방어에는 불안, 위험, 위협, 겁박, 협박, 강제, 강요, 으름장 등을 뺐다-治. 왕권 정치에는 ‘역할, 임무, 직책, 권력, 권한, 세력, 권리, 수행’ 등을 나누었다-分. 신라 문화에는 ‘창조, 창작, 고안, 개발, 제작, 제조, 생산, 개척’ 등을 곱했다.
무역에 당.일본.동남아 등을 교역상대로 진출(進出)했다. 방어에 신라 해안이 불안해진 것들의 요소를 제거(除去)했다. 정치에 독점.독선주의를 혁신해 분담(分擔)시켰다. 문화에 전통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導入)했다.
이것은 선암에서 태동(胎動), 어떤 기운을 싹트게 한 ‘선형체(先形體)’ , 서주에서 구술(具述), 어떤 일들을 갖추어 좇는 ‘서술체(敍述체)’ , 완도에서 제작(製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완전체(完全體)’ 이다. 장보고는 17세 때 신라를 떠난 뒤 23년 만에 완벽한 구성을 갖춘 궁복에서 장보고로 탈바꿈한 ‘완전체’ 로 돌아왔다.
장보고의 수학정석(數學定石)은 학문을 닦은 ‘수학원칙(修學原則)’ 이다. 그의 계산(計算)은 수학적(數學的) 의미로써의 계산, 사회적(社會的) 의미로써의 계산으로, 수학적 계산은 문제에 주어진 정보를 어떠한 알고리즘을 통하여, 조합해 문제에 해답을 구했다. 그는 덧셈, 뺄셈, 나눗셈, 곱셈의 사칙연산(四則演算) 이상으로 계산했다.
신라 분수(分數)의 더 빼가는 분모(分母), 조각의 크기를 같게 만든 뒤 분자(개수)를 떠 빼는 방식으로 계산했다.
사회적 계산은 제3의 물결 사회적 기업 육성 기본계획은 사회적 가치 지표를 기본 지표로 해 1년 4회 사회적 기업 평가하고, 등급을 부여했다. 이렇게 완료된 평가 결과는 사회적 기업 등록제 실시 이후 중앙.지방 및 공공기관이 사회적 기업 대상으로 지원 심사를 진행할 때 활용하게 했다. 이런 계산의 가치 기준은 ▲사회적 성과 ▲경제적 성과 ▲혁신 성과다.
장보고는 좋지 않은 음수(陰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길은 줄이는 일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덧셈에서 음수가 된 만큼의 간격 차이를 메워야 했으므로, 그는 무작정 줄었다. 고되었고 답답했다. 이런 일은 예시당초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지출을 줄어야했고, 될 수 있으면 안에서 직접 만들 것들을 사용하려고 했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어떤 걸 사야하는 지를 생각했고, 물건들을 자신의 시간에 담았다. 물건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시간을 확보했더니 물건 만드는 일이 불편함이 아니게 되었고, 자신이 만든 걸 즐겨 힘을 얻는다고 느끼니, 기쁜 마음으로 물건을 팔게 되었다.
국민들은 장보고의 무역(貿易)에서 오는 물건들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고, 화려하고 고급스럽지 않은 물건을 두고 다양한 대화가 오고갔다. 대화는 웃음을 탄생시켰다.
더하다보면 빼기를 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고, 빼기에 집중하다보면, 더하기가 되는 순간이 온다. 빼기 하면서 느낀 그대로를 무역으로 하면 나누는 것이 되고, 그 나누기가 결국 곱하는 형태로 바뀐다는 것을 장보고는 알고 있었다.
빼기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알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이 충분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늘 사라지지 않는 욕심 덕에 더하기를 좋아하는 장보고, 신라에 더해서는 안 될 위협(威脅), 불안(不安) 등 좋지 않은 것들을 가감하게 뺐다. 뺀 만큼 안전(安全), 발전(發展) 등 좋은 것들의 채웠다. 나누고 곱하고 하면서...
●장보고의 바다, 신라의 물결로 헤엄치다
헤엄쳐 계속
이렇게 모든 게 시작되는 거야
헤엄쳐
난 그냥 빠져들고 싶어
이 엉망인 세상 속으로
벗어나도 난 여전히 이 미친 세상에서 눈을 떠
이 세상 어디에서 숨 쉴 수 있는지 말해봐
이 나쁜 세상에서 나만 착한 척하고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깊은 곳에 빠져 있는데, 너 어디 있는 거야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절대 숨기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이렇게 쉬운 걸
괜히 어렵게 만들지 마
이런 밤에는
그냥 모든 걸 잊고 싶어
달빛과 바다 속에서 여기 이대로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돼, 난 그냥
헤엄쳐
계속 헤엄쳐
평생 너를 바라보고 싶어
헤엄쳐
이렇게 모든 게 시작돼
헤엄쳐
난 구저 뛰어들고 싶어
이 물은 너무 깊어
정말 깊은 물속이야
바닥에서 벗어나 올라와
난 절대 겁먹지 않아
그래, 난 너를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해변을 앉아 있다가
이젠 바다 전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높은 파도가 다가오는 게 느껴져
왜 도망가, 오히려 뛰어들 수 있잖아
입 안에 퍼지는 바다의 맛, 그리고 그녀는 눈부셔
내기 있고 싶은 유일한 곳 너야
헤엄쳐
물방울이 너를 타고 흘러내려
계속 헤엄쳐
평생 널 바라보고 싶어
헤엄쳐
이렇게 시작되는 거야
헤엄쳐
난 그냥 빠지고 싶어
깊이 들어가고 싶어
물 튀기며 흘러가
내 두 팔로 파도를 만들어
물 튀기고 흘러내리고
난 그 경계를 넘어가고 싶어
이 안에서는 시간에 쫓기어 않아
모든 게 그렇게 슬플 필요는 없어
육지를 등지고
난 그냥 뛰어들고 싶어
깊이 빠지고 싶어
물방울이 흘러내려
계속 헤엄쳐
평생 너를 바라보고 싶어
헤엄쳐
이에 모든 걸 시작해
헤엄쳐
난 그저 뛰어들고 싶어
깊이 빠지고 싶어
BTS의 〈스윔-Swim〉 노래다.
‘Swim, Swim’ BTS가 스윔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장보고도 그런 노래를 부르며 ‘헤엄쳐’ 했다.
장보고가 걷는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는 신라가 살아 숨 쉰다. 잠들었던 신라가 빙하에서 깨어 나온다. 그리고 그 물결이 차오른다. 장보고의 바닷길 〈스위밍-Swimming〉 이다.
영암 선암에서 물살을 가르면 헤엄쳤던 궁복, 그는 더 넓은 바다를 향해 상어가 되었다. 궁복은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의지가 강했다. 꿈에서 바다를 스스로 헤엄쳐 건너는 장면은
현재의 난관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강한 결심을 상징한다고 해몽한다. 그는 선암에 당나라로 건너가려고 바다를 스스로 헤엄쳐 건넜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고 성과를 얻었다.
궁복은 목표를 도달점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고 매일 조금씩 전진하는 습관을 갖고 헤엄쳤다.
그는 파도는 건너는 노력과 의지로 거친 파도 위, 숨을 몰아쉬며 바다에 뛰어 들을 태세를 갖춘다. 파도치는 물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다가, 그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파도가 일렁이고, 물결이 밀려온다. 파고가 높고 거세다. 그리고 짧은 단어 하나가 물위로 떠오른다. ‘헤엄’ .
궁복이 당나라로 가는 바닷길을 건너는 한 장면이다. 삶의 파도를 멈추지 않고 헤엄쳐 나가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궁복의 ‘신라의 물결’ 의 주제곡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단순한 의지의 표현을 넘어선다. 배와 바다, 그리고 이동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궁복은 지금 무엇을 건너가고 있는가?
그 질문의 끝에는 〈신라의 물결〉 이였다. 궁복이 당나라로 건너가면서 헤엄의 이름으로 선택한 단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하나의 선언에 가깝다. 세계 해양문화의 중심에 선 궁복이 신라의 번영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방향을 말해준다.
신라의 물결은 노래지만, 동시에 노래가 아니다. 특정인이 만든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거쳐 축적된 감정의 구조에 가깝다. 지역마다 다른 물결이 존재하고, 가사와 선율은 시대에 따라 변주(變奏)되어 왔다. 이별과 이동, 상실과 재회의 정서가 반복되며 쌓여온 집단적 경험 층 위다.
이점에서 신라의 물결은 하나의 ‘열린 구조’ 다. 완결된 콘텐츠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체계에 가깝다. 누군가 부르고, 다른 누군가가 변주하고, 또 다른 세대가 다시 덧붙인다.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았고, 정답이 없었기에 사라지지 않는다. 신라의 혼이 살아남은 이유는 보존이 아니라, 반복(反覆)에 있었다.
궁복은 이 구조를 정확히 읽어냈다. 궁복은 신라의 물결을 재현하지 않았다. 민요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거나, 격식을 갖추지도 않았다. 대신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리듬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작동시켰다.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길에서 보여줬던 ‘헤엄’ 이 상징하는 바도 여기에 닿아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현실 속에서 숨이 막히는 순간을 지나면서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신라의 물결〉 이 수백 년 동안 반복해온 감정의 구조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변화가 드러난다. 궁복의 헤엄은 더 이상 장르로 설명되지 않는다. 장르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신라의 바다 물결은 그 이상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감정과 태도,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전달하는 하나의 코드가 되고 있다.
궁복은 큰 바다를 건너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큰 바다를 수영해서 건너는 꿈의 의미는 넓고 깊은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것은 지금 큰 변화를 실제로 통과하고 있다는 강한 메시지이다. 힘들 수 있지만, 결국 건넌다는 장면 자체가 ‘해결 능력’ 을 상징한다. 잠시 위험하거니 부담되는 흐름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지나면 안정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스로를 극복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한 시기였던 것, 바다가 맑아 더 좋았고, 흐름이 빨라 변화가 더 빠르게 왔다.
우리는 모두 바다를 건너는 중이다. 궁복도 어린 나이에도 그는 바다에서 헤엄치기를 좋아했다. 삶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모험(冒險)에 연속적이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고요한 이 여정에서 궁복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헤엄쳤다. 신라의 물결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해변을 앉아 있다가
이젠 바다 전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높은 파도가 다가오는 게 느껴져
헤엄쳐
그런 마음 상태로 그는 당나라로 건너갔던 것...
●장보고의 결, 그 파문은 멈추지 않았다
장보고의 화려한 귀환, 훌륭한 군사로서 명성을 떨친 장보고는 신라 컴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신라의 뿌리를 강종하는 동시에,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보다 과감하고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장보고의 귀환, 그리고 청해진 활동의 개인적 행동을 단순히 이어 붙인 것이 아닌, 장보고는 함께 불안을 해소하고, 이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을 향한 연대로 확장해갔다.
장보고는 신라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다시 귀환(歸還)했다고, 자신이 신라사람임을 확인해준 진정한 궁복.궁파.장보고임을 보여주기 위한 〈신라의 물결〉 을 귀환의 주제로 삼았고, 완도 ‘청해진’ 에서 무대를 하게 됐다고 했다.
장보고는 ‘결’ 을 중요시 했다. 파도라는 ‘물결’ 이다. 물결의 결은 ‘장결(張결), 보결(保결), 고결(皐결)’ 로서 장결은 물결이 점점 퍼져가는 파문에서 파문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보결은 물결이 점점 일어나는 출렁거림에서 출렁거림으로 번지는 것이며, 고결은 물결이 점점 울림에서 울림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라고 〈신라의 물결〉 을 해보였다. 일으킨 물결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결, ‘결속, 묶음, 결합’ 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장보고는 물결이라는 ‘관계.연결’ 을 만들어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결을 일으키며 친밀감(親密感)과 동맹(同盟)을 만들었다.
장보고의 신라 물결은 나무의 결처럼 가로 자르면 길게 드러난 결과 세로로 자르면 원으로 나타난 결을 해보였다. 가로로 난 결은 ‘군사적(軍事的)’ , 원으로 난 결은 ‘무역적(貿易的)’ 이다. 가로의 결은 ‘외부적(外部的)인 전술’ 이었고, 원의 결은 ‘내부적(內部的)인 전략’ 이었다. 가로의 결 전술은 빈틈없는 방어(防禦)와 진군(進軍), 원의 결 전략은 무역의 활동의 범위(範圍)와 교류(交流) 등의 파문(波文)이다.
나무처럼 돌(石)도 결이 있다. 돌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무늬와 금(線)은 단단히 박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한때는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출렁거렸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돌은 단단하지만, 결은 그 속에서도 부드러운 활성(活性)을 드러내듯이 신라의 물결도 나무처럼, 돌처럼 결을 냈다.
신라의 물결은 ‘무기(武器)결’ 과 ‘비단(緋緞)결’ 이다. 격세지게 물살을 일으키는 무기결은 칼.창.화살 등과 군사.군함 등으로 물결을 쳤으며, 찰랑이며 흩어지는 비단결은 각종 물건을 실고 물결을 쳤다.
결은 활을 쏘는 ‘활깍지’ 의 결(決)이라고도 하니, 장보고는 궁복의 이름다운 결을 해보였다.
●장보고의 군무(軍務)는 군무(群舞)였다
장보고가 추진한 청해진의 일이 ‘군무(軍務)’ 였지만, 그 군무는 바다의 물결과 파도 소리에 자유로운 영혼(靈魂)이 춤을 춘듯했고, 영성(靈聲)을 전달하는 것 같았다. 물결을 흔들었고, 지역에 따라, 날씨에 따라 물결이 제각각이었지만, 물결 앤 장보고라는 매개체가 바다를 하나의 ‘군무(群舞)’ 로 묶어냈다.
바다에서의 칼춤, 창춤, 활춤은 군무로서의 감성무기였다. 살상(殺傷)의 목적보다는 질서를 잡는 마음의 무기로 그들과 맞섰다. 맞서는 고정에서는 절대 상대의 몸을 향한 치거나, 찌르거나, 쏘는 것이 아닌, 상대의 마음을 향한 유혹과 진정의 무기로 삼았다.
장보고의 군무(群舞), 철새가 일몰 무렵 하늘로 일제히 날아오르듯이, 장보고가 지휘하는 군사와 상인들의 군무는 바다 풍경과 함께 군무가 멋졌다. 청해진에서 펼쳐지는 군무가 이동통로 중간 기착지로, 노을빛 바다 위로 떠오르는 군무였다.
동트는 새벽, 어둠을 물리치고 나타나 내려앉은 뒤의 군무, 때가 되면 청해진 앞바다로 몰리는 군무, 청해진에서 보여주는 군무가 펼쳐진 유쾌한 군사.상인들, 갑자기 일시에 나타나며 분위기를 싹 바꾸며, 지휘자(장보고)의 손짓에 따라 진영(鎭營) 뒤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시 불란하게 움직이는 화려한 무대도 이어가는데, 틀에 박힌 기념식을 탈피하고, 파도 소리에 맞춰 춤을 춘 완도 청해진 현장, 정말 멋진지 않을 수 없는, 두고두고 기억이 날만한 장면들이 그려졌다.
“우리 신라 맞나요?”
“그런 장보고였나요?”
모처럼 백성들이 장보고를 보러 찾아왔는데, 백성들이 장보고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알고 보니 장보고와 군사들은 같은 집안, 혼란스러운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누가 장보고지? 한번 만져보긴 하는데, 뭔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경계심을 끝내 늦추지는 않는 백성들, 장보고 찾아 삼만리였다.
반가운 표정들, 장보고를 일아 보고, 장보고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 됐다.
장보고가 연출한 청해진 무대는 화려한 뮤지컬 연기 경쟁이라고 할까? 무대에 오른 모든 분들의 군무는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다.
“지금 아니면 못 봐!” 황홀한 철새 군무(群舞)가 펼쳐지는 철새 여행지가 된 것 같은 청해진 앞바다였다. 청해진 창공에서 펼쳐진 장보고 사람들의 군무는 세계의 이목(耳目)이 될 정도로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은 춤사위 일무(佾舞), 다시 신라 무대에 세웠다.
바다 위를 수놓은 여러 명의 군사와 상인. 배들의 군무, 경이로운 장면으로, 정말 웅장하고 경이로워서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는데, 물 위에 펼쳐진 융단(絨緞)이 밀려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뭉쳤다가 흩어지고, 또 여러 무리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기도 했다. 여러 명의 군사와 싱인, 많은 배들의 화려한 군무로 바다를 수놓고 있었다.
군무를 펼친 세 때 같은 것들은 신라를 출발해 당나라의 산둥반도를 거쳐 페르시아 등으로, 일본과 동남아로 이동하는 데, 신라가 기착지로서의 세 때들이 몰려들었다.
세계를 홀린 신라 군무, 완도 청해진에서 펼쳐졌다. 세계 최고의 군무가 연출된 장면으로 그려냈다. 바닷바람 맞으며 신라인, 그리고 해외 사람들이 배를 통한 백조의 군무가 펼쳐졌다.
●장보고의 무(武)는 무(貿)였다
장보고가 보여준 무, 무기(武氣)의 무(武)와 무역(貿易)의 무(貿)로, 그는 신라의 굳센 기운의 ‘무기(武氣)’ , 굳센 재주의 ‘무기(武技)’ , 춤춘 재주의 ‘무기(舞技)’ 로서의 무(武)와 무(貿)를 보여줬다.
그 무는 다함이 없을 만큼 매우 애를 쓴 ‘무진(無盡)’ 으로 보여줬으며, 무가 바다가 춤을 추는 듯이 한다고 했다.
영암 선암에서 화살을 쏘는 ‘궁무(弓舞)’ 를 보여주기 시작해, 다시 당나라 서주에서 군사들이 행하는 ‘군무(軍舞)’ 를 해보였다. 그는 또 완도 청해진에서 무역으로 출렁거리는 ‘해무(海舞)’ 를 일으켰다.
이런 무의 출렁거림은 신라와 당,일본,동남아 등을 ‘무희(舞姬)’ 의 세계로 만들어냈다.
장보고는 그런 결과 무로 공자의 현실적인 세계로, 노자의 이상적인 세계로 바다를 넘나들었다.
장보고는 무기, 물품의 물체는 ‘몸(體)’ 이요. 물은 ‘마음(心)’ 이라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의 일치를 이루었다.
심신일여(身心一如), 몸과 마음이 하나로 같게 한, 육체와 정신이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하나의 전체로 작용하게 하는 동양 의학적, 철학적 사유를 담아냈다.
정기(正氣)가 강하면 사기(邪氣)가 침입하지 못한다고 했듯이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게 했다.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내면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드러냈다.
신일일여, 자연과 인간,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호흡하는 하나의 존재임을 일깨운 장보였다.
청해진미학(美學),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공간 바다의 세계를 그리는 것의 인생을 움직이는 천년의 철학,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삶의 여정이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에부터 일으키는 것들은 ‘걷는 것도 神, 앉아 있음도 神’ 이라고 했다.
장보고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바다, 바다 문화는 옛 사람이 남긴 아름다운 예술이다’ 라고 했다. 바다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몸과 마음이 화합을 이루는 바다 문화를 창조해 온 것이다.
세계인들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단순히 바다를 접하고, 출렁이는 바다의 쓰임을 넘어서서 바다를 이용해 왔다. 출렁이는 바다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몸과 마음이 화합을 이루는 바다 문화를 창조해 온 것이다. 실로 바다 문화는 지혜로운 옛사람들이 남겨 준 아름다운 예술(藝術),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인문과학(人文科學)’ 의 통합으로 여기며 바다를 가까이 했다.
●장보고는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현상을 보였다
장보고, 궁복으로 태어난 그는 7년 간 공을 들인 끝에 그를 낳았다. ‘칠성공(七星空)’ 이다. 궁복의 어머니 애를 못나 애를 탔다. 마을 뒤 거북바위 또는 칠성바위에서 공을 들었다. 7년 간 기도를 들어 아들을 얻었다.
궁복은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다. 그는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기이하고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정치 이 얘가 뭐가 될 건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신바함을 자아낸 아들이었다. 기이한 현상들은 그가 뱃속에 들어있을 때부터 느끼게 했다. 7년 기도 끝에 태어난 그는 그가 잡은 것마다 활.화살과 같은 물건들을 좋아했다.
그런 그가 점점 자라면서 그런 행동은 더 나타내 보였다. 이런 그를 태어나게 기를 불러준 곳이 〈영암 선암마을〉 이다. 그는 커서 그가 갖고 놀았던 활과 화살을 다루는 일을 해보겠다고, 대륙의 당나라로 떠났다. 거기에는 이미 신라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 신라사람들과 지내면서 군대에 입대했다.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꿈을 펼치고자, 무령군에 군사로 몸을 담았다.
그는 이때부터 군사력 기술을 터득하였고, 무역이라는 공부에도 눈을 뜨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만약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등의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지 않았다면, 그는 장보고라는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칠요는 모두 빛을 발한다. 그 빛이 선암에서도 비추었다. 선암 칠성바위에서 그 빛이 번쩍인 것이다. 그런 아이가 바로 궁복(弓福)이었고, 그는 장보고(張保皐)로 성장했다.
선암의 궁복이 없었다면, 당나라의 장보고도 없었다, 장보고 없는 청해진이 존재하질 않았다. 장보고를 태어나게 해준 영암 선암이 칠요(七曜)의 정기가 서렸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월화수목금토(月火水木金土)의 빛들이 선암을 비추기를 반복하다가 그 빛은 당나라까지 빛을 비췄다. 그 빛은 그곳에서 그치지 않고 청해진에도, 신라에도 비추고, 전 세계로 빛을 비추었다.
●장보고의 확신, 그는 먼저 움직이었다
변화의 관찰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주도자가 될 것인가?
승리를 자신하는 장보고의 자신감, 그의 강력한 추진력은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부 경쟁이 현실화되기 전에 내부 변화를 먼저 이루었다. 군사력과 경제력, 문화력의 격차는 점점 벌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강력한 잔략.전술을 펼쳤다.
장보고는 “우리는 승자가 될 것이다” 라고 외쳤다. 이 선언의 배경에는 분명한 숫자가 있었다. 2다. 2는 수치보다는 한자의 ‘이(二)’ 로써 ‘하늘과 땅’ , 그리고 다스릴 리(理)를 말한다.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또한 2는 날카로울 이(利)다. 화통(和通)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밀물과 썰물의 전략.전술을 펼쳤다. 장보고는 썰물처럼 빠질 때는 감감하게 빠졌으며, 밀물처럼 밀려들어갈 때는 가치 없이 거센 물을 흐르게 했다. 그것도 자신 있게...
장보고는 “지금이 국제 정세에서 경쟁이 치열함 시대” 라고 보며, 바다라는 해양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군사.무역 경쟁 환경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판단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해양투자를 비용이 아니라, 핵심 시설로 규정했다.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는 의미다. 해양이 만들어내는 경쟁 구도의 변화는 군사.무역의 크기를 가리지 않았다. 경쟁은 이미 국경 안팎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는 새로운 기술과 전략을 도입하고, 군사.무역 경쟁 심사 모델을 적용하며, 새 기술 및 전략을 발표하는 등의 〈신라 앤 청해진 투자〉 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 투자가 방어적일 때가 있었다. 규제 대응 차원의 투자, 경쟁 대응 차원의 투자, 혹은 주주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투자인지를 자문하면서 타당성을 따져 그에 맞게 투자했다.
장보고의 자신 있는 선언의 의미, 청해진의 투자에서 주목하는 것은 장보고의 태도다. 그는 해양무역 성과를 정량적(定量的)으로 증명하기 어렵다고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길 것” 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전략적(戰略的) 리더십’ 이다. 모든 숫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조직은 결코 먼저 움직인 조직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는 항상 확신하며 먼저 움직였다.
장보고는 군사+무역 정책에 있어서 투자 규모보다 ‘투자 철학’ 을 먼저 세웠다. 왜 해영무역에 투자하는가에 대에 경영진의 답이 분명하게 했다. 목적이 비용 절감인지, 새로운 수익원 창출인지. 아니면 무역에 위한 금융 서비스 자체를 재정의 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방향이 분명히 했다. 투자 철학이 불분명하면서 해양무역 프로젝트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멈추기 쉬워, 분명하게 했다.
장보고는 해양무역을 부서의 과제로 두지 않았다. 청해진이 해양무역 핵심 시설로 규정한 것처럼 해양무역 도입은 신라 전체 차원의 경영 과제였다. 위험, 여신, 자산관리, 자본시장 등 각 사업 부문의 책임자들이 해양무역 전환의 주체가 되게 했다.
장보고는 인재 전략을 함께 추진했다. 그는 해양무역 도입으로 역할이 바뀐 직원들을 해고하기보다 재배치했다. 기술 투자와 인재 투자는 함께 움직이게 했다. 신라 청해진권이 해영무역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정보수집가와 해양무역 기술자를 영입하는 것을 넘어 기존 무역상들이 해상무역 역량을 갖추도록 했다.
장보고가 이끄는 청해진의 해양무역 투자는 신라 귀족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부 경쟁이 현실화되기 전에 내부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는 해양무역의 격차를 벌여났다.
우리는 이 변화의 관찰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주도자가 될 것인가?
장보고는 현명했다. 확신하며 먼저 움직이었다.
●장보고 넘어야했던 월출산
장보고가 궁복으로 태어났던 마을 영암 선암, 마을 앞으로 펼쳐 보이는 웅장한 산세, 월출산이다. 당시에는 ‘월나산(月那山)’ 으로 불렀던 바위산이다. 달이 난다는 산으로 불리는 월출산이다. 그런 산을 봐라보며 자랐던 그는, 그 너머에 넓고 확 트인 바다가 있어, 그는 그런 바다를 동경(憧憬)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푸르고 깊고 넓은 바다의 시야를 넓혔던 것에 익숙해, 고향의 좁고 얇은 바다는 그의 마음에는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월출산을 넘었다. 마음이다.
그 높은 산을 넘어보니 해남 두륜산(頭輪山)과 달마산(達摩山)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산을 또 넘으니 완도라는 섬이 마음의 움직였다.
완도에는 여러 섬들이 바다를 수놓고 있는 곳이다. 바다에서 펼쳐 보이는 것들이 장보고에게는 기개(氣槪)를 펼칠 만한 환경들이었다.
그는 그런 곳에서 꿈을 꾸었고 희망 사항으로 무역에 손을 뻗쳤다. 해양진출과 바다지배다.
완도를 든든하게 해준 것은 두륜산, 달마산과 월출산이었다. 월출산을 북쪽 방향의 방패 막으로 삼고, 완도에서 앞만 보고 진출했다.
장보고가 이런 지형지도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그 곳에서 마음껏 꿈을 펼쳤던 것은 풍수사상(風水思想)을 적용한 방어선(防禦線) 전략이었다. 월출산이 청해진을 에워 싸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는 안심하고 청해진에서 바다의 시야를 넓혔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기점으로 볼 때 북으로 월출산이 있어 북쪽의 나쁜 기운이 청해진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청해진의 환경은 월출산의 든든한 지킴이 속에 바다를 향한 생각과 일들을 막힘없이 펼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장보고는 육지보다 바다에서 삶을 살려고 마음먹었으니, 만약 그가 태어난 선암에 진영을 두었다면, 월출산이 막힌다는 것으로 여겼다. 만약 그가 완도의 앞에 월출산 같은 산이 바로 앞에 있었다면, 그는 해양진출에 어려움이 따랐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상황을 극히 알고 있었기에 그런 자연 환경은 피했다. 월출산을 뒤 배경으로만 삼은 것이다. 장보고는 완도의 섬(島)들을 하나의 징검다리로 여겼고, 월출산을 넘으면 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역할을 한 산과 섬들이 있어, 이 점에 아주 안성맞춤으로 보고, 이용하고자 했다.
장보고는 완도 앞바다의 섬들을 섬은 지역의 물류 관계로 여기고, 어떤 섬은 당나라, 어떤 섬을 일본, 어떤 섬은 동남아로 보고, 그 섬들을 무역의 상대로 보고, 해상무역의 전략적인 해상 루트로 삼았다.
장보고는 저 섬은 당나라다. 내 눈 앞에 있는 당나라로 보고, 자신이 추진한 일을 섬을 보면서 구상했다. 무역(貿易)뿐만 아니라, 군사적(軍事的)인 면에서도 섬을 보면서 방어.질서.교류 등을 그려냈다.
장보고는 궁복(弓福)으로 자라면서 월출산을 보면서 저 높은 산을 넘어야한다. “넘으면 반드시 바다 세상이 보인다” 라고 월출산을 넘어 완도라는 섬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소리에 취했다. 물결이 치듯이 자신의 마음도 쳤다. 해양무역(海洋貿易)의 진출(進出)이다.
그는 월출산을 넘기 위해 당나라에 먼저 가서 그 기술을 터득했던 것. 당나라는 신라보다 해상무역과 실크로드에 발달되었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월출산을 넘으면 분명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 동경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그는 당나라로 가서 그 세상을 엿보게 되었다. 그런 경험과 체험으로 월출산을 마음으로 넘었다.
당나라가 실크로드로 무역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했듯이, 그는 그걸 보면서 나도 신라에 가서 무역으로 신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당나라에는 실크로드가 있다면, 신라에는 〈인삼바닷길〉 이 있다 라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자 했다.
●청해진은 용혈의 명당형
인간의 삶에서 풍수지리가 지닌 의미는 크다. 풍수지라학(風水地理學)은 인간과 땅의 조화를 통해 기운을 전달하는 학문이다. 강이나 산 등 자연 환경뿐만 아니라, 도로와 인공 구조물 간 관계까지 고려해 명당(明堂)을 결정한다.
풍수지리학은 중국에서 발달된 학문이다. 통일신라 도선국사를 통해 전파됐으며, 풍수지리를 이미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장보고였다. 풍수지리는 과거 통일신라 말기 때부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고려시대에 상류층의 묘지나 궁궐 등을 지을 때 기준이 됐다. 현재에도 묘지, 집, 빌딩 터나, 집안 배치 및 장식 등에도 적용하고 있다.
산이 감싸고 물로 열리는 지형이 이상적인 명당으로 꼽힌다. 청해진이 이 조건을 충족한다. 또 풍수지적으로 집은 남향이 선호된다. 대부분 부유 촌과 집값이 높은 지역은 강을 바라보면서 남향으로 집들을 들어섰다.
청해진은 완도 ‘장좌리(長佐里) 장도(長島)’ 에 설치돼 있다. 장좌리는 ‘당제(堂祭)와 당굿’ 을 지낸 곳이다.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에 장보고가 완도 장좌리 장도를 중심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운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완도군(莞島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남쪽 끝이자 한반도 최남단에 있는 군이다. 완도를 비롯하여 총 201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여 있다. 동북쪽은 고흥군과 여수시, 북서쪽은 해남군과 강진군, 남쪽은 남해를 사이에 두고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가 인접해 있다.
완도 장좌리 당제와 당굿,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 아침 동이 틀 무렵(오전 6시) 완도 청해진 유적(사적 제308호) 내에 있는 당집에서 나라의 번영과 발전, 마을의 무사태평과 각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낸다. 모시는 신격으로는 ‘장보고, 송징, 정년, 혜일대사’ 등 네 분이다.
나라의 번영과 발전, 마을의 무사태평, 각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당제는 아침 동이 틀 무렵 오전 6시에 당집에서 시작된다. 당제가 끝난 뒤 오호에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복을 축원한다. 오후 5시 무렵에는 바다에서의 무사고와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제사를 바닷가에서 지낸다.
장좌리는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828년에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인 청해진(淸海鎭)을 설체했던 곳이다. 장좌리 주민들은 장보고, 송징, 정년, 혜일 대사를 마을을 수호(守護)하는 신으로 여기고 있으며, 청해진 유적에는 이들을 모신 당집(堂)이 있다.
장도의 당(堂)은 섬 가운데 위치한 당집인데, 당집을 둘러싸고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당집은 마을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동향으로 세워졌다. 그 안에는 주신 송징(宋徵) 장군과 우측에 정년(鄭年) 장군, 좌측에 혜일(惠日) 대사가 모셔져 왔으나, 1982년부터 장보고(張保皐) 장군을 모시고 있다. 장보고가 849년에 졸(卒)하였으니,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제향을 지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장보고 제향(祭享) 행사는 불과 30년 쯤 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를 재해석해 그의 공을 인정하고 그도 송징, 정년, 혜일 대사와 함께 모시고 있다. 당제를 위해서 정월 초사흘에 마을 회의를 열어 제관, 제비, 굿칠 사람을 선정하고 제사를 정월보름에 지낸다.
우리니라 남해안에 위치한 완도에는 신라시대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넛을 위로하는 제사가 해마다 진행되고 있다.
장보고(張保皐)는 젊은 시절 친구인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당나라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난〉 을 진압한 공로로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 벼슬을 지냈다. 그는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모습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흥덕왕 3년(828) 신라에 귀국 후 해적(海賊)들의 인신매매(人身賣買)를 근절하기 위해 왕의 허락을 받아 1만 군사로 청해(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장보고의 활약상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화려했다. 단순히 청해진에서 해적을 소탕한 것만 아니고, 한반도.일본열도.동남아.중국대륙과 아랍을 연결하는 해상무역로를 개척하야 동아시아의 대교역 바닷길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은 비단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중동의 아랍권에도 보이며, 속일본기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속인본기에는 장보고(張保皐)를 장보고(張寶高)로 표기해 났다. 보고(寶高), ‘보배 중 최고’ 라는 뜻으로, 그를 훌륭한 인물로 본 것이다.
오늘 날에도 일본 궁내청(왕실) 창고에는 장보고가 일본에 교역한 물품이 지금도 보관되고 있으며, 속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일본 천황이 장보고의 교역 물품을 적극 수용하되, 다만 가산을 탕진하지 않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장보고 교역품은 당대 최고의 물건으로 일본 내에서 귀족을 사이에 호가(呼價)에 매매되어 일부는 그 물품을 구입하느라 가산까지 탕진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일본에는 장보고와 거래를 하여 막대한 부를 누린 관료가 있었는데, 그가 훈야노미 야타마로이다. 근는 장보고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 부하들이 가져온 교역품을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정보고에게 거액의 선금을 투자하였는데, 장보고가 죽었으니, 물품을 받들 수 없을 것 같아 물품을 압수했다. 이때 일본 천황이 이는 물품을 탈취한 것으로 보고 다시 장보고 측근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속일본서기에 보인다.
장보고는 그 당시 우리 신라뿐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중국.동남아.아랍권까지 그 이름을 떨친 위대한 인물이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최고 교역상인(交易商人)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장보고가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 에는 그 비중이 상당히 적다. 그러다 보니 오늘 날 중국에서는 장보고가 본래 신라 사람이 아니고, 중국 사람이라고까지 우길 정도다. 이 위대한 인물 장보고가 우리 역사에서 야박(野薄)했던 이유는 838년(43대, 희강왕 3년)에 장보고는 왕권(王權) 경쟁에서 밀린 김우징(金祐徵)을 완도로 불러온 후, 왕권다툼에서 희강왕(僖康王)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45대 신무왕(김우징)을 임금으로 받아들었다. 그리고 신무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번에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46대 문성왕(文聖王)에게 시집을 보내고자하였다. 그런데 그 권력(權力)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귀족(貴族)들이 그 혼인(婚姻)을 반대하였고, 결국 염장(閻長)으로 하여 장보고를 암살토록 하였다. 장보고의 말년 인생은 참으로 비참(悲慘)하였고, 왕(王)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인물이라는 억울하게 뒤집어 쓴 불명예로, 오명(汚名)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 유학자 김부식의 눈에는 그 장보고가 썩 달갑지만은 않았던 것.
장보고는 민애왕을 쫓아내고 신무왕을 옹립(擁立)했다는 이유만으로, 완도에서는 한때는 그런 연유(緣由)로 장보고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져, 그를 모시지를 않았다. 장보가 활동했던 청해진의 완도 장좌리에서는 장보고보다 그의 친구인 정년을 더 완도의 신으로 여겼고, 그 동안 모셔왔는데, 장보고는 역적(逆賊)의 오명 때문에 한동안 그를 무시하다가 근래에 그 이름이 빛나기 시작했다.
사실 청해진은 장보고가 왕에게 제안해 만든 기지이다. 해군기지(海軍基地)와 무역기지(貿易基地)로 사용했다. 그런데 장좌리 당집에는 주역(主役)인 장보고는 뒷전이고, 장보고의 수하(手下)인 송징(宋徵)을 주신(主神)으로 모신다.
당집 주체가 된 송징은 ‘대장군(大將軍)’ 이다. ‘지방관(地方官)’ 이다 라는 여러 해석으로 출신성분을 말한다. 확실한 출처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어느 시대에 살다간 분인지조차 모른다. 단지 오랫동안 구전(口傳)으로 그 분의 존함(尊啣)과 업적(業績)만이 전래되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송징에 대한 전해진 이야기들은 허위 아닌 사실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기록에는 없는데도, 그럴듯하게 전해지는 이런 애매모호란 것들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완도읍지에 송징은 고려 말 대장군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실 송징은 신라 사람이 아닌 ‘고려’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은 원나라에 빼앗긴 고려의 주권과 영토를 회복하고자, 최영, 이성계 장군들로 하여금 자비량(철령) 이북을 점령케 하는 등 북진정책(北進政策)에 주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몽골과 거리가 먼 남해안 일대는 좀 등한시 하였는데, 이때 왜구 무리가 자주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를 노략질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남해안의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討伐)하고 방어(防禦)할 필요가 있었다.
송징은 이 무렵 남해안 수문장(守門將)으로 청해진에 파견되어, 그 지역 주민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칭송(稱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말 사실일까? 암툰 그 공로를 사실로 보고, 오랫동안 완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그를 신(神)으로 추앙(推仰)되어 제향(祭享)을 모신다. 청해진은 어느 누구보다도 활동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장보고가 아니던가? 만약 장보고보다 송징이 더 바다에서 일어난 일을 하고, 지배했다고 하여 그를 신으로 모신다고 했다면, 그가 더 장보고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면, 대한민국은 〈장보고함〉 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완도를 지키는 사람은 장보였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일을 해냈다. 장보고의 친구 정년, 정년보다 더 훌륭한 일을 했음에도, 정년은 당집에 신으로 모시고, 정작 해야 될 장보고는 말조차 꺼내지도 못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늦게 서야 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를 모독한 일이다. 당집에도 없었던 그를 기린답시고 공원조성을 하며, 관광산업으로 이용하는 것은 그에 대한 공경(恭敬)도 아닌 허례(虛禮)이며, 형식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완도에서는 송징, 정년, 혜일 대사 등은 알아줬어도 장보고는 해적(海賊)과 반란자(叛亂者)로 인식했고, 완도를 빛낸 인물로 보지 않았다. 신격화(神格化)에 그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그를 해적이니,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니 하며, 장보고를 배제한 것이다.
송징은 진천송씨(鎭川宋氏) 족보에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살다간 부사(府使) 송징(宋徵)으로 기록되어 있다. 1200년 동안 전남 완도를 지켜온 남해의 주신(主神) 송징 대장군, 진천송씨 찬성공파(贊成公派) 휘(諱, 돌아간 높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 ‘지백(智伯)’ 조부의 장남이다 라고 기록해두었다.
이런 인물로서의 완도 지역에서는, 그를 왜구를 토벌(討伐)하고, 완도를 수호(守護)하는 가장 훌륭한 인물로 본 것이다. 사실 따져보면 장보고가 송징보다 훨씬 앞서 청해진에서 활약을 했고, 그의 공을 알고 있듯이 해적 소탕과 해양 질서 회복으로 안정되게 한데다가, 해상무역이라는 국제자유무역을 위한 ‘해상무역로(海上貿易路)’ 를 개척한 장본이다. 그럼에도 그가 왕권 경쟁에 개입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누명(陋名)을 씌워 안 좋게 보는 등으로, 장보고는 송징, 정년, 혜일 대사보다 뒷전으로 밀리는, 아예 가려지는 안타까운 일이 생겨났다. 장보고 사후(死後), 그가 왕권 다툼에 공조.가담했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으로 나라의 역적(逆賊)으로 취급하고. 그의 공을 평가 절하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아픔이 벌어졌다. 살아선 명예(名譽)요, 죽어선 불명예(不名譽)를 안은 장보고의 비참한 삶이다. 삼국사기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던 것을. 항간에 장보고에 잘 못된 판단인식에 대해 현재에 들어서 근래에 〈장보고 다시 보다〉 , 〈장보고 인물평가. 그리고 명예회복〉 이라는 논문이나 서술들이 나오고 있어, 그의 공은 〈해상왕〉 이라는 물결로 울림을 해주고 있다.
완도 장좌리의 당집에 주신(主神)으로 모셔야 할 사람은 송징이 아니고, 해상왕 〈장보고〉 다. 왜! 완도에서는 진정 우상(偶像)으로 모셔야 할 사람을 뒤로 감추거나 평가 절하하는 등 안 좋은 시각으로 바로본 건지, 역사는 한동안 장보고라는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꺼려했다. 그런 일이 2000년 가까이 장막(帳幕)에 가려져왔고, 그런 장막을 근래에 들어와서 거둬내는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돼 부끄럽고, 역사를 부정한 일인 것 같아 완도에 신주로 모신 당집의 모습이 장보고를 두 번 죽이는 것 같다. 장보고가 완도에서 태어났다고 본 분들이 왜 장보고는 신(神)으로 모시지 않았는지. 완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더 신으로 모신지. 완도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 대해 신격화(神格化)해 기리는 것은 옳으나, 그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됐던 장보고는 진작 당집에도 그를 모시지 못했는가에 가슴에 손을 얹어놓고 반성해 볼 일이다. 서글픔이 가시지 않는다.
완도는 장좌리에 설치한 당집은 역사를 부정(否定)한 곳이 아닌가 한다. 부정의 역사를 보여준 ‘당집’ 이다. 2000년 동안 장보고를 부정하다가 근래에 들어와서 장보고에 대한 재해석하며, 그를 기린답시고 청해진 ‘역사관,문화관’ 을 조성해두며 장보고에 관한 청해진이라는 보여줌은 이 또한 부정의 역사서(歷史書)를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장보고에 대한, 청해진에 대한 역사를 알리려 면은 제대로 된, 왜곡된 시각이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어야 한다.
그리고 장보고가 태어난 마을 영암 선암에서도 궁복.궁파.장보고에 대한, 그와 관련된 ‘건덕임(乾德岩)과 국두암(國頭岩)’ 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장보고에 관련된 역사관.문화관이나 기리는 비(碑)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또한 부정의 역사로 보여 진다. 부정의 역사, 사유방식을 통해 기존 청해진과 장보고의 역사적 인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참 무섭다. 청해진 장보고 역사적 담론을 ‘자기부정’ 이라는 가르기 기준을 통해 사실, 이념, 소통으로서의 역사 등으로 구별하여 각각의 의미와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다충적 역사비판이론〉 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역사의 부정, 부정의 역사를 쓰고 있는 완도와 영암이 돼서는 안 된다.
장보고에 대한 인식, 한편으로는 왜 그랬을까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장보고에 대한 무시.외면.천대,절하는 아니라고 본다.
상대를 가볍게 보고나 대화에서 배제하는 수준의 무시(無視)하난 태도, 문제를 고의로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하는 외면(外面)한 태도, 상대를 낮게 보며 지속적으로 비하.확대하는 천대(賤待)한 태도,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화.협의에서 제외하는 행동의 절하(切下)한 태도는 점잖치 못한 일이다. 무시(無視)가 아닌 무시(㒇視), 외면(外面)이 아닌 외면(愄面), 천대(賤待)가 아닌 천대(千代), 절하(切下)가 아닌 절하(截呀)가 되어야 한다.
장보고의 충성심(忠誠心)과 애국심(愛國心),
“장보고는 통일신라시대 때 해성무역으로 국익을 떨친 인물입니다.”
“장보고는 통일신라시대 때 해양질서를 바로 잡은 인물입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언젠가부터 장보고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생겼다. 그는 분명 신라를 위해 상선의 선원들을 위협하거나 나라의 안정을 헤치는 사람들을 바로 잡았다. 그런 그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 우리는 지금도 그에 대한 해적으로 본 사람들이 더러 있다.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라고 본다.
장보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면이 우리를 고운 시선으로 유도하고 있다. 관심 끊긴 장보고, 인파 넘치는 청해진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겉치레’ 만 요란하다. 지금 청해진이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때 내용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청해진으로 본 역사.문화의 현장은 관행이라는 말로 책임을 벗어나거나. 구호나, 겉치레에 머무르는 것 같다. ‘역사는 좋은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에서 과거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닌 청해진과 장보고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도구로 보고, 다양한 관점과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한다. 좋은 시각이란 단편적 비교가 아니라, 시대적 조건과 여러 해석을 함께 고려하는 태도를 갖출 필요가 있으며, 그런 시각적 관점에서 청해진과 장보고를 바라보아야 한다.
청해진과 장보고의 역사,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단순화하기보다 맥락과 구조를 함께 파악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같은 사건이라도 인물의 시점, 사회적 배경, 외부 환경 등 여러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고거를 통해 오늘을 이해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며, 감정적 비판보다 폭넓은 시야를 갖는 것이 청해진과 장보고, 신라를 제대로, 바르게 본 일이다.
역사를 변곡점(變曲點)의 청해진과 장보고의 역사,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이유는 같은 기록이라도, 그것의 해석방식이 사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인데, 희대의 성군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치부가 드러날 때가 있고, 만인의 욕을 먹어도 알고 보면 위대한 신념인 경우가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은 경우도 있다.
이 뿐만 아니다. 같은 역사적 사건을 보더라도, 하나의 사건에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떠한 전쟁이 일어나면, 누군가는 이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아니면 다른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사를 보다. 청해진, 그리고 장보고〉 라는 우리는 이런 제목 앞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변곡점을 말해본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런 질문부터 던져보면서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과 인물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왜 청해진을 둬 무슨 일을 하려고 그랬는지 ▲청해진이 신라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국제적으로 끼치는 일은 무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청해진은 한편으로는 끔찍한 문제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대책을 세운 ‘조치(措置)’ 이었지만,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끔찍한 사건과는 별개로 바로 그러한 사건 때문에 그때의 신라가 더욱더 ‘강력한 드라이브’ 를 펼쳐 잃어버린 ‘문화적(文化的) 유산을 재건(再建)’ 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관점으로 봤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어떤 이는 “말도 안 된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하나의 잣대로 바라본다면 아니 될 터, 그래서 청해진과 장보에 대한 여러 번 반복적으로 가술을 해봄이다.
과거사(過去事)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말고 중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말부터 던져보면서 과거사를 진영(陣營) 논리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정치 성향이 우파(右派)인지 좌파(左派)인지에 따라, 같은 과거사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거나,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나만 해도 과거 한때 좌파적인 성향이 강해서, 우리나라 과거사 모든 부분을 좌파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봤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은 무조건 나쁜 놈들이고,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독재자로서 무조건 나쁜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우리니라 역사학계가 좌파 성향으로 많이 치우치는 경향이 강해서인 듯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가 그렇게 봤던 것들이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봤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청해진의 장보고의 세계, 좌파적 시각과 우파적 시각에서 저술된 각종 책과 논문들을 편견을 버리려고 노력하면서 꼼꼼하게 바라보게 시작했고, 이를 통해 그의 과거사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균형적’ 으로 갖추려고 노력했다.
역사적 인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무조건 공(功)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과(過)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무조건 추앙(推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과연 공만 있고 과는 전혀 없을까?
아니다 라고 말할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장수로서 지휘 능력이나 전략과 전술 구사 능력은 탁월했지만, 성격이 너무 원리원칙주의 적이고, 강직해서 시기(猜忌)하고 질투(嫉妬)하는 사람들을 꽤 만들어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 혁혁(赫赫)한 공을 세웠음에도 모함을 얻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참수(斬首) 직전까지 몰렸다. 다행히 류성룡과 정탁의 간곡한 호소에 선조가 마음을 돌려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기사회생했다.
또 해상왕으로 부르고 있는 장보고도 한때는 신라의 역사를 새롭게 쓸 정도로, 그의 업적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나라에서 20년 넘게 군(軍) 생활과 그동안 머물면서 배운 선진무역(先進貿易)을 신라 청해진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바다 질서를 잡고, 무역을 활발히 추진해 부강한 신라로 거듭나게 했다. 장보고도 그런 면에서는 아주 존경받을 인물로 평가되지만, 그의 완고한 성격과 정치에 눈을 뜬 행동은 주변 사람들한테 고운 시선을 받지 못했다. 특히 조정과 귀족층에서는 그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시기(猜忌)가 심했다. 하지만 장보고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로서 남는다. 해상왕으로...
그래서 역사적 인물들을 살펴 볼 때, 균형적(均衡的)인 시각을 가지고, 입체적(立體的)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공(功)은 배우고, 과(過)는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어서, 자신의 삶의 발전 동력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상왕 장보고를 비라보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뛰어난 능력을 본받되, 너무 원리원칙주의 적이고 강직해서 주위에 적(敵)을 만들지 않도록 주의(注意)하자는 깨달음을 얻는 식으로 글을 써본다.
완도의 당집에 장보고라는 한 인물은 한동안 그를 존경할 만한 위대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송징, 정년, 혜일 대사만 신(神)으로 모시는 일이, 우리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데. 공(功)과 과(過)에 대해 균형적으로 보고 싶은 마음에서의 본, 그 당집은 마냥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장보고의 생애(生涯)를 다시 한 번 다뤄보면서, 장보가 왜 청해진을 완도에 설치를 했는지에 대한 ‘풍수지리학적(風水地理學的)’ 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장보고가 완도 ‘장좌리 장도(長島)’ 를 최고의 〈군사기지.무역기지〉 장소로 여겼다. 이 곳이 강한 기운이 작용한다고 보고, 그는 육지도 아닌 섬에 청해진을 설치했다. 기지(基地)를 두는데 있어서 그는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 을 적용했던 것이다. 이름 하여 ‘풍수군사술(風水軍事術), 풍수무역술(風水貿易術)’ 을 선보였다. 군사와 무역에 풍수(風水)를 적용한 것이다. 군사.무역에 지리적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본 게 〈완도 장좌리〉 였다. 장좌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용혈(龍穴)’ 의 지역으로 봤다.
영암 ‘월출산’ 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해남 대둔산으로 이어져 완도에 이르는 산맥의 기운 풍수혈(風水穴), 장보고는 이런 산맥의 용맥(龍脈)을 따라 흐르는 땅의 기운이 모이는 지점을 ‘혈(穴)’ 이라고 보고, 그 흐름과 주변 산세를 읽어 좋은 자리의 ‘명당(明堂)’ 이라고 여겼다. 땅속 기운의 흐름은 월출산과 대둔산.달마산을, 기운이 모이는 중심점은 〈완도〉 로 봤다. 혈을 감싸는 산봉우리가 월출산과 대둔산.달마산이고, 물길.바다 등의 수(水)는 ‘완도 앞바다’ 로 본 것이다.
장보고는 기운이 바다로 흐르는 이런 산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용맥(龍脈)’ 이 흐르는 곳이 좋다고 본 곳은, ‘월출산에서 완도로 이어진 혈맥’ 을 들었다.
북동쪽애서 생기가 나오고, 서남쪽에서 기운을 모으며, 혈이 따뜻하고 안정된 곳을 좋은 명당으로 보며, 그는 완도의 ‘장좌리 장도’ 라는 작은 섬에 군사기지.무역기지의 〈청해진〉 을 설치했다.
월출산과 대둔산~완도 섬 라인, 청해진 풍수의 시작은 월출산(月出山, 옛 이름은 월나산)이다.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본 포인트가 비로 ‘배산임수(背山臨水)’ 였다. 뒤로는 든든한 산(월출산), 앞으로는 완도 앞바다를 향해 열린 터, 청해진을 두어 이 기운을 정중앙에 업혀 ‘신라의 기운’ 을 모으는 자리로 삼았다.
청해진 설치, 풍수학의 형기학적(形氣學的)인 관점에서 전반적이 풍수의 국세(局勢)와 특징들을 파악하고 두었다. 겉으로 드러난 산의 형세를 보고, 그 안에 흐르는 기(氣)의 세력을 살펴 산천(山川)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강약(强弱)과 후박(厚薄) 등을 통해 생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길흉(吉凶)을 살펴보고 정했다.
월출산을 필두로 하여 주맥(主脈)이 행도(行道) 과정에서 산줄기가 흘러내리면, 물이 따라 흐르고, 물이 휘돌아 흐르는 곳에 산이 따라 이어지는 수많은 지리적 음영(陰陽) 변화를 거치며, 월출산에 시작한 그 기운은 청해진으로 이어져 내렸다.
자연의 이치라 할 수 있는 산과 물의 유기적인 관계로 볼 때, 완도 청해진의 가장 두드러진 풍수적(風水的) 특징은 음양합덕(陰陽合德)에 부합한 ‘빼어난 수세와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조화’ 를 이룬 국세(局勢)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해진 터는 전통적인 풍수 이론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할 때 명당(明堂)의 국면에 나타난 국세(局勢)는 어디 일까? 지리적 풍수사상(風水思想)을 내세워 백두산은 ‘태조산(太祖山)’ , 지리산은 ‘중조산(中調山)’ , 무등산은 ‘소조산(小朝山)’ , 그 용맥(龍脈)으로 월출산은 ‘주산(主山)’ , 장흥 천관산은 ‘백호(白虎)’ , 대둔산.달마산은 ‘청룡(靑龍)’ 로 한 월출산에서 완도로 이어지는 것을 ‘현무(玄武)’ 로 보고, 청해진이 있는 곳을 ‘용혈(龍血)’ 로 보았다. 청해진이 있는 그 주변의 청해진을 기점으로 청룡의 좌측에 있는 섬은 ‘용사(龍砂), 호산(護山)’ , 백호의 우측에 섬을 ‘호사(虎砂), 호산(護山)’ 으로 여겼다.
장보고는 장풍승기(藏風乘氣), 거친 바람을 감추어야 기운을 높일 수 있는 명당의 요건을 이루면서 사신사(四神砂)인 좌쳥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의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고,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멀리서 읍(揖)을 하는 형상, 공경(恭敬)의 뜻을 나타내는 형국의 작은 산을 바라보고, 좌우에서 호위(護衛)하는 사산(砂山)인 청룡과 백호 등이 사방으로 들러 싼 환포(環抱)된 섬들이 조화롭게 감싸주어야 한다고 보고, 청해진을 두었다.
장보고는 뒤로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 물을 맞이하면 ‘건강장수(健康長壽)’ 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앞이 낮은 듯하고 뒤가 높으면 ‘세출영웅(世出英雄)’ 하고, 전착수관(前窄後寬)의 앞이 좁은 듯하고 뒤가 넓으면 ‘부귀여산(富貴如山)’ 한다고 믿었다. 완도 청해진은 탁 트여 물이 굽이굽이 감아 돈 곳으로 보았다. 가장 이상적이 ‘환경모식(環境模式)’ 의 장소로 여겼으며, 청해진은 탁 트인 곳이고, 아늑하고 포근한 지세(地勢)에 답답한 느낌이 없는 상태였다. 장풍승기의 청해진이었다. 용(龍), 혈(穴), 사(砂), 수(水)를 잘 갖춘 청해진이었다.
태조산(太祖山)~소조산(小朝山)~부모산(父母山)의 용맥진행도(龍脈進行圖)가 좋은, 중출맥(中出脈)의 우출맥(右出脈)과 좌출맥(左出脈), 개장천심(開帳穿心), 환포교쇄(環抱交鎖), 명당(明堂), 수(水), 합수(合水)의 용맥진행도가 아주 좋은 곳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청해진 자리를 수기지모(水氣之母)의 ‘물은 기의 모체(母體)’ 로 봤으며, 수기지계(水氣之界)의 ‘물은 기의 경계(境界)’ 라고 봤다.
청해진은 주변의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해남 대둔산과 달마산의 품 안에 들어앉은 형태로, 실제로 안산(案山)이 감싸 앉은 포근한 ‘명당형(明堂形) 터’ 로 불린다.
그래서 나라의 기운이 모이는 자리라 했고, 지금도 그 라인은 ‘해상무역의 진출기지’ 로 명성을 유지한다. 청해진이 있는 완도는 출렁이는 바다처럼 생기가 넘친다.
예전에는 육지가 더 왕성한 혈맥(血脈)의 기운이 넘쳐났다, 요즘은 육지와 바다가 조화된 곳이 더 혈맥의 기운이 솟는다. 풍수적으로 보면 완도 등의 바다를 접한 섬들은 ‘수기(水氣)’ 가 가장 풍부한 지역이다.
바다 남쪽으로 완만하게 퍼지는 지형, 바다의 굽이치는 곡선, 그리고 해안가나 섬 등 물길과 도로가 마치 혈맥(血脈)처럼 얽혀 있다. 특히 청해진이 있는 곳의 섬들은 S자로 휘어지며 감싸는 ‘포용형수세(包容形受勢)’ 자리로 바다를 활용한 제품이나 무역의 중심이 모여드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월출산과 천관산.두륜산.달마산의 기운을 받아 군사.무역에 확장을 꾀했던 장보고, 그는 영암 월출산에서 흐르는 기운이 해남 두륜산과 달마산을 거쳐 완도에 이르러 그 기운이 모아지고, 더 폭발시킨다고 봤다.
그는 산(山)의 기운이 해(海)로 넘어가는 시기로, 만물이 소생하여 생명력이 분출되는 시기로 보고, 이 에너지가 물(水)의 기운과 만나면, 생각지도 못한 큰 성과로 이어질 거라는 예단(豫斷)을 했다.
월출산의 기운은 완도에 이르러 완성되고 빛난다고 본 것이다. 한곳으로 치우치는 ‘편재운(偏在運)’ 이 있다고 본 그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을 넘어 덤까지 얻는 일은 이곳 바다와 접한 〈완도〉 라고 보고, 생각의 흐름의 군사.무역 등이 서서히 풀리는 형국(形局)이라 여겼다.
장보고는 여기에 진영(鎭營)을 치면 분명 이후부터 세상의 도움으로 큰돈이 들어올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재물(財物) 운 포인트, 내가 노력한 대가 외에 보너스 같은 돈이 들어온다는 확신, 잊고 있었던 미수금을 받거나, 과거에 해두었던 투자가 빛을 발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행운(幸運)의 팁, 남쪽 방향에 있는 섬이 길하며, 큰 섬보다는 좀 작은 섬의 기운이 더 좋다는 물의 기운이 있는 숫자 〈1과 6〉 을 활용했다.
막혔던 운의 통로가 뚫리며 횡재수가 따르는 섬의 완도로 본 건데, 월출산을 주산(主山)으로 보고 이런 기운의 결정체(結晶體)는 바로 ‘완도(莞島)’ 로 봤기 때문이다. 월나산(月那山, 월출산 옛 이름)과 대둔산(大芚山, 두륜산 옛 이름)과 완도(莞島)를 뜻하는 월대도(月大島), 달이 밝아 그 기운이 크게 넓게 두루 뻗치니 섬이 돋보인다.
청해진이 설치된 곳은 식복(食福)과 재복(財福), 권력복(權力福)과 명예복(名譽福)이 함께 들어오는 명지(名地)로 봤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돈이 되는 정보가 흐르니, 섬을 통한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운수풀이를 했다.
재물은 포인트, 직관력이 매우 날카로워지는 시기로, 그는 “어 오늘 왠지 기분이 좋은데?” 하며, 바로 행운의 날로 여기고 즉시 추진했다. 하는 대로 다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졌다.
행운의 팁, 푸른색 아이템을 품에 지니면 금전 운이 더 상승할 것이라고 믿고, 금을 상징하는 숫자 〈1.3.6.8.9〉 를 제시했다.
장보고는 직진하는 기운으로 재물을 쟁취했다. 그는 기운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기라 여겨, 자심감이 넘치고 결정력이 좋아져 큰 재물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겨, 세상 모든 것을 손에 다 쥘 수 있다는 확신과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다.
재물 운 포인트, 횡재수가 가장 강력했고, 단순히 무역뿐만 아니라, 군사나 정치 등 큰 단위의 명예가 움직이는 운이었다. 행운의 팁, 아침 기운이 가장 좋아 그는 아침형 인간으로 모든 일을 추진했다. 이른 아침 바닷가에 나가 산책을 하거나, 활동을 시작할 때 행운이 찾아왔다.
●장보고의 정책과 전략은 연결고리가 있다
연결고리는 관계의 친밀감, 제품의 브랜드와 감정적 유대, 정책 간 등의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친밀감은 사람에게 더욱 가까워지는 동시에 상호간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제품 브랜드 감정적 유대는 신뢰(信賴)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제품 생산 및 판매다. 정책은 하나의 약속으로써 정확한 내용이나 의사 전달이다.
가치 사업 공유, 다국적 연대 확산이라는 국제자유무역 진출 및 확대가 바로 연결고리다. 장보고는 국경을 남나드는 연대를 자본과 노동 영역에서 경제적.사회적 기업으로 확산시켰다. 그는 세계 각국의 경제적.사회적 기업가들 사이에 〈가치와 비즈니스〉 의 연대(連帶)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했다. 추구하는 목적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 사업 모델을 공유하며, 깊이 있고 현실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연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사례는 무역 관련 경제적 기업인 〈청해진〉 이다. 이곳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이나, 혼란으로 인한 무질서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정치.군사.경제인들의 집단체다.
청해진은 장보고가 당나라의 모델을 참고해 완도에 설치했고, 이후 각 지역의 무예(武藝), 상업술(商業術)이 뛰어난 분들이 가세하면서 청해진을 완성했다. 청해진은 해군기지라는 기치 아래 국가적 이해관계를 초월해 신라의 내놓으라는 뛰어난 능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크게 눈길을 끌었다. 이후 청해진은 지역 내 여러 군사.경제 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가치(價値)의 극대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같은 목적을 위해 사업 모델을 공유하며, 연대를 형성했다. 신라 청해진, 당나라, 일본, 동남아 등의 경제적.사회적 네트워크인 무역의 가치사슬 프로젝트는 다국적 연대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일이다.
청해진의 목적은 ‘신라 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여 기업계층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특정 산업 내 우수 사업 모델을 발굴하고, 그 업종을 중시하는 소규모 사업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발굴한 사업 모델을 공유했다.
예컨대 생산 효율을 높인 인삼 생산자의 모델이 개발되면, 이 사업 모델을 영세한 다른 인삼 생산자들과 공유하게 했다. 나아가 사업자들을 연결해 판매 등에서 협력체계를 국축함으로써 안정적이고 규모 있는 〈생산 네트워크〉 로 발전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연대를 청해진에 국한하지 않고 전 당나라, 일본, 동남아 지역의 대상으로 넓혔다. 청해진에서 가치사슬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장보고가 중국어를 할 줄 알아, 특히 당나라와의 거래를 활발히 하는 등 효과적인 사업 모델 연대를 이뤄지게 했으며, 지역에 밀착해 무역진출을 활발하게 했다. 이런 일로 신라는 청해진, 그리고 장보고로 인하여 경제 부흥(復興)을 일으키면서 국제적인 위상(位相)을 한층 높였다.
장보고가 이끄는 청해진의 주목적은 주주의 이익의 극대화이다. 때문에 국경을 넘어선 시장 확대를 통해 매출 규모를 키워냈다. 반면에 경제적.사회적 기업의 주목적은 경제.사회 문제 해결이었다. 경제적.사회적 기업이 사업 모델을 세계화(世界化)하려는 뜻은 여기에 있었다. 세계화는 곧 〈연결고리〉 라는 것에서 출발했다. 장보고가 추진한 가치사업 공유, 다국적 연대 확산은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연결고리는 영어로 ‘connection’ 이다. 비즈니스에서는 인맥.네트워크 의미로 쓰인다. 장보고가 추진한 연결고리는 청해진은 〈사슬-Chain〉 이라는 고리를 차례로 이어놓았다., 신라+당+일본+동남아 이렇게...
그리고 이런 사술을 신라는 〈매듭-Knot〉 으로 묶어 놓았다. 기업들과 나라들과의 관계에 이루어진 것들을 묶고 고정시키거나, 두 줄로 연결하거나, 혹은 다른 무엇을 고정하고 고정했다.
장보고는 하나의 정책과 전략선에는 분명 선과 선으로 연결 되거나, 여러 개의 선으로 퍼지는 양상을 띤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청해진 장소는 영암 월출산을 기점으로 하여 해남 대둔산을 거쳐 완도 장좌리에 이르게 했다. 이 선은 혈맥(穴脈)의 ‘맥선(脈線)’ 이다. 그리고 신라에서 당, 일본, 동남아 등으로 이어지는 선(線)이다. 신라와 당, 당과 신라, 산라외 일본, 일본과 신라, 신라와 동남아, 동남아와 신라, 신라와 중동, 중동과 신라로 신라의 청해진 線을 이은 연결(連結) 고리를 형성했다.
장보고는 당나라 무령군에 있을 때 신라인들이 머문 곳인 코리아타운인 ‘산라방(新羅坊)’ 과 군복무를 하면서 익힌 군사기술과 무역기술도 함께 터득했다. 무령군에 있으면서 이 부대를 통해 신라방과 무역의 업체 및 무역항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친분을 쌓았다.
연결고리는 장보고의 고향 ‘영암 선암-월출산~당나라 서주-산둥반도~중동-아랍~일본-후지산~동남아-섬’ 등 지역으로 연결된 〈글로벌 커넥션-Connection〉 이였다.
국제자유무역의 ‘먹이사슬’ , 신라의 ‘묶음상품’ 조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미래관이면서 국제사회의 새장을 연 그랜드 플랜이었다.
먹이사슬-Food Chain은 크게 생산자와 소비자로 나뉘며, 소비자는 1차 소비자부터 고처 소비자까지 단계적으로 이어지게 하면서 여러 개의 먹이사슬이 서로 얽혀 복잡한 먹이그룹을 이루고, 이 구조가 제품 다양성과 생태계의 안정과 균형을 돕는 일로써 먹이그룹이 촘촘하면 한 제품이 줄어들거나 없어져도 다른 먹이관계로 보완되기 쉬워 생태계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번들링-Bundling의 묶음제품은 두 개 이상의 여러 상품을 한데 묶어 판매하는 방식을 말한 것으로, 동일한 제품을 여러 개로 묶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1+1 상품, 상호보완적인 제품을 하나로 묶어 판매하는 패키지 상품이 대표적인 묶음제품이다. 이러한 묶음제품은 한매가 저조한 제품의 재고를 소진하거나, 합리적인 구성으로 고객의 충성도를 높일 수 있어 요용한데, 편리한 번들링 판매를 돕는 박스신라의 묶음상품 기능을 활용해 다양한 구성으로 제품을 판매하게 했다.
묶음제품은 박스신라 시스템에 이미 등록해놓은 제품을 묶어 관리하는 기능이며, 묶음제품의 입출고는 구매 및 판매 메뉴에서 진행한, 발주서와 판매서를 작성해 묶음제품을 발주하거나 판매하면, 연결된 제품의 수만큼 입출고되어 재고에 반영되는 방식으로 〈신라 묶음상품〉 으로 추진했다.
●신라서 인정받으면 세계서 통해 해외산=저가품 등식 허물었다
장보고는 무역에 있어서 무역의 상품들은 국제자유무역으로 인한 저가 상품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자국 신라의 제품들이 밀리는 일이 더러 발생하곤 했다. 그는 그런 현상을 원인 분석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응 전략을 세웠다.
저가 상품은 최대한 막고, 고가 상품은 최대한으로 생산하여 수출하는 방식에 집중했다. 그는 ‘해외산=저가품 등식’ 을 허물겠다며, 당나라 제품 돌풍이 무섭게 불었다. 일본도 그랬다. 동남아나 중동 아랍도 신라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나라. 일본 등의 제품 신라 진출 전까지만 해도 저가 해외산(海外産) 제품 이미지 때문에 시장 안착에 난항을 겼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이를 정면 돌파하고, 신라 시장을 공략했다.
같은 제품이 신라보다 더 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웠다. 다만 저가 브랜드는 인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실용적인 소비자들을 정교하게 공략한 게 주효했다.
수입 제품 업계의 뜨거운 아이콘으로 부각한 청해진을 진두지휘하는 장보고는 일시적 수요로 신라 제품 시대가 몇 년간 교착 상태를 맞은 것에 일시적 수요의 원인은 소비자들이 충분히 매력을 느끼고 구매할 만한 제품을 완성품 업체들이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그는 청해진에 있기 전까지는 당나라, 일본 제품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막상 당나, 일본 등의 제품을 경험해보니 기본 질의 기능은 신라보다 나았고, 쓰는 재미도 컸다고 느껴, 장보고는 신라 제품보다 당나라, 일본 상품보다 더 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쟁력에서 뒤지지 않도록 신제품 개발에 나섰다. 청해진은 대중 브랜드는 물론 고급 브랜드 라인업이 많고, 제품 기술은 글로벌 완성 제품 업체와 비교해도 우위에 설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장보고는 당나라 제품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지만, 신라, 일본 등 제품 강국에선 어디까지나 후발 주자로 보고, 업계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가며 차근히 발전하고 싶고 급격히 판매를 늘리려 하지는 않았다.
장보고는 〈신라서 인정받으면 세계서 통해 해외산=저가품 등식〉 허물겠다는 각오는 확고히 세워 강하게 나섰다. 그는 〈해외서 인정받으면 신라서 통해 신라산=고가품 등식 성립〉 하겠다고 자신감을 보이면서 해상무역 추진을 활발히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