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력은 어떻습니까?
홍제동 화제가 일어난지 한달여 지난 지금
당시의 참혹한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다시 한번 화제의 현장에서 숨진 소방관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희망새
작성자 : 김성현
[01.03.17]취재일기(4)-홍제동 화재현장에서
*이메일클럽 사건리포트로 3월 12일 소개드렸던 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사회부 기동팀 김성현입니다.
일요일인 지난 4일 저는 아침부터 "놀러 나간다"고 말하기 미안해 부모님께 '근무'라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방에 수영복과 물안경을 챙기고 룰루랄라 집을 나섰습니다. 오랜만의 일요일 비번이었던 그날, 경기도 용인에 있는 수영장에 갈 작정이었습니다.
집을 나선지 단 1분이 채 안돼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이럴 때 드는 느낌은 세 글자로 '불·안·감'입니다. S선배의 전화내용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오늘 새벽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불이나 화재진압하던 소방관 5~6명이 숨졌다. 파출소에 가있는 김기홍(동료 경찰기자)씨와 합류, 당장 상황을 챙겨라." 이때 저의 대답은 이랬죠. "(가방속의 수영복과 물안경을 잠시 물끄러미 돌아본 뒤) 예, 알겠습니다."
불이 난 현장에서 홍제파출소까지는 불과 100여미터. 아침 10시30분쯤 파출소에 도착할 때쯤 눈발이 거세게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세븐'에는 늘 구질구질한 비가 내렸죠. 그날 오전 내리던 눈은 예쁘기만 했습니다. 눈을 바라보던 저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튀어나왔죠. "에이, XX."
파출소에서 사망자 명단을 챙기고 화재 현장으로 김기홍씨와 걸어가던 중 두번째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화재현장은 김기홍씨에게 맡기고 너는 당장 숨진 소방관들이 있는 병원으로 가라." 그 말에 불이 난 현장을 불과 몇 미터 앞에 두고 저는 다시 차를 잡아타고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소방관 몇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응급실 직원이, 실려온 소방관 가운데 한분은 중대 용산병원으로 옮겼으며, 한분은 영안실로 옮긴 뒤라고 하더군요. 이름을 받아적고 주머니 한쪽엔 수첩을, 다른 한쪽엔 펜을 구겨넣고 영안실로 향했습니다.
타사(他社) 동료는 1명뿐이었습니다. '2등 도착이라. 그나마 다행이군.' 혼자 중얼거리며 숨진 박준우 소방사가 모셔진 2호실로 향했습니다. 대구 출신인 박 소방사의 가족들은 비보(悲報)를 듣고 고향에서 올라오고 있던 중이었죠. 영안실은 혼인신고를 불과 1주일 앞둔 예비 신부만이 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질문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약혼녀는 울먹였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던 동료기자는 티슈를 건네줬습니다. 처음 내뱉은 말부터 한마디 한마디가 제 폐부를 찔러왔습니다.
"이번주에 이사할 예정이었다. 친정 오빠가 아직 결혼을 못해 식은 못 올리지만 며칠 내로 혼인신고도 올리려고 했다."
"어젯밤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는데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왔었다. 메시지에는 '아무 걱정 말고 잘자. 꿈속에서도 밤새 지켜줄게'라고 적혀있었다."
"어제 야근을 하고 오늘 아침 여기서 선배 장례식이 있어 '들렀다 오겠다'고 했었다. 결국 이 영안실에서 싸늘하게 잠들어있다니."
이럴 때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나이와 이름과 주소와 사진을 챙기지 않는다면 '기자'라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취재가 끝난 뒤 '따뜻한 위로'라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떤 말을 해드려야할 지 곰곰히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세란병원으로 가서 후배와 함께 순직한 2명의 소방관 이야기를 챙기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때가 오후 1시30분쯤. 결국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하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나섰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오후 2시쯤. 김기석 소방교와 박동규 소방장의 가족들로 영안실은 이미 울음바다였습니다. 주황색 복장을 한 동료 소방관들의 눈도 붉게 물들어있었습니다. 후배 염강수 기자와 한 가족씩 나눠 취재하기로 하고 박 소방장의 사모님 곁에 앉았습니다. 사모님의 목소리는 비교적 차분했습니다.
"일산호수공원이 가까워 비번인 날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곤 했다. 노래방에도 가족들과 함께 가고."
"늘 다정하고 새심한 남편이었다."
박 소방장의 아들과 딸은 이미 지쳤는지 벽에 기대앉아 있었습니다. 몇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어머니 곁에 다가온 아들 현찬(15)군에게 저는 '묻고 싶진 않지만 물어야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평소에 아버지는 어떠셨니?"
그때까지 늠름하던 중3 아들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괜찮아, 괜찮아"라며 어깨를 감싸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다음날 후배 기자 한명이 전해온 메모에 의하면 현찬군은 삼배 두건과 검은 양복을 입고 상주(喪主)로 의젓하게 동료 소방관들과 친지들의 조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후배와 함께 회사로 돌아와 취재한 메모를 올리니 오후 4시쯤. 피곤함이 밀려오며 머릿속은 갈수록 복잡해졌습니다. 아직 사회부 경력이 1년 조금 못되는 저는 씨랜드 참사 이후 처음 맞는 큰 사고였죠. 다시 취재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용의자로 지목된 집주인 선덕치(여·69)씨의 아들 최모(31)씨가 서대문경찰서에 들어가 있으니 확인하라는 지시였죠.
강력1반에는 이미 수많은 기자들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4~5평 남짓한 공간에 10여명의 기자와 5~6명의 형사, 용의자가 몰려드니 수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진실을 알아야하는' 형사들과 '진실을 알려야하는' 기자들간의 1시간여 공방은 '1시간에 1차례씩 중간 브리핑을 하겠다'는 나름의 신사협정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보니 점심식사를 못했더군요. 타사 동료기자들과 서대문경찰서 옆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중간 브리핑하고. 형사과장과 만나고 회사에 보고한 뒤 다시 브리핑을 하고. 어느덧 밤이 찾아왔습니다.
오후 8시30분쯤. 강력1반장이 들려준 말은 기자들에게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정쯤 최씨가 어머니에게 1000원만 달라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늘 술을 찾는 아들이 못마땅해 '그렇게 술만 먹을 거면 나가 죽어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집을 나가 동네수퍼에서 소주3병을 산 뒤 주변 주차장에서 술을 마셨다. 집에 찾아온 시각은 오후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이때부터 모자간의 말다툼이 시작되고, 아들은 주먹과 발로 어머니의 얼굴과 가슴을 때렸다. 어머니는 아들이 두려워 2층으로 도망쳤다. 아들은 홧김에 분홍빛 노트에 가스레인지로 불을 붙인다. 아들은 자신의 방에 쌓여있는 생활정보지와 어머니의 방 이불에 불을 옮기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아들이 이미 집에서 빠져나간 사실을 모르는 어머니는 출동한 소방관에게 소리칩니다. "내 아들이 안에 들어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어머니의 이 한마디가 결국 여섯 소방관을 불구덩이에 빠뜨리고 맙니다. 경찰조사결과 아들 최씨는 91~93년 A시립병원에서 짧게는 1주, 길게는 2개월씩 정신분열증으로 입원치료를 받았답니다.
96년에는 가족들이 최씨를 B기도원에 보내기도 했답니다. 아들은 기도원에서 1년 뒤 도망치고 이 사실을 두고두고 가슴의 원한으로 묻어둡니다. 그날도 아들은 어머니에게 "내가 기도원에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아느냐. 오늘 그 고통을 보여주겠다"며 때렸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오후 9시30분. 파출소 1곳과 병원 2곳, 경찰서 1곳을 돌아다니니 일요일은 저물었습니다. 사회부 기동팀장께 들었던 내용과 함께 내일 아침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뒤 집으로 터벅터벅 향했습니다. 다음날 기사에는 "최씨에 대해 5일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는 한줄이 추가됐습니다.
기사는 어떻게 마무리됐지만 유족을 울려야했던 제 마음은 끝끝내 걸렸습니다. 오늘 아침 MBC의 라디오프로그램에는 소방관 아내의 애틋한 사연을 방송됐습니다. "소방관의 아내로 12년 살아왔지만, 아들이 장래희망을 소방관이라고 적어낼 때마다 망설여진다"는 내용이었죠. "기자들은 숨진 소방관의 사연을 그렇게 빨리 알아내고 떠나지만, 우리는 또다시 이 화제를 잊어야만 하는가"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취재현장에서 못다한 미안함이 결국 TV뉴스를 보며 눈물이 되었습니다. "다음 세상에선 소방관은 하지마"라고 외치며 망연자실했던 동료 소방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거야"라고 되뇌이며 남편의 영정을 붙잡던 아내, 울부짖는 엄마의 품에 안겨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던 어린 딸. 영결식을 비추던 화면이 흐릿하게 보이던 즈음, 저는 비로소 '기자' 이전에 '인간'일 수 있었습니다.
숨진 소방관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김성현 드림 danp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