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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아무리 좋은 선언문이라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는 ‘소금(할라스)’과 ‘빛(포스)’이라는 상징어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시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다른 복음서에도 ‘소금’과 ‘빛’이 상징어로 제시되지만(소금-마르 9,50; 루카 14,34/ 빛-마르 4,21; 루카 8,16 참조), 이 둘을 연달아 제시하는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서뿐입니다. 또 마태오 복음서만이 ‘너희는 ~이다’고 선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강하게 희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현장은 세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고,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관행이 그러하기에, 남들도 다 그러는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려는 마음속 속삭임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하고 손해 보고 욕을 먹고 꽉 막혔다는 비난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감수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꿋꿋이 그 길을 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서 말씀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일러 줍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초가 빛을 내기 위해 자기 몸을 태우듯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길에는 자기희생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명료한 사람은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참 행복을 누리도록 초대된 우리는 누구입니까?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정체성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파악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 대답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납니다.아무리 좋은 선언문이라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는 ‘소금(할라스)’과 ‘빛(포스)’이라는 상징어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시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다른 복음서에도 ‘소금’과 ‘빛’이 상징어로 제시되지만(소금-마르 9,50; 루카 14,34/ 빛-마르 4,21; 루카 8,16 참조), 이 둘을 연달아 제시하는 복음서는 마태오 복음서뿐입니다. 또 마태오 복음서만이 ‘너희는 ~이다’고 선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를 강하게 희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현장은 세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하고,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관행이 그러하기에, 남들도 다 그러는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려는 마음속 속삭임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하고 손해 보고 욕을 먹고 꽉 막혔다는 비난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감수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꿋꿋이 그 길을 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서 말씀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일러 줍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초가 빛을 내기 위해 자기 몸을 태우듯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는 길에는 자기희생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명료한 사람은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참 행복을 누리도록 초대된 우리는 누구입니까?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정체성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파악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 대답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묵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길을 따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이 되고, 온갖 불의가 만연하는 세상에 소금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주님께 봉헌하도록 합시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알아봅시다
1. 가톨릭 교회 교리서 십계명(十誡命)(2083~2400항)
십계명의 1, 2, 3계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4, 5, 6, 7, 8, 9, 10계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8~10).’
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넷째 계명 :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2197항. 넷째 계명은 사랑의 순서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다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전해 준 우리 부모를 공경하기를 바라셨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 혼인 당사자의 합의로 결합된 부부와 그 자녀들로 이루어집니다. 가정 안에서 교회적 친교가 이루어지고, 자녀 출산과 교육으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이 지속됩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도와 희생에 동참하게 되며, 기도와 말씀을 통해 사랑을 키웁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복음 전파와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 자녀의 의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통하여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마땅히 효도하고 감사하며 공손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 사이에 우애해야 합니다. 장성한 자녀들은 부모의 노년과 병환 중에, 또 고독하거나 곤궁한 때에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은총을 받게 하고 교회 안에서 살게 해준 부모와 가족을 더욱 사랑하여야 합니다.
● 부모의 의무
어떠한 경우에도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所有物)이 아닙니다. 자녀는 하느님께서 부모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시어 양육과 교육을 부모에게 위임하신 귀중한 인격체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언제나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 교육의 첫째가는 책임자이며, 최초의 신앙 선포자입니다. 또한 그들의 영육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덕을 닦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추며 이성과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기본적인 가정교육입니다. 모든 교육은 모방에서 시작되므로 부모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소명을 발견하도록 교육하여야 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생활 상태에서든, 봉헌 생활이나 사제직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다면 기쁘게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또 자녀들의 직업 선택이나 배우자 선택에 있어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현명한 조언(助言)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국가는 인간이 기본권과 자유를 행사할 수 있도록 존중해야 합니다. 특히 가정과 약자를 보호하며 사회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정치적 권리의 행사는 국가와 인류 공동체의 공동선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국민은 사회적 권위를 존중해야 하며, 진리와 정의의 정신, 연대와 자유의 정신으로 국가에 협력하여 공동선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 권위의 명령 또는 요구가 올바른 양심의 판단에 어긋날 때에는 이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 국가에 대한 복종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사도5,29 참조).
다섯째 계명 : 사람을 죽이지 마라
2261항. 무죄한 사람을 일부러 살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황금률과 창조주의 거룩하심을 중대하게 거스르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 주인이시기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오직 보호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 인간 생명의 존중
다섯째 계명은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을 중죄로 금합니다. 또한 간접적인 살인도 금지하며, 죽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그런 위험에 놓인 사람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도 금합니다. 음주 운전 역시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므로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의무가 더 크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는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격체이므로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위적 낙태 및 낙태에 협력하는 것을 금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을 없앤다는 이유로 그 목숨을 끊는 안락사도 금합니다. 물론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베풀어야 하는 치료 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죽음을 인간답게 받아들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고 생명의 소유주는 아니므로 자살은 언제나 중죄입니다.
● 인간 존엄성의 존중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의 신체 건강을 정당하게 보살펴야 하지만, 육신 숭배나 온갖 종류의 과잉은 피해야 합니다. 인간의 건강과 생명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마약 사용 그리고 음식, 술, 담배와 약물의 남용도 피해야 합니다.
장기 이식은 장기를 제공하는 사람의 정신적 또는 신체적 손상이나 위험률이 장기를 받는 사람이 기대하는 선익과 균형을 이루는 경우에, 기증자의 동의를 전제로 하여 도덕적으로 용납됩니다. 죽은 뒤의 기증 행위는 훌륭한 것으로, 기증자의 실질적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의학적 실험이나 장기 매매, 테러, 고문,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 등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중죄입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천부적이며, 이를 해치거나 위험스럽게 하는 일은 단호히 막아야 합니다.
● 평화의 보호
인간 생명의 존중과 증진에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평화는 ‘질서의 고요함’을 말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노)인데, 공동선이 유지되고, 상대방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되고, 개인 간 또는 민족 간의 상호 존중이 이루어지고, 형제적 사랑이 실천될 때에 성립됩니다. 그래서 사목 헌장에서는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고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5,9)!”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요구하십니다. 증오와 복수를 극복하고 인간 존중과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으며,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여섯째 계명 : 간음하지 마라
2380항.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마음으로 짓는 간음조차 단죄하신다.
여섯째 계명은 정결을 지키도록 명합니다. 정결은 ‘완전한 인격’과 ‘온전한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완전한 인격이란 자유로이 성을 사용하되, 악이 아닌 선을 이루는 인격적인 성숙을 의미하고, 온전한 헌신이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는 정결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각자의 고유한 신분에 알맞게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부부 간의 정결을 지키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미혼자들은 금욕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동정을 지키는 이는 동정을 지키는 이로 갈림 없는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소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결을 거스르는 죄는 성욕이나 성적 쾌락에 무질서하게 탐닉하는 것으로, 간음, 사음, 매춘, 강간, 동성애, 음란물 등이 있습니다. 혼인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죄에는 간음, 이혼, 일부다처, 근친상간, 동거, 시험 결혼 등이 있습니다. 이는 여섯째 계명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 문화의 문란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기 때문에 정결이라는 고귀한 소명에 더욱더 투신하여야 합니다. (서울교구 소공동체)
2. 가톨릭에서 조상제사를 허용하는 이유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과 한국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효의 종교라고 일컬어질 만큼 효를 중시하는 유교에서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16세기 중국에서 이 문제가 대두됩니다. 소위 의례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죠. 마태오 리치와 예수회원들은 유교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고 조화하려는 문화적 적응주의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사의 문제도 자녀가 부모에게 드리는 존경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세기 정도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의 선교 방침을 비난하면서 조상제사를 미신적 행위라고 반대하게 됩니다. 이는 선교정책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만났던 대상의 차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회와는 달리 지방의 서민층을 주로 만났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많은 미신적 행위들을 실제로 목격했었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은 1세기 동안이나 계속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하여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여하튼 이 결정은 유교 문화권의 극동 지방 선교에 있어서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로 인해 수차례의 박해가 있었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약 200여 년간 이 금령은 엄격하게 준수되었습니다. 그러다 20세기 들어와서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재조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역의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게 되지요.
한국 천주교회의 지역교회법인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서는 제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 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제134조 1항). 한국 주교단은 또한 상세한 지침을 정하게 됩니다. 즉 제사를 드리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드리는 행위 등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 외에 혼령을 부르는 등의 행위는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상 제사를 드리더라도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 즉, 연도를 바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전통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이런 미사와 기도는 더욱 권장되어야겠습니다. (평화ㅣ방송 TV 신부님 이게 궁금해요)
손석준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http://love.chonnam.ac.kr/~sohns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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