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학맥(嶺南學脈) / 별동(別洞) 윤상(尹祥)
조선왕조 초기 권근(權近),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등이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기초로 국가의 모든 문물제도의 기반을 조성한 후 이를 이어갈 새로운 인물 등용의 문을 크게 열었다.
여기에 힘입어 윤상(尹祥), 김구(金鉤), 김말(金末), 김반(金泮), 김현(金鉉) 등은 지방관리 또는 평민출신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학문을 크게 진작시키며 관학을 주도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尹祥이었다. 그의 호는 별동(別洞)이고 본관은 예천(醴泉).
1973년 현재의 예천읍에서 善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鄭夢周의 문인으로 신 유학에 조예가 깊었던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큰 복이 아닐 수 없었다.
尹祥이 12∼13살경 醴泉군의 사동으로 취직하자 당대의 학계를 대표 할 만한 趙庸이 고을원(지금의군수)으로 와 있었다.
趙庸은 평소 尹祥의 총명함과 근면 그리고 침착함을 눈 여겨 보다가 어느 날 그를 시험하여보았다.
趙庸은 아무도 모르게 장지문 위에 물 한 그릇을 올려 놓고, 지금 소나기가 올 것 같으니 모든 장지문을 급히 내리라고 尹祥에게 명령했다.
조금 후에 尹祥은 시키는 대로 했다고 봉명하자 趙庸은「장지문 위에 아무것도 없더냐」고 물었다. 「물이 한 그릇 있었습니다.」는 尹祥의 답에「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군수가 되 물었다.
이에 尹祥은「혹 장지문에 무엇이 있으면 다칠까 염려되어 긴 막대기로 장지문을 훑어보니 무엇이 닿기에 올라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물 그릇이 있었습니다.」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趙庸은 그의 조심성과 침착성에 탄복,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尹祥 또한 타고난 총명과 근면을 바탕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주경야독(晝耕夜讀)에 힘썼다.
생활형편이 어려운 그는 동헌(東軒)을 드나드는 길에 관솔(松明)을 따서 은밀한 곳에 두었다가 밤에 글을 읽을 때 사용하곤 했다 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20세에 진사가 되고 4년 뒤 태조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尙州) 선산(善山) 향교의 교관을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와 사예(司藝)가 되었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늙은 부모를 위해 그는 외직(外職)을 청하여 金山, 大邱, 榮州의 수령을 역임한 후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서울대학 총장 격)이 되어 성리학 보급과 후진양성에 심혈을 쏟았다.
이때 그의 학문은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고 후진을 가르침에 있어 아주 자상했으므로 성현(成俔) 김종직(金宗直) 등 후대 석학들은 그를 가리켜 權近 이후 제일가는 유학자로 꼽았다.
일개 급사에서 출발한 그는 타고난 총명과 성실성으로 문신에게 가장 영광된 자리인 성균관 대사성직을 16년간 누렸다. 특히 그는 성리학과 역학(易學)에 정통했으므로 당시 경학3김(經學三金)이라는 金鉤, 金末, 金泮 보다 더욱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선비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尹祥은 도덕 학덕 뿐 아니라 기지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기지를 대변하는 전설은 어린이 동화집에 자주 등장하는「거위와 구슬」이야기다.
한번은 尹祥이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게 되었다.
주막에 앉아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이 어린 주막집 아들이 값진 구슬을 갖고 놀다가 떨어뜨리자 옆에 있던 거위란 놈이 삼켜 버렸다. 조금 후 주막집에서는 구슬이 없어졌다고 야단 법석이 일어났다.
결국 구슬 행방에 대한 혐의는 尹祥에게 돌아 왔다.
주인이 尹祥을 관가에 끌고 가려 하자 그는 태연하게 거위의 다리를 노끈으로 묶어 내 옆에 있게 한다면 반드시 구슬을 찾게 해 주겠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반신반의한 주인은 집 기둥에 尹祥과 거위를 함께 묶어 밤을 새게 했다.
이튿날 아침 거위 똥 속에서 구슬을 발견한 주인은 너무도 민망하여 尹祥에게 백배 사과하면서 그 사실을 알면서 왜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尹祥은 허허 웃으면서 "어제저녁에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고 말했더라면 당신은 급한 마음에 거위를 죽였을 것이 아니냐"고 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윤회(尹淮)란 일설도 있음)
이 처럼 尹祥은 당대의 성리학을 대표할만한 슬기와 지혜도 있었다.
尹祥은 후진을 가르치면서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 나와도 엉킨 실오리를 올올이 풀어가듯 자세히 분석하여 이해시키고 종일토록 정좌하여도 피로를 몰랐다고 한다. 단종(端宗)이 성균관에 입학할 때 尹祥은 그 스승으로 상견례하여 사림(士林)의 영광이 되었다.
文宗 초 70대 후반에 들어선 尹祥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예천으로 내려오자 인근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 그의 높은 학식과 도덕 그리고 경륜을 배웠다. 그의 학문적 특성은 우주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에 원래의 법칙이 있으므로 만물은 필연적으로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는 덕성적 형이상학(德性的 形而上學)을 강조한 점이다.
尹祥이 『천생증민유물유칙(天生烝民有物有則)』이란 논문은 정주(程朱)학적인 입장에서 우주만물의 성리관(性理觀)을 표명한 것으로 아주 귀중한 글이다.
이 글의 참뜻은「하늘이 만백성을 낳으니 사물이 있고 법칙이 있었다」즉 대개 사물이 있으면 본질(性)이 있는 것이니 본질(性)은 하늘로부터 받고 부여하는 시초에 이미 갖추어진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낳음에 氣로서 형태를 이루었고 사물의 생성변화는 理(법칙)를 따른다.
尹祥은 그의 해박한 역학(周易)을 토대로 하늘은 우주만물의 원초자이며 실체인 태극(太極)이며 태극이 한번 움직이고 정지함에 따라 음양이 서고 이는 오행(五行)과 교합하여 삼라만상을 변화시키니 여기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법칙(理)이 있다는 우주관을 지지했다.
또 尹祥은 사람은 천지의 氣를 받아 형체를 이루고 천지의 理를 갖추니 인간은 우주의 중심으로 모름지기 하늘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인성론(人性論) 중심의 실천윤리를 강조하고 나섰다.
군신(君臣)간은 의(義)가 있어야 하고 부자(父子)간에는 친(親)을 주로 하고 부부는 분별을 목표로 하고 장유(長幼)는 차례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 모두가 본래부터 갖추어진 당위성이란 논법이다.
따라서 尹祥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는 마음(우주의 정신즉 理)에 달렸고 理는 설사 군주라 하더라도 남을 존경(敬)하는 데서 옳은 마음이 비롯된다고 주창하고 당시 성행하고 있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理 중심의 우주관과 인간본위의 실천윤리를 강조한 그는 깊은 사색을 통하여 그 철학적 이론을 체계화 시켰다는 점에서 한결 우뚝한 유학자였다.
당시 현관명사의 대부분이 尹祥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조 개국이래 가장 으뜸 가는 선생으로 충앙됐다.
趙庸에서 비롯되어 尹祥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일부는 재경관인(在京官人)에게 미쳐 성균관 집현전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다른 일부는 醴泉을 중심으로 한 영남북부지방의 문예를 진작시켜 나갔다.
그의 19대손 윤사현(尹士鉉)씨(45)는 충주 연초 제조창에 근무 중이며, 후손은 번창하지 못해 예천군 보문면 미호동의 50여호 등 전국을 통틀어 2백호 이내다.
(참고문헌=韓國思想史, 嶺南士林派의 형성, 내고장예천군, 燃藜室記述, 國朝名臣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