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과목의 학습목표 <일본인의 생활과 민속> 과목은 일본문화의 기본틀, 기본패턴, 거시적으로 나타난 일본문화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을 학습목표로 하고 있다. 문화의 정의는 상당히 포괄적이고 다양해서 무엇을 문화라고 보아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은데 이 과목에서 다루는 일본문화에는 일본인의 심성이라든가 행동, 가치관이 포함되고 일본인의 사회관계가 포함된다. 또한 사회관계에 기초하여 만들어지는 조직원리 및 제도적 특징 등이 포함된다. 이 수업에서는 일본인의 생활과 민속이라는 미시적인 시점에서의 일본문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본 일본문화의 특징, 다른 문화와 비교해서 일본 특수적인 것으로 주목되어 왔던 일본문화의 특징, 기본패턴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일본문화론이라고 하는 논의가 계보를 형성할 정도로 상당히 활발히 전개되어 왔다. 일본문화론에서는 다른 문화권, 특히 서구사회와 비교해서 일본문화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를 밝히고자 해왔는데 이 수업에서는 지금까지 일본문화의 거시적인 특징으로서 어떤 것이 지적되어 왔는지, 일본문화론의 계보를 살펴봄으로써 일본문화의 거시적 특징을 끄집어내도록 하겠다. 우리가 일본문화론의 계보를 공부하는 까닭은 이러한 논의를 공부함으로써 과연 일본문화의 전체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일본인들은 어떤 가치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행동양식을 보이고 있는지, 일본인의 사회관계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것은 일본사회의 조직원리나 제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즉 어떤 개별현상 뒤에 숨어 있는 심층적인 부분, 일본문화를 이루는 기본원형, 기본틀을 이해하고자 함이다.
■ 문화의 개념
1. 문화의 정의 문화(culture)를 가장 넓게 정의한다면 ‘인간이 자연상태에 작용을 가함으로써 이것을 변형시키고 새롭게 만들어낸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에 대립되는 인위적인 모든 것을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에는 인간이 유인원의 단계에서 벗어나 인류집단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들어낸 모든 것이 포함되는데, 정치나 경제, 법과 제도, 문학, 예술, 도덕, 종교, 관습 등이 포함된다. 물질적인 재화도 문화에 속한다. 한편 좀 더 구체적으로 문화를 정의한다면, 문화란 ‘특정집단에 의해 공유되는 의미와 가치, 생활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와 가치, 생활양식이라는 것은 상징체계로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상징(symbol)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 이외에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집단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상징체계를 발달시켜 왔고 상징체계를 통해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인간이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사회화)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상징체계를 습득하여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란 인간의 현실적 또는 상상적인 생활경험이 상징화되어 표현된 것이다. 이 생활경험이란 집단적으로 공유된 것으로 그 내용은 자연에 대한 것, 인간에 대한 것, 그리고 관념과 같이 다양한 것을 담고 있음. 또한 인간의 생활경험을 상징화하는 인간 활동은 기호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띤다.
2. 문화의 정의를 둘러싼 시각 차이 그런데 문화를 의미하는 culture라는 말은 라틴어의 cultus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말은 재배하다, 경작하다, 돌보다, 사육하다라는 의미를 가짐. 나아가 마음을 돌보다, 지적인 개발을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정의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인간의 정신 가운데서도 세련되고 일정한 유형을 지닌 정제된 형태의 의식’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문화는 음악이나 문학, 회화와 같은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 산물로서의 예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문화를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지적인 활동,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술과 같은 활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임. 그런데 문화를 이렇게 인간의 정신활동과 관련된 구체적인 영역으로 정의하는 방식에는 문화를 물질적인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사회관계와 분리시켜 사고하는 관념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문화예술을 정치, 경제, 사회와 동떨어진 순수한 영역으로 보고자 하는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화를 상당히 좁게 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자연과 맞서 나가는 과정에서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물질적인 생산이나 분배를 둘러싼 사회적 과정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현재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정의는 ‘한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총체적인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 문화의 기능 문화라는 개념과 더불어 사회학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개념은 사회(society)라는 개념이다. 사회라는 것은 공통의 문화를 공유한 개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호관계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사회생활을 무질서와 혼돈 없이 일정한 틀을 형성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문화는 사회생활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사회성원으로서 인간이 문화를 습득해나가는 과정을 사회화(socialization)과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린아이가 점차 커가면서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규칙, 룰을 익혀나감으로써 사회적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사회적으로 전혀 무력한 존재로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기만 함. 문화라는 것은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는 다듬어지지 않은 무력한 아이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기술을 가진 어른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사회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칙이나 관습, 사회적 지위와 역할체계에 대해서 알게 됨. 이처럼 문화는 바로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지위-역할체계를 습득하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공통의 문화를 공유한 개인들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런 점에서 문화는 개인의 행동을 이끄는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타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음. 따라서 어떠한 문화도 사회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회도 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다.
■ 문화의 다양성
1. 차이로서의 문화 인간은 집단으로서 사회를 구성하여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각기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왔음. 우리는 각 사회마다 다르게 통용되는 문화의 다양성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서양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먹는다든지 인도인은 돼지고기는 먹고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의 다양성이 있다. 그런데 서구 유럽에서는 문화를 문명(civilization)과 같은 개념으로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과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음. 문화란 문명화 과정, 서구의 계몽주의의 완성이라고 보는 시각이 바로 이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가진 합리성에 의해, 인습과 미신을 타파함으로써 인간 역사가 보다 진보적인 상태로 나아간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문화란 곧 문명화의 과정과 동일시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서구화를 의미. 즉 다른 사회의 문화는 미개한 것으로 문화로 인정하지 않고 서구의 문명만이 문화라고 보는 서구 우월주의적인 시각, 서구 중심적인 시각인데, 이것은 근대 초기 서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침략하면서 내세웠던 제국주의의 문화개념이자 문명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부름. 이러한 서구 중심적 문화 개념의 한계를 통해 우리는 문화가 어느 한 사회의 문화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에서 복수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즉 복수로서의 cultures로 보는 시각이 필요한데, 특정 시간대의 문화, 특정집단의 문화 등 각 집단별로 공유하는 무수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때 각 사회의 문화는 우월적인 것, 열등한 것과 같은 위계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차이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임.
2. 문화를 보는 두 가지 시각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ty) 어떤 관습도 그 자체로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각 관습은 그 사회집단이 갖는 문화전체의 일부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그러한 관습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단순히 나쁘다든지 야만적이라든지 하는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가 생겨난 배경은 무엇인가하는 전체 문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상대주의의 태도는 어떤 문화도 다른 것에 비해 내재적으로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모든 문화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적응적 표현, 즉 인간이 사회생활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문화는 우열 없이 동등하게 정당하다라고 보는 것. 문화상대주의는 인류학이 타문화를 이해하는 기본태도로서 발전시켜 온 것임. 아프리카나 남미의 원주민문화를 야만적이라든지 하는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원주민 고유의 문화틀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임. 인류학에서는 원시사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이러한 문화상대주의를 타문화를 이해하는 기본시각으로 발전시켜 옴.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그들 자신의 문화만이 옳고 우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민족중심주의는 다른 문화의 존재를 부정하고 탄압, 말살하려는 태도로 발전될 수 있다. 나치가 독일민족의 우월성 신화를 만들고 유태인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이나 일본이 오키나와의 류큐문화나 홋카이도의 아이누민족의 고유문화, 재일한국인이나 식민지 한국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일본문화로 동화시키고자 하였던 동화이데올로기도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우적인 세력의 역사이해의 태도도 역시 일본민족, 일본문화만이 우월하다는 자민족중심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자민족중심주의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어느 한 사회의 문화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실은 상당히 주관성이 개입될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라는 틀에 구속되어 타문화를 볼 수 있음을 의미.
■ 문화의 요소
1. 규범(norm) 사람들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따르는 가이드라인. 규범은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하기도 함. 규범에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일상적인 생활습관(식사시의 규범)에서부터 관습(장례규범이나 결혼규범) 등 다양하다. 규범은 사회마다 매우 다르고 또 그것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따라서도 다르다. 규범에는 법(law)도 포함되는데, 법은 규범 중에서도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이것을 어겼을 때 법률에 근거해 공적인 권력에 의해 제재를 받는 것.
2. 가치(value)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고 그른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생각이나 관념. 규범(rule)과는 달리 가치는 보다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가치로부터 규범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3. 상징(symbol)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 이외에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물건이나 제스추어, 소리, 색, 디자인 등 다양한 것을 통해 상징을 나타낼 수 있음). 상징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1)상징 자체는 임의적인 것으로 그것이 가진 내재적 특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검정색이 애도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든지 빨강색은 위험을 뜻한다든지 하는 것은 이들 색깔이 갖고 있는 고유의 속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음. (2)상징은 집단의 성원이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반면 다른 문화권자는 그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 (3)상징은 임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변동 가능하다. 물론 단시간에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집단성원의 공유의 과정을 거쳐서 변동한다.
4. 언어(language) 음성적 심볼(verbal symbol) 또는 쓰여진 심볼(written symbol)들의 체계. 언어는 문화의 발전과 정교화, 전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언어는 의미나 경험을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언어가 없으면 문화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축적하지 못한다.
상징과 언어는 문화적 의미를 형성하고 표현하는 주요수단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사회학의 한 분파인 상징적 상호작용론자(symbolic interactionist)들은 사회생활의 핵심은 상징의 공유, 갈등, 조작이라고 보고 있다.
제2강 일본문화론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2)
■ 이 강의에서 다루는 교재에 대해 이번 강의에서는 아오키 다모츠(青木保)의 명저 『日本文化論の変容―戦後日本の文化とアイデンティティ』를 교재로 선정하였다. 이 책은 일본문화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전후 직후부터 80년대까지 각 시기별 특징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아오키 다모츠는 일본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로 다양한 학술활동을 전개해왔으며 현재 도쿄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0년에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에서 출판된 이 책은 1999년에 문고판으로 다시 출판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문화론의 계보를 정리한 책들은 아오키의 책 이외에도 많은데, 아오키의 책은 전후 사회상황의 변화와 더불어 나타난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의 변화가 이들 논의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잘 정리하고 있다.
■ 일본문화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일본문화론이고 무엇이 일본문화론이 아닌지는 단언하기 어려움. 일본을 대상으로 하여 논한 모든 논의가 일본문화론이라고도 볼 수 있음. 문화의 개념 자체가 상당히 포괄적이고 애매하기 때문에 사회과학, 인문과학의 연구대상으로서의 일본에 관한 논의라면 모두 일본문화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논의영역으로서, 논의장르로서 일본문화론이라고 할 때는 이들 논의가 갖는 고유한 특징이 있으며 또 여기에 해당하는 계보를 갖고 있다. 가장 쉽게 말한다면 우리가 일본문화론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논의는 다른 사회의 문화와 비교해서 이와 대비되는 일본문화의 거시적인 특징을 끄집어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아오키 다모츠의 『일본문화론의 변용』이라는 책 제1장의 중간부분에 여기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
“전후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의 대상으로서의 일본문화라고 할 때 그것은 일본문화를 포괄적으로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해 외국, 그리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론적인 시각에서 논의한 것이 바로 일본문화론이다.” …… “일본문화론이라고 해도 여기에는 다양한 논의가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일본인론이나 일본사회론 등 홀리스틱하게(전체로서) 일본인과 일본인의 심리, 문화, 사회를 취급한 것이 포함된다. 그 자세한 분류는 여기에서는 거론하지 않겠지만 일본문화론을 이와 같이 넓은 의미로 파악하고 싶다.”
여기서 홀리스틱하게(holistic) 취급한다는 것은 전체는 부분의 합과 같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는 부분의 합 그 이상이라고 보고 전체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하나로서 다루고자 하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민족(nation)을 개인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해 독자적인 퍼스낼리티 혹은 정신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전체론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특정한 문화적 특징이 특정한 민족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보고 있음. 이 때 네이션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인 핵심은 민족성, 국민성, 민족정신(Volksgeist)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표현됨.
■ 일본문화론의 양산 배경 지금까지 일본문화론은 상당히 많이, 그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전개되어 왔다. 일본문화론을 즐기는 대중들의 심리에 기초해서 다양한 일본문화론이 등장하고 있음. 하나의 주목할만한 논의가 나오면 그것과 비슷한 아류의 논의가 나오고, 이것이 매스컴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유포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계속적으로 그 영역은 확산되어 왔고 결코 앞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서점에도 일본문화론 비슷한 것이 많이 출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서점의 일본코너에 가면 일본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의 일본문화에 대한 감상을 비롯해 좀 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일본문화에 대해 논한 다종다양한 일본논의가 판을 치고 있음. 이처럼 감상론적인 수준에서 일본인의 특징은 무엇이고 일본사회, 일본문화의 특징은 이것이다라는 식의 논의가 유행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다른 사회문화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속한 사회와 비교해서 일본사회의 다른 점은 쉽게 눈에 띠고, 또 그것을 발견했을 때 상당히 호기심이 충족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됨. 아마도 이런 호기심의 충족이 논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읽어주는 독자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회, 다른 문화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는데 호기심이 학문적 관심으로 상승해가면서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해서 논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남. 일본에 대한 연구도 처음에는 인상기, 여행기와 같은 것에서 점차 구체적인 분야로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자 해왔는데 일본문화론은 이처럼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 찾기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일본문화론은 단순히 객관적인 학문의 영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이러한 집단으로서의 자기 아이덴티티 찾기와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문화론의 출발은 근대화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본은 아시아국가에서도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 미국의 구로부네(黒船)가 일본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 선진기술에 일본인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는데, 구로부네가 출현한 다음 해인 1854년에 일본은 공식적으로 개국을 단행. 이후 일본의 지도층들은 서양의 앞선 근대적 기술,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서양을 따라잡을 것인가를 국가적인 과제로 하여 총력전을 펼침. 이후 일본은 서구에 뒤떨어진 근대화를 뒤따라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임.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은 정신은 일본의 정신을 갖되 서양의 뛰어난 기술을 받아들여 빨리 서양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자라는 것이었는데 서구를 의식한 근대화가 바로 일본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세계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게끔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아시아사회에 대해서는 일본보다 열등한 사회라고 보는 시각이 팽배. 일본인들의 아시아관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脱亜入欧)론.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은 우매한 아시아로부터 벗어나 유럽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 근대 서구문화에 비해 뒤떨어진 중국의 문화, 뒤떨어진 아시아문화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 후쿠자와는 정치, 경제, 생산기술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본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 진보, 발전하기 위해서는 탈아를 강조. 이러한 생각은 현재에도 이어져 일본인의 아시아에 대한 우월적인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문화론에서는 아시아와의 비교는 거의 없음. 이처럼 일본이 걸어온 근대화 과정 그 자체가 일본문화론을 양산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한층 더 국제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류의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생각됨.
■ 일본문화론의 계보 일본문화론의 시작은 메이지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 이 시기에는 서양과 직접 교류를 하게 되면서 서양인과 일본인을 우월과 열등의 관점에서 논하는 것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았던 것이 일본인은 서구인에 비해 정신까지도 뒤떨어져 있으므로 먼저 국민성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지적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사람은 먼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무형적인 정신,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개혁하고 다음에 이러한 의식의 변화가 정치에 영향을 미쳐 정치나 경제, 법률과 같은 제도개혁을 추진한다. 마지막으로 의식주와 같은 생활양식을 고쳐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메이지기에는 일본인열등성도 횡행했는데 일본인종 열등설도 등장하여 일본인은 신체적으로 서구인들에 비해 열등하므로 잡혼, 즉 결혼에 의해 일본인종을 개종해야 한다는 논의도 등장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서양인의 장점을 취하고 일본인의 장점을 화합시킨다는 논의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일본어가 영어에 비해 뒤떨어져 있으므로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상당히 급진적이고 황당하다고도 할 수 있는 주장인데 당시 서구와 처음 접하게 된 일본인들에게 비쳐진 서구의 모습은 우월한 존재로서의 서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다운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전후에 들어와서이다.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독특한 퍼스낼리티, 행동양식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음. 그 후 일본의 가족구성의 원리에 주목한 가와시마 다케요시의 논의, 도이 다케오의 아마에라는 일본인의 의존심리에 주목한 논의, 나카네 지에의 일본의 종적인 사회관계에 기초한 논의, 에즈라 보겔의 일본의 경제성장을 가져온 집단주의적 협조관계에 주목한 논의, 1980년대 이후의 일본적 사회시스템의 폐쇄적이고 배제적인 성격에 주목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 아오키 다모츠는 이것을 크게 4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다. 1945년에서 1954년까지는ꡐ부정적 특수성의 인식ꡑ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전전의 일본사회를 이루었던 가치관과 제도가 비합리적이고 봉건적인 것으로 평가되었고, 일본적인 문화의 특수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는ꡐ역사적 상대성의 인식ꡑ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패전 직후의 자신감의 상실로부터 벗어나 고도성장의 성과가 눈에 띠게 진전되면서 일본인들이 자신감을 회복한 시기이다. 서구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일본문화의 특수성이 그 자체로 독자성이 있으며, 근대화에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본문화론을 통해 이 시기에 제기되었다. 1964년에서 1983년까지는ꡐ긍정적 특수성의 인식ꡑ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일본의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확립과 더불어 일본적 경영이 세계적으로 주목되어 서구가 따라가야 할 모델로서 일본적 경영이 찬미되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본문화론의 논의도 폭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일본문화의 특수성이 서구의 발전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논의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1984년부터 현재까지는ꡐ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ꡑ시기이다. 이 시기는 국제화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일본의 경제무역 마찰이 심각해지면서 일본을 비판하는ꡐ일본 두들기기ꡑ 논조가 구미의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게 된 시기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문화론에서도 일본문화가 폐쇄적이며 이질적인 존재를 잘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되었으며, 특수성을 넘어서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논의도 진행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일본문화론이 세계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위치를 축으로 해서 긍정과 부정이라는 가치평가로 나누어져 전개되어 왔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일본문화론은 일본인의 심성과 같은 것에 주목한 논의에서부터 일본인들의 행동패턴이나 인간관계에 주목한 논의로 확대되고 이들 사회관계가 만들어내는 일본의 제도적 특징, 일본시스템의 특징에 주목하는 논의로 확대되어 갔다. 처음에는 문화적인 특성에 주목하다가 점차 사회제도적인 것에 주목하는 논의로 진행되어 갔는데 이들 논의를 통틀어서 일반적으로 일본문화론이라고 볼 수 있다.
■ 일본문화론이라는 논의의 특징 첫째, 일본문화를 하나의 전체로서 포괄적으로 파악해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문화론이다. 즉 개별적인 하나 하나의 문화현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의 일본인과 일본인의 심리, 문화,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일본문화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전체적인 특징을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우며 어떤 한 특징만 부각시키고 다른 특징은 사상시켜 버릴 수 있음. 둘째,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일본문화론에서는 일본문화가 갖는 독특함, 일본문화의 특수성을 부각시켜왔다는 점이다. 일본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일본문화론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일본은 지금까지 서구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특이한 사상과 행동의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 이래, 일본문화론에서는 일본문화가 갖는 유니크함, 특수성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들 논의에서 일본의 유니크함이 부각될 때 비교의 준거는 항상 서구사회였다는 점이다. 이 때 서구사회는 하나의 통일적인 것으로 전제되어 개별 서구사회의 다양성이 사상된 채 서구 対 일본이라는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동아시아문화와 일본문화의 유사성은 사상된 채 서구에 없으면 무조건 일본적인 특징이라고 논의되어져 왔다. 이것은 탈아입구(脱亜入欧)론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듯이 일본의 근대화가 일방적으로 서구를 모델로 해서 서구 따라잡기로 전개되어온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넷째, 이들 논의는 세계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위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왔다는 점이다. 패전 직후에 일본인들은 전전의 일본사회를 이루었던 가치관이나 사회관계를 철저히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고도경제성장으로 일본인들이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일본문화의 특수성이 단지 부정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인정할 수 있는 독자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 후 본격적인 고도경제성장과 더불어 일본이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면서 일본문화의 특수성은 긍정의 대상으로, 찬미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 논의는 일본의 경제성과라는 것을 하나의 축으로 해서 상당히 가치개입적으로 전개되고 왔다고 할 수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것만이 과대평가되어 강조된다든지, 비난에 가까운 부정적인 측면만이 강조된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다.
■ 일본문화론의 한계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일본문화론이 그것이 생겨난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논의로서 계속적으로 확장되게끔 하는 특수한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 점에서 논의로서 많은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본문화론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 일부 학자들이 지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와서이다. 80년대에 와서 일본문화론의 엄청난 영향력에 주목하고 그것을 우려하기 시작한 연구자들이 일본문화론이 갖고 있는 논의의 한계점을 지적하였는데 하루미 베후, 스기모토 요시오, 로스 마오아와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 일본계 미국인 연구자 하루미 베후교수는 일본문화론을 이데올로기라고 보고 있다. 즉 일본문화를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특징을 끄집어 내서 그것을 강조하고 무시하고 싶은 곳은 무시해서 하나의 시스템을 만든다는 것이다. 스기모토 요시오(杉本良夫)와 로스 마오아와 같은 사람들은 『일본인은 일본적인가?』(1982), 『일본사회의 여러 이미지』(1986, 영어판) 등의 저서에서 일본인론은 집필자의 개인적 경험이나 일상의 에피소드 같은 편리한 실례만 모아 만들어진 이론이기 때문에 학문적 가치가 없다는 방법론적 약점을 지적.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이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 예증의 자의적 이용을 통해 일본사회의 일치와 통합 모델이 구축되고 반대로 사회에 대한 이해대립이 강조되는 대립모델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 이것은 일본인론이 지배층의 이익에 합치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다고 봄. 가와무라 노조무(河村望)는 『일본문화론의 주변』(人間の科学社, 1982)에서 일본 문화론을 계급적 연대보다 기업 내의 연대, 집단의 화합을 중시하는 경영/지배이데올로기라고 논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문화론이 과연 전혀 학문적으로 쓸모 없는 논의인가에 대해서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음. 일본문화론은 우리의 일본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개별 학문에 영역에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 역사관, 아시아관과 같은 것을 이 논의를 통해 끄집어낼 수 있고 비교사회론적인 관점에서 일본문화의 특징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임. 일본문화론은 이미 상당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생산되고 대중들에게 소비되고 있으며 일본인 및 일본사회, 일본문화에 대한 이미지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일본문화론이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서 생성되고 있고 그것이 또 학문의 세계에서, 그리고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의 세계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제3강 전전의 일본문화론(1)
*제3강 및 제4강의 논의에 대해서는 미나미 히로시(南博)의 『日本人論』(상)(소화출판사, 1999년 번역판)을 참조하기 바람.
■ 메이지기의 일본문화론
1. 시대적 배경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 찾기, 즉 내셔널 아이덴티티 찾기는 근대의 시작인 메이지기부터 활발히 진행되어 옴. 메이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항(藩)이라고 하는 지방분권체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일본인이라든지 일본국가라고 하는 개념은 갖고 있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이 조선사람이나 중국사람과 다르다고 하는 의식은 있었지만 일반 민중레벨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부 지식인을 중심으로 중국과는 다른 일본 고유의 정신이나 일본 고유의 문화와 같은 것을 국학(国学)이라고 하는 학문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있었는데 이것은 계층적으로 상당히 한정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이라고 하는 국민의식, 일본인이라고 하는 아이덴티티가 일본 열도에 사는 주민 대부분에게 확산된 것은 근대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메이지 중기에 와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셔널 아이덴티티는 근대국민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냥 형성된 것은 아니고 끊임없이 국민의식을 창조하려는 국가의 여러 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지방분권체제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일본민족, 일본국민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이러한 의식을 심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이지정부는 국민의식을 강조하는 교육을 교육현장에서 강조하였는데, 일본민족은 단일민족이라든가 일본민족이 신의 자손이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뛰어난 민족이라든지 일본인 전체가 천황을 종가로 하여 가족을 형성하고 있다는 가족국가 이데올로기를 보급하였다. 이런 점에서 근대 초기에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창조는 메이지정부에게 있어 국가적 과제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이 시기에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인의 국민성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히 이루어졌다.
2. 국민성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국민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어를 공통어로 사용하고 일본이라고 하는 국가에 속하는 국민의 대부분에 공통되는 의식이나 행동 경향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같은 일본인이라고 해도 계급, 계층, 성별, 연령, 지역 등에 따라 그 특성이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요인에 의한 차이를 넘어 일본인 대부분에 공통되는 국민성, 그 민족 구성원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최빈적(最頻的)’ 퍼스낼리티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국민성 연구라고 할 수 있음. 전전에 일본문화론은 주로 국민성 연구, 서구와 비교한 일본 국민성의 특징에 대해 논의로서 전개되어 옴.
3. 일본인 열등설 일본의 지식인 중에서도 근대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람을 중심으로 일본인론이 제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창립한 지식인들. 메이로쿠샤는 1874년에 결성된 단체인데 『메이로쿠잡지(明六雑誌)』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음. 메이로쿠샤의 창립멤버는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쓰다 마미치(律田真道), 니시 아마네(西周),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미쓰쿠리 슈헤이(箕作秋坪),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스기 고지(杉亨二),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등 모두 10명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서양인과 비교해 일본인들이 봉건적인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일본이 근대화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봉건적인 의식을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 후쿠자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 젊었을 때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난학(蘭学)을 공부하였고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 1860년대에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세 차례에 걸쳐 막부사절단으로 서양을 방문하여 서구 근대문명에 접하게 됨. 유신 이후에는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교육과 언론에 의한 계몽활동에 전념하여 게이오의숙(慶応義塾)을 열어 인재양성에 힘쓰고 봉건의식의 타파에 힘씀. 자유민권운동에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1882년에 시사신보를 창간하여 관민협조를 주창하면서 국권신장을 강조하여 일본의 대륙진출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서양사정(西洋事情)』, 『학문의 권장(学問のすすめ)』,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概略)』 등이 있다. 후쿠자와의 봉건제도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1899년에 쓴 『福翁自伝』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봉건제도가 신분이 낮은 자에게는 얼마나 불평등한 것이었는가를 부친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봉건제도에 속박되어 아무 일도 안 하고 허망하게 불평을 삼키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탄식하고 “봉건적인 문벌 제도를 분통해 함과 동시에 죽은 부친의 일을 생각하며 혼자 울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문벌제도는 어버이의 적이올시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세상이 바뀌었지만 인민은 바뀌지 않았으며 백성은 막부의 전제에 억눌린 무기력한 존재로 인민의 기질, 국민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概略)』(1875)에서 일본의 국민성은 봉건적인 인간관계에 수반하는 권력에 대한 복종심을 갖고 있으며 이 권력에 의한 지배와 복종의 인간관계야말로 일본인의 서양인에 대한 열등감의 원천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국민의 기풍이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을 구별하는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치자(治者)는 상(上)이요 주(主)이며 안(内)이다, 피치자(被治者)는 아래(下)이며 객(客)이며 바깥(外)이다. 이처럼 상하, 주객, 내외의 구별은 일본인의 인간교제에서 가장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마치 우리 문명의 두 원소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인에게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의연히 봉건시대의 권력복종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자존의 마음이 없으면 일본국의 독립도 달성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육을 통해 국민성을 개조할 것을 주장.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1832-1891) 1866-68년에 막부로부터 영국 유학생의 관리자 역할로 선발되어 런던에 부임. 귀국 후 시즈오카학문소 교수가 됨. 1871년 스마일즈의 『자조론』을 『서국입지편(西国立志編)』으로 번역 출판. 1872년 밀의 『자유론』도 번역. 그는 일찍부터 기독교도가 되어 서양, 특히 기독교적 도덕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다. 1873년에 개인 학원(私塾) 同人社를 개설하였고 1881년 도쿄대학 교수가 됨. 후에 귀족원 의원이 되기도 함. 「인민의 성질을 개조하는 설(人民の性質を改造する説)」(『明六雑誌』 308호, 1875)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메이지유신은 정체(政体)의 일신을 가져왔을 뿐 인민의 일신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정체는 물을 넣는 용기와 같은 것으로 인민은 거기에 부어 넣는 물에 비유된다. 메이지유신 이후 용기로서의 정체는 확실히 옛날보다 좋은 형체가 되었지만, “인민은 역시 본래의 인민이요, 노예근성을 가진 인민이라 아래에 교만하고 위에 아첨하는 인민이며 무학문맹의 인민이며 주색을 즐기는 인민이며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 인민이며 천리를 모르고 직분을 돌아보지 않는 인민이며 지식천박, 국량 협소한 인민이며 노고를 싫어하고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민이로다”라고 통렬히 비판. 따라서 그는 예술과 종교를 통해 국민성의 개조를 주장.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메이지유신 이전에 네덜란드에 유학한 당시 대표적인 철학자, 사회과학자. 1862년 막부의 명령으로 쓰다 마미치와 함께 네덜란드에 유학하여 법률,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開成所 교수가 되고 에도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 장군의 정치고문으로 활약. 유신 후에는 육군, 문부, 내무성 등의 관료를 역임하며 군인칙유의 기초에 참여함. 귀족원 의원을 역임. 콩트나 밀의 영향을 받아 유럽 근대학문, 사상의 이식에 힘쓰고 『만국공법』을 번역하기도 함. 「서양(洋字)글자로서 국어를 쓰는 론(論)」에서 일본인이 모방에 뛰어난 것은 불변의 국민성이라고 지적. “국민의 성질을 묻는다면 답습에 능하고 모방에 교묘하며 스스로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무능하다”고 개탄. 이처럼 일본인이 모방에는 교묘하지만 창조성이 없다는 반성 하에 서양글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 한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인쇄가 편리해지고 번역어를 쓰지 않고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유럽의 앞선 문명이 그대로 우리 것이 되는 이익이 있다고 주장. 「정실설(情実説)」(明六雑誌 18호, 1874)에서 일본인의 인간관계의 특징으로서 정실, 즉 명분이나 친분이 빈번하게 이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외국인들에게는 비합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 인간관계에서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정실에 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민기풍론(国民気風論)」(明六雑誌 32호, 1875)에서는 “우리 일본국에 이르러서는 진무 창업 이래 황통이 면면히 이어져, 이에 2535년 동안 군상(君上)을 받들어 머리에 이고 스스로를 노예시함은 이를 중국과 비교해 보다도 더욱 심하다”라고 일본인의 천황숭배라는 국민성을 비판함. 이와 같이 국민의 기백이 비굴한 것은 역사상 정치의 연혁에 유래한다고 봄. 압제에 안주하여 스스로를 노예시하는 것을 일본인의 정치적 도덕적인 기풍이라고 봄. 일본인민의 성질은 충량이직(忠諒易直)하며 유신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국민성을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 “이 나라 국풍과 백성의 기운은 전제 정부 아래에서는 극히 최상으로 유례 없이 뛰어난 기풍이었지만 외국과의 교제가 시작되어 국내에서 속박의 그물이 완화되고 지력(智力)으로써 위력(威力)을 이기는 새로운 세상이 된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 기풍이 제일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1889) 사츠마번 출신의 관료, 정치가. 1865년 영국 유학생으로 선발된 이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외교관으로서 체재. 귀국 후에는 메이지 정부의 요인으로 청국공사, 영국공사, 문부성 장관 등을 역임. 1886년 문부성 장관으로 일련의 학교령을 공포하여 근대적인 학교제도를 정비하고 독일 교육사상을 섭취하여 국가주의적 교육을 제창하였다. 「영어국어화론(英語国語化論)」(1872)에서 한자에 의한 교육을 그만두고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일본어 폐지론을 대담하게 주장하였다. 일본인은 서양인에 비해 지적 수준이 낮은데 이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한자를 주로 하는 일본의 교육제도를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그는 미국의 언어학자 윌리엄 휘트니의 의견을 듣기도 하였는데 휘트니는 이에 대해 로마자를 채용하는 것에는 찬성했지만 일본어를 폐지하고 영어를 국어로 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73년에 쓴 『일본의 교육』이라는 책에서 일본어 폐지를 주장.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것이라 하여 여기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음.
*다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 실업가. 『일본인종 개량론(日本人種改良論)』(1884)이라는 책에서 인종 개량을 목적으로 체육을 권장, 의식주의 모양을 고치고 혈통 유전의 미를 살릴 것을 주장. 서양인과의 잡혼(雑婚)으로 인종 자체를 개량할 것을 제창. 그는 일본국민성의 단점으로서 너무 청담(清淡)하여 굳센 면이 부족하고 엉성함이 지나쳐서 치밀함과 내실이 부족하다고 지적. 열등인종이 우등인종과 잡혼하면 열등인종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입장에서 서양인은 신장, 체중, 두뇌 어느 것이나 일본인보다 뛰어나므로 국가와 개인을 위해 능력유전을 목적으로 시원시원하게 좋은 연분을 구해 잡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
4. 일본주의의 주창 한편 근대화를 통해 서양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지식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일본정부가 적극적으로 위로부터의 서양화, 서구화를 추진해감에 따라 여기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짐. 1880년대 후반이 되면 서구화를 주장하는 목소리(欧化主義)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일본 것을 주장하는 일본주의가 등장하게 됨. 한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국민에게 전승국의 긍지와 국민성이 우수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였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인 우수설도 등장. 이후 일본문화론은 서양화를 추구하는 구화주의와 일본 고유의 것을 추구하는 일본주의 간의 대립으로 전개됨.
*세이쿄샤(政教社)의 구화주의에 대한 비판 구화주의에 대해 비판은 1888년에 창립된 세이쿄샤가 중심이 됨. 세이쿄샤는 국수주의자들의 문화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대표적인 평론가였던 시가 시게다카(志賀重昂), 미야케 세츠레이(三宅雪嶺), 스기우라 주고(杉浦重剛),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그룹. 정부의 구화주의, 국내외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국수주의를 제창하여 잡지 『일본인』을 창간함. 여기에서는 지나친 서양 숭배를 비판하고 일본인의 주체적인 자각을 높일 것을 목표로 하는 국수주의를 제창하였다.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昂, 1863-1927) 지리학자이자 평론가. 『일본인(日本人)』 제2호에서 「일본인이 안고 있는 본뜻을 고백함(日本人が懐抱する処の旨義を告白す)」(1888)이라는 글에서 国粋(Nationality)라는 말로 국민성에 관해 논함. 그에 의하면 ‘국수’란 ‘야마토민족 사이에서 천고만고부터 유전해오고 화순(化醇)하여 와서 끝내는 당대에 이르기까지 보존된 것’으로 그 발육성장을 촉진하고 야마토 민족의 진화개량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 국수보존이야말로 야마토민족으로서 가장 중요한 국민적 과제라고 지적. 「앞으로 지향해야 할 일본의 국시는 국수보존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인』 4호, 1888)에서 국수보존주의는 서양의 개화를 받아들여도 그것을 일본적으로 동화하는 것이다라고 주장.
*대일본협회의 일본주의의 주창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국수주의로부터 시야를 넓혀 구화현상에 대한 비판, 저항으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 제창된 것이 일본주의. 이노우에 데츠지로(井上哲次郎), 다카야마 쵸규 등이 중심이 되어 일본주의를 제창. 1897년 『태양(太陽)』이라는 잡지에 다카야마가 「일본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해 여기에서 군민일체, 충군애국, 기독교 배척 등을 주창. 1897년 대일본협회를 설립하여 기관지 『일본주의』를 발간. 여기에서는 일본의 전통적 사상과 유럽의 근대철학을 절충하는 입장을 제시.
*하가 야이치(芳賀矢一) 서구 유학의 체험을 살려 문화적 관점에서 종래에 없던 상세한 국민성론을 전개. 『국민성 10론(国民性十論)』(1907, 富山房)에서 종합적인 일본인론을 발표. 그는 국어학, 국문학의 전문가로 러일전쟁의 승리, 영일동맹, 황인배척 등에서 일본인의 국제적인 지위가 문제되기 시작한 때에 종합적 일본인론을 발표. 일본 국민성의 특성으로 10개를 지적. 이 논의는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킴. ①충군애국. 일본국민의 황실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은 고금동서에 유례가 없는 것. ②조상을 숭상하고 家名을 중히 여긴다. ③일본인은 현실의 이익을 중시한다(현세적, 실제적). ④초목을 사랑하고 자연을 즐긴다. ⑤낙천적이고 시원스런 마음을 갖고 있다. ⑥담박하고 티없이 깨끗하다. ⑦섬세하고 고우며 꼼꼼하고 정교하다. ⑧청렴결백(清浄潔白)하다. ⑨경어의 발달에서 알 수 있듯이 예의범절을 중시한다. ⑩온화하고 관대하다. 일본인은 침략적이지 않고 다른 인종에게 관용적이다.
그 후 『일본인(日本人)』(文会堂, 1912)을 발표하고 한층 철저한 우수설을 제창. 이 책의 목차는 제1장 스메라미코토, 제2장 家, 제3장 무용(武勇), 제4장 수업(修業), 제5장 간이생활, 제6장 동정, 제7장 구제, 제8장 공익, 제9장 국가, 결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앞의 『국민성 10론』 보다 한층 더 황실 지향적이다. 그는 여기서 천황을 아키츠미카미(現神)로 삼는 일본의 국체를 국민성의 정치적인 토대로 보고 있다. 일본을 구성하는 기초단위인 이에(家)의 가장에 대한 효의 마음과 천황에 대한 충의 마음이 같은 것이라고 봄. 그 후 『전쟁과 국민성』(1916), 『일본정신』(1917) 등을 발표하여 국가주의의 방향으로 기울어짐.
*미야케 세츠레이(三宅雪嶺, 1860-1945) 서양사상에 정통한 철학자. 도쿄대학 철학과 졸업. 메이지정부의 전제적 경향과 구화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정교사 창립에 가담. 잡지 『일본인』을 발간하여 폭넓은 국수주의를 주창.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비평활동. 1943년 문화훈장을 수여. 『진선미 일본인(真善美日本人)』(1891, 政教社). 『위악추일본인(偽悪醜日本人)』(1891, 政教社)의 두 저서에서 본격적으로 일본인의 본질에 대해 논함. 『진선미 일본인』에서는 일본인이 그 특별한 능력을 신장하여 백인의 결함을 보충하고 진선미가 충만한 행복한 세계로 가기 위해서 자기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일본인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일본에도 서구에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문화가 있으며 일본인의 제1의 임무는 진(真)을 극하는 직분으로서 사적의 연구, 동양문화의 연구, 아시아 대륙에 학술 탐정대를 파견하여 생물학, 지질학, 인류학 등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 제2 임무는 선과 정의를 신장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부국강병을 통해 정의를 세계에 보급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지적. 제3의 임무는 일본적인 미를 세계에 소개하는 일인데 일본인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배양되었다고 봄. 『위악추 일본인』에서는 일본인의 지적 수준을 볼 때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지는 능력(理義究明)이 백인에게 뒤지지는 않으나 이것이 충분히 계발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 또한 일본인의 악으로서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와 결탁해서 사리사익을 탐하는 실업가들을 공격함. 이처럼 미야케의 일본주의는 단순한 일본 찬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자기비판이며, 단순한 서양모방에서 나아가 일본인이 갖고 있는 잠재력, 특질을 계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음.
이처럼 메이지 말기에 나타난 일본인론에는 풍토, 체질, 능력, 문예의 모든 면에서 일본인 자신의 과대평가가 두드러지고 일본인의 대국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 청일, 러일전쟁의 승리로 군사대국이 되었다는 기분으로 야마토다마시, 무사도, 일본정신 등을 강조하는 일본인론이 다수 등장함.
*대국민으로서의 반성을 촉구하는 논의 한편 메이지 말기에는 세계의 대국을 따라잡아 왔던 일본인이 대(大) 국민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해 반성을 촉구하는 소리가 대표적인 학자들로부터 터져 나오기도 함. 그것은 일본인의 자신과잉에 대해 점차 세계의 대국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촉구하는 반성이라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주장이 『태양』이나 『일본인』과 같은 잡지에 발표되기도 함.
*우키타 가즈타미(浮田和民) 태양의 주간이며 정치학자. 「국민의 품성(国民の品性)」(日本人 3차 140호)에서 국민의 품성은 자연적인 경우, 국제적인 경우, 역사적 유전으로 만들어지고 국민은 개인으로서의 정신과 국민으로서의 정신을 갖는다. 국민적 정신의 성장발달은 개인적 정신의 그것과 그 방법을 같이 한다. 일본은 구미의 품성을 관찰하여 거울이 되는 것을 발견해내야 한다. 예컨대 영국인의 장점은 만사에 경험을 중시하고 실행을 앞세우는 것에 있다. 프랑스인의 특별한 장점은 이상을 곧바로 실현하고 사실과 원리를 조화하는 것에 있다.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동양의 영국이라고 칭해야 하지만 국민 심리상으로는 프랑스인의 단점만 닮았고 큰 이상을 고양시키는 국민은 아니라고 지적. 「위대한 국민의 특성(偉大な国民の特性)」(太陽 8권 10호, 1902)에서 일본인은 활동진취의 기성과 함께 깊고 두터운 보수적 국민성을 갖고 있지만 자주독립의 정신과 조직적 일치의 능력이 부족한 점이 있고 민간인의 일치협동을 신뢰하기보다 정부의 보호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 「인종문제(人種問題)」(太陽, 14권 9호, 1908)에서 일본인에게는 약소자에 대한 국가의 의협심이 부족하고 또한 문명적으로 강한 국민다운 품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일본인을 싫어한다고 주장. 그러므로 그 배일사상을 근절하려면 대국민의 품성을 양성하고 약자에게는 동정을 기울이고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구는 것은 큰 수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
제4강 전전의 일본문화론(2)
*제3강 및 제4강의 논의에 대해서는 미나미 히로시(南博)의 『日本人論』(상)(소화출판사, 1999년 번역판)을 참조하기 바람.
■ 다이쇼기의 일본문화론
1. 시대적 배경과 논의의 특징 1912년 7월 30일 메이지천황의 사망으로 다이쇼시대가 됨.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승국의 하나가 된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는 크게 올라감. 한편 반체제운동에 의해 국민의 정치의식도 높아짐.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배경으로 보통선거법이 1925년 5월 5일에 공포되었지만 곧바로 5월 12일에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이 시행됨. 이러한 상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이 시기에는 국제적인 진출에 따르는 국제주의 입장에서 일본인론이 유행. 이 시기에는 국제사회에 등장한다는 희망과 기대가 다이쇼시대 일본인의 일부에서 생겨남. 이 시기 논의의 특징은 국제주의를 천명하고자 한 논의가 상당수 있다는 것. 일본의 국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대국인으로서 취해야 할 자세나 태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는 글들도 상당수 발표됨. 한편 서양문화 예찬론에 강하게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인 서양 비판론, 국수주의적인 일본인론도 등장. 또한 지금까지의 인상주의적인 일본인론에 대해 보다 전문적으로 문학이나 언어, 근대사상, 미학적 관점에서 일본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전개되기도 함.
2. 이 시기의 대표적 논의
*가야하라 가산(茅原華山) 저널리스트이며 평론가. 『地人論』(東亜堂書房, 1913)에서 지금까지의 국민성론이 자화자찬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맹목적 자부심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함.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실제의 역사는 아니고 신화의 유형이라고 지적.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많음을 가리켜 일본인은 사실보다 상상을 위주로 하는 인류라고 지적. 또한 일본인의 호전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있는데 일본은 보호무역, 전쟁, 외국 적시로 나아가고 편협한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므로 외교도 원만한 교제는 하지 않고 형편에 따라서 전쟁에 호소하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음. 가야하라는 일본인의 장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러시아에 이겼으므로 큰 소원성취이며 일본은 일등국이다, 국민성은 만국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스스로를 개조하고 국내 생활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생활도 크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 이러한 견해는 당시로서는 일본의 국제주의를 천명한 선구적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다 요시오(野田義夫)---- 교육학자. 『구미열강 국민성의 훈련(欧米列強国民性の訓練)』(同文舘, 1913)에서 야마토민족이 급격한 진보를 이룬 것은 우수한 국민성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일본인 우수설을 취하고 있음.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는데 어떤 강국에 대해서도 일본을 세계 최우수국이라고 자랑할 자신이 없으면서 일본 국내에서만 낙천관을 부르짖는 것은 비굴의 극치라고 지적. 그러나 저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국가주의로서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국민정신을 강조하고 있음. 그는 일본국민정신의 기초를 야마토다마시(大和魂)와 충군애국에 둠. 『일본국민성의 연구(日本国民性の研究)』(教育新潮研究会, 1914)에서 일본인의 국민성에 관한 종합적인 심리학적 연구서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종합적 일본인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노다에 의하면 국민성이란 국민, 민족을 구성하는 각 개인에게 공통되는 특성으로 국민정신 또는 국민심의(国民心意)라고 볼 수 있는데 그 기본구조는 근본적으로 변동하는 일은 없다. 노다는 일본인의 자화자찬을 경계하고 그 장점과 단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음. 국사는 국민성의 산 역사로서 대표적 위인은 연구의 중요한 재료이며 정치, 경제, 언어, 풍속, 습관, 도덕, 종교, 학문, 문학, 미술 등은 국민성의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함. 이러한 지적에서 국민성을 문화와 관련지어 문화라는 넓은 맥락 속에서 논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음. 그는 국민성 연구에는 각양각색의 각도에서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일본인 우수설이나 서양 숭배설의 양극단에 편파되지 않는 국민성론을 주장함. 그는 열 개의 장점과 이에 따르는 단점을 논하고 있는데, 일본국민성의 특징으로 ①충성심이 강하다, ②결백하다, ③무용심이 강하다, ④명예심이 강하다, ⑤현세적이다, ⑥쾌활담박하다, ⑦예민하다, ⑧우아한 미적 감각을 갖고 있다. ⑨남의 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동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 ⑩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은근함을 갖고 있다고 지적. 한편 장점이 지나치면 단점이 된다고 지적. 예를 들어 충성이 편협하게 되면 열광적 충군애국의 배외사상이 되며 무용이 지나치면 허세, 호전주의를 가져올 수 있으며, 현세주의는 천박한 실용주의를 가져올 수 있음을 지적함. 일본인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반성과 수양을 권장.
*문부성의 청소년의 국제주의의 권장 다이쇼 말기의 소학교 6학년 국어독본 제27과 「우리국민성의 장점과 단점(我が国民性の長所短所)」(『尋常小学国語読本 권12』, 1923)에서는 국민성을 반성하고 서양문명을 존중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무비(無比)의 국체를 가지고 3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펼쳐와 이제야 세계 5대국의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은 주로 우리 국민에게 그만큼 뛰어난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어버이를 진심을 다 바쳐 받들고 모시는 충효의 미풍이 세계에서 으뜸인 것은 이제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충효는 실로 우리 국민성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 이에 부수하여 많은 어진 성품과 미덕이 발달했다. …… 만세일계의 황실을 중심으로 단결한 국민은 그래서 점점 결속을 굳게 하고 열렬한 애국심을 양성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온화한 기후는 스스로 국민의 성질을 온건하게 하고 자연미를 애호하는 순한 성정을 육성하는 데에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정은 한편으로 국민의 단점도 되고 있다. 좁은 섬나라에서 자라고 생활이 안이한 낙토에서 평화를 즐기고 있던 우리 국민은 내향적 사고방식에 빠지기 쉽고 분투노력의 정신이 부족하고 무산안일(流惰安逸)에 흐르는 경향이 있다. …… 우리 국민의 장점, 단점을 헤아린다면 아직 이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 장점을 알고 이를 십분 발휘함과 동시에 또한 언제나 그 단점에 주의하고 이를 보완하여 대국민됨에 손색이 없도록 훌륭한 국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은 당시 일본정부가 갖고 있는 일본 국민성에 대한 시각을 잘 드러내는 것임. 국제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천황에 대한 충군애국을 일본국민에게 내재된 국민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자 함. 앞에서 살펴본 일본인론과도 상당히 유사한데 당시 지식인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었던 일본인의 국민성론이 교육현장에서도 그대로 재생산되고 국민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음. 이런 점에서 일본문화론, 국민성론은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음.
*오마치 게이게츠(大町桂月) 청일, 러일 전쟁에 이겨 세계 일등국의 국민이라고 우쭐대고 있는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미점, 약점, 장점, 단점 일본연구(美点弱点長所短所 日本研究)』(日本書院, 1916. 뒤에 『일본국민성의 해부(日本国民性의 解剖)』(1926)라고 개제)라고 하는 사회저명인사 35명이 쓴 76편의 논문을 모은 평론집을 냄. 여기에는 다양한 논의가 게재되어 있는데, ① 일본인의 독특한 행동양식이나 가치관, 사고방식을 논한 글(일본인의 사유방식, 일본민족성의 특징, 일본인의 희생적 정신, 무사도, 남의 욕을 하는 풍습, 자기비하의 악습 등에 대해 논한 글), ② 의식주에서 나타난 일본문화의 특징에 대해 논한 글(서양의 가옥과 일본의 가옥, 서양의 술과 구미의 술, 양복과 일본의 전통복, 일본우산과 양산 등에 대해 비교하여 논한 글), ③ 일본문화의 전체적인 특징 등에 대해 논한 글 등이 게재되어 있다. 점차 이 시기에 와서 다양한 각도에서 종합적으로 일본문화를 논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解放)』 특대호의 「일본국민성 연구(日本国民性の研究)」(1921년 4월) 해방은 당시 민주주의 운동의 리더였던 정치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등이 만든 여명회(黎明会)가 1919년에 창간한 잡지로서 자유주의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까지를 널리 모은 당시의 대표적인 진보적 잡지. 이 책의 서문에서 현대 일본인은 소극적이고 비사회적이라고 지적. 충군애국 사상에 압도되어 자유정신은 뿌리가 약하며 값싼 현실주의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해방운동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피지배자층의 일부에서는 강렬한 계급적 자각이 타오르고 있는데 이 잡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에서 혁명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서민들의 국민성이 어떠한가를 규명하고자 함. 이 시기에 국민성 논의가 상당히 유행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영향을 받아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국민성을 논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됨. 여기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일본인의 국민성을 논하고 있음. 여기에 실린 글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 서론---비판적 견지에서 본 우리 국민성, 상대(上代) 일본인으로부터 현대 일본인으로, 국민성 모색과 장래, 일본 국민성의 비관적 측면. 제2부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본 국민성---인류학상, 생물학상으로 본 일본 국민성, 일본의 국민성에 미치는 지리적 영향, 음식물과 국민성, 풍토로부터 본 일본 국민성. 제3부 민족심리로부터 본 국민성---신화, 전설, 동화에 나타난 국민성, 언어로부터 본 국민성, 무사도로부터 본 국민성, 풍속상, 민중의 오락생활에서 나타난 국민성. 제4부 사회제도로부터 본 국민성---법제사, 경제사, 가족제도, 매춘제도를 통해서 본 국민성. 제5부 철학 및 윤리를 통해 본 국민성---일본철학, 유교와 국민성, 노장사상과 국민성, 여자의 정조에 나타난 국민성. 제6부 신앙생활을 통해 본 국민성---신도, 불교, 기독교, 민간신앙에 나타난 국민성. 제7부 예술로부터 본 국민성---문학, 음악, 미술, 가부키극, 노가쿠, 교겐, 건축, 정원 등에 나타난 국민성 등등. 이들 논의 중에는 단순한 인상기에 지나지 않는 것도 많지만 다방면에서 다양한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전후 일본문화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5강 전후 개혁기의 일본문화론(1)
■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1. 이 책의 의의 전후에 전개된 일본문화론의 원형. 이 책에서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행동양식이나 가치관이 미국인의 그것과 비교할 때 독특하다, 유니크하다는 관점에서 끄집어내고 있는데 일본문화가 집단주의라는 것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 후 대부분의 일본문화론이 베네딕트가 이 책에서 제기한 집단주의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여기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든지 아니면 보다 집단주의라는 개념을 다듬고 정교화시키는 작업을 되풀이해옴. 이런 점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 이 책은 1946년에 원저가 영어로 출판되고, 1948년에 일본어로 번역판이 출판되었다. 베네딕트가 처음 이 연구에 착수할 때까지 그녀는 일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문화인류학자이었다. 일본에 체재한 경험도 없다. 그러한 그녀에게 1944년 6월에 일본에 대한 조사연구가 미국전시정보국으로부터 의뢰되었는데 이것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싸우게 된 전쟁상대국인 일본인이 어떠한 국민인가, 어떤 가치관과 행동규범을 가진 국민인가를 해명하기 위해 의뢰된 것이었다. 이 연구가 의뢰된 1944년 6월이라는 시기는 일본의 패배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미국은 전후처리를 위한 조치로서 이 연구를 의뢰했다.
3. 이 연구의 특징 베네딕트는 1887년에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나 1909년에 바사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19년에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하여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프란츠 보어즈 교수에게 지도를 받아 문화인류학을 연구하기 시작. 이 연구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구대상인 일본인과 일본사회를 직접적으로 관찰할 기회가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방문해서 현장조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사자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서 그 곳에서 현지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기록해나가는 것이 참여관찰인데 이것은 인류학의 가장 대표적인 조사방법이었음. 베네딕트의 경우는 이러한 현장조사(field work)를 단념해야 했음. 따라서 그녀는 이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이민자나 일본인 포로와 인터뷰를 하였고, 일본에 관한 방대한 문헌 등을 분석. 일본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의 체험을 담은 각종 기록들을 검토하였다. 그밖에 일본의 전설이나 영화, 신문기사, 라디오 방송, 소설, 군사정보국의 보고서나 기타 기록 등을 이용하였음. 이 연구에서 베네딕트는 일본문화를 이루고 있는 기본틀, 기본원형을 끄집어내고자 함. 그녀는 어떤 고립된 행동도 그대로 고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체계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일본인의 개별적인 행동이나 습관, 태도를 통해서 이러한 행동이나 태도의 배후에 있는 동기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묶을 수 있고, 또 이들 유형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종합적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음.
4. 주요내용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베네딕트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본문화의 기본 특징으로서 일본문화에는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각자의 생활을 규정하는 아주 잘 짜여진 엄격한 [계층제도]가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러한 잘 짜여진 계층제도 하에서 각 성원은 사회생활의 기본원리로서의 [집단주의]를 잘 준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일본문화는 수치의 문화라고 하는 점이다. 수치의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수치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말함. 수치스럽다, 창피하다든지 하는 감정은 주로 우리가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인데,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루는 근간이 바로 수치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봄.
(교재58-59페이지) 베네딕트는 ꡒ제각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위치를 차지한다ꡓ는 의식과 행위가 일본인의 사회관계의 기본이며, 이것은 일본인의 계층제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 상호간의 관계 및 인간과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일본인이 지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전제가 상하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대와 성별, 연령의 특권적 관계에 의한 가족 관계를 기저에 두는 사회․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들 관계 구조에서 상하관계는 중요한 책무를 위탁받은 인간으로 행동하는 윗사람과 그에 따르는 아랫사람과의 결합이고, 독재적인 권력자 대 종속자라는 형태는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상하관계가 일본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충, 효, 기리, 인, 인정, 온 등의 개념과 행위의 연쇄적인 결합에 의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는 계약과 규칙에 기인하는 교환보다는 온과 기리에 기인하는 덕의 원리에 따라서 유지된다. 온과 기리는 규범적인 의무감으로 결합된 반대 개념이어서 정신적인 대차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이 집단주의의 본질이고 집단을 구성하는 성원들간의 협조가 온과 기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대․연령․성별 등의 요인에 의한 상하관계로 유지된다.
*계층제도 일본인의 사회관계의 기본에 있는 것은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위치를 차지한다]라는 계층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관계나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각 개인의 관념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의 계층제도에 대한 신뢰야말로 인간상호간의 관계 및 인간과 국가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 전체의 기초를 이룬다]라고 봄. 여기서 말하는 계층제도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신분제나 계급 또는 계층과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서 개개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말한다.
가정에서의 계층제도---- 계층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가정. 가정은 어린이에게 예의범절을 가리키고 세심한 주의를 주는 곳이다. 가족내의 각자의 위치에 따라 웃어른으로서 아버지와 형을 존경하는 행위를 가르침. 즉 가정은 세대와 성에 따라, 장자냐 아니냐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정해지는 계층제도에 입각한 곳이다. 아버지는 그 집안의 가장으로서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있고 성장한 아들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생존해있다면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일일이 아버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아버지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식사 때 맨 먼저 수저를 들고 목욕할 때도 먼저 들어가며 가족들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받는다. 장남은 상속자이므로 아버지와 비슷한 특권을 누린다. 장남은 가업계승자로서 특권을 누림. 남자인가 여자인가에 따라 계층제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달라진다. 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사회적 지위도 남편보다 낮다. 딸들은 보살핌이나 교육 등에 있어 남자 우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세대와 성, 연령에서 오는 특권은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받은 인간으로서 행동한다. 무슨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 가문의 지체가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가장은 친족회의를 소집하여 그 문제를 토의한다. 공동체의 합의를 중시.
사회 및 국가에서의 계층제도---- 지금까지 지적한 계층질서는 주로 가족 내에서의 관계임. 그런데 일본인의 계층제도는 가족이라는 일차적인 집단, 혈연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넘어서도 철저하게 나타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전 기간에 걸쳐 현저한 세습적 계급신분사회였다. 이미 7세기에 고유의 계급질서를 만들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제도를 채택하여 국가시험에 급제한 행정관에게 관직을 부여. 반면 일본에는 과거제도라는 것이 없었고 관직이 세습됨. 일본은 또한 중국의 세속적 황제사상을 채용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역성혁명에 의해 빈번히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한번도 그런 일 없이 만세일계의 천황가가 그 혈통을 잇고 있다고 보고 있음. 물론 1192년에 가마쿠라에 막부가 통치하는 무사사회가 시작된 이래 천황은 사실상은 무력한 존재였고 쇼군을 의례적으로 임명하는 존재에 불과. 어떠한 정치적 권력을 갖지 않았지만 권위는 유지.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쇼군이었고 쇼군 밑에는 여러 개의 반(半)독립성을 가진 번의 번주(다이묘)가 지배. 이들은 쇼군의 말을 따르면서 각자가 독립적인 통치를 하였음. 다이묘 밑에는 사무라이 계급이 있어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칼을 휘두름. 사무라이 밑에 평민으로서 농민/공인/상인의 순으로 신분질서가 있었음. 이들 평민 밑에는 천민계급으로서 에타와 히닌이 있었다. 에도시대 도쿠카와 막부는 이러한 봉건적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정책을 폈다. 다이묘가 힘을 축적하지 못하고 연합하지 못하도록 번과 번의 접경지에서 여행허가증을 조사하고 총기밀수를 엄중히 감시. 결혼으로 정치적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쇼군의 허락없이는 약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다이묘가 일년중 반은 수도에 머물게 하고 돌아가면 처와 아들을 에도에 인질로 남겨두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봉건사회는 복잡한 층으로 나누어지고 각자의 신분은 세습적으로 정해짐. 각자의 신분에 맞는 일상생활을 하도록 엄격히 규제되어 있었다. 의복이나 음식, 주택도 그 사람의 세습적 신분에 따라 규정됨. 메이지시대에 와서 이러한 봉건시대의 계층제도는 바뀌어 사민평등정책이 행해지고 천민해방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특권계급은 여전히 존재하고, 가정 내에서의 기본적인 각자의 위치나 행동의 규정, 각자의 지역사회에서의 위치는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6강 전후 개혁기의 일본문화론(2)
■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1. 집단주의 문화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위치를 차지한다라는 일본인의 계층제도에 대한 신뢰는 개개인의 의지나 목표보다는 집단의 목표를 중시하는 집단주의 문화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계층질서라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집단 속에서의 위치, 집단 내의 서열구조 속에서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임. 따라서 계층제도에 대한 신뢰는 집단의 룰과 집단의 목표를 강조하는 집단주의 문화를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개개인의 이익을 우선하기보다는 집단의 이익, 집단의 화합을 중시하는 집단주의문화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주의문화를 밑으로부터 지탱해주는 행동규범이 바로 온과 기무, 기리로 구성되는 독특한 규범이다. 이러한 규범은 개개인의 사회관계를 강하게 규정하고 계층질서를 밑으로부터 지탱하고 있다.
*온(恩) 온은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이 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나타내는 말이다(obligation). 온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받은 고마움, 은혜와 같은 것임. 일본의 경우, 이러한 온을 채무로서 강하게 의식하고 있어서 그것이 인간관계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 한국이나 중국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온은 사람이 한 평생 짊어진 무거운 부담, 채무이다. 즉 단지 온을 받아서 기쁘다, 감사하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받은 온은 갚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일본인 특유의 가치관이 있다고 할 수 있음. 일본에서는 도덕의 기본은 조상과 동시대인이 함께 포함되는 상호채무의 거대한 망으로 짜여진 체계 속에서 자기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데 있다. 온의 가장 높은 단계는 천황의 온이다.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채무를 무한한 감사로 받아들임. 이 땅에서 태어나 이렇게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자기 신변의 모든 일이 잘되고 있는 것은 천황의 온에 의한 것임. 일본인들은 계층제도에 대한 깊은 신뢰는 천황에 대한 온을 의식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특히 근대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천황의 온을 드높임. 천황이 내린 교육칙어의 봉독이나 예배의식을 통해서, 군대를 통해서 진행됨. 두 번째는 부모의 온이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보살핌과 수고를 말하는데 여기에 대해 자식들은 노후에 부모를 보살핌으로써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우리는 살아가는 가운데 가족들로부터 이웃들로부터 여러 온을 입게 됨.
*기무(義務)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갚을 수 없고 또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의무(obligation). 충에 대한 의무가 있다. 일본에서는 절대적인 의무로서 충과 효를, 갚아야 하는 기무로서 강조. 일본은 충과 효를 무조건적으로 갚아야 하는 기무로 규정함으로써 중국의 국가에 대한 의무와 효행의 개념에서 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중국은 충효의 위에 서는 덕(상위규범)으로서 인을 요청한다. 따라서 지배자가 인을 갖추지 못하면 피지배자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인은 모든 관계의 시금석, 기반이 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중국의 인을 강조하는 도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천황제와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
*기리(義理) 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고, 또한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인데 주군, 근친, 타인에 대한 기리와 같은 것이 있다. 기리는 일본이 중국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의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리는 올바른 도리, 사람이 쫓아야만 될 길, 세상에 대한 변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는 일. 사람들 시선 때문에, 사람들 눈치보느라, 체면(世間体)을 세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성격이 강함. 현재에도 기리닌죠(義理人情)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에서와 같이 일본인의 의식과 행동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음. 이런 점에서 기리는 올바른 도리,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으로서 상당히 적극성은 결여한 것임. 내가 스스로 하고 싶지 않아도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해야 하는 것. 내면적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면적 강제력에 의한 것임. 남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하게 되고 집단에서 통용되는 룰을 굉장히 중시하는 그런 성격을 띠고 있음.
2. 수치의 문화 이런 점에서 온과 기무, 기리로 이루어지는 규범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 집단의 성원이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강하게 의식하는 수치의 문화로 이어지게 된다. 베네딕트는 문화를 크게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를 기조로 하는 문화로 나누고 있는데 일본은 바로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라고 보고 있다. 수치의 문화에 대해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의 제10장 덕의 딜레마의 끝부분에서 수치의 문화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문화의 인류학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와, 죄를 기조로 하는 문화를 구별하는 일이다. 도덕의 절대적 기준을 설명하고 양심의 계발을 의지로 삼는 사회는 죄의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중략)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인 죄의 자각에 의거하여 선행을 행하는데 비하여,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하여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은 남 앞에서 조소당하거나 거부당하거나, 혹은 조소당했다고 확실히 믿게 됨으로써 수치를 느낀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수치는 강력한 강제력이 된다. 그러나 다만, 수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자리에 타인이 같이 있거나, 혹은 적어도 함께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명예라는 것이 자신이 마음 속에 그린 이상적인 자아에 걸맞도록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나라에 있어서는, 사람은 자기의 비행을 아무도 모른다 해도 죄의식에 고민한다. 그리고 그의 죄악감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경감된다.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란 [외면적 강제력에 기반해 선행을 행한다]는 것, 즉 도덕의 절대적 기준이 수치의식에 있음을 의미. 예를 들어 이러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창피하다, 그런 생각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와 같이 항상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 사고나 행동의 기준이 됨.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길거리에 침을 뱉었을 때도 그것이 타인이 보면 창피한 행위가 되고 보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의식이 바로 수치의 문화에 해당되는 예이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집단을 의식한 수치심이 일본인의 행동원리가 되고 있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