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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寧德) 우바새 진실(陳實) 편집
장순용 번역
25) 반야품(般若品)[34칙. 아직 6도(度)가 끝나지 않았다.]
명명백백하게 5온(蘊)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요달하고 요달해서 일체의 고통을 능히 건넌다.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에서 말하였다.
“관자재(觀自在)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5온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을 건넜다. 사리자여,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도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空)한 모습은 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으며, 빛깔·소리·냄새·맛·촉감·법도 없으며, 안계(眼界)도 없고 나아가 의식계(意識界)도 없으며, 무명(無明)도 없고 또한 무명의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으며, 고(苦)·집(集)·멸(滅)·도(道)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니,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도 없어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멀리 여의어 구경(究竟)에는 열반에 든다. 3세(世)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提)를 얻었다. 그러므로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大神呪)요 대명주(大明呪)요 무상주(無上呪)요 무등등주(無等等呪)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니, 곧 주문을 설하기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 사바하'라고 하였다.”[형자함(荊字函) 『인왕경(仁王經)』 말미]
우리 부처님은 몸소 반야(般若)로부터 태어난 것인데
어느 누가 마야 부인의 아들이라 하는가?
『도신족경(道神足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월천자(月天子)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모태(母胎)이니,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곧 32상(相)과 10력(力)과 4무외(無畏) 등을 얻어서 모두 다 귀의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야 부인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로다.' ”[피자함(被字函) 제2권]
어찌하여 법신에 덕용(德用)이 없다고 말하는가?
마땅히 금은보화가 진흙에 싸인 것과 같다.
『대승법계론(大乘法界論)』에서 말하였다.
“중생의 법신은 이미 공덕과 상응하는데, 어째서 여래의 덕용(德用)이 없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연꽃이 아직 피지 않은 것과 같으니 온갖 악한 소견의 잎사귀가 빙 둘러싸기 때문이며, 또한 마치 금산(金山)과 같으니 분노의 진흙에 의해 싸여 있기 때문이며, 또한 마치 허공과 같으니 어리석음의 구름에 의해 가려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게송으로 설한다.
연꽃이나 금산 등이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부처의 체(體)에 객진(客塵)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도 그러하다.
이 때에 공덕은 스스로 이익되게 하지 못하니
이를 뒤집으면 능히 커다란 이익이 될 수 있다.”[임자함(臨字函) 제8권]
마음의 악한 티끌은 선으로 깨끗이 할 수 있다.
코끼리가 물을 흐려 놓아도 구슬로써 맑힐 수 있듯이.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만약 오직 마음만 있고 마음의 법은 없다면, 마땅히 더러움이 있고 청정함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비유하면 마치 청정한 연못의 물에 미친 코끼리가 들어가서 물을 혼탁하게 했을 때 물을 맑히는 구슬을 넣으면 물은 곧 맑아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 이외에 코끼리도 없고 구슬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번뇌가 들어가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혼탁하게 하는데, 온갖 자비 등의 선법(善法)이 마음에 들어가면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번뇌와 자비 등의 법이 곧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명자함(名字函) 제6권]
등불이 이미 비추니 어둠이 스러지고
지혜가 비로소 생기니 번뇌가 없어진다.
『정법경(正法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빈방에 문이나 창문이 없어서 백천 년이 지나도 사람이나 물건이 없다고 하자. 이 방은 어두컴컴했는데 홀연히 어떤 천인(天人)이 있어 그 방안에서 등불을 밝혔다. 가섭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와 같은 어둠이 내가 백천 년 동안 여기에 머물렀다. 나는 지금 떠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가섭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어둠은 무력해서 등불이 켜지면 결정코 사라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저 업과 번뇌도 또한 이와 같다. 백천 겁 동안 저 식(識) 속에 머물러 있더라도 저 수행하는 사람이 하루 밤낮 동안 정관(正觀)이 상응해서 저 지혜의 등불을 켠다면, 가섭이여, 이 같은 성자에게 지혜의 뿌리가 생긴다면 이 업과 번뇌도 결정코 있지 않은 것이다.' ”[경자함(卿字函) 제3권]
내가 생(生)을 끊으니 사(死)는 저절로 멸하고
사자가 사람을 쫓으니 흙덩이는 저절로 쉰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최승(最勝) 천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이 무생법(無生法)에서 생이 있음을 봅니까?'
부처님께서 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에는 소멸이 없으니, 이 때문에 생함도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품[性]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속을 말미암아서 생멸이 있음을 보지만 이는 모두가 허망해서 진실한 유(有)가 아니다. 만약 모든 보살이 깊은 반야를 행한다면 곧 여실하게 알 것이니,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온갖 행을 낳고, 행에 의거해서 식(識)이 생긴다. 자세히 설하면 나아가 유(有)로 말미암기 때문에 생(生)이 있고, 생이 있으면 곧 늙음이 있고, 늙음이 있으므로 죽음과 근심과 탄식과 고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는 무명을 끊어야 하고, 무명이 끊어지면 나머지 10지(支)도 잇달아서[展轉] 그에 따라 소멸한다. 마치 몸이 끊어지면 목숨도 그에 따라 소멸하는 것과 같다.
천왕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外道)는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단지 죽음을 끊으려 할 뿐이지 생(生)을 끊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 만약 법이 생하지 않는다면 곧 소멸도 없으니,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흙덩이를 사자에게 던지자 사자가 사람을 쫓으니 흙덩이가 저절로 쉬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니, 단지 그 생함을 끊기만 해도 죽음은 저절로 소멸한다. 개는 오직 흙덩이를 쫓을 뿐 사람을 쫓는 것은 알지 못하므로 끝내 쉬지를 못한다. 외도도 또한 마찬가지니, 생(生)을 끊을 줄 모르기에 끝내 죽음을 여의지 못한다. 보살이 깊은 반야를 행한다면, 인연과 모든 법의 생멸을 잘 알 것이다.”[과자함(菓字函) 제9권]
이 반야를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금은보배의 힘으로 얻는 것과는 같지 않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다만 바라밀의 상(相)을 요달한다면, 이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시방(十方)으로부터 구하더라도 주는 자가 없으며, 또한 금은보배의 힘으로 구해서 얻는 것과도 같지 않다.”[입자함(立字函) 제1권]
반야는 모습이 없어서 비록 구하기 어렵더라도
방편의 힘으로 마땅히 증명할 수 있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보리를 구함은 방편선교(方便善巧)라야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 보살이 반야를 닦을 때, 만약 법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면 마땅히 취할 수 있으나, 법의 자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 마땅히 어디에서 취할 것인가? 이른바 취하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색(色)이고, 이것이 바로 수(受) 등이고, 나아가 이것이 바로 성문이고, 이것이 바로 보살이고, 이것이 바로 여래이다.
사리자여, 보살이 반야를 수행하면 일체의 법성(法性)과 여래를 다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하게 요달해 안다. 이와 같이 취할 수 없는 바라밀다가 곧 장애가 없는 바라밀다이며, 이와 같이 장애가 없는 바라밀다가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모든 보살들은 마땅히 그 속에서 배워야 하고, 그 속에서 배울 때 오히려 배운다는 것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보리를 얻겠는가? 왜냐 하면 자성이 있는 작은 법도 없기 때문이니, 이처럼 자성이 없음이 자성법(自性法)인데 무엇이 이생법(異生法)이고, 나아가 무엇이 여래법(如來法)이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이미 얻을 수 없는데, 어떤 법에 의거해서 시설(施設)할 수 있겠는가?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더라도 보특가라는 이미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것은 이생법(異生法)이고, 나아가 여래법이라고 설할 수 있겠는가?'
사리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약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어서 마땅히 실유(實有)가 아니라면, 어떤 일에 의거해서 이것은 이생법이고, 나아가 여래법이란 걸 요달해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色)이나 수(受)가 실유(實有)한다고 할 때 이는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처럼 이생(異生)의 집착인가?'
사리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단지 전도(顚倒)됨으로 말미암아서 어리석은 범부가 이같이 집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이 반야의 방편선교(方便善巧)를 수행할 때는 비록 모든 법이 다 자성이 없어서 실유가 아님을 관하더라도 세속에 의거해서 보리를 발취(發趣)하니, 이는 온갖 유정(有情)을 위해서 갖가지로 널리 설하여 올바른 이해를 얻도록 해서 전도됨을 멀리 여의게 하려는 것이다.' ”[상자함(霜字函) 제1권]
“다시 선현(善現)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을 보살의 보리의 자량(資糧)이라 합니까? 요컨대 이 같은 자량을 갖추면 보리를 증득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일체의 선법(善法)은 모두 보리의 자량이니, 원만하게 수행함으로써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할 수 있다.' ”[제5권]
뗏목으로 인해 언덕에 도달하면 마땅히 뗏목은 버려야 한다.
법도 오히려 여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뗏목을 엮어서 강을 건너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이미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렀다면, 이 뗏목을 말미암아서 나의 액난(厄難)을 구제한 것이니, 진실로 두려움이 있는 땅으로부터 무위(無爲)의 처소에 이른 것이다. 내가 지금 이 뗏목의 용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따르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착한 법도 오히려 버릴 수 있어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여자함(如字函) 제8권]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자성은 본래 없는 것이어서
피차가 모두 공(空)한데 어떻게 얻고 버리겠는가?
『정법경(正法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등불이 능히 일체의 어둠을 깨뜨리는 것과 같으니, 저 어둠이 어디로 가겠는가? 동쪽으로 가거나 나아가 북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와도 오는 것이 아니다.
가섭이여, 다시 등불도 또한 그 자체[我]가 능히 어둠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니, 만약 어둠이 없다면 어떻게 등불이 드러나겠는가? 가섭이여, 등불과 어둠은 본래 자성이 없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해서 얻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가섭이여, 이런 까닭에 지혜도 또한 이와 같나니, 지혜가 만약 생긴다면 무지(無智)가 곧 사라지지만, 저 무지가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동쪽으로부터 북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니, 가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와도 오는 것이 아니다. 가섭이여, 다시 지혜가 만약 생긴다면 무지는 곧 사라지지만, 저 유지(有智)가 능히 무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니, 무지가 본래 없다면 유지가 어떻게 드러나겠는가? 가섭이여, 유지와 무지는 모두 자성이 없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하여 얻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경자함(卿字函) 제3권]
공(空)을 듣고서 문득 공무(空無)에 집착한다면
마치 소금이 너무 지나쳐서 소금의 좋은 점을 상하는 것과 같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공을 관하는 사람은 먼저 한량없는 보시와 지계(持戒)와 선정으로 그 마음이 유연하고 모든 번뇌[結使]가 희박해진 다음에야 진공(眞空)을 얻는다. 삿된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고, 단지 상념으로 분별해서 삿된 마음으로 공을 취한다. 비유하면 시골 사람이 처음엔 소금을 알지 못하다가 남이 갖가지 고기와 야채 속에 소금을 뿌려서 먹는 걸 보고 이렇게 말한 것과같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이 소금이 음식의 맛을 좋게 한다네.'
그러자 그는 문득 소금을 입 안 가득히 넣어 이를 먹었는데 너무나 짜서 입이 상했다.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소금이 맛을 좋게 한다고 말하는가?'
그가 어리석은 사람을 질책했다.
'이 소금은 반드시 양을 알맞게 조절해야만 맛을 낼 수 있네. 어찌 그냥 먹는 것을 말했겠는가?'
무지한 사람은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들으면, 공덕은 닦지 않고 다만 공을 얻으려고만 하니, 이는 삿된 견해로서 모든 선근(善根)을 끊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아비담(阿毘曇) 등의 3문(門)에 들어가면, 불법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알 것이다. 이 일을 능히 아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힘이니, 일체법에 대해 걸리는 바가 없다. 만약 반야바라밀의 법을 얻지 못하고 아비담문에 들어가면 유(有) 속에 떨어지고, 만약 공문(空門)에 들어가면 무(無) 속에 떨어지고, 만약 곤륵문(勒門)에 들어가면 유무(有無) 속에 떨어진다.
또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비록 모든 법이 하나의 상[一相]임을 알더라도 또한 능히 일체법의 갖가지 상(相)을 알 수 있고, 비록 모든 법의 갖가지 상(相)을 알더라도 능히 일체법이 하나의 상임을 알 수 있으니,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덕자함(德字函) 제8권]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법이 스스로 공한 것이지, 색(色)을 멸한 것이 아니다.
『보운경(寶雲經)』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야,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공은 스스로 공한 것이어서 전제(前際)·후제(後際)·중제(中際)도 역시 공하고, 다만 법은 스스로 공한 것이지 색(色)이 멸한 공이 아니니, 마땅히 공에 의거하고 사람에 의거하지 말라. 만약 공을 얻었는데도 공에 의거한다면, 부처님께선 이런 사람은 퇴보한다고 설하셨다. 선남자야, 차라리 아견(我見)을 일으켜서 수미산처럼 쌓을지언정 공견(空見)으로써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지 말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견(見)은 공으로써 해탈을 얻는데, 만약 공견(空見)을 일으킨다면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을 무서워해서 슬프게 호곡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이 허공을 물리쳐다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같은 허공을 없앨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공법(空法)을 두려워한다면, 나는 이 사람이 미쳐서 실성했다고 말하겠다. 왜냐 하면 항상 공 속에서 행하면서도 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목자함(木字函) 제7권]
불성(佛性)은 색(色)도 아니고 색을 여읜 것도 아니니
장님이 설명한 코끼리는 끝내 코끼리로 돌아간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일체 중생은 불성(佛性)에서 물러서지 않으니, 이를 결정적으로 얻었다고 한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왕이 한 대신에게 말했다.
'그대는 코끼리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장님들에게 보여라.'
그 때 저 장님들은 각기 손으로 코끼리를 만졌다.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코끼리가 어떤 종류인가?'
어금니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의 형상은 마치 무[蘆菔] 뿌리와 같습니다.'
귀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키[箕]와 같습니다.'
머리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돌과 같습니다.'
코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절구공이와 같습니다.'
다리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절구와 같습니다.'
등을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상(床)과 같습니다.'
배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항아리와 같습니다.'
꼬리를 만진 자가 말했다.
'코끼리는 마치 밧줄과 같습니다.'
선남자야, 가령 저 장님들은 코끼리의 몸체를 설명한 것도 아니고 설명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이 온갖 모습들이 다 코끼리는 아니지만, 이 모습들을 여의고서 따로 별개의 코끼리도 없다. 선남자야, 왕은 여래·정변지(正遍知)를 비유한 것이고, 신하는 이 경전을 비유한 것이고, 코끼리는 불성을 비유한 것이고, 장님은 일체의 무명 중생(無明衆生)을 비유한 것이다. 이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색(色)이 불성이다. 왜냐 하면 이 색은 비록 멸하더라도 차례로 상속하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여래의 32상(相)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래의 색(色)이 항상 여래의 색인 것은 늘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이와 같은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저 장님들이 각각 코끼리를 설명한 것이 비록 진실하지는 않더라도 코끼리를 설명하지 않음도 아닌 것과 같다. 불성을 설명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6법에 즉한 것도 아니고 6법을 여읜 것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중생에게 불성을 설명할 때 색(色)도 아니고 색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나아가 나도 아니고 나를 여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중생의 나라는 것은 바로 5음(陰)인데, 5음을 벗어나서 따로 나라는 것은 없다. 비유하면 벽과 나무가 합쳐져서 집이 되지만, 이런 것들을 여의고서 따로 집이 없는 것과 같다.”[솔자함(率字函) 제2권]
유아(有我)든 무아(無我)든 각기 한쪽 변두리이며
유(有)를 여의고 무(無)를 여읜 것을 중도(中道)라 한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단멸(斷滅)의 견해를 따르려는 것에 대해 나가 있어서 후세의 죄와 복을 받는다고 설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상견(常見)에 떨어지려고 하면 나도 없고 짓는 자도 받아들이는 자도 없다고 설하셨다. 이 5중(衆)의 가명(假名)을 여의면, 다시 한 법도 자재하는 것이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실(實)인가?
[답] 무아가 실(實)이다. 일체법은 무상(無常)하고, 일체법은 무아이며, 적멸이 안온한 열반이니, 이름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한다. 만약 사람의 선근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깊은 무아를 설하시지 않는다. 만약 그런 자에게 설한다면 곧 단멸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문] 가령 가섭의 질문 속에서 부처님께서는 아(我)도 한쪽 변(邊)이고 무아도 한쪽 변이니 이 두 가지 변을 여의는 것을 이름하여 중도(中道)라 설하셨다. 지금 어째서 내게 무아는 실(實)이라고 말하고 유아는 방편이 된다고 설하는가?
[답] 무아를 설한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무아상을 취하여 무아에 집착한 것이다. 둘째는 아(我)를 타파해서 취하지 않고 무아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버리고 여의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유아와 무아에는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세속으로써 설명했기 때문에 유아이고, 둘째는 제일의 실상(實相)으로써 설명했기 때문에 무아이다. 이 같은 등의 유아와 무아에 대한 설명은 잘못이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곳곳에서 모든 법의 유(有)를 설하셨고, 곳곳에서 모든 법의 무(無)를 설하셨다.”[건자함(建字函) 제6권]
모든 법이 필경에 공하다는 걸 통달한다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일체의 공을 관하면서 이 공의 모습[相]에 고착되지 않는다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 하면 만약 공해서 법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반야를 행하겠는가?'
'만약 이 공을 여의고서 다시 법이 있다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 하면 만약 일체법이 공하다면 모습도 없고 지음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공을 여의고서 다시 법이 있겠는가?'
수보리가 여쭈었다.
'공(空)도 반야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공을 여의는 것도 반야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 일체법이 다 반야에 섭수되어 있는 가운데서 지금 단지 반야를 묻는 것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니, 반드시 이법(異法)으로써 행해야 한다.'
다시 여쭈었다.
'반야를 여의고서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왜냐 하면 일체법이 반야에 섭수되어 있는 가운데서 다시 반야를 행하는 법은 없다.'
다시 여쭈었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도(無上道)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반문하셨다.
'그대는 지혜의 눈으로 결정코 하나의 법이 있어서 반야를 행한다고 보는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반야를 행하는 것이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그대는 반야를 행하는 처소를 보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보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반야 속에선 일체의 관(觀)이 소멸해서 상(常)이나 무상(無常)이나 생멸 등 한 법도 정해진 상(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인데, 어찌 이 반야를 적당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지혜의 눈으로써 법을 보지 못한다면, 이 보지 못하는 법은 유(有)라 하는가, 무(無)라 하는가?'
대답하였다.
'무(無)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선 지혜의 눈으로 관해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無)라 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이 무(無)라서 얻을 수 없다면, 이 법은 생(生)하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생하지 않습니다. 이 법은 본래 스스로 무(無)라서 필경은 공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이 법에 대해 통달하여 의심이 없다면, 믿음의 힘과 지혜의 힘 때문에 능히 이 법 속에서 머무니, 이를 무생인(無生忍)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표자함(表字函) 제7권]
색(色) 등은 둘도 없고 둘로 나뉨도 없으니
청정은 구별도 없고 단절도 없기 때문이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선현(善現)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의 청정이 곧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이고,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이 곧 색의 청정이다. 왜냐 하면 이 색의 청정과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은 둘이 아니고, 둘로 나뉨도 없고, 구별도 없고 단절도 없기 때문이다.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청정이 곧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이고,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이 곧 수·상·행·식의 청정이다. 왜냐 하면 이 수·상·행·식의 청정과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은 둘도 아니고, 둘로 나뉨도 없고, 구별도 없고, 단절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의 청정이 곧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이고,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이 곧 모든 부처님의 무상정등보리의 청정이다. 왜냐 하면 이 모든 부처님의 무상정등보리의 청정과 반야바라밀다의 청정은 둘도 아니고, 둘로 나뉨도 없고, 구별도 없고, 단절도 없기 때문이다.”[서자함(署字函) 제3권에서 시작해서 율자함(律字函) 제4권에서 마친다.]
[색(色)·수(受)로부터 보리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명상(名相)은 모두 80여 가지 과(科)이다. 이제 아래의 경문을 갖추어서 첨가할 수 있으니, 이 뜻을 차례대로 하나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미루어 본다면, 반야 한 부의 원융한 뜻을 갖출 것이다.]
경 가운데 명상(名相)을 뽑아서 모으고
그 언구 아래에서 바로 간략하게 분석한다.
『지요록(指要錄)』의 주석에서 반야의 명상(名相) 80여 과(科)를 뽑았는데, 아마도 열람하는 자의 지혜를 발해서 알도록 한 것이리라.
5온(蘊)은 색온(色蘊)[쌓임으로서 비어 있고 가짜이다], 수온(受蘊)[받아들여서 탐착의 자량이 된다], 상온(想蘊)[상(像)을 취해서 달려간다], 행온(行蘊)[미세함이 변천하면서 흐른다], 식온(識蘊)[타오르는 듯하면서 요별한다]이다.
6근(根)은 안근(眼根)[모습을 보고 기뻐하거나 노한다], 이근(耳根)[듣고 살피는 것이 상속한다], 비근(鼻根)[좋거나 싫은 냄새를 맡는다], 설근(舌根)[달고 쓴 것을 맛본다], 신근(身根)[껄끄럽거나 매끄러운 것을 탐내거나 싫어한다], 의근(意根)[항상 살피고 사량한다]이다.
6진(塵)은 색진(色塵)[형체가 드러나고 가로막음을 성질로 한다], 성진(聲塵)[도리어 듣는 것이 미혹을 이룬다], 향진(香塵)[향기나는 것과 냄새나는 것으로 앎을 미혹한다], 미진(味塵)[짠맛과 싱거운 맛으로 분풀이한다], 촉진(觸塵)[차고 더운 것이 수고롭다], 법진(法塵)[만 가지 상이 분분하다]이다.
6식(識)은 안식(眼識)[검고 누런 것이 참되지 못하다], 이식(耳識)[고락(苦樂)의 소리가 다르다], 비식(鼻識)[기운을 관하여 빛을 돌린다], 설식(舌識)[삿되고 바른 것을 분별해 설한다], 신식(身識)[기틀에 따라 몸짓울 나타난다], 의식(意識)[생각을 반연하여 공으로 돌아온다]이다.
6촉(觸)은 안촉(眼觸)[여의면 밝게 본다], 이촉(耳觸)[멀고 가까운 것이 전부 들린다], 비촉(鼻觸)[냄새를 맡으면 곧 안다], 설촉(舌觸)[맛과 닿으면 곧 지각한다], 신촉(身觸)[닿지 못하면 지각하지 못한다], 의촉(意觸)[온갖 모습과 은밀히계합한다]이다.
육연소생(六緣所生)은 안연소생수(眼緣所生受)[빛은 비춤의 경계가 아니다], 이연소생수(耳緣所生受)[소리를 수순하여 분별한다], 비연소생수(鼻緣所生受)[훈습으로 원돈(圓)을 닦는다], 설연소생수(舌緣所生受)[맵고 신 것이 어디에 의지하랴], 신연소생수(身緣所生受)[방일해도 잃는 것이 없다], 의연소생수(意緣所生受)[상념을 잊지 않는다]이다.
4연(緣)은 인연(因緣)[모든 법이 화합한다], 차제연(次第緣)[심법과 심수법(心數法)이다], 소연연(所緣緣)[법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 증상연(增上緣)[법은 얻을 수 없다]이다.
6대(大)는 지대(地大)[단단히 응결되고 가로막음을 성질로 한다], 수대(水大)[매끄러우면서 아래로 향하고 애착을 적신다], 화대(火大)[불꽃이 피어나듯 성냄을 일으킨다], 풍대(風大)[조급히 움직인다], 공대(空大)[끝과 겉을 보지 못한다], 식대(識大)[만법의 본원이다]이다.
12인연(因緣)은 무명(無明)[어두워 참 지혜를 가린다], 행(行)[흘러드는 것이 쉬지 않는다], 식(識)[망령되게 애염(愛染)을 일으킨다], 명색(名色)[형상을 관해서 실다움을 정한다], 6입(入)[근(根)과 진(塵)이 상대한다], 촉(觸)[점점 물들어 집착함을 낳는다], 수(受)[받아들이되 집착하지 않는다], 애(愛)[습기의 힘이 오염을 성취한다], 취(取)[대상을 집착하고 버리지 않는다], 유(有)[업의 인(因)이 성취된다], 생(生)[애욕이 유전한다], 노(老)[점점 변이(變異)를 깨닫는다], 병(病)[온갖 고통이 얽어맨다], 사(死)[버리고 떨어지면서 식(識)은 날아간다], 우(憂)[번민하고 슬픔에 빠진다], 비(悲)[울적하고 슬퍼서 운다], 고(苦)[나쁜 인연이 단박에 나타난다], 뇌(惱)[원수의 해침을 만나게 된다], 아자(我者)[나와 내 것을 일으킨다], 생자(生者)[부모에게 자식이 있는 것과 같다], 수자(壽者)[명근(命根)을 성취한다], 명자(命者)[능히 사(事)를 하기 때문이다], 유정자(有情者)[5온이 화합하여 생긴다], 양육자(養育者)[인연 때문에 자라난다], 중수자(衆數者)[모든 법에는 수(數)가 있다], 작자(作者)[손발의 능소(能所)이다], 사작자(使作者)[힘으로 능히 남을 사역한다], 기자(起者)[지은 뒤 세간의 업이다], 사기자(使起者)[또한 남으로 하여금 짓게 한다], 수자(受者)[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가 나타난다], 사수자(使受者)[고통을 싫어하고 쾌락을 싫어한다], 견자(見者)[눈으로 색상(色像)을 본다], 지자(知者)[5식이 명칭을 아는 것이다]이다.
6도(度)는 보시(布施)[자기 것을 희사하여 남에게 혜택을 준다], 정계(淨戒)[세 가지 업에 오염이 없다], 안인(安忍)[비난과 칭찬에 의연하다], 정진(精進)[용맹하여 나약함이 없다], 정려(靜慮)[모든 반연을 미묘하게 끊는다], 반야(般若)[지혜가 원만히 사무친다]이다.
20공(空)은 내공(內空)[6근(根)에 실체가 없다], 외공(外空)[6진(塵)에 모습이 없다], 내외공(內外空)[6식(識)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空空)[병이 나으면 약도 없앤다], 대공(大空)[소승법은 없다], 소공(小空)[네 가지 과의 모습이 없다], 승의공(勝義空)[공용(功用)이 거짓으로 나타난다], 유위공(有爲空)[생하고 소멸하는 모습이 없다], 무위공(無爲空)[모습 없음도 또한 없다], 필경공(畢竟空)[모든 법의 모습이 다한다], 무제공(無際空)[시작과 마침을 보지 않는다], 산공(散空)[화합하는 모습을 여읜다], 무변이공(無變異空)[여여한 지혜의 공적함], 본성공(本性空)[법은 본래 항상 무이다], 자상공(自相空)[없어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공상공(共相空)[자기와 남의 모습이 다한다], 일체법공(一切法空)[모두 얻을 수 없다], 불가득공(不可得空)[가(可) 역시 불가(不可)이다], 무성공(無性空)[연(緣)을 빌리면 곧 무이다], 자성공(自性空)[체(體)의 본원은 비어 있다], 무성자성공(無性自性空)[모두 무인 것도 무이다]이다.
4제(諦)는 고성제(苦聖諦)[세간의 과(果)의 모습이다], 집성제(集聖諦)[세간의 인(因)의 모습이다], 멸성제(滅聖諦)[출세간의 과의 모습이다], 도성제(道聖諦)[출세간의 인의 모습이다]이다.
진여(眞如)[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에 따르는 것이 있다], 법계(法界)[이(理)와 사(事)가 원융하다], 법성(法性)[항상 스스로 적멸하다], 불허망성(不虛妄性)[본래가 진실이다], 불변이성(不變異性)[지금이나 옛날이나 항상 그러하다], 평등성(平等性)[범부와 성인이 일치한다], 이생성(離生性)[적멸해서 형상이 없다], 법정(法定)[모든 경계가 항상 여여하다], 법주(法住)[각각 스스로의 지위에 안주한다], 실제(實際)[한 티끌도 세우지 않는다], 허공계(虛空界)[변두리가 없다], 부사의계(不思議界)[마음과 말길이 끊어졌다]이다.
4정려(靜慮)는 초선(初禪)[심(尋)도 있고 사(伺)도 있다], 2선(禪)[심(尋)은 없고 오직 사(伺)만 있다], 3선(禪)[심(尋)도 없고 사(伺)도 없다], 4선(禪)[염(念)을 버려서 청정하다]이다.
4무량(無量)은 자무량(慈無量)[사랑의 정(定)이 광대하다], 비무량(悲無量)[연민의 정(定)이 허공과 같다], 희무량(喜無量)[기쁨의 정(定)이 두루한다], 사무량(捨無量)[희사의 정(定)이 두루한다]이다.
4무색(無色)은 공무변처(空無邊處)[공의 정(定)이 공을 나타낸다], 식무변처(識無邊處)[식의 정이 식을 나타낸다], 무소유처(無所有處)[정이 없는 것이 정이다], 비비상처(非非相處)[상념도 상념 아닌 것도 없는 정이다]이다.
8해탈(解脫)이란, 안에서 색(色)이 있는 걸 관하고 밖에서도 색을 관하는 해탈[안을 보고서 밖을 본다], 안에서는 색이 없는 걸 관하지만 밖에서는 색을 관하는 해탈[밖을 보고 안을 본다], 안팎의 모든 색의 해탈[있든 없든 모두 청정하다], 공무변처해탈[색을 인연해도 공과 동일하다], 식무변처해탈[3세(世)의 식이 공하다], 무소유처해탈[무색(無色)의 반연도 없다], 비비상처해탈[상(相)을 끊고 묘(妙)를 성취한다], 멸수상정해탈(滅受想定解脫)[심수법(心數法)이 다한다]이다.
8승처(勝處)는 1승처[청정한 모습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2승처[색의 경계가 뛰어나게 수승하다], 3승처[안팎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4승처[진공(眞空)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5승처[오묘한 식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6승처[공무(空無)가 뛰어나게 수승하다], 7승처[비상(非想)이 뛰어나게 수승하다], 8승처[상정(想定)이 뛰어나게 수승하다]이다.
구차제정(九次第定)은 1차제정[초선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2차제정[2선의 묘한 생(生)이다], 3차제정[3선의 오묘한 즐거움이다], 4차제정[4선의 정진(淨盡)이다], 5차제정[공이 능히 널리 들어간다], 6차제정[식이 능히 명료하다], 7차제정[무유(無有)가 곧 유이다], 8차제정[상념 없음이 곧 상념이다], 9차제정[마음이 멸해도 멸함이 없다]이다.
10변처(十遍處)는 1변처[지대(地大)가 두루 돈다], 2변처[수대(水大)가 두루 돈다], 3변처[화대(火大)가 두루 돈다], 4변처[풍대(風大)가 두루 돈다], 5변처[공대(空大)가 두루 돈다], 6변처[청색이 공(空)에 가득하다], 7변처[황색이 공에 가득하다], 8변처[적색이 공에 가득하다], 9변처[백색이 공에 가득하다], 10변처[흑색이 공에 가득하다]이다.
4념처(念處)는 몸이 청정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오염의 반연이 있기 때문이다], 수(受)가 고통임을 관하는 것[취하는 것에 집착하면 속박을 더한다], 마음이 무상임을 관하는 것[생각생각마다 흘러가면서 소멸한다], 법이 무아임을 관하는 것[정해진 모습이 있지 않다]이다.
4정근(正勤)은 정진근(精進根)[신령스런 싹이 더욱 무성하다], 정진각(精進覺)[마음 마음마다 경책한다], 정진력(精進力)[털끝만치도 굽히지 않는다], 정정진(正精進)[삿됨을 따르지 않는다]이다.
4신족(神足)은 정근(定根)[깊고 단단하고 유원(幽遠)하다], 정각(定覺)[적멸하되 항상 비춘다], 정력(定力)[마(魔)가 능히 흔들 수 없다], 정정(正定)[부처님의 삼매에 들어간다]이다.
5근(根)은 신근(信根)[능히 법해(法海)에 들어간다], 염근(念根)[머물고 지녀서 잊지 않는다], 정진근(精進根)[언제나 생각한다], 정근(定根)[맑고 고요하여 허통(虛通)한다], 혜근(慧根)[진제를 명백히 변별한다]이다.
5력(力)은 신력(信力)[일념이 만 년을 간다], 염력(念力)[한 점도 없이 완전히 맑다], 정진력(精進力)[진겁(塵劫)이 지나도록 게으르지 않는다], 혜력(慧力)[삿됨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드러낸다], 정력(定力)[수미산처럼 높고 튼튼하다]이다.
7각지(覺支)는 염각(念覺)[신령스런 마음이 어둡지 않다], 택법각(擇法覺)[미세함이 명료하다], 정진각(精進覺)[깨닫고 나서도 깨달음을 구한다], 희각(喜覺)[법의 즐거움이고 선의 희열이다], 의각(猗覺)[깨친 바가 없는 깨침이다], 정각(定覺)[밝디 밝고 또렷하고 또렷하다], 사각(捨覺)[깨침과 깨친 바를 여의는 것이다]이다.
8성도지(聖道支)는 정어(正語)[마음과 입이 상응한다], 정업(正業)[불사(佛事)가 아닌 것이 없다], 정명(正命)[결사(結使)를 이미 없앴다], 정사유(正思惟)[망상을 끊었기 때문이다], 정방편(正方便)[무위에 떨어지지 않는다], 정념(正念)[마음에 다른 반연이 없다], 정정(正定)[모든 신족(神足)을 초월한다], 정견(正見)[업보를 믿기 때문이다]이다.
3해탈문(解脫門)은 공해탈문(空解脫門)[공은 공을 보지 못한다],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모습은 모습을 보지 못한다],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원하는것은 곧 원함이 없는 것이다]이다.
보살의 10지(地)는 환희지(歡喜地)[성스러운 지위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이구지(離垢地)[몸과 마음이 청정하다], 발광지(發光地)[지혜가 이미 밝음을 낳는다], 염혜지(焰慧地)[미묘한 깨달음이 확연히 비춘다], 현전지(現前地)[진(眞)과 속(俗)을 통달한다], 난승지(難勝地)[공행(功行)이 초월한다], 원행지(遠行地)[방소에 따라서 감응해 교화한다], 부동지(不動地)[인지(忍智)가 저절로 여여하다], 선혜지(善慧地)[신통의 힘이 자재롭다], 법운지(法雲地)[대지혜가 원만히 밝다]이다.
5안(眼)은 육안(肉眼)[안은 보아도 밖은 어둡다], 천안(天眼)[안팎이 모두 밝다], 혜안(慧眼)[온갖 모습을 비추어 요달한다], 법안(法眼)[기틀을 관해서 가르침을 시설한다], 불안(佛眼)[널리 법계를 관한다]이다.
6통(洞)은 천안통(天眼洞)[대천(大千)세계를 사무쳐 본다], 천이통(天耳洞)[시방을 확연히 듣는다], 타심통(他心洞)[종류를 다 안다], 숙명통(宿命洞)[3세의 일을 요달한다], 신경통(神境洞)[형상에 장애가 없다], 여의통(如意洞)[임운(任運)하여 자재롭다]이다.
10력(力)은, 첫째는 처소든 처소가 아니든 여실한 힘이고[선행과 악행], 둘째는 3세의 업보를 아는 힘이고[과보가 분명하다], 셋째는 모든 선(禪)의 해탈 삼매를 아는 힘이고[명료한 정정(正定)이다], 넷째는 중생의 온갖 근기의 위와 아래를 아는 힘이고[계(界)의 성품을 요달해 안다], 다섯째는 중생의 갖가지 욕망의 힘을 아는 것이고[근(根)의 즐기는 바를 아는 것이다], 여섯째는 세간의 갖가지 성품의 힘을 아는 것이고[정(定)과 부정(不定)의 성품이다], 일곱째는 일체 도의 지극한 힘을 아는 것이고[모든 선정의 경계이다], 여덟째는 숙명지의 힘을 얻는 것이고[옛날이 곧 지금이다], 아홉째는 천안(天眼)을 얻어서 일체를 관하는 힘이고[한 조각도 보지 않는다], 열째는 누진지(漏盡智)를 얻는 힘이다[장작이 다하면 불도 꺼진다]
4무외(無畏)는 법무소외(法無所畏)[사자후(師子吼)를 짓는다], 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어느 곳에 굽어 휘어짐이 있는가?],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삿된 미혹을 능히 타파한다], 설도무소외(說道無所畏)[결정이 이와 같다]이다.
4무애해(無碍解)는 사무애(詞無碍)[구해(口海)의 물결이다], 변무애(辯無碍)[마땅히 이러한 설을 짓는다], 법무애(法無碍)[뜻을 요달치 못함이 없다], 의무애(義無碍)[법이 통하지 않음이 없다]이다.
4섭법(攝法)은 대자(大慈)[널리 사물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대비(大悲)[널리 고통을 뿌리뽑기 때문이다], 대희(大喜)[널리 함께 즐기기 때문이다], 대사(大捨)[널리 베풀기 때문이다]이다.
18불공법(不共法)은, 첫째는 몸에 잘못이 없는 것이고[행이 모범되지 않음이 없다], 둘째는 입에 잘못이 없는 것이고[말이 법 아님이 없다], 셋째는 뜻에 잘못이 없는 것이고[염(念)이 바르지 않음이 없다], 넷째는 다른 상념이 없는 것이고[올바로 믿어서 조화롭고 정직한 것이다], 다섯째는 정심(定心) 아님이 없는 것이고[움직이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여섯째는 이미 버린 것을 알지 못함이 없고[선과 악의 모든 법이다], 일곱째는 욕구가 감소함이 없는 것이고[작은 선(善)이라도 싫어하지 않는다], 여덟째는 정진이 감소함이 없는 것이고[움직이고 고요함이 무상하다], 아홉째는 염(念)이 감소함이 없는 것이고[균등한 마음이 맑고 담연하다], 열째는 슬기가 감소함이 없는 것이고[고르고 실다우며 명료하다], 열한째는 해탈이 감소함이 없는 것이고[속박과 해탈이 둘이 아니다], 열두째는 지견(知見)이 감소함이 없는 것이고[두루 알고 두루 본다], 열셋째는 신업(身業)[지혜를 따라서 행한다]이고, 열넷째는 구업(口業)[지혜를 따라서 행한다]이고, 열다섯째는 의업(意業)[지혜를 따라서 행한다]이고, 열여섯째는 과거를 요달치 못함이 없는 것이고[닦은 바이고 행하는 바이다], 열일곱째는 미래를 알지 못함이 없는 것이고[수기하는 바이고 보응하는 바이다], 열여덟째는 현재를 보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수(受)를 나타내고 과(果)를 나타낸다].
잊어버림이 없는 법이고[무루(無漏)의 성품을 증득한다], 항상 버림의 성품에 머무는 것이고[비고 고요하며 담적하다], 일체지(一切智)[요달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이고, 도상지(道相智)[요달할 것이 없는 걸 요달한다]이고, 일체상지(一切相智)[요달하고 요달해도 요달함은 없다]이고, 일체다라니문(一切陀羅尼門)[총지(總持)의 묘한 성품이다]이고, 일체삼마지문(一切三摩地門)[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수(受)이다]이다.
4과(果)는 예류과(預流果)[수다원이다], 일래과(一來果)[사다함(斯陀含)이다], 불래과(不來果)[아나함(阿那含)이다], 무생과(無生果)[아라한(阿羅漢)이다]이다.
독각보리(獨覺菩提)[스스로 근본지를 깨닫는다], 일체보살마하살행(一切菩薩摩訶薩行)[자기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한다], 모든 부처님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인과가 원만하다]이다.”[계자함(溪字函) 제2권]
색을 파괴한 무상(無常)은 상사(相似)의 설이요
색이 본래 공[本空]함을 요달함은 여실한 말씀이다.
『출생삼법장반야경(出生三法藏般若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미래 세상에서는 반드시 상사(相似)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설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제석천이 여쭈었다.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제석천에게 말씀하셨다.
'미래 세상에서 모든 필추(苾芻)들은 이렇게 설할 것이다.
'색(色)은 무상(無常)하니, 몸이든 마음이든 계(戒)·정(定)·혜(慧)이든 다 있는 바가 없고 모든 관하는 바를 여읜다.'
이렇게 말하는 자는 상사(相似)의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색을 파괴하므로 색의 무상함을 관하고, 수(受)·상(想)·행(行)·식(識)을 파괴하기 때문에 수·상·행·식의 무상함을 관한다.'
만약 이렇게 구해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모두 그 이름이 상사 반야바라밀다가 된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제석천이여, 그대는 이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색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색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니, 수·상·행·식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수·상·행·식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이니, 이렇게 설하는 것이 바로 여실하게 반야바라밀다를 선설(宣說)하는 것이다. 만약 남을 위해 이 뜻을 설할 수 있다면 많은 복을얻게 된다.' ”[택자함(宅字函) 제5권]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불도(佛道)를 구하는 자는 상사(相似) 반야를 설하지 않는 것인가? 선남자야, 그대들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 색(色)이 무상(無常)하다고 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색을 색이게 하는 성품은 공(空)하기 때문이다. 이 색의 성품은 법이 아니니, 만약 법이 아니라면 곧 그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 속에서 색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니니, 왜냐 하면 이 가운데서 색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상(常)과 무상(無常)이겠는가? 이렇게 설하는 것을 이름하여 상사 반야를 설하지 않는다고 하니, 수·상·행·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시 다음에 상사 반야를 설하는 자는 명자(名字)와 언어는 같아도 마음의 뜻은 다르다. 가령 마음을 집착하고 모습을 취한다면, 5중(衆) 등의 무상을 설하고, 나아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데까지 이르러도 이는 상사 반야이다. 만약 마음을 집착하지 않고 모습도 취하지 않는다면, 5중(衆)의 무상을 설하지 않고 다만 상(常)의 전도됨만 타파하기 때문에 무상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는 진실한 반야바라밀다이다.”[형자함(形字函) 제10권]
가령 반야를 버리고 다른 경전으로 나아간다면
마치 근본을 버리고 지엽(枝葉)을 찾는 것과 같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반야 경전을 버리고서 다른 경전을 구해서 배운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은 보살의 마사(魔事)가 된다. 왜냐 하면 일체지지(一切智智)의 근본인 깊고 깊은 반야를 버리고서 지엽인 다른 온갖 경전을 찾는다면, 끝내 부처의 보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다른 경전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가령 2승(乘)에 상응하는 법을 설하는 것이니, 이른바 4념주(念住)와 나아가 8성도지(聖道支), 3해탈문(解脫門), 4제(諦)의 지혜 등이다. 이 속에서 배우고 수행하면, 단지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과와 독각(獨覺)의 보리를 얻을 뿐이지,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는 얻지 못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다른 경전은 지엽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 능히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인발(引發)하질 못하며, 깊고 깊은 반야는 능히 일체지지를 인발해서 대세(大勢)의 공용이 있으니 마치 나무 뿌리와 같은 것이다.”[거자함(巨字函) 제9권]
하나인 반야의 힘으로 보호받지 못하면
다섯 바라밀도 마(魔)의 침범을 받는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가령 어떤 여인이 단정하고 큰 부자인데, 만약 강한 남편에게서 보호받지 못한다면 악인의 능멸을 받기 쉽다. 보시 등 다섯 바라밀다도 이와 마찬가지니, 만약 반야의 힘으로 수호받지 못한다면 마(魔)에게 파괴되기 쉽다.”[출자함(出字函) 제10권]
보시 등은 장님이라서 앞서 이끌지 못하고
반야는 눈이 되어서 그것들을 인도한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마치 백천 명의 장님을 청정한 눈이 없는 자가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정도(正道)에 가까이 갈 수 없거늘, 하물며 능히 풍요롭고 즐거운 대성(大城)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보시 등의 장님들을 만약 반야의 청정한 눈이 없는 자가 인도한다면 오히려 보살의 정도(正道)에 들어갈 수 없거늘, 하물며 일체지(一切智)의 성(城)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반야를 말미암아 바야흐로 피안(彼岸)에 도달한다.”[내자함(來字函) 제2권]
반야를 닦을 때 왜 나태하고 왜 부지런한가?
인지(因地)를 말미암아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한다.
“다시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은 반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낳고, 쓰고 베끼고 받아 지니고, 사유하고 닦아 익힙니다. 이 보살은 어느 곳에서 죽었다가 이 세간에 와서 태어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이 이 반야를 듣고서 겁내지도 않고 미혹되지도 않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구경에는 이익을 통달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전생에 반야를 듣기 즐겨하고, 반야를 들은 후에는 받아 지니고 정근하고 닦아 익혔으니, 이 선근을 말미암아서 인간 세상[人趣]에서 죽었다가도 다시 인간 가운데 태어난다.'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이 이와 같은 수승한 공덕을 성취해서 타방(他方)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섬겼다면, 저곳에서 죽어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 반야를 듣고는 다시 읽고 익히는 데 게으름이 없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게으름이 없다. 왜냐 하면 전생에 타방의 부처님 처소에서 이 반야를 듣고서 이와 같은 선근의 힘을 탔기 때문이다. 다시 어떤 보살이 비록 전생에 반야를 들었고 또한 일찍이 깊은 뜻을 청하여 물었지만 능히 1일, 3일, 4일, 5일 동안을 지나면서 수행에 수순(隨順)하지 못했다가, 금생의 인간 세계에서 반야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는 설사 1일 내지 5일 동안 지난다면 그 마음이 견고해서 능히 파괴할 수 없다. 만약 듣는 것을 여읜다면 곧 물러나 상실한다. 왜냐 하면 전생에서 비록 듣고 물었더라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생에서는 어떤 때는 견고하고 어떤 때는 물러나 상실한다. 다시 어떤 보살이 비록 전생에서 6바라밀을 들었더라도 깊은 뜻을 청하여 묻지 않았다면, 금생의 인간 속에서는 이 깊은 반야에 대한 설명을 들어도 그 마음이 미혹되고 망설이고 겁내서 다른 이해를 내기도 한다.”[양자함(陽字函) 제1권]
반야를 지닌 자는 수승한 과보를 얻고
반야를 비방하는 자는 죄에 더욱 깊이 떨어진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만약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억념(憶念)하여 살바야(薩婆若:일체지)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면, 독약이든 불구덩이든 깊은 물이든 칼로 죽이고자 하더라도, 이와 같은 온갖 악이 다 해칠 수 없으니, 반야의 힘 때문에 이러한 수승함이 있는 것이다.
[문] 현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군대의 진영에 들어가서 병기의 해침을 받을 때 그 뜻이 어떠합니까?
[답] 두 종류 업의 인연이 있다. 첫째는 반드시 과보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반드시 과보를 받지는 않는 것이다.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대역(大逆)의 무거운 죄를 범해서 반드시 죽어야 할 사람은 비록 강력한 재물과 보배가 있더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반드시 과보를 받지는 않는다는 것은 가령 사람의 죄가 비록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도 이치로는 아직 구제할 만하면 세력과 재물을 써서 문득 목숨을 구제할 수 있는데, 구하지 못하면 죽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이처럼 반드시 과보를 받지는 않는다면, 죄가 비록 죽는 일에 이르더라도 반야를 읽고 외우면 제도를 받을 것이고, 만약 읽고 외우지 않는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반야에 힘과 세력이 있다 없다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문] 앞에서 설하신 그 일은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가운데 능히 읽고 외우질 못하고, 단지 쓰고 베끼고 공양만 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공덕을 얻겠습니까?
[답] 이 사람이 얻은 공덕도 앞서와 똑같다. 왜냐 하면 이 사람은 먼저 스승께서 반야의 뜻을 설하는 걸 듣고서 깊이 사랑하고 즐기지만, 문자를 알지 못해서 스승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히 읽고 외우질 못하지만, 재보를 아끼지 않고서 사람을 고용하여 쓰고 베끼도록 한 뒤 마음을 다하여 갖가지 공양을 한다면, 외우는 자와 똑같이 공덕을 얻는다.”[형자함(形字函) 제7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사람이 반야 경전을 쓰고 베끼고, 갖가지로 장엄하고, 청정한 곳에 두고서 공경하고 공양한다면, 시방(十方)의 천룡(天龍)이 항상 와서 옹호하고, 인비인(人非人) 등의 해침을 받지 않는다. 오직 숙세(宿世)에 정해진 악업의 인(因)을 제거함으로써 현재에 마땅히 성숙할 것이며, 혹은 무거운 악이 전변해서 현세에는 가볍게 받는다.”[거자함(巨字函) 제2권]
『금강경』에서 말하였다.
“이 경전을 받아 지녔는데 남에게 경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이 사람은 전생의 죄업이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금생에 남에게 경시 받으므로 전생의 죄업이 곧 소멸하면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提)를 얻는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사람이 전생에 반야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이미 그걸 버렸다면, 금생에 그 설명을 들어도 숙세의 습관적인 힘으로 말미암아 다시 버리게 되어서 몸·말·마음이 모두 화합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서 어리석음을 짓게 되고 나쁜 지혜가 증장하여 올바른 법을 훼손한 업으로 대지옥에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백천(百千) 구지(俱胝) 나유타의 세월을 지내면서 온갖 큰 고통을 받으며, 3재(災)가 일어날 때는 저 법을 훼손한 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타방 세계로 전생(轉生)해서 시방을 편력하고 한량없는 겁을 지나야 그 업이 점점 미약해지면서 지옥 속에서 나오고, 그 다음엔 축생과 아귀의 몸을 받는다. 각각의 취(趣) 속에서 각기 백천 구지 나유타의 세월을 지나고, 3재가 이르면 타방 세계로 전생해서 온갖 고통을 갖추어 받는다. 나머지 세력이 장차 소진해야만 비로소 인간 가운데 태어나는데, 나쁜 율의(律儀)를 가진 가문에 태어나서 6근(根)을 갖추지 못한다.
사리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항상 설하신 죄의 무거움은 5무간(無間)인데, 이는 법을 훼손한 업과 비슷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정법(正法)을 파괴한 업은 거칠고 무거워서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이른바스스로 반야를 비방한 것이든 남에게 반야를 비방하도록 한 것이든 남에게 비방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또한 남에게 마시게 한 것이다.' ”[수자함(水字函) 제5권]
6도(度)를 총괄하여 복과 지혜로 통하고
3학(學)을 섭수해서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한다.
『해탈요의경(解脫了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관세음(觀世音)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일을 배워야 하니, 이른바 6바라밀이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은 증상(增上)의 계학(戒學)이고, 선정은 증상의 심학(心學)이고, 반야는 증상의 혜학(慧學)이며, 정진은 일체에 통한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여섯 가지 일의 얼마가 복덕의 중구(衆具)이고, 얼마가 지혜의 중구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증상의 계학(戒學)은 복덕의 중구이고, 증상의 혜학(慧學)은 지혜의 중구이다. 선과 정진은 일체에 통한다.'
관세음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이것을 일을 배우는 여섯 가지 시설(施說)이라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3학(學)이 중생을 섭취하는 것이며, 둘째는 3학이 번뇌를 대치(對治)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보시의 중구(衆具)와 지계의 해치지 않음과 인욕의 요익(饒益), 이 3학으로써 중생을 섭취하고, 다시 보살은 정진으로 착한 업을 닦고 선으로 번뇌를 굴복시키고 지혜로 모든 결박을 끊는 이 3학으로써 번뇌를 대치한다.' ”[신자함(身字函)]
하나라도 이 경을 지니면 6바라밀[六度]을 갖추고
하나라도 도량을 닦으면 6바라밀이 원만하다.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에서 말하였다.
“이 경을 받아 지니고서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는 6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 이 경전을 능히 믿고 이해하는 자는 단(檀:보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고, 이 경전에 대해 의혹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시(尸:지계)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며, 이 법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찬제(羼提:인욕)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고, 이 경전에 대해 마음이 물러서지 않을 수 있다면 비리야(毘離耶:정진)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고, 이 경전을 믿고 즐기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면 선(禪:선정)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고, 이 경전을 요달해서 분별의 상념이 없으면 반야(般若:지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뢰자함(賴字函) 제4권]
『장엄왕보살경(莊嚴王菩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6바라밀을 행할 때 도량을 닦아서 세우고 향기로운 꽃으로 공양하는 것이 단(檀)바라밀이고, 공양을 닦을 때 몸·입·뜻의 업이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시(尸)바라밀이고, 만약 어떤 벌레가 도량에 들어와도 참고서 해치지 않는다면 찬제바라밀이고, 착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이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이 선(禪)바라밀이고, 단(壇)이 반듯하고 마당이 둥글고 치우치거나 기우는 것이 없으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니, 이같이 한 가지 법은 마음을 따라서 변하여 나타난다.' ”[경자함(景字函)]
6바라밀[六度]을 닦지 않으면 도를 이루기 어렵고
비록 6바라밀을 행하더라도 상(相)을 취하지 말라.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할 때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만약 보시를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빈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력도 없을 텐데, 무엇을 말미암아서 유정(有情)을 성숙시키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겠으며, 하물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겠는가? 내가 만약 청정한 계율을 수호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악취(惡趣)에 태어나서 하천한 사람 몸도받을 수 없을 텐데, 무엇을 말미암아서 유정을 성숙시키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겠으며, 하물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겠는가? 내가 만약 안인(安忍)을 닦지 않아서 반드시 누추한 용모로 태어나 보살의 원만한 색상(色相)을 갖추지 못한다면, 유정을 성숙시킬 수도 없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할 수도 없을 텐데, 하물며 일체지지를 얻겠는가? 내가 정진하지 않아서 보살의 뛰어난 도(道)를 능히 수호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말미암아서 유정을 성숙시키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겠으며, 또한 일체지지를 얻겠는가? 내가 만약 마음이 산란하여 정려(靜慮)에 들어가지 못해서 보살의 뛰어난 선정[定]을 일으키질 못한다면, 무엇을 말미암아서 유정을 성숙시키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겠으며, 일체지지를 얻겠는가? 내가 만약 지혜가 없음에도 반야를 배우지 못해서 온갖 선교 방편의 지혜로 이승지(二乘地)를 초월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말미암아서 유정을 성숙시키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겠으며, 일체지지를 얻겠는가?' ”[영자함(盈字函) 제2권]
『사익범천경(思益梵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연등불(燃燈佛)을 보자, 즉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연등불께서는 내게 수기하며 말씀하셨다.
'그대는 내세에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며, 명호를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리라.'
나는 이 때 6바라밀을 구족했다. 왜냐 하면 비록 보시를 하더라도 과보를 구하지 않고, 비록 계율을 지키더라도 탐착하는 바가 없고, 비록 인욕하더라도 안팎이 공함을 알고, 비록 정진을 하더라도 일으키는 상(相)이 없음을 알고, 비록 선정을 하더라도 의지하는 바가 없으며, 비록 지혜를 행하더라도 상(相)을 취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만자함(萬字函) 제2권]
여기까지가 반야바라밀 등의 여섯 가지가 끝나고
이어서 방편바라밀 등의 네 가지를 추가하여 짝으로 삼는다.[모두 10바라밀다이다.]
『해탈요의경(解脫了義經)』에서 말하였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6바라밀에 대해 이와 같은 차제(次第)로 설명을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은 점차 높은 단계로 나아가면서[上上] 서로 의거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몸과 재물을 버리고서 청정한 계율을 받아 지니고, 계율을 수호하기 때문에 인욕[忍]하고, 인욕하면 정진하고, 정진하면 능히 선(禪)을 하고, 선이 구족하면 출세간의 지혜를 얻는다.'
다시 여쭈었다.
'어째서 나머지 네 바라밀을 시설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6바라밀의 짝이니, 저 방편바라밀과 세 가지 바라밀의 짝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현재의 법에서 번뇌를 많이 행하여 감당할 수 없을 경우 항상 인욕[忍]을 닦아 익히고 사소한 복이라도 행해서 미래세에는 번뇌가 희박해져서 능히 부지런히 정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원(願)바라밀로서 정진바라밀의 짝이 된다.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착한 법을 듣고 수승한 능력을 희망하는 것이 역(力)바라밀로서 선바라밀의 짝이 된다. 보살의 장(藏)에 대해 듣고 반연해서 선을 닦고, 능히 출세간의 지혜를 이끌어내는 것이 지(智)바라밀로서 반야바라밀의 짝이 된다.”[신자함(身字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