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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란치스코와 우리들 원문보기 글쓴이: franciscopaik
Johannes Grosso.
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소속 오보에 주자.
1987년 낭트 출생. 리옹고등국립음악원에서 장-루이 카페짤리의 가르침을 받으며 2011년
수석 졸업, 2013년 Artist Diploma를 취득했다.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 Schleswig-Holstein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등에서 활동하며 거장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매력에 반해, 2010년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에 입단했고, 이어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으로 옮겼다.
이반 피셔가 이끄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리카르도 샤이가 이끄는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정기 객원 주자로 활동 중이며, 서울시향, 파리 체임버 오케스트라,
리옹 오페라, 몬테 카를로 필하모닉, Les Dissonances 앙상블과도 함께했다.
제 5회 이탈리아 '쥐세페토마씨니' 국제 콩쿨 1위 없는 2위, 2013년 타이완 국제 콩쿨 1위,
국제 리드협회 주최 Gillet-Fox 콩쿨(미국) 2위를 거쳐, 2014년 유서깊은 프라하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솔리스트로서의 역량을 입증했다.
현재 파리 베를리오즈 국립음악원에서 교수.
월간 객석의 파리 통신원 김나희와 오보이스트 요한네스 그로소의 허핑턴 포스트에
실린 인터뷰를 옮겨봅니다.
- 이름만 들으면 프랑스 사람 같지 않다.
요하네스는 브람스에서 따왔다. 엄마는 독일어 교수이자 번역가인데, 내 위로는 형이 둘이다. 셋째인 내가 또 아들이라 남자 이름은 생각해 둔 게 없어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브람스를 따라, 요하네스라고 독일식으로 스펠링도 고스란히 붙였다. 그로소라는 성은 콘체르토 그로소에 들어가는 단어랑 똑같은 이탈리아어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혈통이다. 이름만 보면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브람스의 음악도 그렇지만 요한, 루드비히, 볼프강, 프란츠, 로베르트를 통틀어 요하네스를 가장 좋아한다.
- 오보에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위로 둘인 형이 다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었다. 나도 8살이 되니 악기가 배우고 싶어졌다. 형들 하는 건 다 하고 싶은 게 막내 마음인데다 엄마는 아들 셋을 키우면서도 일을 병행하느라 늘 바빴다. 삼형제가 학교 끝나는 시간이 다 다르니까 돌봐줄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내가 일찍 학교 수업을 끝내고 뭔가를 배우러 가야 서로에게 좋았다. 그래서 고향인 낭트의 음악원에 혼자 찾아갔다. 건물이 3-4층 정도인데 부모님이랑 같이 간 것도 아니었다. 어떤 악기를 할 거라고 마음 속으로 정한 것도 아니었고, 가서 직접 해보고 정할 생각이었다. 1층에는 오보에, 2층과 3층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먼저 1층으로 가볼까? 해서 처음 들른 방에서 오보에 선생님이 무작정 나는 네가 마음에 들고 너를 보니 오보에를 잘할 것 같다면서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국립 음악원은 보통 등록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운이 없으면 몇년 대기해도 입학이 쉽지 않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왠지 그럴 것도 같고, 형들이 안 하는 걸 한다는 것도 좋았고, 선생님이 덥석 나를 받아준다는 게 좋았다. 결국 2층과 3층에 있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방에는 가지 않았다. 마치 운명처럼 오보에를 시작했다.
고민이 많던 십대 초반 당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수석이었던 장-루이 카페짤리를 마스터 클래스에서 만났다. 그는 고등국립음악원(CNSM) 출신이 아니고 거의 독학으로 노하우를 많이 터득한 사람이다. 유명하지만 그걸 남에게 전달하거나 설명할 줄 모르는 다른 오보이스트들과는 달랐다. 당시 내가 부딪혔던 테크닉적인 고민과 과연 이걸 다 해낼 수 있을까 했던 의심부터 모든 것이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인간적으로도 만나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무척 좋아했다.음악을 한다는 건 그냥 악기만, 손가락과 호흡하는 테크닉만 배우는 게 아니라 삶을 나누는 행위 아닌가. 아무리 뛰어난 선생이라도 내가 같이 있으면서 불편하거나 인간적으로 별로 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함께 할 수가 없다. 전공 하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고민이 많았는데, 형들이 공부도 잘했고 직업이 보장되는 전공으로 좋은 학교에 간 터라 더 그랬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라면 도전해보라고 용기를 주셨다. 부모님 두 분 모두 클래식 음악이라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좋아하시지만 집안을 통틀어 프로페셔널 음악가가 전혀 없다. 한 명쯤 음악하는 사람은 어떠냐, 또 막내인데 하고 싶은 거 해야지, 라는 식으로 선택이 자유로웠다. 장-루이 카페짤리가 부모님을 만나 내가 뛰어난 오보이스트가 될 자질을 갖고 있다고 설득했고, 결국 그를 따라 리옹고등국립음악원에 들어갔다.
-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1년을 있었다.
부모님 덕에 어릴 적부터 독일어를 일찍 접했고, 가서도 생활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 독어를 하는 상태라 사람 사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물가도 워낙 싸고, 연봉도 프랑스 오케스트라보다 더 높으니까 경제적으로도 더 넉넉했다. 처음에는 리카르도 샤이의 지휘봉 아래 연주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바흐와 멘델스존, 실러와 슈만의 도시인 라이프치히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게반트하우스에서 연주를 하는 게 처음에는 마냥 좋았다. 시간이 흐르며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너무 둔탁하고 묵직하달까. 머지않아 기계가 돌아가듯 기능하는 오케스트라에 속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라이프치히 특유의 사운드인 건 알지만, 그 안에서 나는 그저 소리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아직 솔리스트로서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프랑스 오케스트라보다 급여가 높은 만큼 오케스트라, 오페라, 발레 반주까지 연주가 너무 많았고 내 시간이 없었다. 라이프치히가 아무리 작은 파리라는 별명을 지닌 도시라도 도시 수준을 파리와는 비할 수 있나. 악단이나 상임 지휘자의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파리에 오는 것이 여러 모로 나은 선택이었다. 라디오 프랑스 단원(제2오보에)으로 연주하면서,파리 10구 베를리오즈 국립음악원에도 오보에 클래스를 맡아 제자들을 가르친다. 벌써 제자 중 하나가 이번에 파리고등국립음악원에 응시한다. 아직 결과는 모르지만 몇 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회가 남다르다. 실내악과 솔리스트로서의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유수의 국제 콩쿨에도 나가서 입상할 수 있었다. 이게 좀 더 균형잡힌 생활이고, 음악적으로도 만족스럽다.
- 음악가로서 다양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라디오 프랑스에서 상임인 정명훈을 비롯, 다양한 객원 지휘자들을 통해 많은 걸 배운다. 인상 깊었던 건 마레크 야노프스키였다. 나는 2000년 이전, 그가 있었던 시절은 전혀 모르지만 단원들의 반응이 갈렸다. '야노프스키가 대단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정명훈이 최고다. 정명훈은 언제나 실황에서 제너럴 리허설을 뛰어넘는 마법 같은 연주를 해낸다.'라는 반응과 '바그너는 역시 야노프스키가 정석이다'라는 반응이 공존했다. 야노프스키는 우리가 특유의 색채를 유지한 채로,독일 오케스트라만큼 뼈대가 드러나는 정확한 연주를, 바그너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독일 오케스트라와는 가진 소리, 습관, 균일함 등이 달랐을 것이다. 첫 리허설에서부터 '메조 포르테 ! 메조 포르테를 지켜야 해 ! 악보대로, 악상 기호대로 연주하시오 !'를 반복했다.
학생 시절에는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 Schleswig-Holstein Festival Orchestra와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등에서 연주를 했다. 크리스토프 에션바흐는 당시 Schleswig-Holstein Festival Orchestra를 이끌면서 우리와 함께 독일 레퍼토리들로 미국 투어를 했다. 에션바흐는 유난히 독일 레퍼토리에 강했고 우리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때의 흥분과 객석의 열광적인 반응을 생생히 기억한다.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나. 아마추어는 아니지만 실제 오케스트라 경험이 부족해 아무래도 소리를 모아 구조를 먼저 쌓아야 하는 독일 음악은 도전에 가깝고, 취약함을 드러내기 쉽다. 시간을 두고 오케스트라의 경험치를 쌓아가야 묵직한 사운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아카데미 운영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학생 시절부터 오케스트라 경험을 쌓도록 해준다.
- 지휘자가 에션바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경험인가?
보통 첫 리허설에서 연주하는 순간, 이미 음악으로 모든 걸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 이 지휘자와의 만남이 진짜인지 아닌지 말이다. 꼭 유명세가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를 줄 수 있고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지휘자를 만나면 서로 외연을 넓히고 더 넓은 세계로 갈 수 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연주를 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마에스트로라는 칭호와 극진한 대우에 취해 무늬만 지휘자인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 지휘자를 만나면 우리도 안다. 소심한 복수지만 나름대로 그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우리끼리 알아서 연주해 버린다거나, 그가 말하는 지시 사항을 들어주지 않는 식으로 대응한다. 어쭙잖은 지휘자, 음악적으로 존경할 수 없는 지휘자는 따르지 않는다. 그건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이다. 아마 그 지휘자도 낙담하며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지난 시즌 3월, 그날은 내가 연주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살 플레옐에서 들은 라디오 프랑스의 베토벤 7번은 놀라웠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가 속한 오케스트라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도 저기에서 연주했으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지금까지 내가 듣고 경험했던 독일 유수의 오케스트라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연주였다. 입단 전부터 프랑스 오케스트라들 중 우리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왔지만, 실황으로 듣고 보니 정명훈이 해석하는 독일 레퍼토리가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나라별로 오케스트라 특유의 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런 특색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단원들의 국적도 점점 다양해지고, 오케스트라의 세계화가 실감난다.
- 베를린 필도 사이먼 래틀이 상임지휘자로 온 이후에야 뒤티외, 라벨 같은 프랑스 레퍼토리, 스트라빈스키, 불레즈를 투어 프로그램에 넣었다.
독일 오케스트라가 프랑스 음악에 약하다거나, 특유의 색채를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프랑스 오케스트라가 독일 레퍼토리를 소화해내기에는 소리의 밀도와 두께가 부족하다는 평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더 새로운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시도가 가능해진 것 같다. 사실 음악에 국적이 있나? 음악이 훌륭하면 언어와 국적이 달라도 청중들은 다 이해한다. 이게 좋은 음악인지 아닌지, 2013년 라디오 프랑스가 정명훈과 함께 독일, 오스트리아 투어를 갔을 때, 청중들의 반응을 보며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이반 피셔의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도 꼬박꼬박 객원으로 가고 있다. 게반트하우스에서도 객원 요청이 오면 일정이 맞는 한 간다. 라디오 프랑스에 오는 객원 지휘자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인데 어쭙잖은 지휘자보다는, 피셔나 샤이와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이롭다. 오케스트라의 색깔과 특색이 제각각이고 특히 지휘자별로 스타일이 다른 만큼 매번 공연마다 배우는 것들이 모두 다르다. 음악이라는 대상과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각기 다른 길을 택해서 간달까. 음악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건 목적지까지 가장 빨리 가는 고속도로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빨리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속도로의 휑한 풍경이 아니라 좁은 국도를 탔을 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에 더 가치를 둘 수도 있다. 훌륭한 지휘자들의 공통점은 길이 아닌 방향으로는 절대 가지 않고, 그가 선택한 길로 우리 모두와 함께 떠난다는 것이다. 그 길에서 음악만으로 가능한 황홀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정말 훌륭한 오케스트라다. 이반 피셔가 일생을 바쳐 그의 조국에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연주하는 것이 평가 절하되기 쉽다. 2-3시간 남짓에 불과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오가면서 체력적으로도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파리지엔 특유의 자부심이랄까. 보통 파리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데 뉴욕이나 빈, 베를린도 아니고 다른 도시를 왜 가냐고 생각한다. 콘서트 홀이 프라하의 루돌피눔이나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여도 반응이 보통 그렇다.
- 그래서 서울시향 객원 제안도 거절했나?
13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는 것도 그렇고, 리허설 시간이 라디오 프랑스의 2배 가량 된다고 들었다. 스베틀린(서울시향과 라디오 프랑스의 악장)처럼 음악에 헌신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이라 비행기 안에서도 악보를 보고, 내리자마자 시차 적응할 시간 없이 바로 리허설에 갈 수 있는 정신력과 근면 성실함, 체력을 갖췄더라도, 큰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비행기 안에서 버리는 시간이 제일 아깝다. 페이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에서 연주할 때 버리게 되는 기회 비용이 있다. 설령 지휘자가 정명훈일지라도 서울에 간다면, 다른 오케스트라에 객원으로 가는 건 물론 국립 음악원 출강도 실내악 혹은 솔리스트로서의 활동, 당시 다니고 있던 박사과정(Artist Diploma)에 전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시아 투어를 가는 거야 괜찮다. 실제로도 내가 2013년 9월, 예술의 전당에서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도중, 밖에 나가서 오보에를 연주했다. 청중들의 반응도 뜨겁고 젊은 사람들도 많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세계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따라 행동한다. 다른 건 죄다 부차적인 요소다. 프라하나 라이프치히도 파리보다는 별로라는 게,유럽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인데 서울까지 가는 건 어떻겠는가. 결정적으로 정명훈은 그냥 서울시향에 와서 연주만 하고 가면 안 되고, 책임감을 가지고 맡아달라고 했다. 그게 가장 자신이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시향의 자체 역량이 유럽 오케스트라보다는 못한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시간을 두 배, 세 배 들여서라도 지휘자를 따라가려는 열정이 있고, 그만큼 노력하고 성장하고 있으니 함께하면 보람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오케스트라의 성장을 위해 내가 가진 재능을 다른 단원들과 나눌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데, 내가 그만큼 헌신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그만한 경험이 쌓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내 경험이 그랬다. 자랑이 아니라, 이름난 지휘자들이 처음부터 뛰어난 실력을 갖춘 단원들만 까다롭게 선발하는, 유명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일찍부터 활동했다. 학업을 마치고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에 들어왔고, 국제 콩쿨에서도 어려움 없이 1,2위를 했다.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는 경험해 봤지만, 오케스트라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어떤 기쁨과 뿌듯함을 느껴본 적은 거의 없는 나에게 정명훈의 제안은 부담스러웠다.
- 지난 봄에 유서 깊은 프라하 콩쿨에 나가서 1위를 했다. 소감은?
1위를 해냈다는 기쁨과 동시에, 음반 녹음과 공연의 기회가 주어져서 설렌다. 오케스트라에만 늘 속해 있다가 드디어 솔리스트로서 협주곡을 연주하게 되었으니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아닌가. 프랑스의 음악교육 시스템 분위기로는 솔리스트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고,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일종의 플랜 B라고 본다. 피아노나 바이올린도 아니고, 오보에를 가지고 모두가 다 프랑소와 를뢰나 알브레히트 마이어 같은 슈퍼 스타로 살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음악하는 사람들 치고 마음 속에 세계 최고의 솔리스트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콩쿨을 위해 한나절에 모짜르트와 슈트라우스 협주곡을 모두 연주했다. 큰 산을 넘은 기분이다. 내가 체격이 커서 호흡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고, 슈트라우스 협주곡은 오랫동안 해내지 못할 산처럼 느껴졌다.그만큼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운레퍼토리다. 콩쿨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긍정적인 순기능이 더 많다고 본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운동선수처럼 스스로의 실력 향상은 물론, 꼭 우승하지 않아도 콩쿨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이 많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동료들이 많다는 데서 자극도 얻고, 스스로의 한계와 부족함을 알고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콩쿨 사냥을 할 마음은 없지만 나이 제한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뮌헨 ARD콩쿨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우승 못하면 마이너스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보에를 잡았던 8살 때부터 지금까지 왜 음악을 하는지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매일 좀 더 나아지고, 어제보다 더 괜찮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게 좋아서 음악을 하는 거니까. 라디오 프랑스 바로 건너편에 사는 것도 새벽이나 늦은 밤,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스튜디오에 가서 실컷 연습하고 싶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안정된 생활의 편안함에 빠져, 퇴보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매너리즘에 빠지면 매 번의 연주에도 진심을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보에는 리드를 직접 깎아야 하는 악기라, 리허설과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악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 일상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하는 악기를 통해, 내 가능성을 더 증명해보이고 싶다. 난 아직 이십대니까.
2014년 프라하 콩쿨에서 모짜르트 오보에 협주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보에 협주곡을 연달아 연주하는 실황 영상. 1시간 14분 경부터 시작이고, 인터뷰이 요하네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