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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있는 대학교의 가을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한국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내내 내 마음속에서 암담한 응어리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검찰이 이제까지 행해온 어처구니없는 반인권적 권력 남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며, 동시에 그것이 내가 몸담고 일하고 있는 미국 대학교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 검찰이 미국 대학교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학부모를 기소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더구나 소위 ‘업무방해’를 받은 미국 대학교나 해당 교수 또는 다른 사람이 한국 검찰에 그 학부모를 조사해 달라거나, 고소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국 검찰은 미국 대학교의 업무를 방해 했다는 이유로 미국 대학교를 “위해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부모를 기소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전형적인 권력 남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지난 2022년 9월 2일 금요일, “조국 부부, 조지워싱톤대 ‘대리시험’ 정황” 등의 표제어로 한 기사들이 한국 신문들에 등장했다. 이러한 자극적인 왜곡된 표제어 자체가 기사 내용과 방향을 고정시켜서 설정한다. ‘대리 시험’이라는 표현 자체가 소위 ‘객관성’을 담보로 하는 ‘사실 보도’가 아닌, 지독한 편견에 의한 왜곡된 해석이 반영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대리 시험’이라는 단순한 듯한 그러나 분명한 의도성이 반영된 이 표현이, 왜 편견에 의한 왜곡된 해석이며 심각한 문제인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3. 첫째, 한국에서 흔히 ‘시험(exam)’이라고 하는 것과 미국 대학에서 ‘퀴즈(quiz)’, 더구나 ‘온라인 퀴즈’라는 것의 함의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퀴즈’를 ‘시험’이라는 단어로 의도적으로 대체하고, 동시에 ‘대리’라는 표지를 덧붙이면서 마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오도한다. 둘째, ‘온라인 퀴즈’를 하기 위해 주변에 ‘조언’을 주변에 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퀴즈 자체를 대신 치르는 ‘대리 시험’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설사 학부모나 가족이 조언을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대리시험’이라고 주장될 수 없는 이유는 ‘온라인’의 방식으로 퀴즈가 치러졌다는 사실이다.
4. ‘온라인 퀴즈’는 그 퀴즈를 풀기 위해서 다양한 정보와 조언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핵심은 ‘맞았다 또는 틀렸다’라는 ‘단순 결과’가 아니다.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그것이 책이든, 인터넷 정보든,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조언을 통해서든) 그 학생이 그 퀴즈가 제시하는 문제를 이해하게 되는 그 ‘과정’ 자체가 주요 목적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온라인’ 형태가 아니라 강의실에 앉아서 하는 형태로 하게 된다. 더구나 수업계획서(syllabus)에 따른 성적 반영율을 보면 “출석, 토론 참여도, 퀴즈”의 항목이 합해서 “10%”다. “퀴즈”만 따로 10%라고 해도 그것이 ‘온라인 퀴즈’라고 한다면 실질적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교육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더구나 퀴즈도 1회가 아닌 5회라고 한다.
5.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에서 볼 때, 그 5회에 걸친 ‘퀴즈’가 지닌 함의란 ‘결과’가 아니라 그 퀴즈를 풀기 위한 그 ‘과정’에 그 주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결과’가 중요하다고 담당 교수가 생각한다면, 퀴즈를 결코 ‘온라인’의 형태로 과제를 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퀴즈만 따로 ‘10%’도 아니다. 출석과 토론 참여 그리고 퀴즈—이 세 항목을 합해서 10%라고 하는 것은 이 세 항목에 ‘교육적인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 ‘결과’에 집착하는 한국식의 ‘시험’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검찰의 ‘업무 방해 기소’는 ‘온라인 퀴즈’ (‘시험’이 아니고 ‘퀴즈’다)라는 것이 구체적인 미국 대학 현장에서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검찰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 ‘무지’가 ‘의도적 무지’가 아니라면 더욱 창피한 일이다. 국내도 아니고, 미국 대학교의 업무까지 걱정하는 한국 검찰의 능력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되는 것인가.
6. 한국 검찰이 이러한 구체적인 교육적 함의를 전혀 보지 않고, 가족 단톡방에서의 대화 몇 마디로 미국 대학교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학부모를 기소했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미국 대학이 한국 검찰에게 ‘수사’를 의뢰하거나, 해당 학생을 문책하거나, 또는 해당 교수가 문제제기를 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검찰이 온 가족이 사용하는 매우 사적인 소통 공간인 모든 문자 메시지를 독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고 받은 사람이 처한 특정한 정황과 연결시켜야만 최소한의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렇기에 가족과 같이 친밀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메시지들을 몇 줄 떼어서 온전한 정황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정황화’가 일어나는 전형적인 예다.
7. 담당 교수였던 맥도널드 교수는 2015-2017년, 2년이나 길어야 3년 동안 조오지워싱톤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길어야’라고 하는 것은 그가 시작한 월이나 학기를 구체적으로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정한 표기가 없는 한 대학에서의 연도표기는 “academic year”를 의미한다. 즉 Fall 2015-Spring 2006, Fall 2016~Spring 2017 그리고 Fall 2017~Spring 2018로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학기제가 아닌 퀴터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대학들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그의 이력서에는 시작 학기와 끝나는 학기가 어떤 것인지 표기하지 않았기에 그가 가르친 기간이 만으로 2년인지 3년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는 또한 미국에서는 소수의 대학만 사용하는 직책명 “professorial lecturer”의 자격으로 가르쳤다. 이 명칭은 영국에서는 간혹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조오지워싱톤 대학교를 비롯하여 매우 소수의 대학만 사용한다. 이 직책은 이론보다는 ‘실무’에 강조점을 두기에 조오지워싱톤 대학교와 같이 워싱톤 디시(D.C)에 소재한 대학에서 사용하곤 한다.
8. 미국은 한국의 10배가 넘는 대학교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인정하고 싶든 아니든, 이 21세기에 세계의 대학교육을 이끌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이 세계에 대한 다층적 '지식 생산과 연구'는 이제 서유럽이 아니라 미국 대학들이 선도하고 있다. 그러니 미국 대학의 업무는 미국이 알아서 하도록 하면 되고, 한국 검찰은 미국대학의 ‘업무방해’ 가 아니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에 그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서 가장 심각한 한국 대학의 ‘업무방해’라고 할 수 있는 사건, 그러나 검찰이 외면하고 있는 사건은 무엇인가. “김건희씨의 석박사 학위 논문 표절/위조”문제다.
9. “박사논문 147쪽 중 출처 표시는 8쪽에 불과”하며, 타인의 논문을 “통째로 베끼고, 연구 결과까지 복사해 붙여”라는 검증결과가 있다. 이것은 단지 해당 대학교만이 아니라, 한국 대학 교육 전체의 ‘업무’를 심각하게 방해하고 왜곡 시키는 사건이다. 14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범학계 국민 검증단 “이 낸 9월 6일자 대국민 보고회에서의 보고에 따르면 표절의 종류가 한 가지만이 아니다 (표절의 다양한 양태는 아래 첨부한 도표 참조).
10. 미국 대학교에서 교수나 학생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범죄”로 간주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표절 (plagiarism)”이다. 나도 이 대학교에 임용되어 왔을 때 “Turnit in(https://turnitin.com)이라는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식 그리고 표절의 다양한 방식 등에 대한 다각도의 교육을 3일에 걸쳐서 받았었다. 표절은 ‘지적 범죄 (intellectual crime)’로서, 미국 대학교육에서 가장 심각한 ‘범죄’로 간주된다. 그런데 한국 검찰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영부인의 위치에 서게 된 사람이 저지른 심각한 ‘업무방해’는 외면하고, 미국 대학교에서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한국에 있는 학무모를 ‘업무방해’했다며 기소를 하고 있다. 한 가족을 의도적으로 말살하고자 하는 끔찍한 노골성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기소’ 사건이다.
11. 인간을 향해서 두 종류의 살상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육체적 죽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적 죽임’이다. 육체적 살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살인’이라는 표지로 범죄화한다. 그런데 ‘사회적 죽임’은 그 해가 바로 드러나지 않고 왜곡되어 정당화되기에 많은 이들이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죽임’은 육체적 죽임 만큼 뿌리깊은 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수가 그 사회적 죽임의 심각성을 외면하거나 왜곡된 정보로 선동되어서, 그 사회적 죽임의 대상자는 그 어떤 인간적 대우나 연대의 범주에서 조차 배제되곤 한다.
12. 비판적 사유와 개입을 외면하고, 권력에 의해서 ‘선동’되기만 하는 국민은 민주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로 탈바꿈하게 만든다. 한국 검찰은 반인권적인 권력행사를 통해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그 우선적 책무를 유기한 채, 특정 인물에 대한 맹목적 비호 또는 의도적인 사회적 ‘죽임의 정치(thanatopolitics: politics of death)’를 행사하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육체적 죽임만이 아니라, 사회적 죽임을 당해 온, 그리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와 연대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다. ‘어떻게’를 고민하고, 다양한 ‘어떻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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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담당교수, "Geoffrey Macdonald"의 조지아워싱톤대 경력
2. 담당 교수 직함 설명 “Professorial Lecturer”
3. 표절의 종류
4. 교수신문 2022년 9월 6일자, “김건희씨 박사논문 147쪽 중 출처표시는 8쪽에 불과”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3682
첫댓글 도대체 어찌하면 좋을까요...
넘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