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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3국 탐방-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일시:2015년 9월 11일 금요일~19일 토요일
탐방국: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인천공항 출발,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 도착
* 인천 공항 출발
가을 기운이 감도는 날씨로 서늘하다. 집에서 오후 1시 20분 경 출발했다. 인천공항에서 인솔자와 3시에 미팅한다. 15명 출발로 인솔자가 동행한다. 가방을 부치고 48번 게이트로 이동했다. 16:50분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행 아시아나 573 항공이다. 16:20분 보딩타임이다. 두 아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탑승했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7시간 50분 소요 예정이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시차는 -4로 한국보다 4시간이 늦다. 기내 석식으로 쇠고기와 빵, 야채 샐러드 등을 맛있게 먹었다. 의자 등받이 붙어 있는 기내 모니터로 영화 2편을 보았다. 90분 상영시간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120분상영시간의 [국제시장] 2편 모두 큰 감동을 준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94세와 89세 노부부 이야기다. 천진스런 사랑으로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뜬다. 눈 쌓인 산길에서 목놓아 우는 할머니의 마지막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국제시장]은 한국전쟁 6.25사변으로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어머니와 세 동생의 가장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윤덕수(황정민)의 이야기다. 독일 탄광 광부로 죽음 고비를 넘기고, 간호사와 한국에 나와 결혼한다. 다시 베트남 파월 장병으로 나가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한다. 아버지가 부탁한 부산 국제시장에 '꽃분이네'라는 화장품 가게를 차린다. 이산가족 찾기 티이브이 프로에서 아버지는 끝내 찾지 못하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입양 갔던 여동생 막순이만 찾는다. 가족이 모두 모여 흥겨운 시간을 갖는데 덕수는 손녀가 부르는 전쟁의 아픈 노래에 베트남 사이공 총탄에 잃은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홀로 방으로 간다. 아버지를 부르며,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고, 그런데 정말 힘들었다고, 오열한다. 아내에게 부산 시가지가 보이는 둔덕 벤치에 앉아 이제 '꽃분이네' 가게를 팔자고 한다. 아버지가 오시겠느냐고...이제 못 오실거라고...그렇게 영화가 끝난다. 2편 모두 인간 내면의 깊은 정을 그린 영화다. 끈끈한 가족애가 담긴 메시지에 가슴이 훈훈하다. 이제 타쉬켄트까지 2시간 30분 남았다. 우즈베키스탄 시간으로는 현재 오후 8시 20분이고, 한국시간으로는 밤 12시 20분이다. 이제 휴식을 취하고 귀국할 때 영화를 다시 볼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 도착
캄캄한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이다. 오후 8시 20분 정시에 도착했다. 7시간 정도 소요 되었다. 기장의 안내방송으로는 공항이 31도라고 하여 가벼운 옷차림으로 내렸다. 공항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기온이다. 짐벨트가 작은 규모다. 한국에서 물건을 사오는 현지인들의 짐이 많다. 늦게 가방을 찾았다. 여기는 공산주의 잔재가 남아 모든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잘 대해준다. 우리나라의 삼성 광고판이 많다. 삼성, 엘지 제품과 대우차도 많단다. 우즈베키스탄 현지 주민 남자 가이드와 미팅했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사람이다. 능란하게 한국어를 구사한다. 공항에서 15분 거리의 호텔로 이동한다. 여기서는 좋은 호텔이라는데 우리의 눈에는 허술할지도 모른단다. 우즈베키스탄은 한반도 2배, 남한의 4배 크기다. 인구는 3천만 명이다. 130년 간 타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후 140년 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91년 독립하여, 이제 겨우 독립한 지 25년 된 나라다. 공항 시스템이 5년 전 그대로여서 수속이 그렇게 늦은 거란다. 모든 발전이 느린 곳이다. 내일은 낮 기온이 33도란다. 여름옷 차림으로 준비햐야 한다. 6시 모닝콜, 6시 30분 조식, 7시 10분 호텔 출발이다. 내일은 오전 8시 사마르칸트행 고속열차를 탑승하는 관계로 서둘러야 한다.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 경 취침을 위해 자리에 누웠다. 이곳으로는 초저녁이다. 바깥 풍경은 흐릿한 전깃불이 도시를 밝히고 있다.
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사마르칸트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호텔 출발
현지시간으로 새벽 3시에 기상했다. 한국시간으로는 오전 7시다. 한국에서의 기상 습관으로 일어난 것이다. 커텐을 제키고 보니 수도 타쉬켄트가 캄캄하다. 전등불이 거의 없다. 이슬람 국가여서 오후 5시~6시면 도로는 캄캄하고 건물은 하루의 일과를 마감한다. 자연 순리대로 사는 나라다. 호텔 뷔페조식을 마치고 잠시 호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나무들이 많다. 아침 출근 차량이 분주히 움직인다. 호텔을 출발하여 사마르칸트행 고속열차를 탑승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이동한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기차역
호텔을 출발하여 타쉬켄트 기차역으로 왔다. 사마르칸트행 고속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분수도 있고 아담한 기차역이다. 플랫트 홈에 나가니 벌써 기차가 들어와 우리를 기다린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기차에 탑승했다.
* 우즈베키스탄 타수켄트에서 사마르칸트 가는 고속열차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고속열차는 2010년 스페인에서 들여온 기차다. 한국의 KTX 고속열차와 같다. 한 칸에 역방향과 순방향이 마주하여 있는 것도 동일하다. 우즈베키스탄 현지 주민들과 함께 고속열차를 타고 간다. 오늘은 티무르의 족적을 따라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는 여정이다.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2시간 20분 소요 된다.
* 우즈베키스탄 들녘
들녘에는 산이 없다. 슬레트 지붕의 주택이 한국의 새마을 운동 초기 시골 모습과 유사하다. 농토가 보이다가, 사막이 보이다가, 동물이 보이다가, 멀리 사막산이 보이는 이색 풍경에 지루한 줄 모르고 간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기차역
사마르칸트 기차역에 도착하여 내렸다. 타쉬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버스로 5시간, 완행열차로 4시간 거리인데 우리는 고속열차로 2시간 20분만에 도착했다. 우람한 기차역이다. 시계탑이 높이 솟아 있고, 잔디와 나무들이 많아 싱그러운 풍경이다. 사마르칸트 기차역이라는 문구가 기차역 건물 위에 크게 새겨져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스탄은 땅, 광장이란 뜻이다. 즉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벡의 땅이란 뜻이다. 12개 주의 행정으로 나뉘어져 있다. 타쉬켄트는 돌의 나라란 뜻이다. 돌이 많아서가 아니고 공예품 기술자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공예품이 발달된 지역이다. 사마르칸트에서 사마르는 남자, 칸트는 여자를 뜻한다. 즉 사마르와 칸트가 만나, 남자와 여자가 만나 행복한 도시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도시에 왔다. 아프로시압은 고대 사마르칸트의 지명이다. 사마르칸트는 해발 650m, 위도 39도에 위치해 있다. 오늘은 날씨가 33도까지 오르는 더운 날이다. 바다가 없지만 큰 강이 두 개 있다. 파미르 고원에서 눈이 녹아내린 물이 흐르는 아무다리아 강과 시르다리야 강이 만나 아라비아해로 유입된다. 사마르칸트는 박물관 도시이고, 역사 도시다. 몽골에서 독립시킨 티무르의 족적이 서린 곳이다. 실크로드의 중심지이며, 중앙아시아의 수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사마르칸트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유적 탐방의 여정을 시작한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알렉산더 성벽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다. 2,500년 역사를 지닌 중앙아시아의 고대도시다. 또한 중앙 아시아의 진주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지역이다. 유럽과 아시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많은 침략을 받아왔다. 기원전 4세기 초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그로 인해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쌓은 알렉산더 성벽이 사마르칸트 도시 언덕에 오롯하게 남아있다. 다 허물어지고 그 잔재 일부가 앙상하게 세워져 있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모스크 곁의 공동묘지
알렉산더 성벽을 지나 도로를 달릴 때, 모스크가 보이더니 모스크 근처 언덕 위에 공동묘지가 있다. 크고 작은 팻말이 곳곳에 꽂혀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묘지인지도 알 수 없고, 도시 가운데 모스크 곁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이슬람 국가이고, 모스크와 공동묘지 또한 성지 순례지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성벽 동굴
도로변 성벽 언덕진 자락 아래 동굴이 있다. 구멍을 뚫어 만든 크고 작은 동굴이 보인다. 이곳은 집시들의 거주지다. 유럽에서나 들어본 집시라는 이름을 아시아 영토인 여기서 들으니 신비롭다. 유럽에 가까운 아시아 국가 우즈베키스탄이어서 그런가보다. 아직도 저런 풍경을 제공하는 사마르칸트는 역시 역사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울루그벡 천문대
울루그벡Ulugbek은 아미르 티무르의 손자로 사마르칸트의 황금기를 지배했던 위대한 왕이자 천문학자,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다.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1419년~1429년에 지은 울루그벡 천문대다. 그는 레기스탄의 울루그벡 신학교와 천문대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천문학교도 만들었다. 울루그벡이 세운 천문학교에서는 당대 유명한 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했다. 천문대에 들어서니 푸른 빛이 감도는, 우주를 연상케 하는 우람한 벽면이 세워져 있고, 바로 앞 넓은 광장에는 커다란 울르그벡 동상이 긴 종이를 펼쳐들고 심오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와 상면한다. 결혼한 신혼 부부가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무하마드 울루그벡 왕은 1394년에 출생하여 40년 간 통치한 군주이자 유명한 천문학자다. 시와 역사와 신학에 조예가 깊어 학문 발전 번성기를 이룩했다. 아프로시압 언덕에서 북동쪽으로 약 1km정도 거리에 울루그벡의 동상을 세웠다. 그 뒤 언덕에는 천문대의 터가 있고 바로 앞에는 박물관을 지었다. 동상을 뒤로 하고 언덕 계단을 올라 천문대로 갔다. 현재는 천문대의 기초만 남아있는데, 예전에는 높이가 40m에 이르는 거대한 천문대였다. 그 옛날 울루그벡이 천문을 관찰하던 장치가 보존되어 있다.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그곳을 돌아보고 건너편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갔다. 1964년에 건립된 박물관 1층에는 울루그벡의 초상화와 그의 업적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천정이 별자리 지도로 장식되어 있는 2층에는 천문학과 관련된 관측기구와 그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의 관측을 바탕으로 울루그벡은 항성시 1년간을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추측했다. 이는 오늘날의 정밀기기로 계산되어진 365일 6시간 9분 9.6초에서 오차는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망원경도 없는 당시의 기술로 이렇게도 정확한 수치가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 1,018개 별의 궤적을 기록했던 그의 천문표는 후에 콘스탄치노프에게 도망친 제자에 의해 출판되어 울루그벡의 이름을 널리 세계에 알려졌다. 그의 명성은 역사 속에서 전설로만 전해져오다가 1908년 러시아의 고고학자인 비아트킨 바실리에 의해 땅에 묻혀있던 천문대의 터가 발굴되면서 그 존재가 확실히 알려졌다. 울루그벡이 지배했던 시대는 종교가 과학에 우선했다. 그래서 보수적인 이슬람 지도자들의 반발과 시기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울루그벡의 아들을 속여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도록 한다. 울루그벡은 자신의 아들이 보낸 이슬람 자객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다. 울루그벡이 죽자 바로 천문대도 파괴해버렸다. 그 후 이슬람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소위 암흑통치를 하게 되었다. 울르그벡은 우리나라 조선의 세종시대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울루그벡의 천문표는 조선왕조 세종 때 이슬람 역법인 회회력으로 알려져 이순지, 장영실 등에 의해 칠정산내외편 등을 만드는 기초가 되어 조선의 역법을 발전시켰다. 자료실 전시물 중에 한국돈 만원 권 지폐 사진과 지폐에 그려진 장영실의 앙구일부 해시계를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먼 나라에서 만난 우리 역사의 일부여서 흐뭇했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
울르그벡 천문대에서 나와 아프로시압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만난 기념비다. 싱그러운 공원의 잔디 위에 우뚝 선 비석에는 한국 태극기와 우즈베키스탄 국기가 나란히 박혀 있고,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다. 2013년 우리나라 경상북도 코리아 실크로드 프로젝트 추진본부는 실크로드 거점 국가 교류협력 상징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시안,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이란 이스피한, 터키 이스탄불,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 등 5개국 5개소에 ‘실크로드 우호협력 기념비’를 설치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가장 먼저 2013년 4월 5일 중국 시안의 대당서시 한국관에 ‘실크로드 기념비’를 안치하고 7월 17일에 제막하였는데, 이 비석에는 한글과 중국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어서 2013년 8월 2일에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박물관 앞에 실크로드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비석에는 한글, 우즈벡어, 영어 3개국 언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8월 20일 이란 이스파한 시청 옆 광장에 세운 실크로드 기념비는 삼면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각 면에 한글, 페르시아어, 영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9월 1일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개최와 함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의 실크로드 동단 기점 공인을 기념하여 터키 이스탄불 갈라타 타워 광장 앞에 세운 실크로드 비석은 삼각기둥 모형에 한글, 터키어, 영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11월 4일에는 대한민국 문화 융성을 경상북도가 선도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을 담은 ‘코리아 실크로드 길 위에 길을 열다’라는 문화융성비를 경상북도 경주 엑스포공원에 건립하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자랑스런 내 조국을 만난 기쁨으로 비석 주변을 여러 번 맴돌며 살펴보았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박물관
아프로시압 언덕에서 발굴된 출토품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알렉산더 대왕시대의 동전을 시작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제단과 우상 등 실크로드 중심지였던 다양한 문화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는 전혀 쓸모없는 황량한 아프로시압 언덕은 13C 징기스칸의 정벌 전까지 사마르칸트의 마을이 있던 곳이다. 2800년 전 소그드인이 이 지역에 정착을 하여 성벽을 쌓고 건물을 건설하면서 도시가 탄생하였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과 아랍 등의 지배에도 흔들림 없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도시로써 성장을 하였으나, 징기스칸의 정벌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해버렸다. 아프로시압은 1958년 한 목동이 우연히 이곳에서 땅을 파다 동전 및 옛 유물들이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화의 흔적이 11개 층으로 층층이 쌓여 있으며, 깊이는 20m, 면적은 219헥타르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여행객과 학자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사마르칸트의 옛 명칭인 마라칸다에는 모든 도로가 포장이 되어 있었고, 수도시설이 각 가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이며 신비로운 물자와 상인들로 풍요로운 도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된다. 처음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마라칸다를 침입하였을 때, 마라칸다는 요새처럼 튼튼한 성이 있어 징기스칸 군대를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징기스칸은 금방 마라칸다의 약점을 알아내고는 바로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공급되는 급수 시설을 파괴한 것이다. 생명에 필수적인 물이 끊기자 마라칸다는 더이상 저항을 못하고 성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그 후 징기스칸은 마라칸다의 모든 관개시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노예화시켜 도시를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후 150년이 지나고 아미르 티무르가 이곳 남쪽 아래 지역을 제국의 수도로 삼고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함으로써 현재의 사마르칸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마르칸트인들은 그 동안 전설로 내려오던 위의 이야기가 아프로시압 언덕 발견 이후 사실로 확인되자 징기스칸은 파괴자, 티무르는 창조자라고 말한다. 언덕 북동쪽에는 성내의 터가 선명한 형태로 남아 있다. 유명한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실제로 나는 이곳 아프로시압 박물관에서 여러가지 모습을 그린 벽화를 보았다. 벽화 원본이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생생한 색상으로 남아 있다.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도 있다. 궁전 벽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주의 궁전에서 발견된 사절도다. 7세기 중앙아시아 소그디아 왕국의 바르후만 왕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각국 사절단의 모습을 그린 벽화다. 사절단 중에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인물이 담겨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 간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비로운 정경이다. 이것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에게는 양국의 오랜 교류를 증명하는 특별한 세계문화 유산이다. 그외 도자기와 도자기를 굽는 시설물 등 많은 유물이 있다. 알렉산더 초상화도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대하여, 사마르칸트에 대하여 많은 역사를 보고 배운 훌륭한 박불관이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가정집 현지중식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현지인 가정집으로 향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조혼 풍습이 있다. 여자는 19세~23에 시집을 간다. 남자는 23~25세에 장가를 간다. 현지인 가이드도 지금 30세인데 21세에 결혼하여 아기가 둘이고 태중에 한명이 더 있단다. 이곳은 다산 문화다. 막내가 부모를 모신다. 현지인 가정집 식당에는 벌써 음식을 한가득 차려 놓았다.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하는 것이 이 나라의 음식 문화 예절이다. 고기 종류도 많고, 포도, 사과, 수박, 토마토, 복숭아 등 과일도 푸짐하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포도나무가 지붕을 이뤄 그늘을 만든다.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름다운 풍경까지 선사해준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학생 캠프 공원
이 나라는 학생들이 목화를 따러 간다. 지금 지나가는 곳도 학생 캠프 시가지인데 학생들이 없다. 학생들이 목화를 따러 갔기 때문이다. 9월이나 10월 한달 동안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나라를 위해 목화 따기 봉사활동을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고 의무사항이다. 목화밭은 국가 소유이며, 국가사업이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구르에미르 영묘
사마르칸트 도심에서 모스크 같은 아름다운 건물에 다다랐는데, 이것이 구르에미르 영묘란다. 구르에미르는 왕의 무덤 이라는 뜻으로 아미르 티무르 왕이 그의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는 영묘다. 그의 스승을 모셔 있다. 원래는 1403년 이란 원정에서 병사한 무함마드 술탄의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가족의 묘가 되었다. 그 후 1405년 중국 원정 중에 오트라르, 현재 카자흐스탄에 있는 도시에서 급사한 티무르도 이 곳에 안장되었다. 돔 지붕은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건설한 것이다. 높은 탑은 미나레라고 하는데 설교시 울리라고 세우는 것이다. 정문으로 들어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복도를 따라 깊숙한 공간에 들어서자 무덤 관이 여섯 개 놓여 있다. 그러나 이 무덤 관은 모두 가묘다. 실제 묘는 지하에 있다. 정면에서부터 보면 맨 앞의 가장 큰 관이 티무르 스승 가묘, 바로 뒤쪽 검은 색 관이 티무르 가묘, 오른쪽이 아들 두 명 가묘, 왼쪽이 29세에 죽은 손자 가묘, 맨 끝에 있는 것이 울르그벡 가묘다. 영묘 곁에는 이슬람 성지 메카를 향해 세워둔 나무 기둥이 오롯하다.내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지하 실제 무덤으로 가는 문이 있다. 신학교 자리가 영묘 양옆으로 있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사마르칸트의 도심에 있는 웅장한 광장이다. 레기스탄은 모래땅, 모래광장이란 뜻으로 옛날에는 이곳이 모래로 뒤덮힌 사막이었다. 왕궁 주위를 흐르는 운하에 정기적으로 물이 높아지면 물이 넘쳐나며 모래가 많이 퇴적되어서 이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레기스탄 광장은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다. 주변에는 신학교와 모스크 건물들이 둘러싸여 있다. 광장 곁에는 싱그러운 숲 공원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이곳에 광장이 생겨나기 전에는 주위에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도공, 대장장이, 유리제조자 등의 공방들이 있었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에 위치한 레기스탄 광장은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 등이 열리던 장소다. 공공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죄인 처형 등이 행해졌다. 티무르 시대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울루그벡 시대에 처음으로 마드라사가 세워졌다.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 후 샤이바니 왕조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다른 2개의 마드라사가 건립된 이후이다. 광장 왼편에 종교건축물인 울루그벡 마드라사, 오른편에 쉐르도르 마드라사, 중앙에 틸라카리 마드라사가 세워져 있다. 마드라사는 신학교를 말한다. 아랍어로는 메드레세, 터키어로는 마드라사다. 울루그벡 마드라사는 현재 남아있는 3개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울루그벡에 의해 1420년 완공되었다. 쉐르도르는 용맹한 사자라는 뜻이다. 쉐르도르 마드라사 건축물 위에도 용맹한 사자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지폐 50숨 짜리에 들어간 장면이다. 틸라카리는 금색이라는 뜻이다. 3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였다.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광장은 명절이나 기념일 때 대규모의 콘서트나 행사가 열리기도 해서 무대와 좌석들이 설치되어 있다. 칭기즈칸이 사마르칸트를 침략하여 파괴한 후 사람들이 이 곳 남쪽 외관으로 이사 왔다. 시장이 새겼고 도시의 주요 사원이 생겼다.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은 중앙아시아의 훌륭한 유적지 중 하나다. 이 유적지에는 중세 사마르칸트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으며 사마르칸트의 수세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레기스탄 광장은 아미르 티무르 시대에는 행정, 상업의 중심지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격언처럼 사마르칸트에서는 모든 길이 레기스탄을 향한다라고 할만큼 위대한 광장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수려한 건축물 그리고 확트인 넓은 광장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마르칸트의 유적지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울루그벡 마드라사
레기스탄 광장에서 왼편에 우람하게 세워진 종교 건물이 울루그벡 마드라사다. 마드라사는 이슬람 최고의 신학교를 뜻한다. 이곳 신학교는 우즈베키스탄에 남아있는 울루그벡 마드라사 3개 중 하나다. 뒤편으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공원을 이루고 있다. 석양이 건물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쉐르도르 마드라사
레기스탄 광장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마드라사로 웅장한 신학교다. 위에는 쉐르도르는 사자가 그려졌다라는 뜻으로 쉐르도르 메드라사Sherdor Madrassah 건축물 입구 아치에는 어린사슴을 쫓는 용맹한 사자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사자보다는 호랑이에 훨씬 가깝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200숨짜리 지폐의 모델 문양이 그려져 있는 유명한 마드라사다. 그 만큼 위상이 높은 교육기관이다. 마드라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 탐방했다. 정원에는 나무와 벤치가 있고 사람들이 앉아있다. 부하라의 나지르 지반베기 마드라사의 것과 같은 사람 얼굴 형상의 태양도 그려져 있다. 이 마드라사는 1636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지어졌고, 부하라의 것은 이보다 앞선 1622년 세워진 것이므로 쉐르도르 마드라사가 표절을 한 것 같다. 본래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지만, 간혹 그 시대의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금령을 깨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쉐르도르 마드라사를 설계하고 감독한 건축가는 마드라사가 완성되자 무슬림으로서 이슬람 교리를 어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자살을 했다. 울루그벡 마드라사 건설 2세기 후에 쉐르도르 신학교와 틸라코리 사원이 건설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세 건물이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시대에 따른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17세기에 들어 사마르칸트의 바하두르 영주는 울루그벡 마드라사 건너편에 쉐르도르 마드라사를 건설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울루벡이 만든 하나코가 있었지만 지진으로 무너져버렸다. 영주는 맞은편에 있는 울루그벡 마드라사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쉐르도르 중앙의 뜰은 2 층으로 된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울루그벡 마드라사와 달리 사원은 없고 충 52 개의 방이 있다. 지금은 신학교가 아니라 공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건물 내부에는 아름다운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곳곳의 방을 둘러보고 나왔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틸라카리 마드라사
레기스탄 광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마드라사다. 1647년 쉐르도르 마드라사를 세운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급히 세워진 신학교 마드라사다. 쉐르도르 마드라사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문양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수 많은 무슬림들의 불만을 샀다. 그래서 그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이슬람 양식으로 더욱 더 화려하게 이 마드라사를 건축하였다. 틸라카리는 '금박으로 된'이라는 뜻이다. 마드라사 안으로 들어가보니 좌측편 푸른 돔 아래의 예배당의 벽면과 천장을 모두 금빛으로 장식하여 화려하다. 천장의 돔 모양을 보면 둥글게 보이나, 사실은 세밀한 표현으로 둥글게 보일 뿐 사실은 평면이다. 현재 예배당 내부는 19~20세기의 레기스탄 광장을 비롯한 사마르칸트 유적지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 그림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념품 상점도 있다. 쉐르도르 마드라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시가지 공원
레기스탄 광장에서 비비하눔 모스크로 걸어가면서 본 사마르칸트 시가지 공원이다. 울창한 나무가 많고 곳곳에 낙타 등의 조형물을 설치해 두어 아름답다. 또한 이곳은 학생캠프가 있어 학생들이 종종 보인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비비하눔 모스크
시가지 공원을 따라 걷다가 비스듬히 내려간 곳에서 아름다운 비비하눔 모스크를 만났다. 이곳은 티무르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지은 모스크라 하여 가슴 설레게 하는 유적지다. 석양이 드리워 그윽한 그리움이 더욱 진하게 차오른다. 입구에서부터 대리석을 깔아 윤기가 촉촉하다. 곁에는 사마르칸트 바자르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고운 꽃과 잔디가 정원을 채우고 또 하나의 웅장한 건축물이 서 있다. 돔 지붕의 모스크 건물이다. 그런데 그곳은 문을 닫아 두어 외형만 살펴보았다. 가까이에서는 둥근 돔지붕이 보이지 않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모스크 위로 푸른 빛 돔이 찬연하게 보인다. 비비하눔Bibi-Khanum은 티무르가 사랑한 중국인 왕비의 이름이다. 가장 높은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비비하눔 모스크는 아미르 티무르가 가장 총애하던 사라이 물크하눔 부인이 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인도로 원정 떠난 티무르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교 이 거대한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티무르가 돌아오기 전까지 완공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때 왕비를 남 몰래 사랑하던 건축가가 왕비가 자신에게 입맞춤을 해주면 완공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건축가와 입맞춤을 하게 되었는데 왕비의 볼에 건축가의 입맞춤 자국이 남게 되었다. 돌아온 티무르는 거대한 모스크를 보고 기뻐했지만 왕비의 입맞춤 자국에 화가 나 건축가를 사형시켰고 왕비에게는 차도르를 쓰도록 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그후 왕비는 완성된 미나레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도 한다. 모두 근거가 없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라고도 전해진다. 사실은 1398년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의 개선 기념으로 지어졌다. 1399년에서 1404년까지 아무르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다. 가로 167m, 세로 109m의 사각형 회랑에 50m 높이의 거대한 미나레트와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돔이 아름다운 모스크다. 내부는 다각 모양 안에 대리석과 테라코타, 윤기 나는 모자이크, 푸른색과 금색으로 그려진 프레스코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건축 기술에 한계가 있어 조금씩 수년에 걸쳐 부서지다가 1897년 지진으로 무너져 내렸다. 비비하눔 모스크의 아름다움은 바로 중앙에 있는 모스크의 크고 푸른 돔이다. 돔 지지대에는 알라에 대한 찬사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뜰의 중앙에는 울루그벡이 세운 코란 경대가 남아있다. 아주 커다란 돌로 만들어져 있다. 비비하눔 사원 입구에서 보면 맞은편에 푸른 돔 지붕의 모스크 건물이 또 하나 있다.원래 모스크와 함께 만들어진 신학교였다. 신학교의 뜰에는 비비하눔이 자신의 어머니 영묘를 만들었고 후에 자신도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 옛날 비비하눔과 아무르 티무르 왕의 진한 사랑이 고인, 인간적인 정이 흐르는, 그리고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잠들어 있는 영묘까지 보며 가슴 훈훈한 시간이었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바로 곁에 잇는 사마르칸트에 가서도 곳곳에서 전경이 보였다. 오래도록 그리움으로 남을 여정이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바자르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성벽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중동부에 남아 있는 역사 유적 도시다.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14~15세기 티무르 제국 때 특히 번창하였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실크 상인들이 서양으로 실크를 판매하려고 이용하던 육로이기도 하다. 그들로 인해 실크로드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마르칸트는 유럽과 동양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리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주요 무역도시였다. 3,4세기 아프로시압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마을을 이루고 생활해 왔을 때부터 이곳은 고대 그리스에 마라칸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도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그 유적이 아프로시압 언덕에 남아있다. BC 4세기 초에 알렉산더 대왕이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는데, 그로 인해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7세기초 아랍인들의 군대가 침입했다. 그들은 사마르칸트를 바그다드와 중국 사이를 오가는 상단의 교역지로 번영시켰고,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1220년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사마르칸트는 완전히 파괴되어 번영과 영광의 빛을 잃게 되었다. 14세기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 왕이 사마르칸트를 티무르 왕조의 수도로 정하면서 다시 찬란한 영광의 도시가 되었다. 티무르 왕이 통치했던 35년 동안 그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서 이름난 건축가들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여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 사마르칸트는 15세기까지 티무르 왕조와 함께 번영을 누렸다. 우즈베키스탄은 1868년 러시아 군대의 침략으로 러시아의 종속국이 되었다. 1925년부터 1930년 타슈켄트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도였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사마르칸트 성벽이 그 옛날의 번영과 영화를 빛내며, 아니 외침으로 짓밟힌 고뇌의 아픔을 토로하며 우람하게 도로변에 서 있다. 이슬람 공동 묘지도 있다. 이슬람 성지이기도 하다. 이제 성벽을 끝으로 사마르칸트 탐방은 끝났다. 오늘은 1만보 정도 많이 걸었지만 내일은 2천보 정도로 조금 걷는단다. 사마르칸트에서 샤크리샵을 거쳐 부하라까지는 350Km란다. 우리는 내일 샤크리샵으로 가서 유적을 탐방하고, 다시 부하라까지 갈 것이다. 모두 티무르의 족적을 따라 가며 역사 유적을 탐방하는 것이다. 가는 길에 목화밭이 많을 거란다. 하얗게 핀 목화밭을 보고 가란다. 어느 도시의 시장이 목화밭을 방문한다고 하면 당일에 도로를 포장하기도 한단다. 길가의 가로수로는 뽕나무도 많단다. 실크를 생산하는 곳이어서 그렇단다. 모든 것이 기대되는 여정이다.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사마르칸트, 샤크리샵, 부하라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호텔
호텔이 매우 아름답다. 높이 솟아 있지 않고 길게 옆으로 자리하여 긴 복도를 따라 이동한다. 호텔 정원에는 나무도 많고 건물 색상도 곱게 장식해 놓았다. 한적한 주변 풍경도 아름답다. 아침 조식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호텔 문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데 내 곁으로 사장이라는 건장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곳 주민들은 외지의 사람을 그렇게 반가워 한단다. 이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학교
사마르칸트 호텔을 떠나 샤크리샵으로 간다. 시가지를 벗어난 무렵 사마르칸트 학교 건물이 보인다. 나는 전직 교사다. 그래서일까. 여행 중에 학교를 만나면 참으로 반갑다. 학교 뒤 큰 산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시골마을
사마르칸트 도심을 떠나 시골 마을로 접어든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포도밭, 토마토밭이 있어 정겨운 풍경이다. 사마르칸트는 포도주 생산 도시다. 길가에서 농산물을 판매하기도 한다. 당나귀 타고 들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넓은 들녘에서 가축들이 방목으로 풀을 뜯는 풍경이 목가적이다. 사막 건조한 농토에 물을 주어 기르는 농경지대도 있다. 연 강수량이 300m인 곳이다. 모래와 바위로 들어찬 민등산이 황막하다. 우리는 오늘 저 산 너머에 있는 샤크리샵으로 간다. 저 산길은 자가용만 허락된 길이다. 험한 길이어서 우리가 탄 대형버스는 산길을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산을 빙 둘러서 먼 길을 가는 것이다.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고 그런 이유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이곳 장례문화는 가로 2m, 세로 1m의 공간에 시신을 넣고 흙을 덮지 않고 벽돌을 올린다. 더러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하여 살아날까봐 구멍을 내놓기 위해서다. 우즈베키스탄 현지 주민 남자 가이드는 한국어를 전공하였는데도 한국어가 어렵다고 한다. 부하라에 가서 현지 주민이 우리에게 '너 한국 사람이야?'라고 해도 이해하란다. 한국어가 어려워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런 것이란다.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사마르칸트의 들녘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한 시간이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검문소
사마르칸트에서 샤크리샵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검문소가 있다. 작은 건물이 하나 있고, 제복을 입은 직원이 자가용을 세워 운전자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며 기록하는 것 같다. 우리 버스 잠시 멈추었다가 검문소를 통과하여 샤크리샵으로 넘어갔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농촌 방목 가축들
민둥산 산자락 아래 농촌 마을이 있다. 가축을 방목하여 기른다. 여인이 가축을 돌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인구 3천 명인데 1천 명 정도는 외국에 나가 외화 돈벌이를 한다. 한국에 나가 일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월 150만원에서 200만원씩 보내온다. 러시아에 나간 사람들은 80만원 정도 보내온다. 이곳 월급은 경찰이 40만원 정도이고, 보통은 30만원이다. 자국에서보다 높은 수준의 외화벌이를 하는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건조하지만 샤크리샵은 녹색 도시다. 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버스는 샤크리샵을 향해 계속 달려간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시골마을 노천시장
길가에 장터가 열렸다. 큰 노천시장이다. 차량에 물건을 싣고 와서 차에서 판매한다. 주로 농산물이다. 수박 6Kg 한덩이가 한화로 700원 정도다. 토마토 1Kg에 500원이다. 매우 싼 값이다. 겨울에는 비닐 하우스에서 재배하여 비싸다. 농장을 운영하는 한인 경영자가 있는데 돈을 많이 번다. 한국에서 난로 등 설비를 가져와서 설치하여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 건조한 나라에서 그래도 과일은 풍성하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고속도로변 풍경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보는 풍경은 거의 사막이다. 버스는 들녘 땅과 같은 높이에 건설된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그리 위험한 속도는 아니다. 시속 80Km의 느린 속도인데도 가끔씩 검문소가 있어 고속도로의 속도를 줄이게 한다. 구소련시대에 건설한 도로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덜컹덜컹 요동치기도 한다. 사막에는 전갈과 뱀 등이 많다. 그래서 사막을 여행할 때는 그런 것들에 물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길가에 양, 소, 말 등 방목하는 풍경이 정겹다. 산도 민둥산이다. 더러는 물을 주어서 인공으로 나무를 키우고 작물을 재배하는 마을도 보인다. 가도가도 건조한 사막은 계속 이어진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농촌 당나귀 마차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서 한적한 농촌 마을길로 접어 들었다. 당나귀 마차가 풀섶에 멈춰 있고 당나귀는 풀을 뜯는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곁에 있고, 두 청년이 우리들에게 손을 흔든다. 한국의 60년~70년 같은 풍경이다. 어릴 적 고향에서 보았던 우마차와 유사하다. 진풍경을 만났다. 이 나라에서 당나귀는 아주 소중한 교통수단의 동물이다. 한 마리의 값이 여름에는 20만원 정도 한다. 겨울에는 2만원 정도다. 당나귀 고기는 안 먹는다. 사람에게 충성하는 동물이어서일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농촌 건조한 땅
농촌 마을에서 첫 대면은 건조한 땅이다. 그래도 저곳에는 지금 밀을 뿌려 놓았다. 내년에는 저곳에 목화를 심는다. 이 나라에서 땅은 모두 국가 소유다. 개인에게 경작을 50년~100년 정도의 기간으로 임대로 빌려준다. 현지 가이드 가족도 국가 땅을 임대하여 사용하는데 250평을 1년에 2만원 정도 낸단다. 여기에 집도 지고 나머지 땅에는 농사를 짓는단다. 온돌이 없는 나라다. 나무 바닥에 카펫트를 깔고 생활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혼수로 카펫트을 짜 온다. 물은 모두 지하수를 사용한다. 먼 나라에서 낯선 풍경을 보며, 낯선 이야기를 들으며 흐뭇하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광활한 목화밭
샤크리샵 들녘에서 최초로 목화밭을 만났다. 광활한 목화밭이다. 앞으로도 저런 목화밭은 많이 볼 거란다. 목화는 손으로 따야 한다. 손으로 따면 3~4회 수확하는데 기계로 따면 1회만 생산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동원해서 목화를 따는 것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목화를 50Kg 따면 빨리 기숙사에 들어간다. 기숙사에서는 자기 집에서 가지고 들어온 그릇에 음식을 배식받아, 자기가 가져온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먹는다. 목화의 75%를 수출한다. 한국으로 7% 정도 수출한다. 유년시절 우리 집에서도 목화를 재배했다. 목화 송이가 터지기 전에 열매를 따 먹으면 씁쓸하면서도 달콤했던 기억이 난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농촌마을 길가 수로
농촌 마을 길가에 수로가 있다. 건조한 지역에서 물줄기를 보니 참으로 반갑고 흐뭇하다. 이곳은 모두 지하수를 사용한다. 물이 흐르는 주변에 나무들이 울창하다. 저 물은 식수가 되고, 농사를 짓고, 나무를 키우고, 아주 소중한 물을 운반하는 수로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사막 노천 휴식
고속도로변에 휴게소가 따로 없다. 그저 사막 벌판에 잠시 쉬어 휴식한다. 사막에 방뇨도 한다. 남자는 길을 건너 저쪽에서, 여자는 버스가 정차한 이쪽에서 볼일을 본다. 일행들이 곳곳 드넓은 사막에 앉아 흩어져 소변을 본다. 화장지는 절대로 사막에 버리면 안 되어 들고 나왔다. 소련제 30년 된 차가 많다. 우리의 버스 앞에 당나귀를 끌고 온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외지의 길손에게 당나귀와 함께 사진을 찍도록 허락하고 돈을 받는다. 지금은 여름인데도 당나귀 한 마리에 3만원 정도의 싼 값에 살 수 있단다. 사막 노천 휴식을 하며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고운 낭만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사막 물길
사막을 가로지르는 큰 물줄기가 흐른다. 생명의 물이 사막 생활을 유지하도록 곳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인공으로 수로를 잘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그 물길 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서 왔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학교
사막 건조한 땅에 학교 건물이 오롯하게 들어서 있다. 튼튼하고 아름답게 잘 지었다. 규모도 제법 크다. 아이는 많은데 학교 수는 적다. 그래서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공부한다. 내가 교사로 재직하던 70년~80년대의 교육현실과 동일하다. 나도 오전, 오후반 수업을 했었다. 그날의 아득한 추억이 떠오른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농촌생활 풍경
지금 지나가는 곳은 대부분 건조한 사막지역이다. 가끔씩 농촌 마을이 나오지만 물을 인공으로 주어서 나무도 기르고, 농작물도 재배하는 것이다. 조금 풍요로운 농촌생활이 보인다, 집도 벽돌로 지었고, 사람들이 모여 한가로이 노는 모습도 보인다. 사막지대에서는 움집 같은 시원한 게르를 짓고 산다. 이 지역에도 목화밭이 매우 큰 규모로 있다. 목화를 따는 사람도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가스 충전소
우즈베키스탄은 천연가스가 생산된다. 도로변애 가스 충전소가 있다. 우리나라라면 주유소가 있어야 할 곳에 가스 충전소가 있는 것이 이색 풍경이다. 가스를 충전하려고 온 자동차도 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마을 물길
농촌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물길을 또 만난다. 건조한 사막이 보이다가, 농촌마을이 보이고 어김없이 물길이 흐를 때면 참으로 반갑고,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물인데, 우리나라는 그 귀함으로 모르고 살지만 이곳은 정말 귀한 것이 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사마르칸트에서보다 샤크리샵에서 물을 많이 본다. 이 지역이 물이 더 많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가스관
마을 담장에 가스관이 설치되어 있다. 매설하지 않고 모두 밖으로 드러나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천연가스가 생산된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으로 가스를 사용한다. 가정집에서 난방비까지 합하면 월 2만원 정도 들고, 보통은 월 1만원 정도 가스요금을 낸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재래시장
조그만 마을 중심을 지날 때 만난 재래시장이다. 여기서는 농작물보다 생활필수품을 더 많이 판매하고 있다. 주로 길가에서 팔고 산다. 정겨운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도로변 당나귀 타고 가는 아이들
우리가 지나가는 도로변에 당나귀를 타고 가는 아이들이 있다. 두 남자 아이가 함께 당나귀 등에 타고 간다. 우리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든다. 어린 형제가 당나귀를 타고 집으로 가는 것 같다. 낯선 이방인에게 따스한 손길이다. 도로변 물길에는 물이 풍요롭게 흐르고, 곁에는 소를 방목하고 있다. 모두 진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나무로 집 짓는 모습
이 나라 사람들은 주로 나무로 집을 짓고 산다. 나무가 수명이 더 길다. 또한 여름에 시원하다. 나무로 집을 짓는 모습을 실제로 지금 보고 있다. 흙으로 벽을 쌓고 지붕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세워 놓았다. 신기한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농촌 풍경
푸른 물결이 흐르는 농촌마을을 또 지나간다. 동물과 사람이 들녘에 같이 있다. 옥수수를 심어놓은 집도 있다. 큰 나무도 있고, 농토도 보인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고운 목화밭 솜송이
목화밭을 또 만났다. 이곳 목화는 하얗게 솜송이가 피었다. 고운 풍경이다. 목화 나무는 빵 굽는 떌감으로 사용한다. 목화와 나무와 파란 농토가 잘 어우러진 마을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들녘 동물들
들녘에 방목하는 동물들이 많다. 곁에는 목동도 보인다. 풀을 뜯고 있다. 자연 그대로 사육하는 모습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물길
샤크리샵 시가지로 갈수록 물길이 더 많고 물도 더 많이 흐른다. 확실히 이곳은 물이 많은 지역이다. 물이 많을 수록 나무도 더 많고 농토에도 작물이 더 충실하다. 우리는 물길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 가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뽕나무 가로수
뽕나무 가로수가 많다. 실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뽕나무 아랫 부분은 하얗게 벌레 방지 약품을 칠해 놓아았다. 크고 작은 뽕나무들이 계속 스쳐 지나간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들녘 긴 화물열차
들녘에 긴 화물차가 있다. 아마도 목화를 실어 나르는 열차인듯 하다. 그런데 가이드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스탈린이 고려인을 실어서 보낸 열차란다. 고려인을 쫓아 낼 때의 일이다. 살 곳도 없이 황막한 벌판에서 고생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말이라면 바라보기조차 소슬한 기차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목화밭 목화 따는 정경
목화 따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들이 주로 딴다. 현지 가이드도 대학생일 때 목화 따기에 참여했단다. 가이드는 한국어를 전공했단다. 부인도 한국어과를 함께 졸업햇단다. 목화 딸 때 기숙사로 한국어과 교수가 먹을 것을 많이 갖다 주어서 다른 과 학생들이 부러워 했단다. 한국어과 교수는 목화밭에는 안 가지만 그렇게 먹을 것을 많이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고 말한다. 목화 따는 정경이 목가적인 낭만을 선사한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시가지
샤크리샵 시가지에 접어 들었다. 허름한 도시다. 길가 정육점에는 그 옛날 우리나라 시장처럼 쇠고기를 매달아놓고 판매한다. 이곳은 아미르 티무르의 고향이다. 그래서 그의 족적을 따라 역사 탐방을 온 것이다. 샤흐리삽스 또는 샤크리샵이라는 도시는 200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약90km 떨어져 있다. 인구 58,000여 명의 작은 도시이다. 샤크리샵은 14세기부터 녹색 도시 라는 뜻인 샤크리샵이라고 불렸으며, 이름에 걸맞게 도시가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2,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돌궐제국의 침입, 아랍세력의 침입 그리고 몽골제국의 점령 등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샤크리샵 시가지의 모습과 유적들은 대부분 티무르 제국 시절에 건설된 것이다. 아미르 티무르는 늘 고향인 샤크리샵을 기억하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티무르 왕의 고향에 진입한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악사라이 궁전 티무르 동상
샤크리샵에서 먼저 악사라이 궁전을 탐방했다. 샤크리샵은 티무르의 고향이기도 하고, 또한 이 악사리 궁전은 티무르가 지었다. 궁전 앞의 큰 광장에 티무르 동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티무르 동상이 서 있는 주변은 약간 높은 지대를 이루었고 잔디로 파랗게 가꾸어 놓았다. 분수로 물을 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 아무르 티무르 왕을 만나기 위해 찾는 곳이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다. 재위 기간은 1369년∼1405년이다. 그는 게시, 현재의 샤크리샵의 귀족 출신으로, 계보는 칭기스칸에 이어진다고 전한다. 서차가타이한국汗國의 카잔의 딸을 정비로 삼았다. 전투에서 오른발을 다쳤기 때문에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불리기도 했다. 1360년 칸이 침입했을 때 군사를 일으켜 몰냈고, 1370년에는 군주가 되어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후 티무르는 매년 각지로 원정하여, 1380년에는 코라즘을 병합하였다. 그리고 5회에 걸쳐 동차가타이한국을 공격하여 마침내 1397년에는 이를 복종시켰다. 이란 지방에 대해서는 1380년에 카르토 왕조를 멸망시키고, 1393년에는 자라일 왕조의 군주 아마드를 바그다드에서 몰아냈다. 1395년에는 모스크바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1398년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인도 북방지역을 공격하였고 마침내 인도 내륙으로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고 많은 재화를 약탈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동방의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으나,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였다. 사마르칸트 구르에미르에 그의 무덤이 있다. 1941년 그 유적이 발굴되었다. 여기 오기 전 사마르칸트에서 그의 가묘를 보고 왔다. 그의 성격은 매우 대담하고 용맹스러운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의지가 강하며 준엄하였지만, 또한 학자와 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동상 앞에서 서니 그의 정복에 대한 집념도 보이고, 인간적인 고뇌도 보인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악사라이 궁전
그 옛날 화려했던 궁전이 있던 자리는 공터가 되어 있다. 공터의 광장에 티무르의 동상이 오롯하게 세워져 있다. 주말이면 결혼식을 올린 신랑 신부가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이 온다. 티무르 동상을 먼저 보고 한참을 걸어서 악사라이 궁전으로 갔다. 허물어진 궁전이 지금은 볼품 없지만, 넓은 정원이 자리한 것으로 보아 그 옛날 궁전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무르는 생시에 중앙아시아를 보려면 이곳 악사라이 궁전을 보라고 했다. 그 만큼 큰 규모임을 뜻하는 대목이다.샤크리샵 중심부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티무르 왕의 여름 궁전이다. 악 사라이를 그대로 직역하면 하얀 궁전이지만, 고귀한 궁전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티무르가 호레즘을 비롯한 점령지에서 최고의 장인들을 징집하여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늠 모스크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설토록 직접 지시하였다. 앙상하게 뼈다귀 건물 두 덩이만 우뚝 서 있는 궁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원래는 문에 아치 돔이 있었는데 무너져서 없어졌다. 1380년부터 24년에 걸쳐 건설한 것 궁전이다. 보잘 것 없는 작은 규모만 남았지만 역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티무르가 여름에 머물면서 정무를 보았던 장소다. 별장 겸 접대의 궁전이었다. 성문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는데 116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도 있다. 악사라이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궁의 명칭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 만큼 이곳은 우즈베키스탄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악사라이 궁전 외경
악사라이 궁전을 나왔어도 한참 동안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 허물어진 건물 덩이에 불과하지만, 앉은 자락으로 보아 큰 규모의 궁전이라는 증명이다. 푸른 잔디 정원과 나무들이 싱그럽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시가지 주상 복합 건물
샤크리샵은 티무르의 고향이어서 방문객이 많다. 그래서일까. 악사라이 궁전에서 이동 하는 중에 잘 지어 놓은 주상 복합 건물을 보았다. 구조도, 색상도 세련되어 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코쿰바스 모스크
도로변에 한참 보수 중인 웅장한 건축물이 있다. 코쿰바스 모스크다. 악사라이에서 궁전에서 시장 길을 따라 내려와서 만났다. 안으로 더 들어가니 아름답고, 여러가지 기능을 했던 푸른 돔 지붕의 모스크가 있다. 코쿰바스는 푸른 돔이라는 뜻이다. 1437년 울루그벡이 아버지 샤흐루흐를 위하여 지은 사원이다. 독특한 느낌의 기둥과 천장이 있는 큰 복도를 지나 중앙의 뜰로 이어진다. 오른쪽 푸른 돔 아래의 건물이 바로 사원이다. 이 사원의 벽은 다른 사원의 조각된 벽과는 달리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다. 매우 아름다운 모스크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코쿰바스 모스크 원경
코쿰바스 모스크를 나와 정원을 따라 안으로 걸어 갈 때 점점 멀어지면서 보이는 코쿰바스 모스크는 더욱 아름답다. 푸른 색 돔 지붕이 찬연한 빛이다. 모스크 전경이 시야에 오롯하게 담겨온다. 정원 가운데에는 큰 연못이 있어 더욱 비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이맘 궁전
코쿰바스 궁전에서 한참을 걸어오니 우뚝 서 있는 건물이 있다. 이맘 궁전이다. 이맘은 이슬람 종교의 지도자를 뜻한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머물던 곳인 것 같다. 허물어진 외벽에 역사의 흔적이 고여 있다. 이곳 안에 티무르의 아들 가묘가 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티무르 가묘
코쿰바스 모스크 사원의 뜰 안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티무르의 가묘를 비롯한 그의 가족 가묘가 있다. 먼저 간 곳은 티무르의 가묘다. 허름한 건물의 지하에 있다. 머리를 숙이고 계단을 따라 어렵게 들어가서 만났다. 티무르는 29세 나이였던 그의 손자가 죽자, 내일 모레 나도 죽겠다고 했다. 그로인해 이곳에 가묘를 건설한 곳이다. 이곳은 그의 고향이어서 더욱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은 갔는데 가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티무르 아들 가묘
이맘 궁전에서 티무르의 네째 아들 가묘를 보았다. 하얀 색 천으로 덮어 놓았다. 티무르의 세째 아들 가묘는 공사 중이어서 보지 못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이맘 궁전 호두나무 기둥
우즈베키스탄은 호두나무가 많다. 그래서 이맘 궁전 기둥이 모두 호두나무다. 기다란 기둥이 아름다운 문양으로 높은 지붕을 받들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이맘 궁전에서 만난 아이
이맘 궁전 앞에서 천진한 아이를 만났다. 우리 부부를 보고는 손을 흔든다. 같이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외지인을 만나면 매우 호기심을 가지고 정겹게 다가온다. 정겨운 시간이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악사라이 궁전 원경
코쿰바스 모스크와 이맘 궁전, 티무르 가족 가묘 등을 보고 나오는데 멀리 악사라이 궁전이 보인다. 조금 전에 갔던 궁전이다. 그때도 큰 규모를 보았는데 지금도 역시 우람하고 큰 규모를 보여준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시가지 풍경
코쿰바스 모스크를 떠나 이동하면서 본 샤크리샵 시가지는 그래도 잘 다듬어져 있다. 건물도 잘 지었고, 도로도 넓다. 여인네들이 손잡고, 또는 아이를 안고 나들이 하는 모습이 정겹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호두나무
우즈베키스탄은 호두나무가 많다. 이곳 샤크리샵에서도 호두를 많이 본다. 큰 호두나무에 호두 열매가 열려 있다. 나의 고향집에도 어릴 적에 호두나무가 있었다. 호두의 파란 겉껍질을 벗겨 까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가정집 현지 중식
중식은 현지인 가정집에서 했다. 정원에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아늑한 식당이다. 우리 일행 말고도 옆에는 다른 외국인들이 식사를 한다. 그 중에는 벨기에 여행객도 있다. 지난번 현지인 식당에서도 만났는데 또 만나니 반갑다. 여러 탐방지에서도 만나게 되어 낯익은 얼굴들이다. 우리 부부는 벨기에에 다녀왔다. 작자민 큰 자부심으로 사는 다부진 국가였다. 그날의 고운 추억을 부르는 반가운 벨기에 여행객이다. 견과류를 비롯한 만두, 쇠고기 감자 스프, 가지요리, 토마토와 사과와 복숭아 과일 등 풍성한 식단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마을 가스관
샤크리샵 마을에 수많은 가스관이 연결되어 있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크고 작은 가스관들이 질서있게 뻗어 나간다. 우리나라는 지하에 가스관을 매설하지만, 이곳은 지상에 가스관을 설치하여서 그렇다. 이런 모습은 코카서스 3국인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에 갔을 때도 많이 보아온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수박 트럭
우즈베키스탄은 농산물이 풍부한 나라다. 수박을 가득 실은 트럭이 마을 도로변에 있다. 몇 명이 마무리 작업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시장에 내다 팔려고 준비하는 것 같다. 곁에는 건초를 가득 실은 트럭도 보인다. 풍요로운 정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화물열차
샤크리샵을 떠나 부하로 이동하는 중에, 들녘에 놓인 화물열차를 또 만났다. 이번에는 아까 만났던 화물열차보더 더 길고 우람한 화물열차다. 철로가 들녘을 가른다. 스탈린이 블라디보스톡에 한인 문화가 번창해지자 고려인들을 저 화물열차에 실어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으로 내몰았다. 우즈베키스탄에는 고려인과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여기서 고려인은 북한의 고려인을 말한다. 신분증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많이 사망하기도 했다. 생존자들은 양파, 쌀 등의 농사로 생활해 살아간다. 한가득 목화를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라고 듣고 싶었는데, 물론 목화 운반도 하지만 우리 동포들을 실어다 버린 화물열차라 하니 가슴이 서늘하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드넓은 목화밭
광활한 목화밭은 또 만났다. 목화가 한가득 풍요로이 넘실거린다. 샤크리샵에서 부하라까지는 5시간 정도 소요되는 먼 거리인데, 저녁 6시에나 도착할 예정인데 저런 고운 풍경이 보람된 여정을 선사해준다. 목화는 모두 국가의 것이다. 현지 남자 가이드는 목화를 볼 때마다, 대학생 시절 한달 간 집을 떠나 기숙사에 머물며 목화를 따던 아픈 추억으로, 고운 목화가 곱지 않고 기쁘지도 않단다. 아직 우즈베키스탄은 사회주의다. 그래서 저 목화밭은 정치적인 이해를 해야 곱게 보인단다. 그런 연유는 우리에게는 중요하 건 아니고, 유년의 고향집 목화밭이 보여 참으로 행복한 회억에 젖게 한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아득한 사막 풍경
아득한 사막 능선이 보인다. 줄기차게 달리는 도로변에서 만난 우람한 사막 풍경이다. 간간이 사막 땅에는 풀들이 자란다.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보았던 그와 유사한 풀더미들이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들녘 건초더미
농가의 주변 밭에 건초더미가 많다. 겨울용으로 저장하는 가축들의 사료다. 동물들이 여름에는 풀을 뜯어 먹고 살기 때문에 먹이를 따로 주지 않지만 겨울에는 저 건초를 주어 기른다. 농촌 곳곳에서 많이 보아온 정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목화 따는 사람들
광활한 사막 가운데 목화밭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인공으로 물을 주어 기르는 국가의 목화 사업이다. 사람들이 목화를 딴다. 곁에는 트럭도 들어와 있다. 목화를 운반하는 차량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사막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사막 도로변에 잠시 정차하고 휴시시간을 가졌다. 아득한 사막이다. 부하라는 사막도시다. 샤크리샵과는 다른 풍경이다. 부하라에 점점 가까와지고 있다. 사막에 지은 마을은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는다. 신비로운 진풍경에 사막 안으로 들어가 거닐어 보았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시골마을 정경
사막 한 가운데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시골 정경이 보인다. 건조한 땅에 건초더미가 군데군데 놓여 있다. 육안으로 보아도 온통 건조한 영토다.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몸을 식힌다. 사막에 지은 마을은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는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사막 휴식
사막에서의 휴식은 말 그대로 휴식이기도 하지만 소변을 배설하는 시간이다. 드넓은 사막에 남자와 여자가 양편으로 나뉘어 가서 건조한 땅에 물을 주는 심정으로 소변을 본다. 천연의 땅에 오물이 될까 미안하기도 하지만 휴게소 시설이 많지 않은 탓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 화장지는 절대로 버려선 않되고 가져와야 한다. 시베리아 여행 중 자작나무 울창한 숲에서, 지금처럼 휴식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오늘도 먼 나라에서 이색 체험을 했다. 먼 후일 이것도 잊지 못할 고운 추억이 되리라.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고속도로
이곳 고속도로는 상태가 좋지 않다. 한국의 고속도로를 기대하면 안 된다. 매년 보수 공사를 해도 고속도로가 여름에는 녹고, 겨울에는 얼어 깨져서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버스가 많이 흔들린다. 한국인이 놓은 고속도로도 있는데 그곳은 상태가 좋단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석유 채취 기계
사막 들녘 곳곳에 석유 채취 기계가 설치 되어 있다. 석유가 많이 나오진 않는단다. 건조한 사막 가운데 생명처럼 솟아 오른 것이 진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민가 방목 동물들
농촌 민가 마을에 방목한 동물들 풍경이 정겹다. 가축도 많고, 아이와 어른이 많이 나와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국가인데 80%가 온건주의인 수니파이고 20%가 과격한 시아파다. 금요일은 이슬람 대예배인 주마가 있는 요일이다. 남자는 3세에서 10세까지 할례를 한다. 이 나라에는 아직 사회주의라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 우즈베키스탄 병원은 모두 무료다. 국가에서 의사에게 봉급을 준다. 기차를 탈 때 검색을 철저히 한다. 불편해도 그것은 인전을 위한 것이다. 이 나라에도 IS 가 있단다. 사막의 풀들은 낙타, 양, 소 등 동물이 먹는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노천 수박 상가
버스가 지나가다가 도로변에 잠시 멈춰 섰다. 노천 수박과 멜론 상가에서 과일을 사기 위해서다. 현지 가이드는 친절하여서, 우즈베키스탄의 수박과 멜론이 맛있다고 사 준다고 한다. 인솔자와 가이드가 내려서 살펴 보고 있다. 그런데 싱싱하지 않다고 그냥 들어온다. 다음 기회에 사주겠단다. 수박과 멜론이 참 많이 놓여 있는 정경을 본 흐뭇한 시간이었다.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목화밭
고속도로변에서 또 거대한 규모의 목화밭을 보았다. 정말 수많은 목화밭이 전개되는 국가다. 왜 학생들을 동원하여 목화를 채취해야 하는지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사막을 활용하는 훌륭한 국가 사업이라는 대목도 이해 되는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가스 생산 공장
검문소를 만났는데 관광버스는 검색을 하지 않고 그냥 통과시킨다. 중앙아시아에 100년 기찻길도 있단다. 부하라는 석회수라서 호텔의 물도 끓여 먹거나 생수를 먹으란다. 하얀 땅이 나오면 부하라란다. 소금기가 많은 지역이어서 그렇다. 이제 부하라에 가까운 영토다. 산도 바다도 없는 광활한 사막 평원에 가스 생산 공장이 우람하게 큰 규모로 들어서 있다. 부하라에는 저런 가스 생산 공장이 많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들녘 가스관
사막 들녘에 길게 가스관이 놓여 있다. 가스 생산 공장에서 생산한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관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들녘 수로관
사막 들녘에 튼튼한 수로관도 있다. 가스관도, 수로관도 모두 지상에 설치되어 있다. 저 수로관은 목화 재배용 물을 운반하는 장치다. 우즈베키스탄의 둘레는 6400Km다. 도로포장 공사를 하는 것도 보인다. 이식쿨 호수에 공항도 건설하려는 계획이란다. 부자들이 개인 비행기를 타고 오는 공항이 될 것이란다. 부하라 호텔에 가면 산책을 하란다. 호텔 주변에 모스크가 많으니 돌아보란다. 긴긴 시간 동안 달리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여정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검문소
이제 샤크리샵에서 부하라 주 입구에 진입했다. 검문소를 통과한다. 소형 가동차는 멈추어서 검문을 받는데 우리의 대형 관광버스는 그냥 통과 시킨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사막 휴식
오늘은 참으로 긴 여정을 달려서 왔다. 또한 사막에서의 휴식도 여러 번 했다. 지금 머무는 사막은 그래도 주변에 나무들이 많다. 곳곳에 들어가 소변을 본다. 사막에 방뇨를 하며, 건조한 땅에 물을 주니 이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냐고 한바탕 웃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고속도로
한국에서라면 어느 지방 국도만도 못한 것이 고속도로다. 포장공법도 허술하고, 포장상태도 허름하다. 홈이 파이거나 갈라진 곳도 있다. 그래서 버스가 달릴 때 승차감이 좋지 않다. 속도도 낼 수 없어 샤크리샵에서 부하라까지 5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그래도 사막 평원과 나란한 위치에서 시원하게 뻗어나간 고속도로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사막
부하라는 사막 지역이다. 그래서일까. 종종 사막이 보인다. 모래 사막 둔덕이 예술적인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목화 창고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며 곳곳에서 목화밭을 참 많이 보아왔다. 이번에는 목화를 저장하는 창고가 들녘 가운데 세워져 있다. 붉은 지붕으로 아름답고, 큰 규모의 창고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물길
사막의 땅 부하라에서 처음 만난 물길이다. 샤크르샵에서는 여러 번 물길을 모았는데 부하라에서는 처음이다. 시원하게 들녘을 휘돌아 흐른다. 주변엔 나무들도 울창하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소금기 사막
아득한 사막이 고속도변에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하얀 색 사막이 보인다. 하얀 소금기 서린 사막이다. 저곳에서는 농사를 못 짓는다. 예전에 여기가 바다였다는 것이다. 소금기 사막에서는 풀도 안 자란다. 부하라 땅은 염분이 많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을 파지 않고, 땅 위에 시체를 놓고 흙을 덮는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석회 공장
부하라 사막 들녘에 석회 공장이 있다. 돌을 가져와서 석회로 생산하는 공장이다. 부하라는 석회가 많은 지역이어서 석회 공장이 있다. 공장 주변이 석회로 하얗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목화밭 목화 싣는 트럭
부하라 들녘에서 목화밭을 만나고, 또한 지금은 저녁 시간이라서 목화를 가득 실은 트럭도 보는 진풍경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수확해온 목화 자루를 트럭 곁에 놓고 왔다갔다 바쁘게 움직인다. 감독관 차로 보이는 자가용도 있다. 모든 목화밭은 국가 소유이고 국가 사업이다. 건조하고, 기름기 없는 사막 모래의 박토를 인공으로 물을 대어 목화를 생산하도록 가꿔 놓은 우즈베키스탄이 상당히 지혜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철도
부하라에서도 철도와 화물열차를 본다. 아마도 저것은 목화를 운반하는 열차인 것 같다. 철로가 길게 부하라를 향해 뻗어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길가 동물
길가에 동물들이 방목되어 풀을 뜯는다. 동물이 있는 곳에는 대부분 풀과 나무도 함께 있다. 동물에게는 고마운 환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시가지 도착
부하라 시가지에 도착했다. 부하라는 붉은 사막 가운데 있는 도시다. 부하라 주의 인구는 180만 명 정도다. 부하라 시내에는 35만 명이 거주한다. 우즈베키스탄에 한국교민이 3500명 정도다. 그런데 부하라에는 한국교민이 별로 없다. 옛날에는 페르시아의 일부 영토였다. 타지기스탄과 접경 지역이어서 타지기스탄 사람도 믾다. 그래서 언어가 좀 다르다. 러시아인, 고려인, 타지기스탄인, 우즈베키스탄인 등이 함꼐 산다. 각각 언어가 달라 부부 끼리도 불통될 때가 있다. 내일은 기온이 30도란다. 더워서 반팔 차림으로 나오란다.내일은 호텔에서 9시 출발하여 버스로 가서 보는 곳은 여름 궁전 밖에 없고, 모두 도보로 탐방한단다. 오후에 3시간 정도 구시가지를 걸어서 투어할 거란다. 그래서 1만 5천보 정도를 걸을 거란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 도시다. 지금 지나가는 이곳은 부하라 신시가지라서 대형마트와 아파트, 복합 건물이 많고 깨끗하다. 버스는 신시가지를 통과하여 부하라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전통공연 석식
부하라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풀고 맨 처음 간 곳은 전통공연 석식 장소다. 저녁 7시부타 8시까지 석식을 하며 전통공연을 관람한다. 이곳 건물들은 100년에서 1000년 전에 지은 오랜 역사의 건물들이다. 유네스코 지정 건물이다. 원래는 신학교였던 곳이다. 건물들이 사방으로 빙 둘러서 있다. 가장자리에 식탁을 놓아 세계 곳곳에서 온 손님들이 앉아 식사를 하게 하고, 가운데 마당에서는 많은 출연자들이 나와 전통의상을 입고 공연을 한다. 패션쇼 같은 분위기다. 남자들은 악기로 배경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른다. 우즈베키스탄의 진한 향기를 발하는 황홀한 밤의 여정이다. 여기는 우리가 유숙할 호텔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갈 때는 각자 걸어서 가란다. 이곳은 치안이 안전해서 밤중에 거리를 다녀도 괜찮다고 한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호수를 지나, 모스크를 지나, 호텔로 걸어서 왔다. 내일은 7시 모닝콜, 8시 조식, 9시 출발이다.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타쉬켄트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호텔 주변 산책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하고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지난 밤 낭만이 서린 풍경을 자세히 보지 못하여, 그 풍경을 보고 싶어서다. 조금 걸어 내려가니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호수 주변에는 말, 낙타, 사람 등의 동상을 세워 놓아 풍경을 더욱 멋있게 한다. 모스크 건물도 있다. 어제 저녁식사를 하며 전통공연을 모았던 건물에도 가 보았다. 문을 닫아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유네스코 지정 마크가 문 옆 벽에 부착되어 있다. 호텔로 다시 돌아올 때 일출이 비경이다. 부하라는 해발 650m의 도시다. 그래도 더운 도시다. 속의 옷은 시원한 차림으로, 겉에는 잠바를 거치고 하루를 시작한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호텔 출발
부하라 호텔은 상당히 웅장한 건물이다. 입구가 모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어 고풍스럽다. 여러 나라 국기도 걸려 있다. 우리의 버스 말고도 여러 대의 관광 버스가 들어와 있다. 그 만큼 많은 관광객이 이것에서 유숙한다는 것이다. 9시에 호텔을 출발한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시가지 풍경
부하라는 역사의 도시이며,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 도시다. 오늘은 부하라에서 아크시델타, 칼란 모스크, 칼란 미나렛 등을 탐방할 것이다. 부하라 Bukhara는 중앙 아시아에서 고대의 이슬람문화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그래서 전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고대 도시를 보기위해 찾아오고 있다. 대부분의 기념물은 도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흔히 이곳을 우즈베키스탄의 보물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사연이 많은 다양한 건축물들이 관광객을 반기고 있다. 특히 이곳의 가장 유명 유적은 칼렌 미나레트Kalyan Minaret로 고대 부하라의 상징과도 같은 유적이다. 징기스칸이 이 도시를 파괴하였을 때에도 칼렌 미나레트Kalyan Minaret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곳만은 남겨 놓았다고 할 정도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의 서쪽 270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때 거대한 실크로드 상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과거에는 이슬람 세계를 통털어 배움의 열기가 가장 높은 도시로서 약 350개의 이슬람 모스크와 100여개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명성은 17세기 중앙아시아 대정복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부하라가 얼마나 오래된 도시인가는 이곳 유적의 방사능 연대측정으로 알수 있는데 가장 오래된 층은 BC3~4 세기의 것이며 가장 최근의 유적은 9세기부터 20세기로 추정되어 약 2500년 역사를 가진 도시임을 알수 있게 한다. 특히 이곳이 가진 140여개의 역사적인 건축물은 부하라를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이러한 건축물들은 만들어진 시기도 달라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게힌다. 1997년은 부하라 도시 개국 2500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고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의 외벽은 인위적인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진흙 색깔 그대로를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수세기 동안 사막과 함께 조화를 이뤄온 고대 건물 등은 고대의 문화를 그대로 느낄수 있게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부하라는 부하라 주의 주도다. 자라프샤 강 하류에 위치해 있고, 1993년에는 구시가지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시가지 곳곳 풍경이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은 육중한 분위기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여름 궁전
우즈베키스탄의 마지막 왕이 지은 건물로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이 나라 말로 쉬토라이 모히하사 궁전이라고 부르는데 쉬토라는 별을 뜻하고, 모는 달, 하사는 장소를 뜻한다. 달과 별의 궁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궁전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건축한 왕의 여름 궁전으로 약 100년 된 건물이다. 부하라 칸국 최후의 칸인 아림 칸이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상트페트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을 보고 유사하게 건축했다. 부하라는 천샨산맥 끝부분에 있다. 부하라 구시가지는 1993년 유네스코 지정 되었다. 부하라의 건물이 대개 푸른색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궁전의 입구는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여름 궁전은 아주 넓다. 궁전 정원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나무들이 있다. 공작새가 우리를 환영하듯 여러 마리가 들어온다. 궁전 건물도 아름답다. 제일 아름다운 건물은 정원을 둘러싼 듯한 흰 궁전으로 외부는 유럽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나 내부는 부하라 양식의 화려한 문양이다. 왕이 여름에 와서 머물렀던 곳이다. 방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살펴 보았다. 궁전내 응접실 등에는 보석, 무기, 침구류, 양탄자, 악기, 일본의 화병 등이 장식되어 있다. 이 궁전을 지을때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칸은 4마리의 양을 여러 곳에 방목하도록 했다. 그후 4마리의 양을 조사해보니 이곳에 방목했던 양이 가장 많이 살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가장 공기가 맑고 건강에 이로운 곳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궁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칸은 궁전이 완성되자마자 더 이상 이와 똑 같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건축가들의 손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한다. 나무 그늘 터널에는 장신구와 그림을 평화로이 걸어놓았다. 왕이 연회를 베풀던 건물 앞에 왔다. 높은 건물이 있고 바로 앞에는 큰 연못이 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을 수영하게 했던 연못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라스가 높은 곳에 지금도 그대로 있다. 건너편에는 300여 명의 후궁을 살게 했던 하렘 건물도 있다. 여인들이 저 연못에서 놀 때 왕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오라고 하지 않았겠냐고, 현지 가이드가 말하여 웃었다.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부하라의 여름 궁전에서 왕이 된듯, 왕비가 된듯 상큼한 산책을 하고 나왔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이스마일 사마니 사원
부하라의 아름다운 공원 뜨락에 뽀얀 덩이의 독특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건축 양식도 특별하고 건물 구조도 특이하다. 매우 다부지고 아름답다. 바로 앞에는 연못도 있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중아아시아 고전 건축의 걸작품인 이스마일 사마니 사원이다. 사마니드 영묘가 있는 건물이다. 연못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중앙에 벽돌 관이 놓여 있다. 이 영묘는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묘로 905년에 만들어졌다. 영묘에는 사마니드 왕조 (879-999년) 중 사마니 왕조를 세운 이스마일 사마니와 그의 아버지, 아들들이 안장되어 있다. 사마니드 영묘는 세계에서 유일한 기술로 건축되었다. 하루 중 태양의 위치에 따라 벽의 무늬가 변한다. 이슬람 초기 건축양식의 영묘로 892년에서 943년에 걸쳐 지어진, 중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이슬람 건축물이다. 9세기 말에 부하라를 점령, 수도로 정한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사마니가 부친을 위해 지은 영묘다. 후일에 그와 그의 자손도 묻혀 사만 왕조의 왕족영묘가 되었다. 내부도 상당히 독특한 구조다. 환기를 위해 둥근 돔 지붕 천정에는구멍이 뚫려 있다. 창문 하나도 환기에 신경을 써서 만들어 놓았다. 몽골 내습으로 마을이 파괴되었을 때 마고키 앗타리 모스크와 함께 거의 땅 속에 묻혔다. 주변이 모두 묘지였기 때문에 쉽게 알지 못했다가 1925년에 발굴되었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아 올린 후 반구형 돔 지붕을 만든 단순한 구조지만 그 외관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벽면을 다양한 문양으로 다듬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 큰 특징이다. 음영이 있는 건물로 당시 건축가의 기술과 미의식에 절로 감탄하게 한다. 벽면 색깔의 강약, 각도에 따라 그 음영이 변해 다양한 느낌을 준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숨을 참고 묘를 2바퀴 돈 후 소원을 빌면 반드시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숨을 쉬지 않고 2바퀴 도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만큼 이 사원은 주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원의 문 벽에는 유네스코 지정 마크가 부착되어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야곱의 샘
이곳도 유네스코 지정 건물이다. 야곱의 샘이라 하는 이곳은 정확히는 차쉬마 아유브 Chashma Ayub 영묘다. 차쉬미는 샘이고, 아유브는 선지자 욥을 의미한다. 야곱이라고도 한다. 12세기에 샘 위에 영묘를 지었다. 이 영묘에는 누구도 안장되지 않았지만 야곱의 영묘라고 불린다. 부하라 사람들이 물로 힘들어 할 때 성경 속 인물인 야곱이 이곳을 지나가며 지팡이를 내리치자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샘물 뒤에 무덤 관이 놓여 있다. 야곱의 가묘 무덤이라고 한다. 야곱의 진짜 묘는 다른 곳에 있단다. 사막에 돔이 있고 그곳에는 물이 있었다. 건물 안에 아직도 물이 나온다. 사람들은 이곳 샘물을 직접 마셔불 수 있다. 나도 물을 마셨다. 성경 속 야곱을 가슴에 새기며 감사함으로 물을 마셨다. 건물 안에는 부하라의 물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하라는 도색을 금지하는 도시다.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높은 건물도 못 짓게 한다. 그래서 모든 역사 건물이 연한 갈색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바자르
부하라의 아주 큰 재래시장이다. 농산물을 주로 판매한다. 쌀이 있다. 반가웠다. 건과일, 견과류, 과일 등 풍성한 시장이다. 현지 가이드가 큰 멜론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시가지 자동차
부하라 바자르 재래시장 주변은 복잡하다. 쉼 없이 자동차들이 왕래한다. 노란 택시가 인상적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현지식당 중식
우리가 유숙했던 호텔 부근의 호수 곁에 있는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많은 세계인들이 안에서 혹은 밖에서, 연못가에서 식사를 한다. 지난 밤 전통공연을 보며 저녁식사를 했던 이곳도 바로 이 근처다. 쇠고기와 닭고기를 고치에 꿰어서 구운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골목길 풍경
부하라의 골목길을 걷는다. 그런데 진풍을 만났다. 밀짚과 물과 흙을 반죽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시골집을 지을 때 사용하던 재료와 유시하다. 인부들이 집을 짓으며 이방인인 우리를 바라본다. 가스관도 골목의 집 담장 너머로 들어가기도, 공중으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모두 이색 풍경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초르 미나렛
한참을 걸어간 곳에서 첨탑 네 개가 오롯한 초르 미나렛을 만났다. 초르는 4란 뜻이고, 미나렛은 첨탑을 뜻한다. 즉 네 개의 첨탑이란 건물이다. 첨탑의 끝은 푸른 색이다. 18세기 신학교 건물이다. 네 개의 첨탑으로 지어진 것이 이건물의 특징이다. 양편으로는 신학교 건물이 있던 터가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볼로 하우즈
큰 연못이 바로 앞에 있는 웅장한 모스크다. 이 나라 말로 볼로는 지붕, 하우즈는 물이란 뜻이다. 즉 볼로 하우즈는 물이 있는 높은 지붕의 모스크란 뜻이다. 여러 개의 호두나무 기둥이 높이 솟구쳐 지붕을 받쳐 들고 있다. 호두나무 문도 웅장하다. 18세기 건축물인데 색상도 구조도 매우 아름답고, 우람하고, 튼튼한 형상이 그대로 있다. 모스크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앉아 살펴 보았다. 외인 내부 출입을 허락하는 탐방지다. 내부의 구조와 색상도 매우 아름답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아크시타델
도로변에 높이 쌓아올린 거대한 성벽이 대단한 위용을 드러내는 웅장한 성이다. 16~20미터 높이의 성벽이 아름다운 구조로 옆으로도 길게 뻗어 있다. 코발트빛 하늘과 맞닿아 있어 비경이다. 1920년 러시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왕들을 비롯한 3천여 명이 거주하던 큰 성이다. 총 면적이 3.9헥타르로 매우 넓다. 7세기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오늘날의 모습은 수많은 전쟁으로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다가 18세기 부하라 칸국 시대에 완성되었다. 유네스코에 등록된 건축물이다. 아크는 아치, 시타델은 중심이란 뜻이다. 즉 아크시타델은 아치형 행정중심이란 뜻이다. 아치형 성문으로 들어가니 오르막길 양쪽으로 죄수들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다. 인형으로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성안에는 정원도 있고 모스크, 옥좌, 왕비실, 코란, 책받침대 등이 있다. 건물에는 호두나무 기둥이 많다. 작은 박물관에는 형을 집행하던 장면, 감옥, 노예들의 생활, 의료기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대관식 장소이기도 하다. 사자석상이 액자에 사진으로 담겨 높이 걸려 있다. 사자는 우즈베키스탄의 수호신으로 한국의 호랑이 격이다. 현재는 1년에 2회 정도 전시하는 사자석상 사진이다. 자수 용품 등에 많이 사용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잠시 성 내부에서 밖으로 나오니 부하라 시가지가 아래로 보인다. 1920년 구 소련 프룬제 장군에 의해 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현재의 성 뒤편은 그 당시의 모습을 보전하기 위해 펜스가 설치되어 들어갈 수 없다. 건물 창문 틈으로 바라보니 흙언덕 위로 칼렌 미나렛이 오롯하게 보인다. 이곳 다음으로 탐방할 곳이다. 전시실 벽면에 말채찍 가죽이 걸려 있다. 성으로 들어올 때 성문에 걸려 있었다. 실제로 말을 몰 때 사용하던 물건으로 부하라 평화의 상징이다. 11개의 성문 열쇠 중 1개도 말채찍과 함께 있다. 지금은 집에서 염소털 채찍을 문에 걸어둔다. 많은 시간을 머물며 둘러보고 아크시델타를 나왔다. 높고 긴 성벽을 따라 걸으며 칼렌 미나렛으로 갔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칼란 모스크
아크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걸어서 왔다. 부하라 도심 복판에 첨탑과 함께 오롯하게 서 있는 아름다운 모스크다. 칼란은 크다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모스크 첨탑이 높이가 46m로 매우 높다. 그래서 부하라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부하라의 상징 건물이다. 1127년에 칼란 칸 왕조 아루스 칸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부하라의 흥망을 지켜본 역사적인 모스크 건물이다. 미나렛 옆에 세워진 칼랸 사원은 16세기에 한꺼번에 만 명 이상이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사원이다. 탑의 기단부 직경은 9m, 토대부분이 지하로 10m 들어가 있다. 탑은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원통형으로 탑의 벽면은 14층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벽돌을 다르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장식했다. 벽돌들은 햇빛에 구운 갈색 벽돌이며, 달걀의 흰자와 낙타 젖으로 반죽하여 쌓았다. 미나렛은 모스크의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리로 이어져 있다. 내부에는 105개의 나선계단이 있으며, 관리인이 허락만 하면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관광객이 올라가 자살한 사건이 있어서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미나렛, 즉 첨탑은 사막의 등대로써 사막 여행객에게 있어 중요한 길잡이였다. 또한 18세기 경에는 공개 처형장으로 꼭대기에서 자루에 사형수를 넣어 던졌기 때문에 죽음의 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최후의 사형은 1884년에 행해졌다. 이 미나렛은 마을 전체가 붕괴된 대지진에도 흔들림이 없었고 파멸을 몰고 다니는 징기스칸에게도 파괴되지 않았던 것으로 많은 전설을 안고 있다. 징기스칸이 와서 이 탑을 올려다보다 그만 모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생각없이 허리를 숙여 모자를 주우려 하던 징기스칸은 '이 탑은 나의 머리를 숙이게 한 멋진 탑이다. 그대로 두어라' 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칼랸 미나렛은 커다란 2 개의 돔이 있는 미르아랍 MirArab이라는 신학교와 접해있다. 이 신학교는 아직도 학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칼란 미나렛과 칼란 사원, 호화스러운 신학교가 한데 모여 보이칼란PoiKalyan 이라는 웅장한 조화를 이룬다. 미나렛과 모스크 그리고 마드라세는 항상 같이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칼란 미나렛
칼란 모스크와 함꼐 웅장한 첨탑이다. 높이 46m의 거대한 미나렛이다. 자세한 내용은 칼렌 모스크에 적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미르아랍 마드라세
칼랸 미나렛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다. 커다란 2 개의 푸른 색 돔이 보이는 건축물이 바로 아름다운 미르아랍Mir-Arab 마드라세, 즉 신학교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 신학교는 아직도 학교의 역할을 있다. 정원에 신학생들이 앉아 있다. 칼랸 미나렛과 칼랸 사원, 호화스러운 신학교가 한데 모여 보이칼란PoiKalyan이라는 웅장한 조화를 이룬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타키
타키는 큰 거리의 교차점을 반구형 지붕으로 덮은 노천시장이다. 휴게소와 같은 역할도 했다. 16세기 당시의 타키는 전문상점의 요소가 강해 희귀하고 고가의 보석류 판매, 여러 가지 재질 모양의 모자류, 금 등을 판매하기 위해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 들었다. 흰 터번을 쓴 사람과 긴 비단옷을 입은 사람, 비싼 모피 모자를 쓴 사람등 많은 민족들이 모여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물품 교역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중요한 정보교환의 장소였다. 교차점의 반구형 지붕은 크고 높으며 외광이 잘 들어오게 하기 위한 많은 창이 있다. 그리고 낙타를 타고도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입구가 매우 높다. 부하라에는 자르가론 타키, 사라폰 타키, 텔팍 푸루스한 타키 등 다양한 타키가 남아 있다. 칼란 모스크를 탐방하고 지나가며 본 타키다. 지금도 여러가지 물건을 판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울르그벡 마드라세
우즈베키스탄에는 마드라세, 즉 신학교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대개 비슷한 건축물이다. 맞은편에는 울루그벡 메드라세보다 약 200년 뒤에 지어진 압둘 아지스한 메드라세가 있는데 울르그벡 마드라세보다 화려하고 색채도 다양하다. 울르그백 마드라세는 아지스한 마드라세와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있다. 울르그벡 마드라세는 1417년 울루그벡에 의해 지어진 신학교다.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다.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메드라세와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다. 화려한 장식 또한 유사하다. 무슬림에게는 교육열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문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두 마드라세를 서로 비교해보며 이슬람 건축의 양식도 시간에 따라 약간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아지스한 마드라세
울르그벡 마드라세와 마주보고 있는 신학교다. 울르그벡 신학교보다 200년 더 늦게 지어져 색상도 건축 구조도 더 아름답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오마르 하이얌 시인 호텔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은 술에 대한 시를 많이 쓴 우즈베키스탄 시인이다. 그는 술에 대한 시를 많이 쓴다는 것으로 추방 당한 시인이기도 하다. 부하라는 그의 고향이어서 그의 이름을 븥여 지은 호텔이다. 시가지 상가 도로변에 아담하게 서 있다. 여기까지는 현지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오마르 하이얌(1040년 ~1123년)은 페르시아의 시인ㆍ천문학자ㆍ수학자다. 16세기에 나온 그레고리 달력보다 더 정확한 달력을 만들어 내었고, 3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결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4행 시집인 《르바이야트》는 피츠제날드가 영어로 번역한 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여졌다. 그와 동일한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확한 것은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시인 김윤자다. 내 고향은 충청남도 보령시다. 먼 훗날 나에 대한 기록도 내 고향에 남아 전해졌으면 좋겠다. 세계탐방 기행시를 많이 쓴 시인이라고, 의지 시인이라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이라고,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소망으로 오마르 하야얌 시인 이름의 호텔을 함참 동안 바라보았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카펫 짜는 소녀
시가지 상가를 걷다가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카페 짜는 소녀를 보았다. 10대 나이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긴 줄을 늘이고 카펫을 짠다. 우리나라라면 학교에 가서 공부할 나이인데, 여기서는 카펫을 짜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라비 하우즈
라비 하우즈는 우리가 유숙한 호텔 근처에 있다. 오늘 아침에 호텔 주변을 산책할 때 들렀던 곳이다. 오늘 중식도 이곳 라비 하우즈 근처의 연못가 식당에서 했다. 라비 하우즈에서 하우즈khauz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광장과 연못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 엣날의 건축물을 말한다. 연못은 매우 크고 넓은 규모다. 물빛도 햇볕에 따라 변하며 매우 아름다운 비경이다. 깊이는 약 5 미터 정도다. 고대도시의 중앙광장에 위치하며 1620년에 만들어졌다. 연못 주위에는 16세기~17세기에 지어진 노드르 디반베기Nodir Devonbeghi 신학교와 하나카. 그리고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아카데미였던 구겔다쉬Kukeldash라는 큰 신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라비 하우즈 광장에는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던 현자 호자 나스레딘Khodja Nasreddin의 동상이 있다. 낙타 동상도 있고, 노천 카페, 식당도 있다. 깊은 연륜의 나무들이 더욱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부하라에서 마지막으로 온 탐방지다. 아쉬움으로 곳곳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진종이 머물며 시도 쓰고, 명상에 젖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공항
부하라 관광을 모두 마치고, 현지식으로 저녁식사도 마치고 부하라 공항으로 왔다. 여기서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로 가기 위해서다. 맨 처음 내렸던 그 공항으로 간다. 올 때는 사마르칸트, 샤크리샵, 부하라 이 세 도시를 탐방하며 버스로 왔지만, 갈 때는 비행기로 간다. 저녁 9시 35분 HY 1328 국내선 힝공이다. 부하라 공항은 아담하다. 타쉬켄트 공항에는 23:05분 도착예정이다.
2015년 9월 15일 화요일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호텔 출발
지난번 한국에서 처음 타쉬켄트에 왔을 때도 유숙했던 호텔이다. 오늘은 이 호텔과 이별하고 떠나야 한다. 아쉬움으로 주변을 산책하며 둘러보았다. 울창한 나무들이 싱그러운 풍경이다. 이 호텔은 타쉬켄트 신시가지에 있다. 우리는 오늘 타쉬켄트 구시가지를 탐방하고 저녁 비행기로 키르기스스탄으로 간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아침 출근 풍경
우즈베키스탄은 텐샨 산맥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나라다. 수도 타쉬켄트는 평균 해발 450m의 도시다. 시가지에 울창한 나무들이 많다. 아침 출근시간으로 차량도 많다. 호텔 주변인 이곳은 신시가지라서 건물도 현대식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타슈겐트는 2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다. 시르다리야 강 지류인 치르치크 강변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 도시다. 우즈베스탄어로 '돌Tosh의 도시Kent'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우즈베기스탄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사마르칸트에서는 북서쯕으로 35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250만 명 정도다. 면적은 350km2다. 1966년의 대지진 이후 도시는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현대적인 건물로 가득한 대도시가 되었다. 이슬람교육과학문화기구ISESCO는 2007년에 타슈켄트를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라고 발표했다. 타쉬켄트는 1966년 대지진 이후 새로이 건설된 신시가지와 아직도 실크로드의 정취가 남아있는 서북부 일대가 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신시가지에는 인민친선궁전, 1992년에 세워진 알리샤나보이기념비, 1918년에 로마노프왕조가 세운 유서깊은 우즈베키스탄미술관, 2차세계대전시 일본군 징용포로들에 의해 건설된 나보이극장을 비롯 박물관, 호텔, 백화점, 젊은이들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브로더웨이거리 등이 반경 2km 내에 있어 걸어서 모두 탐방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명소들을 탐방할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지진 기념비
타쉬켄트 신시가지에 지진 기념비Earthquake Memorial가 있다. 타쉬켄트는 우즈베키스탄 대지진의 진원지로 1866년, 1868년, 1886년, 1924년, 1966년 다섯 차례 대지진이 일어났다. 특히 1966년 진도 8도의 대지진은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오랜 역사의 도시 타슈켄트를 폐허로 만들었다. 지진 기념비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넓은 자락에 있다. 지진이 일어났던 연도, 날짜와 시간이 검은 사각 돌에 그대로 새겨져 동상 앞에 놓여있다. 1966년 4월 26일 5시 22분, 커다란 시계 바늘이 그날의 지진 시간에 맞춰 정지되어 있다. 지진으로 크고 검은 돌이 갈라지는 아픈 형상도 재현해 놓아 가슴이 시린 장면이다. 그 곁에 남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지진 당시 목숨을 걸고 어린이와 여성을 구한 용감한 남성의 모습이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를 합하면 중앙아시아를 지킬 수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1976년에 타쉬켄트시에서 지진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 도심 복판에 용기라는 주제로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진으로 파괴된 시가지를 다시 복구하여 건설했다. 근처의 아파트도 다시 지짓고 도시를 재정비하여 현대풍의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지진 피해로 고대 도시 흔적은 많이 소멸되어 안타깝지만 깨끗하게 탄생한 타쉬켄트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대목에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하스트 이맘 콤플렉스
하스트 이맘Hast Imam콤플렉스는 이슬람 복합 사원으로 타쉬켄트 구시가지에 있다. 하스트 이맘은 우즈베키스탄 말로 최초의 이슬람 성인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16세기에 세워진, 이슬람 최초 성인 아부 바크르 카팔 샤시의 영묘가 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추앙받는 이슬람 지도자 이맘이며, 학자였다. 72개국어를 익혔고, 최초로 구약성경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이슬람종교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영묘에는 청색 타일로 코란의 글귀를 영롱하게 적어 놓았다. 그를 기리기 위하여 모스크도 짓고, 신학교도 세웠다. 넓은 이맘 광장에 틸라 세이크 모스크, 마드레사, 기숙사, 이슬람 중앙사무실, 기타 부속 건물 등이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스만 코란을 보관하고 있는 사원이다. 그로 인하여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도 이슬람 성지로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다. 오스만 코란은 구소련시절에 잠시 상트페테스부르크에 있었는데, 그때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복합 사원은 티무르 전성기였던 15~16세기에 건축된 건물들인데 여러 차례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우즈베키스탄이 구소련연방국에서 1991년 독립하여 그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구 건물 자리에 이슬람 건축양식으로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시켰다. 대부분 2007년에 완공된 최근의 건물들이다.그래서 규모가 아주 크고, 시스템이 잘 설치되어 있다. 외형으로도 돔 지붕이 화려하고 미나렛 첨탑도 매끈한 새 건축물이고, 내부도 아주 깨끗하다. 모스크 실내 천장에 눈과 눈동자를 상징하는 장식물이 설치되어 독특하다. 오늘날에도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의 행정 중심지다. 대통령도 이곳 사원에 와서 기도한다. 2천 명 정도 일시에 수용 가능하다. 코란 보관소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관람했다. 중국에서 온 실크에 잉크로 3권을 작성한 코란이다. 제작자를 죽일 때의 그 피가 아직도 묻어 있다. 전시된 것은 복사한 10권 중 하나다. 2007년에 국제 이슬람 교육과학문화기구ISESCO에서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를 이슬람 문화 수도로도 선포했다. 그것은 오스만 코란을 보관하는 하스트 이맘이 타쉬켄트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다르지만 참으로 훌륭한 이슬람 성인을 만났고, 참으로 구한 성서 코란을 만난 보람된 탐방지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재래시장
이곳 재래시장은 돔 지붕으로 된 아주 큰 시장이다. 온갖 물건이 다 있고 왕래하는 사람도 많아, 입구에서부터 복잡하다. 둥근 돔 지붕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둘러 보았다. 맨 처음 눈길을 끄는 것은 고려인들이 파는 염장 식품가게다. 작은 오이 절임이 한국의 음식과 유사하다. 건과일, 과일, 야채 등 가게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우리는 건과일 코너에서 호두와 건포도 종류를 샀다. 값이 싼 편이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국회의사당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국회의사당을 보았다. 푸른 색 돔 지붕에 하얀 색 건물이다. 한국의 국회의사당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란다. 규모는 작지만 여의도 우리나라 국회의사당과 조금 닮았다. 돔 지붕에 국기가 펄럭인다. 입구에는 경비원이 서 있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압둘카심 사원
압둘카심 세이흐 사원은 16세기에 건축된 건물이다. 압둘카심 세이흐는 이 사원을 지은 사람 이름이다. 처음에는 모스크와 목욕탕과 신학교로 복합 구성되었다. 공공 장소 중 하나였다. 오늘날은 공방으로 사용한다. 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와서 공예를 배우고있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칸칸마다의 공간에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공예품을 전시해 놓기도 하였다. 자신의 작품 작업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 '나의 결홍 원정기'에 등장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정원에는 나무와 꽃들이 많아 아름답다. 벤치도 있어 공방 학생들과 함께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원래는 단층 건물이는데, 다시 건설할 때 이층이 만들어졌다. 아치형 문들이 매우 아름답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시가지 건물과 나무들
타쉬켄트는 투르크어로 돌tash의 나라kent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며 인구는 약 220만 명 정도다. 천산산맥에 있는 오아시스에 위치하고 있다. 시르다르야강의 지류에 접한다. 아시하바드 철도와 오렌부르그 철도와 연결되며, 천산산맥으로 가는 자동차 도로의 기점이기도 하다. 또한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중심지로서 국제 항공로의 중심이기도 하다. 13기경 칭기스칸의 침입 이후 몽골 지배로 들어갔고 차가타이 한과 티무르의 지배를 받았다. 1865년 러시아군이 점령하여 1967년 투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러시아 식민지가 되었다. 그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의 중심지로서 1917년 중앙아시아 최초의 혁명 소비에트 자치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1898년에 러시아와 연결된 철도가 완성되었으며, 이후 산업이 발전했다. 타쉬켄트는 1930년에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1991년 12월 소련연방의 붕괴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의 수도가 되었다. 타쉬켄트는 2천 년 역사를 지닌 고대도시이지만, 지금은 고대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1966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고 소련 도시 계획자들은 타쉬켄트를 전형적인 러시아 식의 도시로 재건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쪽에 남아 있는 구시가지는 실크 로드의 오아시스 잔재가 남아 있다. 타쉬켄트 시가지는 서부의 구시가지와 동부의 러시아 식민가였던 신시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1966년의 대지진으로 건물이 즐비했던 구시가지가 모두 파괴되었다. 중앙아시아 최대 공업도시로서 타쉬켄트에는 면방공장과 타쉬켄트 농기계제작소, 기계 및 다양한 식품가공 산업이 발전하였다. 문화시설로는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등 20개의 교육 연구기관과 나보이 기념극장, 함자극장, 국립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도심의 우람한 최신식 건물이 나무 사이로 오롯하게 솟구쳐 오른다. 크로 넓은 자락으로 앉은 건물도 있다. 타쉬켄트에는 공원이 많다. 곳곳에 울창한 나무들이 많다. 분수로 물을 분사하여 뿌려주는 곳도 있다. 건물과 나무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한식식당 중식
한식 식당에서 중식을 햇다. 메뉴는 김치찌개와 불고기, 콩나무국, 두부, 깍두기 등 맛있는 한식 음식이다. 김씨네 식당이라는 간판이 정겹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원
타쉬켄트는 천산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오아시스 격의 도시다. 그래서일까. 공원이 많다. 이곳에 서울공원이 있다. 한국을 홍보하기 위한 차원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기와 정자 등이 아름답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독립광장
타쉬켄트 시가지 공원을 함참 걸어서 이곳에 왔다. 주변도 울창한 나무 숲이고, 독립광장도 나무와 잔디로 잘 조성해 놓았다. 매우 넓고 아름다운 광장이다. 이 광장은 우즈베키스탄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우즈베기스탄의 중심을 상징하는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독립기념비가 높이 세워져 있다. 맨 꼭대기에는 우즈베키스탄이 새겨진 금색 지구본이 올려져 있다. 이것은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가 탄생한 주권을 상징하며 아울러 국제 사회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기념비는 우즈베키스탄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 줄 독립과 인도주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지구본 아래 기념비 앞에는 2005년 12월에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행복한 어머니 동상이 세워졌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신생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의 미래를 지키는 조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머니와 아기가 햇빛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빛난다. 광장 주변에는 재무부, 내무부, 대통령궁, 국회 등 국가 주요 건물들이 있다. 그래서 더욱 웅장한 풍경이다. 광장 입구에는 아침형 문이 세워져 있다. 아치 기둥 16개는 흰색 대리석이다. 아치 위에 학이 새겨져 있다. 학은 좋은 곳에만 둥지를 튼다고 믿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새들의 모습은 행복과 번창을 상징한다. 독립광장은 넓고 웅장한 규모도 대단하고, 지구본 기념비와 모자상, 학 등에 담긴 뜻이 우즈베키스탄을 대변하는 깊은 외침이다. 독립광장을 돌아서 나오면서도 여러 번 뒤돌아 보았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2차대전 기념비
독립광장에서 왼편 가까운 곳에 2차대전 기념비가 있다. 1999년 카리모프 대통령은 5월 9일을 추모의 날로 공포하고 무명용사 추모 광장을 조성하였다. 울창한 숲이 빙 둘러싼 광장 중앙에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앉아 있는 괴로운 표정의 여인 동상이 있다. 2차대전으로 희생당한 병사들에 대하여 매우 슬퍼하는 어머니 동상이다. 비애의 어머니 동상이다. 2차대전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50여만 명이 참전했다. 그 중 42만 명이 전사하고, 64만 명이 부상 당했다. 어머니 동상을 건립한 것은 과거에 대한 존경과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힌 각 지역의 젊은이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기념비 중앙 어머니 상 좌우에는 '당신은 항상 우리들의 가슴 속에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어머니 상 앞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있다. 불꽃이 활활 솟구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긴 회랑에는 각 지방별로 전사자의 이름이 게재되어 있는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사자들의 성명이 금속책자에 출신 주별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전쟁의 아픈 마디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본 현장이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시가지 공원 풍경
타쉬켄트에서 울창한 공원을 많이 본다. 우즈베키스탄은 텐샨산맥 끝부분에 있다. 그래서 텐샨산맥에서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많이 흐른다. 특히 8월에 많은 물이 흘러 들어온다. 그런 연유로 타쉬켄트에는 물도 많고 운하도 많다. 나무가 울창한 공원도 많이 조성되어 있다. 시인 나보이 공원도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러시아 시인 푸쉬킨을 나보이라고 부른다. 도심을 이동하며 나보이 공원도 보았다. 싱그러운 풍경의 타쉬켄트 시가지 공원이다.
* 우즈베키스탄 비쉬케크 티무르 역사박물관
티무르 역사 박물관은 타쉬켄트 시가지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잔디와 꽃으로 잘 조성된 정원에 이슬람 사원을 닮은 푸른 색 돔 지붕이 아름다운 하얀 색 건물이다. 건축물도 등글게 지어 특이하고, 검은 색 테두리의 많은 아치형의 창문들이 강한 인상을 준다. 현대와 고대 풍의 아름다운 조화다. 이곳은 티무르 탄생 660주년을 기념하여 지은 티무르 역사 박물관이다. 유네스코 지원으로 1996년 9월 개관하였다. 박물관 실내로 입장하여 관람했다. 아름다운 외관 못지 않게 내부시설이 웅장하고, 티무르에 관한 많은 역사 전시물이 질서정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보았는데 1층에는 7세기에 오스만에 의해 쓰여진 코란이 전시되어 있다. 2층 넓은 전시장에는 샤크리샵에서 탐방했던 악사라이 궁전, 사마르칸트에서 보았던 비비하눔 모스크, 울르그벡 천문대, 구미에르 영묘, 구에르 영묘를 보고 티무르 후손이 건설했다는 인도 타지마할까지 티무르에 관계되는 역사 유물들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해 놓았다. 부하라에서 보았던 주마 모스크 사막 등대사원, 마드라세 신학교, 울르그벡 천문대 모형도 있다. 아무르 티무르는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정치적, 군사적 영웅이다. 그래서 이곳 박물관은 티무르의 족적과 자손 가계도와 그 시대 티무르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중한 자료를 모두 전시하고 있다. 티무르의 초상화도 있다. 박람회장에는 고고학 민족학 자료와 화폐 재료, 금관복, 전사들의 무기와 갑옷 등이 있다. 실크로드에 관계된 시대적 상황도 제시히고 있다. 유럽 예술가들이 그 당시의 바자르를 그린 대형 그림이 1층 벽면에 있다. 그 그림 안에 조선인도 있다는 것이 매우 반갑고 인상적이다. 현지 가이드가 박물관 안내원에게 사정하여 이 그림을 배경으로 잠시 사진 찍는 것을 허락받아 내부 사진을 담아왔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정원에 우리처럼 탐방온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이 많다. 국가를 초월하여 정답게 손잡고 사진도 찍으며 흐뭇한 시간이었다. 그 동안 우즈베키스탄에서 보고, 배우고, 느껴왔던 타무르에 대하여, 그가 왜 그토록 추앙받는 인물인지 결론으로 매듭지어 한데 전시하여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 박물관이다.
* 우즈베키스탄 시가지 웅장한 건물
티무르 역사 박물관을 끝으로 우즈베키스탄의 탐방을 모두 마치고 이동하는데 시가지 도심에서 웅장한 건물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 호텔이라는 문구를 높이 새겨 지은 곡선의 우람한 건물과 그 곁에 둥근 아치형으로 지은 컨벤션 센터 건물이다 있다. 온통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감싸고 았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 출발
이제 우즈베키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가기 위해 타쉬켄트 공항으로 왔다. 18:00 비행기다. 17:30분 보딩타임이다. 20:15분에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 공항에 도착 예정이다. 우리가 가는 키르기스스탄과의 시차는 한국과는 -3시간이다. 우즈베키스탄과는 +1시간이다. 즉 우즈베키스탄보다 키르기스스탄이 1시간 빠르고, 한국보다는 3시간이 늦다. 3박 4일간의 우즈메키스탄 여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떠나야 할 아쉬운 시간이다. 능숙한 한국어로 여행을 이끌어준 참으로 고마운 현지 남자 가이드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석식은 비행기 시간 관계로 김씨네 식당에서 싸준 김밥으로 먹었다.출국장 게이트 앞에서 우리 부부 앞 의자에 앉은 우즈베키스탄 두 여인이 앉았다. 그 중 한 여인이 자청하여 친절하게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준다. 아름다운 인상이다. 정시에 비행기가 이륙햇다. 상공에서 본 타쉬켄트는 매우 크다. 주로 저층 건물이고, 가끔 우뚝 솟은 건물이 보인다. 도시를 지나자 사막산이 보이고, 멀리 구름 아래 텐샨산맥 줄기 능선길이 장관이다. 노을에 물드는 텐샨산맥 설봉도 비경이다. 모두 가슴에 담아가는 소중한 여정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공항 도착
현지시간으로 20:15분, 정시에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사람들이 많다. 키르기스스탄 현지 여자 가이드 리사와 미팅하여 호텔로 향했다. 호텔까지는 30Km이고 30분 정도 소요된다.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비슈케크, 이식쿨 호수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호텔
오늘은 오전 7시에 모닝콜, 8시에 조식, 9시 호텔 출발이다. 조식 뷔페를 마치고 주변을 산책했다.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호텔의 아침은 나무들이 많아 상큼하게 열린다. 오늘은 이식쿨 호수에 가는 날이다. 여기서 5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의 여정이다. 벌써 벅찬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과일가게
키르기스스탄 호텔을 출발하여 비슈케크 시가지를 지나는데 과일가게가 보인다. 우즈베키스탄에서처럼 수박과 멜론을 길가에 놓고 판다. 아름답게 조성한 공원도 지나간다.
* 키르기스스탄 들녘과 텐샨산맥 풍경
지금 우리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기대 되는 여행지 이식쿨 호수를 향해 가고 있다. 들녘 끝에 우람한 천산산맥의 설경이 보인다. 2500Km의 텐샨산맥 중에서 1000m가 키르기스스탄에 있다. 지금 텐샨산맥 접경지대를 지나가고 있다. 대단한 비경이다. 오늘 실크로드 거리도 지나간다. BC2세기~15세기의 화려했던 비단길이다. BC 2세기의 진시왕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카자흐스탄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6500Km에 이르는 길이다. 실크는 중국에서만 생산되었다. 이 실크를 가지고 유럽과 물물교환 했다. 한무제는 호전적이어서 실크로드를 따라 침입했다. 키르기스스탄 인종은 원래 백색에 푸른 눈, 붉은 머리였는데 징기스칸이 들어오면서 아시아 쪽계 혼혈로 80개 민족의 나라가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130개 민족의 국가가 되었다. 다민족 국가다. 소비에트 연방시절 이전에는 부족국가였다. 현재 중국과의 관계는 좋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배우며, 텐샨산맥 설경으로 보며 가는 소중한 시간이다.
* 키르기스스탄 부랴나 탑
그리고 이식쿨 호수에 가면서 들른 부랴냐 탑이다. 부랴나는 키르기스스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수도 비쉬케크에서는 동쪽으로 80Km 거리의 작은 도시다.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중요 도시였다. 부랴나 탑으로 가는 입구에 천샨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수가 시내를 이루며 흐른다. 작은 다리를 건너 울창한 숲을 향해 걸어가니 입구에서 얼굴만 새긴 돌비가 안내한다. 그곳에서 더 깊슥이 걸어가니 천산산맥의 설봉이 그림처럼 전개되는 들녘에 오롯하게 솟구쳐오른 부랴나 탑이 있다. 부랴나 탑은 10세기~11세기에 건설한 천문대이며 전망대다. 첨탑은 모스크 미나렛과 유사하다. 건설 당시의 높이는 45m였으나, 현재는 25m다. 러시아 학자가 우연히 발견한 영묘에서부터 발굴된 유적지다. 우물 같은 곳이 벽돌로 지은 영묘 자리다. 오랜 세월 동안 지진과 전쟁 등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허름한 터전만 남은 것이다. 1975년에 마지막으로 복원작업을 마쳤다. 돈이 없어 제대로 복원이 안 된 상태다. 영화롭던 시절에 화려한 궁궐이 들어섰던 자리는 허술한 둔덕만 솟아 있다. 첨탑에 가까이 가 보았다. 첨탑 내부에 가파른 계단을 따라 꼭대기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 아찔한 경사여서 오르지는 않고 주변만 돌아보았다. 부랴나 탑 곁에는 돌무덤과 박물관도 있다.
* 키르기스스탄 부랴나 탑에서 본 텐샨산맥 설경
부랴나 탑에서 본 천산산맥은 설경과 함께 장관이다. 천산산맥은 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4개국에 걸쳐 있는 산맥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나라는 키르기스스탄이다.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약 90%가 천산산맥과 그 지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오늘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에서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천산산맥의 설경을 보면서 온 것이다. 약칭으로 톈산天山이라고도 한다. 일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에 덮여 있어 옛날에는 바이산白山 또는 쉐산雪山이라고 불렀다. 서쪽의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뻗어있다. 동서의 길이는 약 2500㎞, 남북의 너비는 250Km~300㎞이다. 평균 해발이 5000m 정도로 대단히 웅장한 산맥이다. 최고봉은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국경에 있는 해발 7435.3m의 포베다산이다. 그밖에 높은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약 200만~300만년 전에 형성된 젊은 산에 속한다. 지형은 산지와 산간분지 그리고 산자락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파미르 고원과 이어진다. 산정의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내려 강을 이루는데, 시르다리야강, 이리강, 추강 등이 이 산맥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중국에서는 톈산산맥을 신장텐샨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약 1700㎞다. 산장 웨이우얼 지구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2013년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랴나 탑에 머무는 동안 고개만 들면 천산산맥의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이 파고 드들었다.
* 키르기스스탄 부랴나 탑 박물관
부랴나 탑 곁에는 아담한 박물관이 있다. 이곳을 발굴할 때 나온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모든 유물을 러시아에서 가져 갔다. 현재는 나머지 유적만 전시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생활 물품과 이곳 도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또한 11세기의 유명한 키르기스스탄 시인의 하얀색 석상이 있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주습말라사든이라는 이름의 시인이란다. 현지의 말은 우리가 통용하는 말과는 많이 달라서 그 이름이 정확한 지는 잘 모른다. 시인은 한편의 시를 들고 있는데 그 제목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란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그래서 더욱 그 시인의 하얀 석상이 살아있는 생명인듯 정겨웠다. 사람은 갔어도 시인의 영혼은 남아서 저리 모습을 드러내고, 시인의 시는 죽지 않고 살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나의 시들도 내가 죽은 후일에도 저렇게 남아 세상을 밝히리라 생각하니 훈훈한 가슴이다. 나의 남편 유기섭님도 수필가로서 글을 쓰는 작가다. 자꾸 그의 곁에 나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준다. 키르시스스탄 시인을 담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와 동감인 것이다. 작은 규모지만 키르기스스탄의 시인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는 소중한 박물관이었다.
* 키르기스스탄 부랴나 탑 기념품 가게 요르트
황량한 벌판에 겨우 부랴나 첨탑 하나 오롯하게 솟구친 유적지인데 기념품을 파는 가게 요르트가 있다. 요르트는 사막 생활에서 집으로 사용하기 위해 짓는 둥근 천막집을 말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게르라고 부르는 천막집이다. 사막 생활에서 매우 시원한 집이란다. 여인이 요르트 앞에 나와 기념품을 구경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요르트 안으로 들어가 보니 키르기스스탄의 초촐한 기념 상품들이 있다. 주로 손수공예품이다. 우리 부부는 모직 재료로 만든 모자를 샀다. 내 것은 주황색, 남편의 것은 진갈색으로 곱다. 모양도 문양도 아름답다. 우리 일행이 모두 모자를 사서 나중에는 더 사고 싶어도 모자가 떨어져 못 산 사람도 있다. 물건의 질과 가격 대비가 양호하여서 그렇다. 모자 한 개에 11달러인데 몇 개를 사도 값은 깎아주지 않는다. 현지 가이드 말로는 키르기스스탄은 원래 받을 값만 부르기 때문에 에누리가 없단다. 그냥 놓고 갈지언정 값을 내려서 파는 예는 없단다. 이곳의 물건 판매에 대한 문화가 현명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키르기스스탄 부랴나 탑 전망대
부랴탑에는 높이 오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내부의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그런데 경사가 가파르고 길어서 올라가기에 어려움이 있다. 우리 일행은 올라가지 않고 그냥 주변만 탐방했다. 멀리 천산산맥이 설봉ㄱ과 함께 비경을 선사한다.
* 키르기스스탄 부랴나 탑에서 만난 홍콩인
부랴탑에는 높이 오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내부의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그런데 경사가 가파르고 길어서 올라가기에 어려움이 있다. 우리 일행은 올라가지 않고 그냥 주변만 탐방했다. 멀리 천산산맥이 설봉ㄱ과 함께 비경을 선사한다.
* 키르기스스탄 전사자 수호 돌비
부랴나 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전사지들 수호 돌비가 있다. 넓은 자락의 들녘에 자연스런 풍경으로 전시되어 있다. 전사자들의 수호 돌비리고도 하고, 또는 전쟁에 나가기 전 무사귀환을 위해 세워 놓고 간 돌비라고도 한다. 크고 작은, 앉았거나 서 있는 돌비들 사이로 한 바퀴 돌면서 살펴보았다. 돌비에 문양을 새긴 그 당시의 유물도 고스란히 있다. 또 마지막으로 부랴나 탑 가까이에 책 모양으로 제작하여 놓은 역사자료도 보았다. 뚜껑을 열면 신비로운 역사자료들이 보여진다. 이것을 끝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부랴나 탑과, 키르기스스탄의 역사을 배웠다.
* 키르기스스탄 텐샨산맥 물길
부랴나 탑에 들어갈 때 지나갔던 곳이다. 부랴나 탑으로 가는 입구에 천산산맥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길이 흐른다. 건조한 사막 땅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소중한 물이다. 물길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 지나왔다.
* 키르기스스탄 시골마을 옥수수밭
먼 나라에서 옥수수 밭을 만났다. 광활한 들녘에서도 보고, 아담한 시골마을 집 근처에서도 보인다. 주로 사료용이란다. 씨를 뿌리고 그냥 두면 저렇게 자란단다. 키르기스스탄은 농업국이다. 옥수수외 토마토, 오이 등을 재배한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풍경에 정겨웠다.
* 키르기스스탄 학교
들녘에 넓은 자락으로 앉은 학교 건물이 보인다. 학생들은 모두 교실에 있는지 하나도 없다. 향학열이 높이 보이는 규모의 우람한 학교다.
* 키르기스스탄 철도
철도가 마을 가운데로 놓여 있다. 나무 기둥의 전봇대도 곳곳에 서 있다. 우람한 천산산맥도 보인다.
* 키르기스스탄 가정집 현지 중식
오늘 중식은 현지인의 집에서 현지식으로 한다. 풍성한 식탁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많이 내놓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다. 고기, 과일, 야채 등 맛있게 먹었다. 정원에 나가보니 가축에게 주는 건초가 있다. 우리에 있는 가축에게 건초를 주었다. 유년 시절 고향에서 건초를 주며 기르던 소가 생각난다. 아름다운 꽃도 많다. 집 앞 도로에 나가보니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한 학생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함께 정답게 눈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소박한 사람들이다. 버스에 올라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마을을 떠나왔다. 이식쿨에 도착하면 호수 유람선을 승선하여 넓은 이식쿨 호수의 낭만에 젖을 것이다. 석식은 이식쿨 호수변 호텔에서 한다.
* 키르기스스탄 텐샨산맥 설경
키르기스스탄을 달리며 계속 천산산맥의 설경을 본다. 들녘 끝자락에서 우람하게 서 있다. 언제, 어디서 보아도 비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산녘마을과 동물들
이식쿨 호수를 향해 가는 길은 아주 많은 이색 풍경을 제공한다. 지금은 산녘마을을 지나며 방목하는 동물들을 보고 있다. 여기서 120Km 정도 가면 이식쿨 호수다. 아직도 많이 남은 거리다. 신비로운 풍경이 연이어 전개되어 전혀 지루하지 않은 여정이다.
* 키르기스스탄 산계곡물과 철도
이식쿨 호수를 향해 계속 천산산맥 줄기를 따라 달린다. 건조한 산 풍경인데 천산산맥에서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물이 비경이다. 옥빛으로 굽이쳐 흐르고 물가에는 식물들이 파랗게 자라 싱그러운 풍경이다. 물가 바로 곁으로 철도가 놓여 있다. 첩첩산중에서 기찻길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묘한 현대적 풍경에 놀랍기도 하다. 아무튼 사람의 숨결이 고인 철도가 아름답다. 빙하수 계곡물은 이곳 산마을 사람들의 식수다.
* 키르기스스탄 중국이 건설한 고속도로
천산산맥 준령을 지날 때, 키르기스탄에 중국이 건설한 고속도로가 있다. 키르기스탄에서 중국에게 이자 없이 건설비를 지불하여, 아직도 곳곳에서 고속도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 길로 중국의 트럭이 와서 면화, 견과류 등을 가져 간다. 천산산맥의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물 곁으로 놓여 있다. 철도도 함께 나란히 만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고속도로가 있어 편리한 문명의 발전이 온다면 키르기스스탄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키르기스스탄 산중 휴게소
중국이 건설한 고속도로변에 있는 휴게소다. 천산산맥 줄기의 산중에 잘 닦아 놓은 길이다. 휴게소 또한 사막길에서 만났던 그 어떤 휴게소보다 좋은 시설이다. 고속도로에는 중국 트럭이 빠른 질주로 달려 왕래한다. 아직도 이식쿨 호수까지는 25km 남았다.
* 키르기스스탄 사암산
고속도로변에 하얀 사암산이 있다. 그 산을 헐어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도 있다. 저 하얀 산은 뽀얀 모래로, 집을 짓는 재료로 쓰인다. 진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로 가는 버스
버스를 계속 산길을 달린다. 아름다운 천산산맥 줄기의 풍경이 버스의 이쪽 저쪽 유리창문에 새겨져 비경으로 뜬다.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첫번째 도시
이식쿨 첫번째 도시에 들어왔다. 이식쿨 호수는 넓이가 워낙 광대하여 호수 주변에 많은 도시들이 있다. 지금 이 도시는 우리가 호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만난, 호수 서쪽 끝에 위치한 첫번째 도시 발릭취Balykchy다. 발릭취는 이식쿨 호수 초입의 도시이며, 이식쿨 호수의 관문이다. 발릭취는 이식쿨 호수의 관문이다. 이식쿨 호수를 만날 때 꼭 거쳐야 되는 곳이다. 대부분 관광객들이 이곳 아담한 도시 발릭취에서 촐폰아타CholponAta 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며 이식쿨 호수의 비경을 본다. 도시의 건물 위에 레닌 흉상이 올려져 있다.아직도 구소련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저런 모습들이 이색 풍경으로 시야에 고인다. 그래서 소련연방국이었던 중앙아시아가 매력적인 여행지다. 키르기스스탄 독립 기념일이 8월 30일이다. 그래서 전봇대 곳곳에 빨강색, 노랑색, 초록색 깃발을 꽂아 놓았던 것이 오늘이 9월 16일인데, 아직도 걸려 있다. 아담한 도시를 지나간다.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풍경
도시를 만나고, 다시 청빛 이식쿨 호수를 만나고, 건조한 들녘을 달리고, 우람한 천산산맥 줄기를 만나고 그렇게 반족하며 이식쿨 호수를 향해 잘려가고 있다. 발릭취에서 촐폰아타로 가며 보는 청빛 호수와 천산산맥의 설경이 비경이다. 설산 위에 머룰고 있는 하얀 구름이 비경을 더해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호수다. 수변에 리조트 건물도 간간이 보인다. 우리는 호수의 북쪽으로 가고 있다. 유람선 타는 곳은 거기서 5Km 정도 더 간다. 그곳에 모래 수변이 많다. 산책하기에도 좋다. 리조트도 많다. 낭만 가득한이식쿨 호수 풍경을 보며 벌써 가슴이 설렌다.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변 시가지
이제 이식쿨 호수가 있는 시가지에 진입했다. 이식쿨 호수를 찾아오는 자국민과 외국인 모두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호수 초입의 도시 발릭취다. 발릭취에서 촐폰아타로 다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며 이식쿨 호수의 비경을 본다. 발릭취는 이식쿨 호수의 관문이다. 이식쿨 호수를 만날 때 꼭 거쳐야 되는 곳이다. 여기는 촐폰아타 도시다. 이 도시는 이식쿨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는 1만 명 정도다. 이곳에서 이식쿨 호수로 내려간다. 나무 전봇대가 오롯하게 솟구쳐 오른다. 집도 나무판을 지은 풍경도 보인다. 호두나무도 있다. 모두 신기한 진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유람선
나는 한국에서 여행준비를 할 때, 가장 보고 싶은 곳이 이식쿨IssykKul 호수였다. 지금 그 장엄한 이식쿨 호수에 온 것이다. 가슴 훈훈한 호수의 전설과 비경을 담아갈 것이다. 이식쿨 호수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며, 해발 1600m 고지에 있는 산정호수다. 이식쿨 호수의 면적은 약 6,200 ㎢로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 위치한 티티카카Titicaca 호수(약 8,300 ㎢) 다음으로 크다. 제주도 면적의 3배 또는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합한 크기다. 호수변을 내려오니 아름다운 꽃들이 물보다 먼저 나와 반긴다. 꽃 사이에 목선도 있다. 항구에는 벌써 우리를 태울 유람선이 정박하여 기다고 있다. 울창한 나무 숲이 호수에 비춰 비경을 자아낸다. 드디어 유람선이 이식쿨 호수의 넓은 품으로 출항한다. 키르기스스탄 동쪽에 위치한 호수다. 이식쿨 호수는 따뜻한 호수를 의미하는 키르기스스탄 말이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데, 그것은 호수의 바닥에서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1948년에는 자연보호지역으로, 1975년에는 람사르 장소로,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생물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여러가지로 특별 보호지역이다.
이식쿨 호수는 둘레 전체 길이가 688km다. 자동차로 9시간 달리는 거리다. 하루 종일 돌아야 다 보는 호수다. 평균 수심이 270m이고 가장 깊은 곳이 702m다. 호수 길이는 남북으로는 60Km, 동서로는 182Km다. 염기가 많아 식수로는 사용하지 못한다. 염분이 물 1리터에 6그램 들어 있다. 즉 염분농도가 6/1000으로 0.6%다. 바다의 1/5 염도를 품고 있다. 그래서 호수를 깨끗하게 해주고,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주기도 한다. 러시아 부호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다. 구소련연방시절에는 해군의 어뢰를 설치하여 군사훈련 지역으로 사람의 출입을 막았었다. 이식쿨 호수로 유입되는 강이 44개~118개다. 엄청난 물의 양이 고인 바다 같은 호수다. 가장 큰 강은 디이르갈란강과 튜프강이다. 호수의 물은 대부분 온천수와 천산산맥의 눈이 녹아 흘러든 곳곳의 강물이 고인 것이다. 수심 20m까지 보이는 청정 호수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청정지역으로 지정했다. 나는 바이칼 호수에도 가 보았다. 그때도 유람선을 탔었다. 바이칼에서는 파도가 쳐서 배가 흔들거렸는데 이곳은 잔잔하다. 하지만 지금 이곳 이식쿨 호수도 바이칼 못지 않은 광활하고 장엄한 풍경의 호수다. 우리는 2시간 정도 유람한다. 1시간 갔다가, 다시 1시간 돌아오는 코스다. 이식쿨 호수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두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는 목을 찔러 자살했다. 그 죽은 여인의 붉은 피가 이식쿨 호수가 되고, 두 남자 형제는 양쪽으로 산이 되어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다. 또 여자가 우물물 뚜껑을 덮지 않아서 계속 넘쳐서 이루어진 호수라고도 전해진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다. 잔잔한 물 위를 배가 흘러 간다. 수변에서 수영하는 사람도 있고, 리조트 건물도 있다. 울창한 나무들이 호수에 빠져 고운 풍경을 더해준다. 어찌 이것이 호수인가. 신의 큰 손이 만든 걸작품이다. 점점 수변에서 멀어지고 깊고 넓은 호수로 달린다. 배의 한쪽에는 건조한 사막산이 따라오고, 다른 한쪽엔 천산산맥의 설산이 따라온다. 바다 같은 망망한 호수다. 천산산맥 설경이 비경으로 호수를 빛내고 있다. 하얀 포말과 함께 갈매기가 솟구쳐 오르며 따라온다. 이럴 때 나는 다 비워내는 빈 몸, 빈 마음이 된다. 천진한 새가 되고, 천진한 물이 되어 참으로 무념의 행복한 순간이다. 이런 체험이야말로 세계여행에서 얻는 값진 보상이다. 현지 여자 가이드가 승선하기 전에 준비해온 보드카와 과일, 오이피클 등을 먹으며 더욱 진한 그리움으로 호수의 낭만에 젖는다. 나는 바이칼 호수에서도 유람선을 탔었는데 그때 보드카와 안주로 먹던, 바이칼 호수에서 잡았다는 훈제 물고기가 떠올랐다. 이식쿨 호수에도 많은 물고기가 많이 있지만 원래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생선을 먹지 않았다. 구소련시절 러시아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을 보고 먹기 시작했다. 수심이 연간 약 5 cm씩 줄어들고 있다.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호수는 더욱 고운 빛으로 물든다. 배는 우리가 승선했던 그 선착장에 내려준다. 이 고운 호수의 추억을 어찌 잊을까. 먼 후일 그리우면 어떻게 할까. 두 눈과 가슴에, 그리고 사진으로 많이 담아다가 내 정원에 걸어두고, 가슴 시린 그늘이 스며들 때 이식쿨 호수의 저 찬란한 추억의 등불로 태우리라. 이식쿨 호수의 청청한 물빛, 그 아름다운 채색으로 나도 물들어 청청한 삶이 되리라.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리조트
이식쿨 호수 유람을 마치고 우리가 유숙할 리조트로 이동한다. 1930년대 러시아 때 만든 도로의 울창하고 큰 가로수 사이로 지나간다. 리조트에 도착하여 2층 숙소로 올라갔다. 발코니에서 바라본 풍경은 대단한 비경이다. 나무와 꽃으로 가꾼 정원, 동화 속 같은 집들이 조화를 이뤄 절창이다. 그리고 리조트 마을 사이로 낸 길을 따라 가면 거기 이식쿨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뷔페로 석식을 마치고 산책 하려니 어두워져서 그냥 휴식했다. 내일은 6:30분 모닝콜, 7:30분 조식, 8:30분 출발하는 일정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주변을 산책할 것이다.
2015년 9월 17일 목요일 이식쿨 호수, 비슈케크
*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아침 산책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마치고 이식클 호수로 나갔다. 숙소에서 가까운 거리다.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걸어간 곳에서 꿈 같은 이식쿨 호수 비경을 만났다. 수변은 모래가 쌓여 해수욕장 같다. 일출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는 호수는 물빛이 장관이다. 청청한 코발트빛 물이 한가득, 어찌 저것을 호수라 할까. 호수 깊숙이 들어가도록 목조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걸어 호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뒤로는 천산산맥 줄기가, 앞으로는 이식쿨 호수가 감싸 안는다. 수변의 나무들과 휴양시설도 고운 비경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징기스칸 무덤이 이식쿨 호수에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바이칼 알혼섬 불한 바위에서도 그런 전설을 들었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전설을 듣는다.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만큼 호수가 장엄하다는 뜻이리라. 이식쿨에서 대통령도 나오고, 작가도 나왔다는데 저 광활한 호수가 키운 것 아닐까 싶다. 결코 잊지 못할 여정이다.
* 키르기스스탄 암각화 공원
이식쿨에서 일정을 마치고 다시 비쉬케크로 돌아가던 중, 이식쿨 호수 가까운 곳에 있는 암각화 공원에 들렀다. 산자락 아래 아주 넓은 자락으로 위치하고 있는 고대 유적지다. 42ha의 드넓은 들녘 곳곳에 돌이 들어앉아 있는데, 돌에 무언가를 새겨 놓았다. 1ha는 300평이니 12,600평의 대단히 큰 넓이다. 입구에는 안내 간판이 세워져 있고, 소들이 방목된 상태로 암각화 공원을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다. 공원에 들어가서 크게 한 바퀴 돌며 살펴보았다. 돌에 새겨진 것들은 사냥을 떠나기 전에 이런 동물을 잡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며, 제사 지내던 의식으로 동물을 새겨 놓은 것이다. 사슴, 양 등 다양한 동물이 크고 작은 바위에 암각화 되어 야생 그대로 놓인 것이다. 이것은 BC2000년에서 중세까지 제작된 것이다. 이것은 키르기스스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다. 이식쿨은 아주 오래 전, BC2세기부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다. 지금도 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 동전 등이 발견된다. 아직도 지하에 유물이 많이 묻혀 있다. 비용이 많이 들어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발굴된 유물도 러시아에서 많이 가져가고, 일부만 촐폰아타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잠시 고대의 생활상을 체험한 소중한 여정이다.
* 키르기스스탄 주택
들녘 곳곳에 주택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이식쿨 호수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식쿨 호수의 풍요로움만큼이나 집도 크고, 주택형태도 현대풍으로 아름답다.
* 키르기스스탄 구소련시절 가로수
구소련시절 조성된 도로를 달린다. 그런데 도로변 곳곳에 가로수가 우람하다. 1930년대 소련에서 심은 나무들이다. 키가 아주 크다. 발목 부분에는 벌레 예방용으로 하얀 약품을 칠해 놓았다. 중국에서 많이 보았던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들녘 공동묘지
비쉐케크로 가는 길 도로변 들녘에 공동묘지가 있다. 벽돌로 담장을 만들어 어느 마을처럼 예쁘게 꾸며 놓았다. 무덤은 집처럼 큰 규모도 있고, 작은 비석만 세운 것도 있다. 이 나라의 종교는 90%가 무슬림이다. 그 다음은 러시아 정교다. 이곳 장례문화는 죽은 사람을 흙 속에 묻지 않고 땅 위에 놓은 채 뚜껑만 덮는다. 그것은 혹시 살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여 살아난 사람도 있단다. 공동묘지의 종류가 네 가지다. 무슬림, 러시아 정교, 유태교, 군인묘지로 분리된다. 공동묘지 자리도 좋은 곳은 비싸다. 죽어서도 아름다운 집에 거하고 있다.
* 키르기스스탄 고속도로 중국인 인부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쉬고 있는데, 고속도로에서 일하는 중국인 인부들이 보인다. 중국이 건설하는 고속도로라서 인부도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6개월 이상을 여기서 머물며 작업을 한다. 타국에서 힘들겠지만 참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 키르기스스탄 휴게소
중국이 건설한 고속도로변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이곳 휴게소에서는 키르기스스탄의 천연 벌꿀과 프로폴리스를 판매한다. 천산산맥 웅장한 품에서 채취한 꿀이라 하니 모두들 꿀을 샀다. 장엄한 산맥의 정기를 보듬어 가고 싶은 심정에서다. 동물상을 정원 곳곳에 세워두어 산마을을 실감나게 한다. 현지 가이드는 옥수수는 절대로 사서 먹지 말란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의 상가에서 판매하는 것도 함부로 사 먹으면 배탈이 난단다. 석회수가 함유된 물로 삶아서 그렇단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적응이 되어 괜찮아도, 우리들은 안 된단다. 고속도로만큼이나 잘 정비해 놓은 휴게소에서 즐거운 휴식이었다.
* 키르기스스탄 사막집 요르트
사막집 요르트가 도로변에 있다. 화장실도 곁에 있다. 요르트를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게르라고 한다. 둘 모두가 사막 생활에서 꼭 필요한 집이다. 키르기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모두 우직한 근성이 있다. 그리고 농촌풍의 성향이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도시적인 분위기다. 하얀 천막을 둥글게 두르고 문 입구에는 붉은 문양으로 장식을 했다. 먼 나라에서 독특한 풍경을 보니 흐뭇하다.
* 키르기스스탄 사막 풍경
키르기스스탄은 70%가 산이다.우리나라와 같은데, 이곳 산은 건조한 사막산이다. 사막산 아래에는 사막이 있다. 간간이 풀들이 둥지를 틀었다. 미국 서부 여행에서 사막을 달리며 눈이 저리도록 보았던 캘리포니아 들녘의 모하비 사막이 떠오른다. 이곳 풀들도 그곳 풀들과 유사하여서 더욱 그렇다.
* 키르기스스탄 산녘 동물들
건조한 산녘에 동물들이 많이 보인다. 각자, 혹은 뭉쳐서 사막 사이에 겨우 돋아난 풀을 찾아 다니며 힘겹게 뜯어 먹는다. 이곳 천산산맥 줄기의 산마을 사람들은 가축을 산녘에 방목하여 기른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산녘 맑은 계곡물
계곡에는 맑은 물이 있어 마을 사람들의 식수가 되고, 저 동물들이 먹기도 한다. 순수한 옥빛 물결이 장관이다. 땅은 건조한데도 물줄기는 힘차게 흐른다. 천산산맥 설봉에서 녹아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장엄한 풍경이다. 강이 400여 개나 있다. 그래서 수력발전소도 있다. 이런 것들이 천산산맥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며, 키르기스스탄의 큰 자부심이란다.
* 키르기스스탄 산녘 설표 동상과 사슴 동상
산녘 도로를 달리는데 길가에 설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설표는 해발 5천 미터 이상에서 사는 동물이다. 이 부근에 설표가 산다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는 천산산맥 줄기의 산으로 높은 고지대다. 사슴 동상도 있다. 산길에서 보는 독특한 이색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산마을 풍경
방목한 동물들이 보이기에 저들은 어느 집에서 살까, 궁금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산마을이 나온다. 겨우 한 집만 보인다. 동물 우리로 보이는 큰 축사도 보인다. 고독한 산녘에서 사람은 동물에 기대고, 동물은 산에 기대어 도란도란 산다. 계곡의 맑은 물이 풍족하여서 생명의 끈을 이어준다. 산마을은 지하수지만 깨끗하다. 가정에 수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다. 키르기스스탄 1대 대통령 고향도 지나간다. 대통령도 이런 산마을에서 나고 자랐나보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천샨산맥 풍경
비쉬케크에서 이식쿨 호수로 갈 때도 보았던 장엄한 천산산맥 풍경이 또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여전히 장관이다. 고속도로변에는 사막이, 다음 경지에는 농촌마을이, 다음 너머로는 천산산맥이, 그 너머 위로는 설봉이, 또 그 너머 위로는 하얀 구름층이 비경을 이뤄 이방인에게 아낌 없이 선사한다. 키르기스스탄은 목화를 재배하지 않는다. 일조량이 풍부하지 않아서다. 가내 소규모로 다양한 농사를 짓고 산다. 농산물을 수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다. 키르기스스탄은 땅이 개인 소유다. 일부의 땅과 공원만 국가 소유다. 민주국가다. 우즈베키스탄과는 다르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의 간섭을 많이 받는다. 천산산맥 아래 농촌마을이 멀리 보인다. 도란도란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두고두고 잊지 못한 키르기스스탄의 고운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를 지나간다. 도로변에 강물이 흐르는데. 그 강 너머가 카자흐스탄이다. 잘 보면 철조망도 나무 사이로 간간이 보인다. 국경을 넘어가는 다리도 있다. 강 하나를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만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마을이 보인다. 두 나라가 마주하여 서로 바라보며 산다. 강 다리를 건너 넘어갈 수도 있다. 참으로 부럽고, 신기한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국경지대 아름다운 식당 중식
키르기스스탄의 전직 대통령 아들이 소유했던 하바이 식당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운영한다. 드넓은 정원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변에 여러가지 동물상을 세워 두었다. 식당은 목조 건물로 상당히 우아하고 곳곳에 많은 식당 건물이 있다. 호수 건너편에 낙타가 있다. 호수에는 백조가 많다. 사람이 주는 빵조각을 잘 받아 먹는다. 우리도 빵을 주었다. 중식 메뉴는 볶은 국수요리와 스프, 샐러드인데 아주 맛있다. 중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결혼한 신혼부부가 사진을 찍는다. 주변 풍경이 워낙 좋아서 아름다운 배경이기 때문에 결혼 후 이곳을 찾는다. 풍경도, 사람들도 모두 정겹고 아름다운 식당이다.
*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국경선 철조망
중식을 마치고 식당에서 나와 비쉬케크로 가는데, 조금 달려가니 도로변에 철조망이 둥글둥글하게 감아 3단으로 설치해 놓았다. 저것은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선이다. 아까는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선이었는데, 이곳은 도로까지는 키르기스스탄 영토고, 도로 건너편부터는 카자흐스탄 영토다. 기막힌 광경이다. 지금 우리는 버스를 타고 키르기스스탄 영토를 달리지만 바로 눈앞에는 카자흐스탄 영토가 있어 카자흐스탄을 마주보며 가고 있다. 고요한 평화가 시리도록 부럽다.
* 키르기스스탄 옥수수밭
우즈베키스탄에서라면 목화가 자라고 있을 들녘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이 나라는 일조량이 부족하여 목화를 재배하지 못해서다. 건조한 땅에서 드넓은 땅에 가득 들어차 있는 옥수수가 풍요로운 정경을 선사한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시가지 풍경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케크 시가지에 도착했다. 어제 떠났던 도시다. 자동차들이많다. 독일제 중고차량이 많다. 소련시절에 지은 집들도 그대로 있다. 70년~80년 전 주택이다. 키르기스스탄 인구는 600만 명이다. 그런데 비수케크 인구는 100만 명이다. 키르기스 산맥과 가까운 추 강 유역 해발 750~900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1878년 러시아가 코칸트 칸국의 요새를 점령하고 건설한 도시다. 이 지역의 행정중심지였지만 허름한 마을 정도였다. 1924년 새로 창설된 키르기스 자치주의 주도로 선정되었다. 1926년 키르기스 자치주가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되면서 수도가 되었다. 그 후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현대적 도시로 성장했다. 가로수 넓은 도로들이 건설되었고, 공원이 곳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만년설에 덮인 산맥이 있다. 비쉬케크에 관청, 극장, 과학 아카데미, 키르기스국립대학교, 농과대학, 의과대학, 과학기술전문대학, 사범대학 등 주요 물들이 많이 있다. 비슈케크의 산업은 2단계로 발전해왔다. 1941년까지는 현지에서 나는 원료들을 이용한 식료품산업과 경공업에 중점을 두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 서부의 중공업이 이곳으로 철수한 뒤부터는 기계조립과 금속공업이 널리 이루어졌다. 특히 1960년대에 급속히 발전했으며 1959년~1970년에 인구가 거의 2배로 늘어났다. 이제 우리는 비쉬케크를 탐방할 것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구소련시대 주택
비쉬케크 시가지에 구소련시대에 건축한 집들이 있다. 70년에서 80년 전 건물인데 아직도 그대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주택 규모가 크다. 지붕도 높고 넓다. 시대는 지나갔는데 흔적은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어쩌면 저런 모습이, 구소련시절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런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나라를 찾는 하나의 이유에 속한다. 나 역시 그렇다. 이번에 탐방하는 중앙아시아 3국이나, 작년에 다녀온 코카서스 3국이 바로 그런 연유에서 더욱 가 보고 싶었다. 구소련연방시절에는 우리는 감히 찾아 올 수 없는 국가였지만, 지금은 그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시절의 유적이나 유물이 그 당시의 현실을 다소나마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소련연방국이었던 국가의 여행은 매우 신비롭고 숨은 보석을 찾는 개념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빅토리아 광장
빅토리아 광장은 러시아를 대신하여 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키르기스스탄 전사자들의 추모 광장이다. 20만~30만 명이 희생당했다. 오늘 아침 호텔에서 출발하여 이식쿨로 갈 때, 시가지에서 보있던 바로 그 공원이다. 그때는 참으로 멋잇는 도심의 공원이라는 생각만 하고 바라보았는데 엄숙하게 바라보아야 할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기념비가 있고, 여인상이 서 있고, 바로 앞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광장 양 옆으로는 참전용사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키르기스스탄은 중앙 아시아 북부에 있는 내륙국으로, 1864년 제정러시아에 정복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 투르키스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6년 키르기스스탄 자치공화국이다가, 1936년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을 거쳐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1년 분리독립하였다. 독립 국가연합의 일원이다. 결코 러시아와 무관하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직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광장 주변은 아름다운 꽃과 잔디로 곱게 조성해 놓았다. 죽은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려는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숙연해지는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탐방하였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국회의사당
빅토리아 광장에서 역사 박물관으로 이동하는 중에 국회의사당 건물을 만났다. 웅장한 기둥들이 건물을 받들고 있다. 청청한 하늘에 국기도 오롯하게 걸려 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역사박물관 앞 레닌동상
역사 박물관 앞에 레닌 동상이 우람한 형상으로 세워져 있다. 소련시대에는 이 박물관도 레닌 박물관이었다. 레닌은 항상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뜻으로 꼭 한 손을 높이 들고 있다. 저런 모습의 레닌 동상은 러시아 여행 중에도 여러 번 보았다. 동상 앞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화사하다. 바로 앞 길 건너 편에는 국회의사당이 마주 하고 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역사 박물관
키르기스스탄은 1876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1991년 독립했다. 이곳 역사 박물관도 소련시대에는 레닌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아주 웅장하다. 박물관 건물 뒤편 정원에는 레닌 동상도 크게 세워져 있고, 건물 앞에는 알라투 광장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알라투 광장에는 키르기스스탄의 전설적인 영웅인 마나스 기마동상이 또한 우람하게 세워져 있다. 레닌 동상을 만나고, 다음으로 알라투 광장을 바라보며 역사 박물관에 입장하였다. 키르기스스탄의 역사를 전시한 아주 큰 규모의 박물관이다.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으로 세운 박물관이다. 그때 2600만 명이 전사했다. 박물관에는 키르기스스탄의 역사 유물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우즈케키스탄에서 게르리고 불리는 사막의 천막집인 둥근 집이 이곳에도 전시되어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요르트라고 부르는 천막집이다. 곁에는 교통 수단인 말이 생생한 모습으로 서 있다. 소비에트의 상징 마크인 낫과 망치를 새긴 부조상도 있다. 이곳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여지는 것은 웅장한 용사들의 동상이다. 사진자료도 있고, 부조상도 있고 다양한 역사자료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 2차 세계대전 승리, 키르기스스탄과 러시아의 관계 등을 표현한 것들이다.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오랜 역사와 수려한 경관을 지닌 국가다. 키르기스인들은 이미 기원전 2천 년경부터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렸다.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민족이다. 기원전 1세기까지 흉노와 함께 중국을 공격하였다. 그로인해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게 만들었다. 5~6세기경에는 키르기스 왕국을 건설했다. 그 뒤 키르기스인들은 유목 생활을 계속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해 첨단기술과 정보를 받아들여 번창했다. 동서양 문명교류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인구 200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지만 오랜 역사를 지녔고, 많은 노력으로 발전을 이룩한 국가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알라투 광장
비슈케크의 도심 한 복판에 웅장하게 자리한 광장이다. 바로 곁에는 국립 역사 박물관이 있다. 알라투 광장 건너편에는 대통령궁이 있다. 알라투 광장 근처의 건물에는 2010년 키르기스스탄 혁명 때의 총탄 자국이 그대로 있다. 그때 90여 명이 사망다. 2005년 튤립 혁명으로 바키예프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부패 정치로 인하여 2010년 민중의 심판을 받았다. 그 후 키르기스스탄은 의회 권한을 강화했고, 2012년부터 아탐바예프 대통령이 재임 중이다.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 주변은 구소련시대의 레닌 대로가 있어 비슈케크의 중심지다. 현재의 국립 역사 박물관도 레닌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앞의 이곳 알라투 광장에는 원래 레닌 동상이 놓여 있었지만 독립과 함께 철거 당했고, 현재는 레닌 동상 대신 마나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나스는 키르기스스탄의 영웅이며 건국설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이 기마상이 오롯하다. 박물관 앞에 놓여있던 레닌 동상은 철거 후 그 형상 그대로 유지하여 박물관 뒤편 정원에 옮겨 놓았다. 광장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거대한 마나스 상은 독립 후 키르기스스탄을 튼튼하게 세워주는 강인한 상징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알라투 광장 마나스 동상
마나스는 이 지역의 장군이며 영웅이다. 10세기부터 떠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다. 비슈케크 도심 중앙의 알라투 광장에 서 있는 커다란 마나스 기마 동상은 키르기스스탄 탄생 신화의 주인공이며, 키르기스인들의 상징 인물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마나스 신화는 19세기에 책으로 전파되어 기록되기 시작했다. 마나스를 기리는 50여 편의 서사시와 많은 책들이 있다. 뒤로는 역사 박물관이, 앞으로는 주요 정부건물들이 있어 더욱 웅장한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알라투 광장 주변 정부건축물
알라투 광장은 도심 중앙에 있다. 그래서 주변에는 레닌대로도 있고, 대통령궁도 있고 그외 주요 정부 건축물이 있다. 역사 박물관과 국회의사당도 있다. 분수와 긴 건물들이 아름답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알라투 광장 국기게양대
비슈케크 알라투 광장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큰 국기게양대가 있다. 키르기스스탄 국기는 붉은 바탕에 민족 전통의 노랑 무늬를 배치하였다. 노랑 무늬는 40개의 햇살을 가진 태양으로서 40개의 키르기스스탄 민족을 상징한다. 햇살이 반은 시계방향, 나머지 반은 시계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태양 안에는 3줄로 이루어진 2세트의 선들이 교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의 유목민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천막집인 요르트를 형상화한 것이다.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어 독립국가연합CIS에 속한 국가로서 독립하면서 1992년 3월 3일 제정하였다. 거대한 국기게양대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고 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대통령궁 백악관
이곳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 거주하는 화이트 하우스다. 하얀 색상의 건축물이어서 백악관으로 부른다. 울창한 숲 공원이 곁에 있어서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주변만 돌아 보았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알라투 광장 주변 풍경
알라투 광장 주변에는 웅장한 건축물도 있고, 추모위령기념비와 혁명기념비도 있다. 건물에는 역사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어 독특한 풍경이다. 또한 비슈케크의 아주 큰 공원이 있어 울창한 나무들이 한 가득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판필로브 공원
판필로브 공원은 카자흐스탄에도 동일한 이름으로 있다. 소련시절 1893년부터 1941년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던 판필로브 부대의 지휘관 이름을 따서 붙여진 공원이다. 이곳은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판필로브 공원이지만 판필로브라는 이름은 동일한 인물이다. 28인 전사 추모비가 오롯하게 세워져 있다. 28명의 전사자 명단도 새겨져 있다. 아주 큰 규모의 공원에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 시설도 많고, 울창한 나무들이 많아 시민들의 휴식처다. 공원 부근에는 엥겔과 마르크스 동상을 비롯한 여러 동상이 세워져 있다. 소련 산하 키르기스 연방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미국대학인 건물도 있다. 1920년대의 러시아 정교 건물도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그대로 있다. 아름다운 꽃과 도토리 나무가 많다. 도토리가 길 바닥에 많이 떨어져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도토리를 먹지 않아 그대로 뒹굴고 있다. 공원 안과 그 주변을 한참 동안 걸으며 많은 것을 보았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판필로브 공원 28인추모비
판필로브 공원에 오롯하게 세워진 28인 전사자들의 추모비다. 28명의 명단이 하단에 새겨져 있다. 판필로브는 구소련시절 1983년부터 1941년 소련군이 주둔하던 부대의 지휘관 이름이다. 소슬한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국립극장
판필로브 공원 근처를 지나다가 만난 곳이다. 국립극장은 울창한 나무로 돌러싸여 있어 매우 아름답다. 건물 앞에는 남자 무용수인 발리노 동상이 무용하는 포즈로 서 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러시아 정교회
키르기스스탄 현지 여자 가이드가 다니는 교회라고 우리를 데리고 왔다. 요즈음의 비슈케크 시민들은 80% 이상이 이슬람교다. 하지만 차도르를 쓴 여성들은 거의 없다. 모스크도 많지는 않다.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문화도 달라졌다. 그러나 이제는 독립하였고, 다시 잃어버린 종교와 전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본 건물 뒤에는 침례식 건물과 러시아에서 파견된 주교의 집이 있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거리 펌프물
비슈케크 시가지 거리에 펌프물이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펌프에 입을 대고 물을 받아 먹는다. 우리나라의 1960년~1970년대에 보던 모습으로 정겨운 풍경이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구소련시절 아파트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 도심에 구 소련시절의 아파트가 그대로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구조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오쉬 바자르
키르기스스탄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탐방지다. 오쉬는 이곳 지역 이름이다. 오쉬 바자르, 시장 주변에는 전차와 버스 정류장이 있다. 시장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교통난까지 혼잡하다. 비슈케크의 대시장인 오쉬 바자르에서는 키르기스인들의 활기찬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따라 온 상인들이 장사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달러는 받지 않는다. 자국의 현지돈만 받는다. 그 만큼 관광객에 대하여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키르기스스탄은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벌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이식쿨 호수에서는 달러를 받는다. 그곳은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 눈을 뜬 지역이다. 관광지에서만 달러를 사용이 가능한 나라다. 부라냐 탑에서도 달러를 받았다. 휴게소 꿀 가게에서도 달러를 받았다. 거스름돈은 자국돈 솜으로 주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 나라보다는 낫다. 아직 여행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시장에는 고려인들도 있다. 고려인들은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를 당한 사람들이다.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슬픈 역사를 안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과일과, 의류 등 생활용품들이 아주 많다. 한국의 전통 재래시장 같은 향수로 한 바퀴로 둘러보았다.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서울식당 석식
키르기스스탄에서 마지막 보내는 날로 석식은 한식으로 먹었다. 우리 교포가 운영하는 서울식당인데 어둠 속에서도 SEOUL이라는 영문 문국구 영롱하게 빛남에 참으로 반가웠다. 마당에는 고추를 널어 말리고 있어 더욱 정겨운 풍경이다. 푸짐한 한식 메뉴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2015년 9월 18일 금요일 키르기스스탄 출발, 카자흐스탄 알마티
*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호텔 출발
오늘은 새벽 5시 기상했다. 6시 출발이다. 카자흐스탄으로 간다.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에서 카자흐스탄 국경까지는 250Km다. 6시간 정도 소요된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머문 키르기스스탄 호텔을 떠났다.
* 키르기스스탄 편의점과 주택
아침 식사는 가다가 마트에서 현지 가이드가 사 왔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키르기스탄의 주택이 길가에서 보인다. 버스에서 나누어준 햄, 치즈, 빵, 과자, 쥬스 등으로 간단히 조식을 했다. 이 버스와 현지 가이드 모두 그대로 카자흐스탄까지 가서 여행을 도와준다.
* 키르기스스탄 국경 사무소
키르기스스탄 국경사무소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렸다. 직접 가방을 들고, 밀고 이동하여 출국수속을 한 후 국경을 통과했다.
* 카자흐스탄 국경 사무소
카자흐스탄 국경사무소에서 입국신고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렇게 입출국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우리 앞의 프랑스 여행객은 3시간 걸렸단다. 카자흐스탄도, 키르기슷탄도 러시아와 비슷한 언어와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모든 입국절차 마치고 나왔다. 힘들게 넘어온 국경선이지만 이것도 세계여행에서 만나는 독특한 체험이다.
* 카자흐스탄 진입 검문소
국경을 통과하여 조금 가자 검문소가 있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객 차량은 잠시 멈추었다가 그냥 출발한다. 철처한 검색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중앙아시아 국가인 카자흐스탄 영토로 진입했다. 카자흐란 이름은 유랑자라는 뜻이며, 13세기 징키스칸의 후예로 전통적인 유목민족이다. 면적은 2,724,900㎢로 세계에서 9위 크기다. 남한의 27배에 면적으로 거대한 영토다. 1991년 구소련의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하여 독립국가연합CIS의 하나다. 현재는 공화제의 형태로 대통령제다. 90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방한을 한 후 우리 나라와 92년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북한과도 수교국이다. 1998년에는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옮겼다. 북쪽은 러시아연방, 동쪽은 중국과 몽골, 남쪽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서쪽은 카스피해에 접해 있다. 카자흐는 나라 없는 한인들의 한많은 수난의 역사가 나라이기도 하다. 1937년 스탈린의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강제 이주에 따라 수십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러시아는 일본인이 한인을 이용해 간첩으로 쓴다는 우려를 한 것이다. 또한 한인수의 증가에 따라 자치요구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그리고 벼농사 등 농업기술을 중앙아시아의 농업 개척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소수민족 분산 지배정책 등의 정치적 이유로 한인들을 화물차와 가축 운반철도로 강제 이송되었다. 추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한달여에 걸친 이동 중 추위와 굶주림으로 다수가 사망하였다. 겨우 살아남은 한인들이 당도한 곳은 민가 하나 없는 황량한 반사막 초원지대인 우슈토베란 곳이었다. 소련당국은 이 황무지에 수십만 명의 한인들을 내려 놓고 아무런 대책없이 생활을 하도록 강요했다. 2차 세계대전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자, 한인들이 적성민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후방의 노동전선인 탄광, 군수공장, 북극권 산림벌체 등에 동원되어 추위, 기아, 강제 사역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11만 명 정도가 있으며, 교민도 10만 5천여명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고려인은 대부분 북한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는 슬픈 역사가 고인 국가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생생하게 전해 들으며 배워간다. 카자흐스탄의 드넓은 들녘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 카자흐스탄 드넓은 들녘의 동물들
이제 카자흐스탄의 영토에 진입하여 광활한 들녘을 달린다. 카자흐스탄은 인구 1700만 명이다. 알마티에 150만 명이 거주한다. 전체 인구 중에서 대부분이 카자흐스탄인이고, 러시아, 중국, 키르기스스탄인, 그리고 소수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해주에서 추방 당한 우리 동족인 고려인도 10만 명이나 거주한다. 전체 인구의 0.6%를 차지하는 큰 비율이다. 연해주에서 추방 당할 때 최초로 도착하여 정착한 땅이 카자흐스탄이어서 그렇다. 카자흐스탄에는 150개 만족이 산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부자 국가다. 석유와 수자원이 풍부하다. 면적은 271만7천km로 구소연방 영토의 12%이며 세계에서 9번째로 큰 나라다. 한반도의 12배, 남한의 약27배 크기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위치한 내륙국이다. 북단은 모스크바, 남단은 한반도의 북부와 비슷한 위도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원으로 되어 있다. 서부는 카스피해 연안저지와, 중앙부는 카자흐 소화산대지, 북부는 서시베리아 저지로 되어 있다. 동부와 남부 산악지대는 만년설과 빙하로 덮인 해발 5000m가 넘는 톈산과 알타이 산맥이 솟아 있다. 그래서 동고서저형의 지세를 이룬다. 전체 면적 중 경작 가능지가 겨우 8%, 농경지가 0.05%뿐이다. 2005년 통계로 기타의 영토가 91.67%다. 북부 일부를 제외하면 내륙에 광대한 유역 평야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알마티까지는 200Km 거리다. 넓은 영토의 나라이기에 우람한 산과 들녘이 아득한 풍경이다. 점점 푸른 초지의 마을로 진입한다. 많은 양떼들을 비롯한 동물도 있고, 말을 타고 다니는 목동도 보인다. 풀이 곳곳에 파랗게 있고, 동물들이 풀을 뜯는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 카자흐스탄 휴게소
카자흐스탄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중국 트럭이 들어와 있다. 주유소를 겸하고 있는 넓고, 깨끗한 휴게소다.
* 카자흐스탄 공동묘지
들녘 한적한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민가인지, 공도묘지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웅장하다. 가도가도 끝없는 들녘이다. 도로변에도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워낙 넓은 땅이어서 그렇다. 장군 2명의 기마상도 지나간다. 고운 풍경이다.
* 카자흐스탄 검문소
하얀 검문소 건물이 있다. 서로 통행하는 자동차를 세워 검색한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 차량은 잠시 멈춘 바로 출발시킨다. 우리 버스도 쉽게 통과하였다.
* 카자흐스탄 텐샨산맥 고산마을 풍경
텐샨산맥이 우람하게 늘어선 산자락 아래 고산마을 풍경이 아름답다. 원래 카자흐스탄 전통가옥은 요르트라는 둥근 천막집이다. 주로 사막이나 초지에서 짓고 산다.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은 원래 한 나라였다. 1917년 소련 혁명 전에는 두 나라가 이름이 비슷했으나 소련연방 후 소련이 키르기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구분해줬고, 1919년 독립 후 완전히 이름을 구별해서 지었다. 나자르 바이브 1대 대통령이 현재까지 통치한다. 우즈베키스탄도 동일하다. 키르기스스탄은 4번째 대통령이다. 카자흐스탄도 천산산맥과 접해있는데 낮은 산악지역이다. 지진이 주1회 정도로 잔잔하게 일어난다. 우리도 느낄 수 있을 정도란다. 연간 1500회 지진이 일어난단다. 1016년 강도 10도의 대지진이 일어았다. 그후로는 강진은 없다. 키르기스스탄 19세기 말 큰 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졌다. 우즈베키스탄도 1996년에 강진이 일어났다. 건조한 들녘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주택이 보인다.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농토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길가에서 수박을 팔기도 한다. 모두 고산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모스크
이제 알마티에 가까이 왔다. 시가지 초입에 아담한 모스크가 있다. 알미티는 1929년~1998년꺼자 카자흐스탄의 수도였다. 대부분 건물은 수련연방시절 건축물이다. 알미티에는 2개의 큰 강이 있다. 기대되는 여행지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에서 보는 텐샨산맥
알미티 시내에 들어와서 보는 텐산사맥은 장관이다. 짙푸른 고산 설봉이 웅장하다. 텐샨산맥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나라들을 거쳐 아프가니스탄까지 동서로 2천500km에 이르는 장엄한 산맥이다. 해발 3천m 이상의 고봉들이 이어져 히말라야 산맥과도 조우한다. 허름한 도시 위로 장엄하게 솟구쳐 올라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자동차들
알마티 시가지에 들어서자 자동차들이 도로에 가득하다. 알마티는 교통체증이 심한 도시다. 1가구에 2~3대씩 보유하고 있다. 알마티의 큰 문제점이다. 키르기스스탄과는 다르다. 지금 서서히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완전 서행이다. 자동차 번호 옆에 KZ는 카자흐스탄 차량으로 하늘색 국기가 그려져 있다. 붉은 색 국기가 그려진 차는 키르기스스탄 차량이다. 두 나라는 친하다. 서로 출퇴하는 생활한다. 만약 체증이 심하면 중식을 먼저 하고 투어를 한단다. 알마티에서는 콕두베 타워, 판필로브 28인 추모공원, 젠코바 성당, 박물관 등을 탐방한다. 카자흐스탄은 농업과 산업이 반반인 국가다. 예전에 사과를 많이 재배하여 알마티는 사과도시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 체증은 알마티 여행 중 여러 곳에서 겪었다. 그 만큼 풍요로운 도시임을 알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도심 강
알마티에는 2개의 강이 흐른다. 빅 알마티 리버, 스몰 알마티 리버 즉 큰 강과 작은 강인데 지금 지나는 강은 큰 강이다. 우리의 눈에는 그리 크지 않다. 강변에는 나무들이 울창하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가스관
이나라에서도 가스관은 지상으로 놓여 있다. 알마티 시가지 주택 사이로 가스관이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아파트
대부분이 구소련시대의 아파트다. 웅장한 아파트도 있고, 소박한 아파트도 있다. 크고 작은 아파트가 도시를 장식한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현지 중식 식당
우리는 교통체증으로 투어보다 중식을 먼저 하기로 했다. 도심의 울창한 나무 사이 고운 풍경이 드리운 식당이다. 정원에 전시한 소련풍의 자동차 풍경이 소슬하기도 하다. 뷔페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다양한 메뉴다. 쇠고기, 닭고기, 만두, 과일, 포도주, 쇠고기스프, 과일화채, 등 약간 짠맛 음식이다. 시간이 있어 알마티 시가지 주변을 산책했다. 주변은 여전히 자동차가 많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가지 풍경
중식 후 도심 거리를 살펴 보았다. 소련시절의 아파트와 건물도 있고, 전차, 레일, 버스, 교통신호 등이 있다. 현대풍의 느낌이 든다. 울창한 나무들이 도로변에 한가득이어서 상큼한 분위기인데, 도로에는 차들이 많아 답답하다.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과는 약간 다르게 발전된 풍경이다. 알마티는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금융중심지이며 카자흐스탄 GDP의 20%를 기여하고 있다. 알마티에서 가장 큰 산업은 금융산업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은행인 BTA Bank가 알마티에 본부를 두고 있고 Kaz Kom Bank 및 다른 주요 은행들도 알마티에 있다. 수도는 아스타나로 옮겨 갔지만,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의 경제 중심 도시다. 풍요로운 시가지 풍경이 대변해 주고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판필로브 28인 전사 추모 공원 입구
오늘 알마티에서 판필로브 28인 전사 추모공원, 젠코바 성당, 전통악기 박물관, 역사 박물관, 콕두베 산정 전망대 등을 탐방할 것이다. 중식 후 먼저 온 곳은 판필로브 28인 전사 추모공원이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정경이다. 큰 글씨로 공원을 안내문구가 새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푸쉬키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공원에 들어서니 울창한 나무들과 꽃들이 먼저 반긴다. 문 바로 앞에는 판필로브의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다. 소나무 길을 따라 안으로 걸어가니 공원 중앙에 아름다운 건축 양식의 젠코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들어서 있다. 핀필로브 추모공원에는 28인 전사 추모비와 젠코바 성당과 악기 박물관 등이 있다. 우리는 오늘 모두 관람할 것이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젠코바 성당
젠코바 성당은 알마티 판필로바 28인 추모공원 중앙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공원에 들어오니 바로 앞에 아름다운 자태로 반긴다. 성당 앞 마당에는 비둘기들이 많이 날아와서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먹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휴식한다. 이 성당은 1903~1906년에 텐샨산 목재로 건축하여 1907년에 완공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건축된 목조 성당이다. 무게 중심을 안정하게 하기위해, 무겁고 낮게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외부의 색상도 구조양식도 대단히 수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주변에는 우람한 나무들이 함께 치솟아 오른다. 높이 54미터로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목재 건축물이다. 눈앞에서 바라보니 정말 그 높이가 아득하여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시야에 담긴다. 1911년 강도 10도의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 성당이다. 그 당시는 러시아 제정시대로, 2,000여 개의 건물이 파괴되는 강진이었는데도 잘 견뎌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개 안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성당 안으로 입장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관람하고 있다. 내부는 사진촬영 금지다. 소련연방 시대에는 예배가 중단되었다가, 1995년 러시아 정교회로 반환된 후 1997년부터 다시 예배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역사박물관, 문화센터 등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에 와서야 성당 본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은 알마티 도시의 중앙성당이다. 러시아 정교회 크리스찬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걸작 예술품 같은 아름다운 경관의 성당이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판필로브 공원 풍경
알마티 판필로브 공원은 주요관공서가 있는 중앙광장 근처에 있다. 도심 복판 푸쉬키나 거리에 있어서 공원 앞에는 차량과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 이 공원에는 젠코브 성당, 28인전사 추모기념탑, 2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 기념비, 전통 악기 박물관 등이 있다. 시민들은 가족 단위로, 혹은 친구, 연인 끼리 울창한 나무들과 꽃들로 조화된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행복한 표정들이다. 거기에 비둘기까지 공원 마당에 한가득 채워 멋진 정경이다. 아이들은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비둘기를 따라 다닌다. 사람과 자연, 동물과 식물까지 함께 모여 조화로운 공원 풍경은 매우 그윽하고 평화롭다. 지금 이곳을 걸으며, 나 역시 큰 행복에 젖어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악기 박물관
판필로브 공원 안에 카자흐스탄 민속 악기 박물관이 있다. 젠코바 성당에서 나와 공원 마당을 지나 울창한 나무 사이의 길을 조금 걸어서 도착했다. 옛 러시아의 건축양식의 건물이다. 외형이 상당히 아름답고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이다. 러시아 여행에서 종종 보았던 건축물 향기가 그대로 배어 있다. 이곳은 카자흐스탄의 민속악기 1천여 점아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이 나라의 전통 민속무용과 민속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이다. 원래는 국가 정부의 관사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악기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에서는 고대의상을 입고 악기 연주도 하고, 민속춤을 공연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방을 돌며 수많은 악기들을 살펴 보았다. 공연장에는 알마티 상징인 사과가 크게 제작되어 놓여 있다. 사과 바로 앞 의자에 잠시 앉아 음악의 향기에 젖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판필로브 28인 전사 추모 공원 용사비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가지 도심 가운데 판필로브 공원에는 28인 전사 추모 용사비가 있다. 판필로브는 장군이었던 사람 이름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카자흐스탄은 소련 연방국이었다. 그래서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이곳에서는 위대한 애국전쟁이라고 부른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모스크바 아래 지역 근교까지 쳐들어 왔다. 그때 소련군 316보병사단 1075연대 소속 28인의 용감한 전사들이 나서서 참전했다. 316보병사단은 알마티에서 창설된 부대였다. 거대한 독일군 탱크 50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싸웠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인 이반 판필로브 장군이 지휘를 했다. 전투시 판필로브를 비롯한 28인 용사가 폭탄을 품고 탱크를 향해 자살 폭탄 투하로 용감하게 전사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판필로브 장군을 기리기 위해 공원이름도 판필로브 공원이라 지었다. 자살 폭탄 투하로 용감하게 전사한 28명의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전사자들이 하나로 뭉쳐셔 투하하는 형상의 커다란 동상무리가 소슬하다. 2차 대전을 연도별로 내용도 기록하여 크게 전시해 놓았다. 바로 앞에는 국방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용사비 동상 앞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도 타오르고 있다. 이제 평온한 공원에는 시민들이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결혼식후 신랑 신부가 꺼지지 않는 불꽃 앞에서 헌화하고, 아름다운 공원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소련 연방국 시절에는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이 나누어져 있지 않았고, 키르기스스탄인과 카자흐스탄인이 섞여 있어서 두 나라에 동일한 이름의 공원이 있다. 이곳 공원에서 전승기념 행사도 한다. 울창한 나무와 파란 잔디밭, 그리고 고운 꽃들이 28인 전사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듯 공원을 곱게 장식하고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판필로브 28인 전사 추모 공원 영원의 불꽃
판필로브 28인 전사 추모 용사비 앞에 전몰 용사를 위한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있다. 28인의 청동조각상이 불꽃을 응시하고 있다. 헌화로 바친 고운 꽃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한다. 그 무서운 전쟁, 우리라고 왜 모를까. 동일한 아픔으로 겪어온 내 조국의 애국 전사자들을 떠올리며, 전쟁으로 애처롭게 죽어간 모든 용사들의 명복을 빌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판필로브 공원 아름다운 풍경
판필로브 공원은 상당히 넓고 아름다운 조경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도 동일한 이름의 판필로브 공원에 갔었는데, 그곳의 공원도 상당히 넓고 아름다운 조경이었다. 두 공원 모두 나무가 울창하고, 고운 꽃들이 화사하게 공원을 밝히고 있다. 전쟁으로 희생 당한 전사자들의 슬픔을 기리는 소슬한 공원인데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그들의 아픔을 다소나마 잠재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모비 앞을 떠나오며 사진을 찍으려는데 현지인 두 청년이 내게로 확 들어와 사진 속에 함께 담겼다. 중앙아시아 여행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외부 여행객에게 매우 친절하고 인정어린 시선이라는 점이다. 항상 웃음으로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결혼한 신혼 부부도 곳곳의 아름다운 정경을 사진에 담는다. 모두가 세계여행에서 체험하는 고운 추억이다. 젠코바 성당 앞에 오니 무지게가 곱게 내려온다. 판필로브 공원의 비경을 더해주고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전차
판필로브 공원을 나와 우리를 태워갈 버스를 기다리는데 전차가 들어온다. 이곳이 전차 정류장이어서 그렇다. 운전기사는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도심 물길
알마티 도심을 지나다 보면 가로수 나무 아래에 물길을 조성해 놓았다. 그 조그만 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 간다. 카자흐스탄 알마티는 천산산맥이 가까이 있어서 물이 풍부하다. 알마티에 2개의 강도 흐른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가지 건물들
알마티의 인구는 약 150만 명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가장 큰 도시다. 알마티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가진 도시다. 카자흐인이 51%, 러시아인이 37%, 기타 국적이 12%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알마티의 사람들은 카자흐어나 러시아로서 의사소통을 하며, 때로는 토속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알마티는 19세기부터 징키스칸이 쓸어간 도시다. GNP가 14000~16000달러다.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관계가 좋다. 카자흐스탄은 가스 생산국이다. 키르기스스탄 남쪽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스를 공급받고, 북쪽은 카자흐스탄에서 가스를 공급받는다. 오늘날의 알마티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쇼핑점, 레스토랑, 호텔, 카지노 등이 들어서 1990년 이전과는 상당히 변화되었다. 알마티는 공화국 이전 1997년 11월까지 카자흐스탄의 수도로서 역할을 해왔다. 현재 수도는 바뀌었지만, 남쪽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도심을 이동하며 본 시가지 건물들이 현대풍의 구조로 세련되고 아름답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역사박물관
이곳은 카자흐스탄 고고학 박물관이다. 건물 외형이 매우 아담하고, 청색과 흰색의 조화가 아름답다. 건물 입구의 들어서는 길에는 예쁜 모양으로 조성한 꽃무리들이 화사하게 외인을 반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카자흐스탄 지도가 높이 부착되어 있고, 그 아래 4명의 동상이 유리관 속에 서 있다. 그 중에서 금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높은 고깔 모양 모자를 쓴 병사가 독특하다. 그는 알마티에서 25Km 떨어진 곳에서발굴한 금장군이다. 금 4천 조각으로 만들었다. 다음층으로 올라가니, 사막집 요르트가 있다. 천을 짜는 여인도 있다. 주방용품과 의류함도 있다. 여름에는 산으로 가고, 겨울에는 산아래로 내려오는 동물들의 생활상도 담아 놓았다. 레닌의 오로라 함선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의 그림과 기념관도 있다. 한국관에는 한복 등이 전시되어 있어 정겨웠다. 여러가지 옷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카자흐스탄 민족관에는 25년 통치자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다. 그래서 대통령이 파워가 세다. 독립 후의 근대관에는 수교국들이 나열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우리나라 역사책이 전시되어 있어 가슴이 훈훈하다. 도자지, 김영삼 대통령, 우주인, 로켓, 국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잠시나마 카자흐스탄에 대하여 배운 소중한 여정이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콕두베 산정
콕두베는 카자흐스탄 어로 푸른 언덕Green Hill이란 뜻이다. 알마티 시내에서 이동 중에 바라보니 정말 푸른 언덕이 콕두베 산정을 받들고 있다. 시가지 동쪽 해발 1,070m 고지의 콕두베 산정은 알마티 곳곳에서 보인다. 산정에는 티브이 송전 타워, 전망대, 케이블카 정류장, 산책로, 기념품가게 등이 있다. 알마티 상징인 사과 모양 분수도 있다. 버스나 케이블카로 오른다. 우리가 가는 날은 케이블카가 수리 중이어서 버스로 올라갔다. 대형버스로 산 중턱까지 오르고, 가파른 언덕 산길은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산정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산길을 따라 걸어 오른다. 알마티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고, 곁에는 송전탑이 높게 솟구쳐 오른다. 울창한 숲길 곳곳에는 작은 동물원이 있다. 우리나라의 남산과 같은 곳이다. 평평한 산정에 오르니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고, 콕두베 카페와 공연장, 행사장 등 현대적인 문화시설이 잘 갖추어 있다.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조화가 고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콕두베 전망대
콕두베 전망대는 아주 잘 조성해 놓았다. 알마티 시가지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고, 멀리 텐샨산맥 설봉을 조망하는 전망대도 있다. 서울의 남산 타워 같은 곳이다. 알마티는 앞으로는 600m, 뒤로는 800m 경사 도시다. 콕두베 전망대에 올라와서 그 도시를 조망하고 있다. 알마티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련한 운무에 싸여 선명하진 않지만 계획도시 알마티가 짙푸른 나무 사이로 아름답게 보인다. 조금 걸어오르니 텐샨산맥을 조망하는 전망대에 이르렀다. 톈산산맥 준령들이 물결치듯 넘실거린다. 겹겹이 웅장하게 솟구쳐 오른 텐샨산맥 줄기를 눈앞에서 조망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는 늘 동경으로 바라보며 품고 사는 거룩한 봉우리다. 저 풍경은 알마티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번에 여행하는 우즈베케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중앙아시아 사람들 모두에게도 큰 위안을 주는 의미 깊은 산맥이다. 이곳 콕두베 산정도 톈산산맥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봉우리 중의 하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텐샨산맥 줄기에 서 있는 감격스런 순간이다. 톈산산맥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아주 가까이 있다. 또한 콕두베 언덕은 전망대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연보존 구역이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고산식물이 자연그대로 자생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보물 같은 영토에서 알차게 보고 배운 흐뭇한 여정이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콕두베 타워
콕두베 산 언덕에 건축한 TV 타워는 알마티의 상징물처럼 오롯하다. 콕두베 산정에 오르면 제일 먼저 시야에 담긴다. 해발 1,080미터 고지에 높이 327미터로 장엄하게 세워져 있다. 5개의 TV 채널과 4개의 라디오 채널의 송신을 담당하고 있다. 271KW로 인근 80km에서 190km까지 송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3개 층의 기초 위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세워졌다. 전망대는 146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타워 안에는 2대의 고속 엘리베이터가 운영된다. 강도 10의 지진에도 견딜수 있도록 철심을 지반에 고정시켜 설계했다. 남산 타워 같은 송신탑으로 방송 송신 역할뿐만 아니라 콕두베 산정을 빛내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산정을 오르내리며 곳곳에서 다른 각도로 조명되는 타워가 매우 수려한 경관을 선사한다. 두 눈에, 가슴에 잘 담아 알마티의 고운 풍경으로 저장해 왔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콕두베 하산길
콕두베 산정에서 다시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내려왔다. 낯설은 카자흐사탄어의 문구가 정류장에 붙어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하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산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알마티 시가지가 아름답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화국 광장
콕두베 산정에서 하산하여 약간 시간적 여유가 있어 오후 6시부터 30분 동안 시티투어를 했다. 한국의 광화문 같은 곳인 신광장, 즉 공화국광장(노바야 쁠로세찌)Republic Square을 관통하여 지나가며 알마티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상당히 길고 넓은 광장이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교통체증도 심하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광장이다. 1980년 이후부터 알마티의 경제,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광장 주변에 크그 작은,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남쪽에는 대통령 여름궁전, 구 정부청사 등이 있고, 북쪽에는 국영TV방송국과 푸른 색상 유리의 수려한 고층 주택건물 등 현대식 건물이 많다. 그외 광장 주변에는 5성급 앙카라 호텔과 국군병원, 중앙박물관도 있다. 그야말로 공화국 광장은 알마티의 상징이며, 근대 건축물이 들어선 가장 큰 광장 중 하나다. 건물 사이 거리에는 분수가 있어 물이 솟구쳐 오른다. 맞은 편 도로변에는 시청사도 웅장하게 들어 서 있다. 광장 중앙에는 건축가 쇼타 발리카노브가 만든 독립기념탑이 아주 우람하게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다. 저녁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드리우고, 그 사이로 첨탑이 소슬한 비경으로 솟아 있다. 대리석 기념탑의 꼭대기에는 날개달린 표범과 삭 전사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광장은 1986년에 조성되었고, 그해 12월 모스크바 통치에 대항한 폭동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 중앙에 세워졌다. 이 기념탑은 광장에서 가장 최근에 건립된 건축물이다. 광장의 중앙에는 큰 동상이 하나 우뚝 서있는데, 금전사Sak warrior를 모델로 만든 독립기념상이다. 금전사는 13세기~15세기의 트로이 목마다. 첨탑 아래에는 책이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만지면 복이 온다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책이 맨질맨질하다. 첨탑을 중심으로 사방 네 군데에 동상이 서 있다. 멀리 텐샨산맥 설경이 비경이다. 이 광장에서 토요일, 일요일이면 결혼식을 끝낸 신혼부부가 기념촬영을 찍기도 한다. 그리고 국경일이면 여기서 기념행사 등을 하거나, 신년행사, 음악축제 등을 열기도 한다. 그때는 이곳 거리의 교통이 통제된다. 알마티는 경제도시이고, 풍요로운 도시여서 자가용이 많은 관계로 교통체증이 상당히 심한 도시다. 지금 이곳 공화국 광장 거리를 지나면서도 심각한 교통체증에 완전 서행이다. 중앙아시아 여행에서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지루하지만 첨탑과 아름다운 거리의 건축물들, 그리고 퇴근하는 알마티 시민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흐뭇한 여정이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도심 시가지
공화국 광장을 지나면서 알마티의 현대풍 건축물들을 많이 보았다. 알마티의 상징인 사과 모양 조각품을 세워 놓은 시청사가 아주 우람하게 서 있고, 그 곁에는 사막 천막집을 연상케 하는 요르트도 설치해 놓았다. 사막의 교통수단인 말도 조각품으로 세워 놓았다. 푸른 색 유리의 고층 건물이 현대적인 감각을 내뿜고 있다. 높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 저런 풍경은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다. 주로 공업 건축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익숙한 풍경인데 중앙아시아 여행에서는 독특한 풍경이다. 알마티는 발전했고, 또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는 도시다.그래서 현대식 건물들이 많다. LG 거리도 있고, 현대식 아파트도 있다. 카자흐스탄 국기도 곳곳에 많이 걸려 있다. 1992년에 건립한 하얀 색상의 투란 대학교 건물도 있다. 이 지역이 중세 때 투란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유명한 대학교다. 오후 6시까지 공부를 시킨다. 이곳은 알마티 중심 관통도로여서 교통체증이 극심하다. 운전기사는 알렉산더, 현지 가이드는 리사 엘리자베스다. 모두 키르기스스탄에서 같이 온 사람들이다. 거의 버스가 움직이지 못하자 여기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감사하다고,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도심 시가지, 아쉬운 마음으로 창밖의 멋진 풍경들을 가슴에 담는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항 출발
알마티 국제공항은 도심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현지식당에서 석식을 마치고 서둘러 공항으로 왔다. 카자흐탄 알마티 공항에서 밤 23:15분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아시아나 OZ578 항공이다. 알마티 공항의 밤풍경이 아름답다. 우리의 여행을 안내해준 키르기스스탄 현지인 여자 가이드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그녀는 키르기스스탄 사람인데 카자흐스탄까지 영어로 여행을 도와주었다. 열심히 사는 여인이다. 공항은 상당히 크다. 출국장 2번 게이트 앞에서 탑승 준비로 기다렸다. 면세점이 바로 곁에 있다. 우리 부부 좌석은 21A, 21B로 창가좌석이다. 22:40분 보딩타임이다. 늦은 밤인데 공항 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알마티 공항 건물의 조명 라인이 매우 아름답다. 비행기는 이제 서서히 활주로를 향해 이동한다. 약 5시간 40분 비행하여 내일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중앙아시아 3국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는 지금 이 시간, 매우 행복하다.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인천공항 도착
* 인천공항 도착
어젯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밤새 상공을 날아 새벽 하늘의 일출 비경을 선사하며 내 조국 인청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하기 전 기장은 인천공항은 쾌청하며, 기온은 19도라고 안내방송을 했다. 오전 7시 30분에 착륙했다. 예정 시간은 7시 55분인데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다. 중앙아시아 3국, 우리가 쉽게 부르는 3스탄, 꼭 가 보고 싶었던 나라들이었는데 그 소망을 이룬 것에 대하여 매우 흐뭇하고 기쁘다. 구소련 연방국가들이어서 역사적인 면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는 여정이었다. 가슴에, 두 눈에, 뇌리에 담아온 세 나라의 자료들을 나는 시인으로서 깊은 감성을 담아 시로 쓰고, 문학탐방록으로 써서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다. 그것이 문인의 사명이기에 힘든 작업이지만 큰 보람으로 여기고 하나하나 정리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