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기존 소설과 달리 우리 사회의 핵심적 사안이었던 노동자, 도시 빈민의 문제를 계급적 차원에서 정면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이 소설의 주요한 인물들, 난쟁이와 그 아들 영수, 그리고 대학생 지섭의 확고한 계급적 신념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깨달을 수 있다. 또 이 소설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뚜렷한 대립적 세계관이 서로 충돌한다.
그 충돌은 계급적 싸움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 싸움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음을 희망적 여운으로 제시함으로써 차원 높은 문학적 성과를 보여 준다. 그 성과의 꼭 지점은 사랑으로, 작가는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게까지 머물게 한다며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을 꿈꾼다.
“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이 문답은 언뜻 보기에는 무슨 넌센스 퀴즈 같지만, 이 연작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적 뼈대가 된다. 굴뚝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앉은뱅이와 곱추는 자신들의 입주권을 헐값으로 사들인 부동산 업자로부터 사기당한 돈을 다시 받아내기 위해 그를 납치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부동산 업자로부터 자신들의 몫을 되돌려 받은 뒤에도 그를 풀어 주지 않고 차와 함께 불태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원래 피해자였던 앉은뱅이와 곱추는 가해자로 처지가 바뀌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바로 이처럼 겉으로 보아서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쉽게 알 수 없는 왜곡된 현실의 상징이다.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아이들처럼 이 세계에서 부동산 업자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고 앉은뱅이와 곱추로 대표되는 소외 계층도 자신의 깨끗함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혼란한 세계에서 끝내 부동산 업자를 불태워 죽인 앉은뱅이처럼 당장의 이익을 위해 쉽게 행동하는 지식의 간사함을 고발하는 것 또한 뫼비우스의 띠가 상징하는 의미의 하나이며, 다른 한편으로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빈부의 격차 없이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몸을 팔면서 자기 집문서를 훔쳐 오는 소녀, 악덕기업주를 죽이려다 착각해서 그 동생을 찌르는 노동자의 이야기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을 우선 제시하고, 그것을 곧 이어서 뒤집어 보인다. 그 현상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못 가진 자들이 저지르는 살인, 방화, 매춘, 도둑질로 이 소설은 가득 차 있다. 물론 이런 설정은 현실에서도 이런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거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단지 겉보기 현상일 뿐이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범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겉보기의 선과 악을 뒤집는다. 겉보기에 범죄자들은 이 모든 범죄로 몰아가는 힘은 바로 가진 자들의 횡포와 약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겉보기에“횡폭하고 잠재적 범죄자고 무식한”노동자들은 더 없이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들로 반전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도덕과 법을 깔아뭉개는 악한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 뒤집기는 살인을 하고 감옥에 갇힌 난쟁이의 아들 영수가 감옥 안과 감옥 밖을 뒤바꿔 버리는 논리에서 극에 달한다.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니 클라인씨 병이니 하는 위상 수학적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는 정부 주도 정책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여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성장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그 혜택을 주지 못하고 자본가 계층의 부를 날로 축적시킴으로써 상대적 빈곤을 가중시키면서 이 사회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구도를 양분화했다.
난쏘공에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만 설명이 가능한데,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작가가 대립시킨 공간인 “집”의 의미이다. 난쏘공에서의 '집'은 난장이 일가가 살고 있는 '행복동'과 은강그룹 경영주들이 살고 있는 '깨끗한 주택가'로 나뉜다. 그 사이에는 개천과 터널이 있다. 공간의 대립은 '빈곤/풍요, 고통/안락, 분노/사랑의 결핍, 피착취/착취, 어둠/밝음, 추움/따뜻함'으로 나타나는데, 전자의 공간이 누대에 걸쳐 이어진 '정지된 시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후자는 '전진뿐인 시간'을 기반으로 하여 그 기반을 확충해가는 '괴물 덩어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보이는 이 소설에서는 많은 계층간의 대립과 함께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우선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제재의 하나인 노동 현장의 문제인데, 작가는 노동현장의 열악성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면서 착취당하는 피지배계층의 모습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야기된 공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산업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력을 보이고 있다.
대립 공간에서의 계층간의 단절, 열악한 조건 속에서 계속되는 노동,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물신화와 인간소외 현상'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제 양상들을 능동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지배받는 현상은 인물들은 노동 모습을 통해 드러내며, 이는 산업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대립의 공간만이 아니라, 이를 타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이상 공간을 설정한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으로 상징되는 안과 밖이 없는 공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는 이상 공간의 모습은 '달나라, 우주, 릴리프트 읍' 등으로 나타나는데, 단순히 현실이 아닌 환상이나 관념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이상세계를 이 지상에 실현코자 하는 의지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