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진 | 빛나는 외계인의 지구정착기
[2007-01-02 14:20]
1세대 모델 출신 배우가 제 2막을 여는 방법
20년 전, 외계인이란 ‘배 나오고 머리 크고 다리 짧은’ 영화 <E.T>의 E.T였다. 그러나 20년 후, 강동원이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영화를 움직이는 화보집으로 만들고, ‘혼혈 왕자’들인 다니엘 헤니와 데니스 오가 TV에 등장하면서 우리는 그 비현실적인 존재들을 ‘외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큰 키, 작은 얼굴, 긴 팔과 다리. 거기에 얼굴까지 잘생겼다. 대체 너희는 어느 별에서 왔니?
물론, 그런 남자들은 예전부터 어딘가에 존재했었다. 모델이란 이름으로, 패션쇼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 하지만 그들은 TV 브라운관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기엔 너무 비현실적인 존재였다. 모델이 TV에 나올 때, 사람들은 진짜 외계인이 등장한 것 같은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그들이 TV에 진출한 것은, 그런 비현실적인 존재, 비주얼만으로도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는 존재를 위한 작품들이 등장했다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말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들도 말이 되게 만드는 트렌디 드라마의 그 수많은 왕자님들의 등장. 그래서 인기 모델이었던 김남진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이 SBS <천년지애>였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설정부터 판타지인 작품에서 비현실적인 부를 쌓은 재벌 가문을 이어받을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 셔츠의 단추 세 개를 풀러도 이상하다기보다는 멋져 보이기만 하는 남자. 시놉시스의 캐릭터 설명만 보면 <천년지애>의 타쓰지는 과거에서 떨어진 공주 부여주(성유리)만큼이나 황당했지만, 셔츠의 단추를 풀면 풀수록 섹시함을 발산했던 ‘모델’ 김남진은 그 외모만으로도 타쓰지의 캐릭터를 현실로 만들었다.
김남진의 성공은 모델 출신, 혹은 외계인이라 불리는 외모를 가진 신인 탤런트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현실적인 설정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멋진 외모를 가진 신인 연기자의 결합. 김남진 이후의 모델 출신 신인 연기자들은 대부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김남진이 남성 스타일의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는 건, 그를 또 다른 ‘모델’로 만드는 일이었다. 패션쇼 무대 위의 모델처럼, 그는 TV에서도 남들이 동경할 수 있을 만큼 멋진 모습만 반복해야 했다. MBC <회전목마>에서는 재벌 2세였고, MBC <황태자의 첫사랑>에서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유능한 실장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식상하다는 말이 뒤따랐고, ‘모델 출신’이라는 경력은 ‘멋진 남자’에서 ‘연기력 부족’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12월의 열대야>와 어떤 남자 박정우
<천년지애>는 판타지적 설정으로 끝까지 강하고 멋있는 이미지의 캐릭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캐릭터가 가문의 몰락과 출생의 비밀이라는 변화를 겪게 되는 <회전목마>와 <황태자의 첫사랑>은 그에게 또 다른 모습을 요구했다. 잘 쌓아왔던 멋진 남자의 이미지는 옛말이 됐다. 그리고 대중은 또 다른 모델 출신 연기자들에게 몰려갔다. 모델 출신 연기자는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말과 함께. 외계인에 대한 신기함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외계인은 계속 현실에서 살아야 한다. 그때 그 외계인은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과 조우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해답은 또 다시 그의 외모에 있었다. 김남진이 셔츠의 단추 세 개를 풀고 다니는 재벌 2세가 되기 전, 그는 권진원의 뮤직 비디오 ‘Happy birthday to you’에서 한가로운 일상을 즐기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었다. 자전거를 탄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상의 압박에서 벗어난 그의 모습. MBC <12월의 열대야>는 그 여유를 김남진에게 되찾아줬다.
<12월의 열대야>에서 그가 연기한 정우는 평생을 고난 속에서 살다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오래도록 사랑했던 연인은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하루 종일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그에게 사고뭉치 동생은 잊을 만하면 큰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저 머리가 좀 좋아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의 전부인 남자. 그러나 그런 정우를 유부녀였던 영심(엄정화)이 모든 걸 버리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리고 결혼한 그의 옛사랑(최정원)이 여전히 그를 놓지 못했던 것은 고난의 연속인 인생 속에서도 사람 좋게 웃을 수 있었던 여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힘겨운 일상이 이어져도 자신이 일하는 운전면허 학원에서 몇 번씩 가르쳐줘도 사고만 치는 영심에게 웃으며 운전을 가르쳐줄 수 있고,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 그래도 가끔은 웃으며 맛있게 라면을 끓여줄 수 있었던 남자. 김남진의 웃음은 정우의 매력을 현실로 옮겼고, 그는 <12월의 열대야>에서 처음으로 모델 출신의 멋진 구경거리가 아니라 내 옆에 있어주면 좋을 것 같은 남자가 되기 시작했다.
이 빛나는 외계인의 지구 정착에 응원을
그가 스스로 밝혔던 대로,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과거의 성공을 의식해 멋져 보이려 했던 모델 출신 연기자가 <12월의 열대야>에서 작업복을 입고 친구와 술 마시며 자기 신세를 털어놓는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건 김남진을 비롯한 1세대 모델 출신 연기자들의 제2막을 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존재만으로도 주목받는 신인이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도 됐다. 그리고, 그 시간을 거쳐 30대에 접어든 이 모델 출신 연기자는 무엇을 통해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평생 직업’이 될지도 모를 연기자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을까.
김남진이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tvN <인어 이야기>에서 그는 멋진 재벌 2세 대신 아내가 있는 보건소 의사를 연기하며 현실 속으로 한 발 더 다가선다. 물론, <인어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의 이름 옆에는 ‘모델 출신’이라는 말이 따라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잘하든 못하든 모델이 아닌 연기자로 평가받을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김남진이, 그리고 그처럼 외모만으로도 주목받았던 모든 이들은 그 시기를 지나 30대가 되고, 또 다시 중년이 되기 시작한다. 그 모든 빛나는 외계인들이 지구의 땅 위에 정착할 수 있길.
첫댓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길.... 빨리 보고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