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일) - 30(목)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넷째 날 오전 :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
특징 : 아드리아해(海)에 면한 달마티아 해안에 있는 작은 도시인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해안 도시이다. 7세기 도시가 형성,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인 라구사(Ragusa)공화국으로 시작하였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가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국이 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부(富)를 축적했으며, 십자군 전쟁 뒤 베네치아 군주 아래 있다가(1205~1358)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도시가 요새화되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총 공격을 해와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시가지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고, 1999년부터 도시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들이 다시 복원(復原)되면서 옛 명성을 되찾았다.
▼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에 이틀 밤을 묵은 네움(Neum, 보스니아어), 두브로브니크와 코도르(Kotor)를 둘러본 뒤 다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더 묵었다. 두브로브니크나 코도르가 아닌 이곳에서 머문 이유는 다음 행선지인 모스타르(Mostar)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이동거리를 최대한으로 줄여보려는 의도인 모양이다. 네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에 닿아있는 유일한 해안(海岸) 지대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때문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해로 통하는 약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여 내륙국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이로 말미암아 크로아티아 본토와 끊어져 있는 월경지(越境地)가 되어버렸다. 그런 불편을 배려한 탓인지 양국을 넘나드는 국경에서의 심사는 비교적 간단했다. 네움에는 가파른 언덕과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 그리고 거대한 관광호텔 등이 있다. 물가가 인접한 크로아티아에 비해 싸기 때문에, 쇼핑객들에게 인기가 높고, 관광산업이 지역경제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고 한다.
▼ 숙소인 네움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은 아드리아해의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나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중의 하나로 꼽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사이의 좁고 긴 해협(海峽)이다. 북부 지중해(地中海 : Mediterranean Sea)인 이 바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날씨가 화창하고 리아스식해안(rias coast)이 빚어내는 풍광이 빼어나 수천 년 전부터 천혜의 휴양지로 각광 받아왔다고 한다. 비록 한국인에게는 최근에야 익숙해진 이름이지만 말이다.
▼ 해자(垓子)를 건너며 두브로브니크의 투어가 시작된다. 해자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의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는 물을 다 빼버리고 대신 꽃과 정원수(庭園樹)들을 심어 놓았다. 해자를 건너면 필레문((Pile Gate)이다. 필레란 그리스말로 문(Gate)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레문으로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쓴다. ‘역(驛)의 앞’을 ‘역전(驛前) 앞’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필레문(Pile Gate)을 지나면 또 하나의 문(門)이 더 있다. 필레문보다 100년 정도 더 먼저 지어졌다는 또 다른 문이다. 문의 위에 이 도시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인 ‘성 블라시오(Saint Blaise)’가 새겨져 있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문(城門)과 주요 건물 정면 위에는 어김없이 그가 등장한다. 278년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난 성 블라시오는 316년 커다란 쇠빗으로 온몸을 무참하게 긁히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했다. 10세기께 옛 시가지에 있는 ‘성 스테판성당’의 스토이코 신부 꿈에 나타나 ‘지금 베네치아 군대가 배를 타고 이곳을 정복하러 오고 있다’고 알려 도시를 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 필레문을 들어서면 중앙도로인 ‘플라차(placa) 대로(大路)’을 통해 광장(廣場)으로 연결되며, 이어서 서쪽 끝의 작은 항구까지 이어진다. ‘대로(大路)라는 뜻의 스트라둔(Stradun)거리라고도 불리는 도로의 양 가장자리는 기와처럼 가운데를 오목하게 판 화강암으로 배수로(排水路)를 만들었고 길바닥에도 화강암을 빈틈없이 깔아 놓았다. 이 돌들이 수백 년 동안 닳고 닳아 햇살 아래 반질반질하게 빛이 난다. 행여 비라도 올 경우에는 미끄러짐을 주의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대로의 양쪽으로는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무수한 샛길이 가지를 치고 있다. 그 좁은 골목길 사이로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이 빼곡히 들어서서 관광객들을 맞는다.
▼ 성곽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원형의 돔처럼 생긴 오노프리오 분수(Onofrio Fountain)가 나온다. 도시의 물공급 시스템의 일부로 1438년에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11km나 떨어진 산에서 물을 끌어와 만든 것이란다. 건축가의 이름을 딴 이 분수는 1667년 지진(地震)으로 많이 부서져서 이젠 16개의 얼굴 조각만 남아 있지만 여전히 두브로브니크의 랜드마크(land mark)이다.
▼ 분수의 왼편은 ‘프란체스코 수도원(Franciscan Monastery)’이다.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웅장한 수도원으로, 도시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원래의 수도원은 14세기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었으나 1667년 대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의 수도원은 오래된 프레스코 기법으로 장식되었고 섬세한 기둥 장식이 정원을 감싸고 있다. 남쪽의 커다란 현관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조각 장식은 이 지역 최고 수준의 페트로비츠 형제가 일일이 제작했다. 현관의 웅장한 규모로 미루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약 제조로 유명했고 지금은 제약박물관으로 이용된다. 박물관에는 중세시대의 약 제조에 관한 역사는 물론 기구나 방법 등에 관한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수도원에는 유명한 도서관도 있는데, 고대의 원고, 귀중한 단행본, 손으로 일일이 쓴 원고, 보물급 공예품 등 수많은 작가들과 역사가들의 작품 및 방대한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 구시가지의 중심가인 스트라둔(Stradun) 거리 끝에 다다르면 루자광장(Luza square)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이 조그마한 광장 주위는 역사적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루자광장의 중앙에는 이슬람교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낸 영웅 기사 '롤랑의 기둥'(Orand`s column)이 서 있다. 현재는 국기 게양대(수리중인지 국기를 거는 기둥은 보이지 않았다)로 쓰이고 있지만 교역의 중심지였던 중세 두브로브니크에서는 롤랑의 오른쪽 팔꿈치 길이가 부정을 방지하는 도량의 기준 수치가 되었다 한다.
▼ '롤랑의 기둥' 뒤편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를 기리는 성 블라이세 성당(Church of St. Blaise)이 위치한다. 두브로브니크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성당이며,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이세에게 헌납되었다. 1368년에 건립되었으며 1369년에 화재가 났고 1667년 대지진 때 파괴되었다. 지금의 바로크 양식 건물은 1706년에 시작하여 1717년에 완공되었으며, 베네치아의 건축가인 마리노 그로펠리(Marino Gropelli)가 지었다. 이 성당은 도시의 가장 핵심 되는 랜드 마크(land mark)로 도시인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 계단에서는 도시의 주요한 행사인 새해 전날 행사 또는 여름페스티벌의 오프닝 등이 개최된다. 성 블라이세를 기리는 페스티벌은 1972년부터 매년 열리는데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의 오랜 전통이다.
▼ 성당을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렉터스궁전과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 대성당 앞에서 뒤를 돌아봤다.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렉터스궁전(Rector's Palace)이다. 그리고 거리의 끄트머리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스폰자궁(Sponza Palace)이다. 렉터스궁전은 두브로브니크 수로와 분수(噴水)를 건설한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1435년에 건축했다. 후기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양식을 혼합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며, 귀족들을 위한 업무와 종교행사 때만 사용하였다. 궁전 정면에는 기둥이 늘어서 있고 교회의자처럼 장식한 석조벤치가 놓여 있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었는데,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 기간에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회가 열린다. 2층은 현재 시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라구사공화국(Republic of Ragusa) 시절의 유물들을 전시한다. 특히 1만 5000점의 회화작품 중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그리고 스폰자궁은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Ragusa Republic)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었다. 당시 두브로브니크에 지배적이었던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로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Paskoje Mili?evi?)가 건설을 맡았다.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으며 우아한 아케이드, 기다란 고딕 양식의 창문 등이 특징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며 1667년의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16세기 말에 라구사공화국 중앙문화센터로 바뀌었다. 현재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며 중앙홀은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 대성당 뒤가 군둘리치 광장(Gunduliceva Poljana)이다. 그곳에선 매일 아침 7시면 아침 시장이 열린다. 활기찬 큰 시장도 매력적이겠지만 이런 소규모 시장은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상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다.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새겨져온 이야기가 있다. 이런 소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의 전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시장은 정오가 될 무렵에 정리되고 대신 레스토랑의 테이블들이 대신 자리 잡는다고 한다.
▼ 중앙로 뒤편으로 돌아서면 미로(迷路) 같은 골목이다. 분주한 도심(都心)을 벗어나 골목 한편에 자리 잡은 카페에라도 들어서면 또 다른 중세의 공간이 된다. 이곳에서는 고요한 휴식과 옛사람들의 담소가 함께 어우러진다. 집사람과 함께 들어간 와인 바(wine bar)도 그중의 하나였다. 젊고도 예쁜 여주인에게 손님이 많고 적고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에서 한없는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구시가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다시 성곽을 벗어나 스르지산(Mt. Srđ) 정상(412m)에 오르기로 한다. 성곽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케이블카(Cable car)의 승강장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의 행렬은 건물의 밖으로도 부족했던지 도로까지 점령하고 있다. 그 덕분에 약 1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 케이블카 근처에 서면 두브로브니크의 성채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셈이다. 그러나 케이블(cable)이 조망을 방해한다. 케이블카가 편의를 제공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눈의 호사(豪奢)를 막고 있는 것이다. 시설물에 가려버린 두브로브니크의 풍경이 무척 아쉽다. 그러나 너무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두브로브니크의 성채를 조금 비켜서 내려다보고 싶다면 왼편에 있는 스르지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려도 전체를 다는 가릴 수 없었나 보다. '섬들의 왕'으로 불리는 로쿠룸섬(Lokrum Island)이 한눈에 들어온다. 로쿠롬은 라틴어로 ‘마쿠르멘’, 즉 '새콤한 과일'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원 때부터 세계의 이국적인 나무를 재배한 데서 비롯되었다. 해안가는 바위가 많지만 아주 평화롭고 물이 깨끗하고 안전하여 수영을 즐기기에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이국적인 나무들이 많은 정원은 1859년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란 페르디난드가 자신의 여름 별장과 정원으로 조성했단다.
▼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왼편으로 돌아가면 성곽(城郭)이 나타난다. 1808년 나폴레옹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건설된 ‘명예로운 요새’란다. 그런데 이곳저곳이 무너진 채로 방치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해체이후 일어났던 내전(內戰)의 상처란다. 그 아픔을 잊지 않으려는지 이곳에다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1991년 폭격당시의 사진과 그러한 주제로 전시(展示)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전쟁박물관과 통신시설을 지나 돌무더기 위에 나무로 된 십자가가 꽂혀있는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툭 터진다.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는 더더욱 푸르게 빛나고, 붉은 색 지붕으로 덧칠을 하고 있는 두브로브니크의 시가지는 곱기만 하다. 두 풍경이 함께 어우러지며 절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왜 이곳 두브로브니크가 ‘아드리아의 진주’ ‘유럽속의 아주 특별한 유럽’으로 소문난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다들 탄성(歎聲)을 질러댄다. 그리고 카메라의 셔터만 눌러대고 있을 따름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져 할 말을 잊어버린 모양이다.
▼ 발아래로 아드리아해의 푸른 물결이 끝없이 펼쳐지고, 빛나는 지중해의 태양이 이 바다 위에 드리워 있다. 바이런이 ‘지상낙원’이라고 감탄한 것도 바로 이 풍광 때문이었으리라. 참고로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진정한 낙원(樂園)을 원한다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라’ 했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두브로브니크를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렀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대형 십자가가 우뚝 서있는 전망대에 서면 또 다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아드리아의 쪽빛 바다와 두브로브니크의 성채가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 정상에는 두브로브니크 시가지와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노천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이 거센 탓에 여유롭게 즐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행운은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산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또 다시 필레문(Pile Gate)을 통과해 성곽의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번에는 좁은 골목을 통과해 본다. 좁은 골목에는 작은 숙박 시설들과 레스토랑, 그리고 주민들의 주거지역이 들어서 있다. 13세기 베네치아가 이 곳을 지배하게 되면서 서쪽 필레 지역에 계획된 시가지를 짓고 기술자들을 데려와서 의무적으로 살게 했다 한다. 그 필레지역이 이곳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베네치아와 닮은 분위기를 느꼈었나보다. 물론 이곳이 베네치아보다 더 구획이 잘 되어 있지만 말이다.
▼ 필레문(Pile Gate) 근처의 벽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지도(地圖)가 붙어 있다. 지도에는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가 주축이 된 유고연방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지점들을 표시해 놓았는데, 부서진 정도에 따라 검은 삼각형(Roof damaged by direct hit)과 붉은 직사각형(Burnt-down Building). 흰 삼각형(Roof damaged by Shrapnel), 검은 원형(Direct hit on the Pavement) 등으로 각각 표기해 두었다. 지도에는 거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 프랑스 작가인 장 도르메송 등 유럽의 지성인들은 폭격을 중지시키기 위해 ‘인간사슬’을 시도하기도 했다. 내전이 끝난 후 유네스코와 시민들의 열성적인 복구(復舊)로 두브로브니크는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이 성벽은 수많은 역경을 견뎌내고 극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어 오늘날 명소로 더 각광받는 게 아닌가 싶다.
▼ 성곽투어를 들어가기 전에 우선 배부터 채워야 한다. 스폰자궁전과 시계탑 사이의 문으로 나가면 항구가 나오는데, 마침 바다를 낀 골목에 레스토랑 군락이 형성돼 있다. 피자, 파스타를 파는 이탈리아 식당 등 다양한 메뉴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맘에 드는 곳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우린 ‘꽃보다 누나’ 팀들이 식사를 했다는 식당을 찾았다. 메뉴는 ‘해산물 리조또’ 그러나 맛은 우리나라에서 먹었던 것보다 별로였다. 두브로브니크의 명물이라는 해산물 요리를 주문해 볼걸 그랬나? 하긴 점심시간에 푸짐한 식사는 어울리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 식사가 나오기 전에 두브로브니크 올드항구(Old Port of Dubrovnik)를 둘러본다. 두브로브니크를 비롯한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꽤 깊어 보이는데도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푸른빛 바다다. 항구로 나가면 그런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구시가지에 있는 이 항구는 중세시대에는 무역항이었으나 지금은 섬투어를 하는 배들의 선착장(船着場)으로 변해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인 로크룸섬(Lokrum Island)으로 향하는 배를 탈 수도 있다. 옆에는 해양박물관이 있고 이는 성벽의 동쪽과 연결되어 있다. 항구에서 성곽을 올려다보는 재미 또한 제법 쏠쏠하다.
▼ 식사를 끝낸 뒤에는 성벽 투어를 나선다. 투어의 시작은 필레문 바로 안쪽이며 동쪽 끝에 있는 플로체 문 옆에서도 들어갈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성벽(城壁) 위 걷기’이다. 두브로브니크를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를 위해 이곳을 찾아온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구(舊)시가지 전체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성벽은 높이 25m에 두께가 3m나 된다. 그리고 길이는 2km, 한 바퀴 돌아보는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한 시간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중간에 그만두어도 된다. 중간 두어 곳에 성곽을 벗어날 수 있는 계단이 나있기 때문이다.
▼ 두브로브니크 관광은 뭐니 뭐니 해도 성벽 걷기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벽 위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당연히 탁 트인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걷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무료해지기라도 할 경우에는 작은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음료 한잔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 두브로브니크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要塞) 안에 있는 중세의 석조건물들과 반짝이는 대리석 거리가 인상적이다. 성곽 위를 걷다보면 마치 중세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마치 타임캡슐(time capsule)에서 금방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데는 현대적인 간판이 눈에 띄지 않는 점이 일조를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만일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지만 않는다면 옛날 영화 촬영지로 그만이겠다.
▼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덕과 마을, 그리고 바다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전망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민체타 성루(Fort Minceta)’이다. 오래된 테라코타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구시가지와 그 너머로 푸른 아드리아 해, 거기다 로쿰 섬까지 한눈에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성루는 자유의 상징이며 가장 아름다운 요새로 유명하다. 요새는 훌륭한 건축가들의 합작품인데, 1319년 니치포르 라니나(Nichifor Ranjina)에 의해 작은 사각형 건물이 처음 건축되었고 나중에 다른 건축가들의 작품이 이곳에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요새를 마무리한 사람은 유명한 르네상스 건축가인 미켈로조 미켈로지(Michellozzo Michellozzi)이다.
▼ 푸른 아드리아 해 위로 떠 있는 구(舊)시가의 붉은 지붕은 언제나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러한 풍경들을 보고 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 각자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성 안은 또 한 장의 그림이다. 수많은 골목들과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두브로브니크가 왜 '진주'로 불리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성의 안이 대부분 오래된 유적들로 채워진 유럽의 고성들과는 달리 두브로브니크 성의 구시가는 일상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 성벽(城壁)을 따라 걷다보면 구시가지 서쪽의 성벽 밖에 있는 ‘로브리예나츠 요새(Fortress Lovrijenac)’가 눈에 들어온다. 벼랑 위에서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서쪽 바다에서 침입하는 적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아드리아해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절벽 위에다 지었다고 한다. 11세기에 건축하여 14세기에 완공했으며 요새의 내부 장식은 유럽에서 가장 기품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유명한 여름축제 기간 중에 공연과 콘서트가 열리는데 특히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공연된 것으로 유명하다.
▼ 성벽을 걸으면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움에 방점(傍點)을 찍어주는 아드리아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성곽 아래의 절벽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정겹다. 그 절벽의 사면(斜面)을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아마 카페라도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 성벽(城壁)을 따라 걷다보면 빨래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풍경들이 자주 눈에 띈다. 건너편에 마주한 집과 서로 빨랫줄을 연결하고, 그 빨랫줄에다 널어놓은 옷감들이다. 물론 양쪽에는 도르래를 매달아 줄이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빨랫줄 아래는 예쁘게 가꾼 정원(庭園)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하나 더, 건물 곳곳에 구멍이 나 있거나 지붕이 없는 집들도 보인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벌어진 내전(內戰)의 상처란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