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어렵고도 쉽다. 일단, 정희진이 사상적 근거로 삼고 있는 철학자가 누가 됐건, 여성으로서 산다는 경험이 주는 모순과 분열감을 찬찬이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 자신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그 누구든 언제나 다수자 혹은 강자이기만 할 순 없다)을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해서 사고하기를 계속해온 사람, 그리하여 더이상 주류와 다수자와 강자가 아닌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을 고민해본 사람에게 이 책의 방식은 아주 익숙하고 쉽다. 나는 정희진의 고백대로, 소위 "가방끈이 짧"거나 철학이나 사회사상 같은 거 전혀 모를지라도 자신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직시해본 사람들이라면 정희진이 무슨 얘길 하고싶어하는지 너무나 쉽게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중산층 먹물 남성 지식인들의 '판타지'와는 전혀 달리.)
그러나 이 책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중립'이고 '객관'이며 '합리'라고 배워온 것들이 역시나 누군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틀에 불과하단 걸 머리로 안다 해도, 그 틀을 새로운 틀로 대체하고 새로운 틀을 기반으로 다시 보고 다시 말하는 것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 꼴페미라고 무수한 욕을 얻어먹기도 했던 나라고 이 책이 마냥 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분열적 주체", 페미니즘은 언제나 내게 분열증을 가져다주는 고마우면서도 미운 존재고, 이 책 역시 그렇다. 한편으론 너무나 명쾌한 틀을 제시하며 쾌감을 주지만, 그 쾌감의 한꺼풀 안에는 나를 더욱 극심하게 분열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드는 고통과 상처가 있다.
이 책에서 내가 특히 기대했던 부분은 '성판매자 여성' 혹은 '성노동자'에 관한 부분인데, 알라디너인 마태우스님이 오래 전 이 책을 읽고 성매매 특별법을 마냥 지지할 것이 아니라는, 성판매자 여성의 입장에선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리뷰를 쓰셨던 반면, 소위 '성노동자 운동'에 연대한다는 모 인권단체 사이트에서 정희진을 '성판매 여성을 억압하는 페미니즘 궤변'의 대표자로 모는 글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예상대로 후자의 입장은 정희진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거니와 읽을 마음도 없었단 판단이 든다. 정희진도 그 챕터에서 자신의 강연 후 받았던 '상반된' 반응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섹슈얼리티와 계급과 인종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서구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은 분명 다를 것이다. 성매매는 현재 경제력이 없는 여성의 가장 확실한 선택이기도 하며 이는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한편으론 장려돼왔고 동시에 천시되어 왔다. 여성에게 가장 모욕적인 욕들이 성판매 여성에게 빗대는 것인데, 그것이 모욕으로 통하는 코드 자체를 생산하고 유통시켜 온 구조, 그럼에도 이것이 '꼭 필요한' 구조로 만들어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스스로가 소위 '몸 파는 여성'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에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혹은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연애가, 결혼생활이 어느 순간 매매춘과 별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고 절망하곤 한다. 혹은 '몸 파는 여성'이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분노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래봤자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몸을 팔고 있으며 나는 내 직업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자긍심을 내세운다. 이러한 분열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 분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성판매를 남성들은 하지 않는가? 남성들이 느끼는 분열은 왜 이런 것과 종류가 다른가?
성판매 여성과 비판매 여성을 대립항으로 놓는 것의 문제점과 장점, 모두 여성으로 환원했을 때의 문제점과 장점을, 정희진은 정면돌파하며 그대로 보여주고 서술해낸다. 분명 이들 여성간의 대립은 계급간 대립이기도 하며 적대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는데, 이들을 모두 '여성'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범주화하는 순간 정희진 말대로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차이의 경계를 지운 채 존재를 '여성'이라는 범주 하나로 환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의 구조는 또다시, 가부장제에서 근거하기도 한다. (성녀와 창녀의 구분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페미니즘이 풀어야 할 답이란 과연 이 사이에서 어떻게 길을 새로이 만들고 혹은 구조 자체를 새로이 재구성할 것인가?이다. 정희진도 또렷이 답하지는 않았고, 나 역시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긴, 이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여전히 성매매 문제를 가지고 계속 대립된 주장만이 반복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조가 어떠한가, 가 아니라, 그 구조를 누가 왜 말하는가, 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의외의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
모든 글에서 정희진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건 '화자'이자 '인식주체'이다. 인류의 역사만큼 존재해 온 '여성에 대한 논의'는 여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타자에 대해 품고있는 남성 주체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모두 남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성이 실제로 그렇다, 라는 것이 아닌, 누가 왜 그렇게 말하는가를 볼 때, 우리는 의외의 사실들을 발견하고 그 구조의 숨겨진 / 은폐된 면을 포착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이 자칫 잘못 발을 디딤으로써 공연한 에너지 낭비로 흐를 수 있는 혹은 또다른 타자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한 통찰을, 정희진은 제시해주고 있다. 패러다임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그 패러다임이 명명되는지를 보는 것. 우리가 비판하는 패러다임에 역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지혜이다. 정희진은 그렇게 새로이 판을 짜는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