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떠난 학생들에게 따듯한 엄마밥 한 끼와 격려 한 토막, ‘도시락&토크’
당당뉴스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나그네 아닌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매주 한 번 엄마의 마음으로 도시락을 싸주고 부모의 마음으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역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매주 한 차례씩 감신대(매주 화요일 12시)와 연세대(매주 수요일 12시)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40~50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펼치는 ‘도시락&토크’가 바로 그것.
경기도 고양의 샘솟는교회(박인성 목사)는 지난해 3월부터 감신대와 연세대에서 엄마의 밥 한 끼로 힘들고 지쳐있는 청년들에게 작은 위로와 용기를 주고자 무료급식 프로그램인 이 사역을 시작했다.
식사만 하고 마는 것은 아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겪는 신앙적 갈등이나 인생의 문제를 풀어줄 목사님, 유명인사를 초청하는 멘토링도 병행하고 있다. 그동안 이학성, 이정배, 김병삼, 유성종, 정영희, 박상철, 장현구, 최준식, 김진두, 차흥도 목사, 김정일 sbs아나운서 등이 다녀갔다.
지난 5월에는 연세대 송도캠퍼스(매주 목요일 12시)에서도 인천 예일감리교회(박상철 목사)의 후원에 힘입어 ‘도톡(도시락&토크)’ 사역이 시작됐다.
도시락&톸 사역을 하는 샘솟는교회는 이 외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위한 주거공간인 엘림학사(쉐어하우스)를 세우고자 기도중에 있으며 지역 청소년들과의 일대일 멘토링 사역도 준비중에 있다.
“신학교 나와서 목회말고 할 게 뭐있죠?”
15일 오후 5시30분 감신대 웨슬리채플 1세미나실에서 가진 ‘도톡’은 독특하게도 감신총학생회와 도시락톡이 함께 목회가 아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동문 선배들을 초청하여 후배들의 진로에 도움을 주는 대화의 시간을 준비했다. 그래서 이날 도톡의 주제도 ‘2015 미래 토크콘서트’다. 토크에 앞서 지희경(85) 문재성 등으로 구성된 크로체의 노래공연도 있었다.
감신대 총학생회가 도톡과 함께 이 토크를 준비 한 이유는 과거 세대 뿐 아니라 현 세대의 신학생들도 목회의 길과 ‘또 다른 길’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신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목회자를 배출하는 학교에 들어와서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가 일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목회지와 목회자의 수급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단 현실에서 보면 당연한 현상처럼 보인다.
이날 초청된 토크 게스트는 호텔리어 정영철(85학번), 방송작가 나미혜(87학번), 연극배우 전중용(90학번)이다. 토크의 진행은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한 sbs 김정일 아나운서(감신대 목회대학원 재학중)가 맡았다. 신학대학을 졸업했지만 목회의 길이 아닌 곳에서 자기 삶을 개척하는 게스트들과 긴 길을 돌아 이제 목회의 길에 들어선 진행자의 조합이 절묘하다.
토크 콘서트를 마친뒤 이정배 교수는 이들 토크게스트에게 “여러분이 협력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학교에서 준비하면 어떨까 한다”고 권면하고는 “이들이나 여기 참석한 후배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던 열려진 마음으로 그 길을 가도록 새로운 꿈과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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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고 도전하라 밖에도 선배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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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철씨(신학과 85학번)는 감신대를 졸업한 뒤 강남 노보텔에서 프론트를 시작으로 노보텔 어카운트 총지배인, 삼정호텔, 설악비치콘도, 설악파크호텔과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 총지배인을 거친뒤 지금은 제주도에서 골든 튜립 호텔의 오픈을 총괄하고 있다.
“불러줘서 너무 영광입니다. 오고 싶었습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23년이 지났네요. 이렇게 여러분과 이야기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이런 기회가 내겐 한번도 없었습니다.”
“감신대에 입학하고 1년 마친뒤에 군대에 갔다왔습니다. 당시 고민이 많았습니다. 3년의 시간이 아직 있어서 어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꿈에서도 영어회화를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졸업했고 4달 후에 노보텔 앰베서더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쳐서 프런트에 들어갔고 어카운팅 밑바닥부터 시작해 10년을 하고나니 재경팀 총지배인이 됐습니다.”
“거기서 오래 있고 싶었지만 다른 도전을 하고 싶었습니다. 강원도 평창의 알펜시아에 갔지요. 980개 객실에 매출규모 1500억의 호텔인데 그 80%를 내가 관리했습니다. 집에도 못가면서 거기서 많이 배웠습니다.”
“알펜시아에서 다시 나와 지금은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제주 함덕해수욕장에 프랑스계 호텔체인 1호점인 골든 튤립이라는 새로 오픈하는 호텔이 있는데 그 호텔 건축부터 오픈까지 총괄 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곧 오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강원도에 있는 리조트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공이 생겼습니다. 귀와 입이 두꺼워야 합니다. 입은 총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나서 한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내가 한게 아니었습니다. 난 후견인이 없었지만 내 후견인은 G·O·D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밖에 여러분들의 선배가 굉장히 많습니다. 경찰관, 노무사, 법률상담사, 회계사, 개인 업체 사장들 등 너무 많은데 다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대학의 졸업자들은 똑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감신 선배들은 똑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전국의 모든 산업분야에 스며들어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길만합니다”
“보람이라면 남보다 더해서 이루는 성취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취감으로 버텼습니다. 도전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다른 사람과 같아지지 않습니까? 멈추면 칼날이 목에 들어오기 때문에 역발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못할 것은 없습니다”
“이거 잊지 마십시요. 냉천골 사람이라는거 잊지 마십시요. 여기서 나가면 여기서 배운거 사회에서 써먹을 일 없을거 같지만 직장가면 다 써먹습니다. 종교는 모든 사람의 고민거리 아닙니까. 학과에서 배운거 소홀히 하지 마십시요. 세부냄시, 트레이팅 플랜, 워크샵플랜 등 모든 기초의 저자가 기독교인이고 기독교학자들입니다. 다 쓰입니다. 고민하고 도전하십시요. 밖에 여러분 선배들 많습니다.”
“내 꿈은 65세까지 일하는 것입니다. 적자를 보고 있는 호텔이나 시설에 가서 영업이익을 내며 활성화 해보고 싶습니다. 감리회 일영연수원이나 큰 교회 영성수련원 같은곳도 좋습니다. 연수원의 경우 내 계산으론 2년안에 흑자로 돌릴 수 있겠더군요. 본부 분들은 장사꾼이 아니기에 못하겠지만 난 내 경험으로 그 곳 체질을 바꾸고 운영을 제대로 해서 자립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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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뜨거움이 있는 방황은 얼마든지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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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혜(신학과 87학번)씨는 CTS, CBS, KBS 등에서 다큐 작품활동을 하고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이다. 얼마전 소천한 나원용 목사의 막내이기도 하다.
“87 나미혜에요. 난 왜 이길을 가게 됐는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의 20대는 용광로였어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는 패틱상태라고나 할까… 요즘 아이들은 10대때 진로를 결정하는데 난 20대에 온 몸으로 내 진로를 겪었어요.”
“7살에 초등학교를 갔으니 남들보단 어린 나이에 감신대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여기가 내 삶의 뿌리와 같습니다. 87년은 너무 뜨거웠어요. 졸업했을 당시가 21살인데 당시 우리 사회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민중교회에 가겠다고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구로공단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서 여공들과 공부하며 주말에는 전도사 겸 활동가로 2년여 시간을 보냈어요. 그 2년이 내겐 가장 뜨거웠고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뜨거움으로 어린나에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이 길을 가기에는 내가 너무 부족했던 것이었어요. 거기서 목회에 대한 미련을 탁탁 털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제 나 뭐 먹고 살지?’ 하며 비로소 내 먹고사는 문제가 다가왔어요. 취직하기 좋은 경제학과에 어찌어찌 가서 졸업까지 했습니다. 그 4년이 내겐 단언컨대 너무 좋은 고민의 시간을 준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넓은 길을 보는 기쁨이 내게 있었습니다”
“경제학과 4학년때인가… 티비에서 ‘갯벌은 살아있다’라는 다큐를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내게는 똥물 밖에 안됐는데 막상 그 다큐를 보니까 갯벌에 생명이 넘치고 있는 거에요. 갯벌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이죠. 다큐 한 편이 이렇게 사람을 바꾸고 파급효과가 크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시만해도 감신 윗 선배 중에 방송작가로 가는 분이 없었고 그 길 자체도 힘들던 때였죠. 그러는 중 우연히 신문광고에 cbs아카데미 야간수강생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거기 가보자 했습니다. 경제학과 다니며 야간에 6개월을 다니다가 운좋게 라디오에 들어갔고 기독교 티비로 갔다가 저기 갔다 하며 20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방송일 하다가 보면 보람있는 일도 겪어요. 어느 어려운 가정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1억이나 되는 많은 도움을 줬던 일이이라거나 남들은 가보지 못하는 북한에 가보는 등의 유니크한 경험도 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올해까지만 일하고 접으려고 해요. 50대 이후의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그많게 뭔가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할 것이에요.”
“오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는 아무것도 안보였는데 지나고 보니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민중교회에서 열심히 하다가 내 길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다른 길에서 또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20대는 그렇게 뜨겁게 방황속에서 살았습니다. 가슴에 뜨거움이 있는 방황은 얼마든지 누리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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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사회생활에서 쓸모가 없다고?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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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용(종교철학과 90학번)씨는 감신 졸업후 연극계에 투신하여 삼류배우, 한여름밤의 꿈, 공장, 빛의 연인들, 로드시어터, 돌연히 멈춤, 로맨티스트 죽이기, 햄릿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난 목회를 하려고 감신에 오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대학은 너가 살아갈 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사학이나 철학을 추천하셨는데 감신대 종교철학과에 입학을 하게 됐습니다. 창조극회에 들어가서 연극만 했어요. 수업이나 공부도 재밋게 했고요.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졸업하고 뭐할까 하다가 학부때 창조극회에 있던 계기로 연극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다른 선배도 마찬가지겠지만 감신나와서 다른 것 하기가 쉽지 않자나요? 연극을 해야겠다 마음 먹고 있었는데 마침 신문에 연습단원 모집공고가 난 것을 보고 일단 디밀어 봤습니다. 학교에서 연극한게 경험의 전부인데도 그리 했어요.”
“김의정 선생님이라고 지금은 연극계 원로신데 그 선생님이 단원을 뽑을 때 연극연화를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를 많이 뽑아 주셨어요. 그래서 연극을 시작하게 된거죠. 처음엔 프리랜서로 지내다가 특이한 연극을 하는 델 들어갔는데 지금의 극단 여행자에요. 16년 정도 있었습니다. 제 위의 선배중 연극하는 분이 한 분 계세요. 지금 그분 교수하고 있습니다. 후배도 있습니다. 우연히 연극계에서 소개받고 인사하고 그랬어요.”
“제가 하는 일은 사는데 도움이 안되요. 다들 아시겠지만 먹고 살기 힘들고 제 만족이 있어서 그 만족감으로 살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여기 연극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때려줄거에요. 나 스스로 자부심은 있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밖에 나가보니 일단 언어가 안통했습니다. 그 사람들 언어와 나의 언어가 달랐던 겁니다. 난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언어를 못알아 들어서 두루뭉술한 연기를 하게 되는 거에요. 나의 연극이 전달이 잘 안되는 것이었죠. 이 연극언어를 배우는데만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시점을 넘어가니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한 고민했던 것들이 도움이 되면서 오히려 동료들을 넘어서게 되더군요. 내가 배운 것이 그때야 활용되는 것이에요. 연극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면서 지금은 연극계 선배들과 얘기가 잘 통하는 위치가 됐습니다. 근원에 대한 4년의 고민하는 훈련이 연극에서 비로소 활용되더니 남들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게 되는 힘이 생겼지요. 신학이 사회생활에서 쓸모가 없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지금 내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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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돌아 감신에 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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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씨는 증조부가 평안도 해변에서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인 이래 5대째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 CBS를 거쳐 SBS에 공채3기로 입사하여 월드컵과 동계올림픽, 런던올림픽 등을 중계했다. 현재 아나운서국 부장이며 sbs뉴스퍼레이드와 열린TV 시청자 세상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감신대 목회대학원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북한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 3때 전도사님이 감신대에 가라고가라고 아주 못살게 굴었습니다. 참 이상한 분이다. 내가 감신을 왜 가야하나 생각했습니다. 전 해군사관학교를 갔습니다. 40기로 합격했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은 그럼에도 감신대를 가야한다고 말하더군요. 그 전도사님이 마귀처럼 보였습니다. 해사에 갔더니 사회물을 뺀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패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치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30년만에 돌아돌아 감신에 끌려왔습니다.”
“사람 앞 일은 모릅니다. 걱정을 너무하는 것도 문제고 안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전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려합니다. 북한 정치를 전공하고 여길 왔습니다. 통일이 안되면 가까운데라도 갈 것입니다. 꿈중의 하나로 북한 교회의 회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해외 이주 노동자들은 통일을 대비해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예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잘 살아야 후에 북한 사람들과도 잘 살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훈련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북한 미워하지 말고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