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의 낙원과 부자의 음부
누가복음 16 : 19 – 31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내세의 영생이나 영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구속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자’가 주연이고 ‘나사로’는 조연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부자와 같은 자들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부자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하시려고 경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에 대한 말씀을(1-13) 듣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비웃는 보고(14)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었고, 죄 많은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병들고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었으며, ‘고운 베옷’은 가는 실로 짠 속살이 비췰 정도의 고급 옷으로 음란의 옷입니다. ‘호화롭게 즐긴 것’은 갖고 싶은 것은 다 갖고 자신의 맘대로 즐겼다는 말입니다.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는 거지였습니다. 심지어 버려진 들개들이 헌데를 핥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했습니다.(왕상21:24 이세벨과 아합이 시체를 들개가 먹음)
그러나 아브라함은 굶주리고 버려져서 개들이 헌데를 핥는 나사로를 ‘고난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25) ‘고난’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나사로가 죄가 많아서 병들고 가난한 거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매 맞은 상처가 곪아 터져서 헌데가 되었고, 재산도 다 빼앗겨서 거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로’란 이름은 ‘도움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도움의 하나님’이란 ‘나사로’가 왜 거지가 되고 굶어 죽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도움의 하나님’은 만사형통으로 생각합니다. 물결이 일지 않는 잔잔한 바다를 향해 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 오해입니다.
큰 풍랑에 밀려 떠내려가고 살 소망도 없는 위험 속에서 파도와 싸워 항구에 도착했을 때를 ‘도움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받고 굶주린 거지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받은 것을 ‘도움의 하나님’ 곧 ‘나사로’ 입니다.
교인들은 고난 없는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위로는 없습니다. 부자는 고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사로가 받은 위로는 잠깐 동안의 받은 위로가 아닙니다. 영원한 위로입니다.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고 말했습니다.(24,25) 고난을 받지 않고 매일 호화롭게 지낸 부자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교인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가족들은 사택에서 쫓겨나서 산밑 움막에 숨어 살았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은 양식이 없어 굶고 있을 때, 교인들이 밤중에 일본 경찰이 모르게 쌀을 조금씩 갇다 주어 먹게 했습니다. 주목사님은 모진 고문과 매를 맞고 평양형무소에 갇혔습니다. 가족들은 가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며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신사참배 한 김길창 목사는 옥에 갇히지도 않았고 가족들이 굶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고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제국은 한국교회를 말살하기 위해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회 경남교구’로 명칭을 바꾸고 하나님 대신 일본 천황을 섬기게 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하고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동방요배)
그때 김길창 목사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회 경남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많은 지원금을 받고 부산 광복동에 남선여중고를 세우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경성대학을 위시하여 남성학원, 훈성학원, 그리고 국성학원 안에 무려 중고등학교를 합쳐 7개나 갖고 있는 유일한 기독교 학교 아성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우리는 주남선 목사와 김길창 목사가 죽어 그분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말씀에서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자를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거지를 보고서도 부자는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청지기였습니다.
먼저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라고 하지 않고 ‘거지가 죽어’(22)라고 한 것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시신마져도 허술한 공동묘지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부산영락공원에 무명인들의 무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은 거지로서 굶주림과 피부의 헌데로 개들이 와서 핥는 치명적인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116:15)라고 시편은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귀중하게 보시고 즉시 천사를 보내셔서 나사로의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주어 위로를 받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구원받은 자들의 위로 받는 처소입니다.(마8:11)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한 것은 많은 조문객과 호화로운 장례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즉시 영혼은 음부에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한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고난받은 나사로는 낙원에서 위로받았습니다. 그러나 난을 받지 않고 좋은 것을 받았던 부자는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으로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음부의 불꽃 가운데 고통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른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들처럼 하나님을 잘 섬긴 것처럼 말했습니다. 부자는 우상숭배나 이방신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도 잘 지켰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음부에 던져지게 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청지기에 대한 말씀을 듣고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그도 칭찬을 받고 음부에 던져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어리석은 청지기에 대한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14) 부자의 죽음은 청지기직을 빼앗긴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호화롭게 즐기던 많은 재물을 죽음으로 다 빼앗겼습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살면 우리도 부자처럼 음부의 불꽃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눈앞에 도와주어야 하는 목마른 사람을 보고서도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면 내세가 어떻게 되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제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2:31,33)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호화롭게 지낸 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큰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거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5)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는 곧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부자가 거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시겠다’(마10:42)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그때 거지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보고도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예수님께 하지 아니한 것이므로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면 예수님께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25:46)
자비를 베푸는 것은 크고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음부에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고통당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맡겨주신 재물로 자기만을 위해 호화롭게 즐기면서 굶주린 거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음부에 던져질 만큼의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음부에 던져질 만큼의 큰 죄가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비웃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자신의 형제들에게 가르쳐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부탁한 것을 보면, 자신이 살았을 때 나사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하였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사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음으로 당하는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괴로웠으면, 살았을 때 사랑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부자처럼 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부자처럼 무서운 음부에 던져지지 않고, 나사로처럼 낙원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영생합시다.
첫댓글 💖오늘도 하는 일마다 기쁨이 되고 숨쉬는 순간 순간 마다
즐거움과 사랑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