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드로 3세 왕은 자신의 딸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1월 17일)을 본받으라고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 1세(Denis 또는 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후에 남매를 얻었다. 딸 콘스탄스는 후에 카스티야(Castilla)의 왕인 페르난도 4세(Fernando IV)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아들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승계해 아폰수 4세(Afonso IV)가 되었다.
데니스 1세 왕은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자선 사업에도 힘써 병원 · 고아원 ·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 양로원 등을 설립하고,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주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했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한 아들 아폰소 4세와 남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과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1324년 남편 데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뒤늦게 회심하고 신앙을 찾았지만, 이듬해에 선종하고 말았다. 남편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성녀 엘리사벳은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 후 수도원 · 교회 · 빈민 구제소 등을 세우는데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리고 코임브라(Coimbra)에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그곳에서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은 포기했지만,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어 수도자 못지않은 엄격한 보속의 생활과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평화와 중재의 사도’로 알려진 성녀 엘리사벳은 말년에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아들인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폰소 11세(Alfonso XI) 간의 평화를 중재하러 가능 도중 과로와 열병으로 인해 병을 얻어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선종했다. 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녀의 유해는 코임브라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성당에 묻혔고, 두 왕은 후에 동맹을 맺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고,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8일 축제(현재는 폐지되었음)와 겹치는 관계로 7월 8일로 바꿨다. 하지만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선택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축일 또한 천상 탄일(선종일)인 7월 4일로 복원되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 또는 아라곤의 이사벨라(Isabella, Isabel)로 알려져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엘리사벳은 평화와 중재의 사도답게 대개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혹은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비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마찬가지로 장미의 기적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다. 14세기의 한 제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느 겨울 아침에 성녀가 성을 나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또는 빵)을 나누어주었는데, 그녀와 마주친 왕이 무엇을 감싸고 있냐고 묻자 ‘주님의 장미’라 답했고, 1월임에도 불구하고 풀어헤친 앞치마에는 장미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