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海戰 1】
하와이 西北西 약 1600km 지점에 위치한 미드웨이는 일본의 북태평양 지배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야마모도제독은 미국의 잔류 태평양함대를 미드웨이해전에서 섬멸시키고자 했지만 1942년 6월 4일에서 6일까지 걸쳐 벌어진 이 싸움은 미국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돌아갔고 향후 태평양 전쟁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연합군의 승리는 무적일본이라는 신화를 깨뜨렸으며 이로써 연합국측은 보다 공격적인 정책을 채택할 수 있게 되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진주만 공습이 끝난 직후의 회의에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모두 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위에서 언급한 미 해군 항모들에 의한 일련의 도서지역 공격은 이러한 야마모토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이에 남방작전이 종료되는 즉시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미 해군에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낸 다음 이들을 격멸한다는 작전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은 일본군의 어느 누구도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야마모토의 원래 구상은 호주나 미드웨이가 아니라 미 해군의 본거지인 하와이 침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마모토의 구상은 육군과 해군 모두의 외면을 받기 딱 좋았다.
야마모토의 의중에 말려들지 않으려던 대본영 내 해군과 육군 수뇌부는 호주와 미국 간 연락선을 차단하는 내용의 MO작전과 FS작전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는 한발 물러나서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방안으로 선회했고, 진주만 공습으로 얻어진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 이 계획을 어떻게든 밀어붙였다.
진주만 공습 때 처럼 자신의 직위를 걸고 나서야 마지 못해 승인을 얻었지만 거기에는 댓가가 따랐다.
해군 수뇌부가 구상한 MO작전을 위해 제 5 항공전대를 제공해야 했고, 육군의 요구에 따라 알루샨 열도의 공격도 같이 진행해야 했다. 참고로 과거에는 알류샨 열도 공격이 일종의 양동작전으로 기획된 것처럼 알려졌었으나,
실제로는 모두가 하나하나의 목적을 가진 작전이었다.
이렇게 결정된 미드웨이 공격작전은 MI작전으로 명명되었지만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작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양군 수뇌부를 확실하게 끌어들일 더 이상의 뾰족한 수가 없던 야마모토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 상황을 엎어버렸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과 국민들의 사기고양을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도쿄 폭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도쿄 공습이 가능하다는 계획이 나왔고 이 안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둘리틀 특공대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 공습을 성공시켰다.
사실 중형 쌍발 폭격기 16대로 수행했던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 자체는 대단한 피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대단치 않은 폭격은 미국에게는 진주만 공습의 울분을 갚아주는 카운터 펀치가 되었고, 일본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얻어맞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이는 폭격 그 자체보다는 벌건 대낮에 미군의 폭격기에게 일본 본토, 그것도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를 대놓고 공격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특히 이것이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습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일본 해군은 그야말로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해군에 대한 기대는 심해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해군이 비난당한 것은 해상경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역사상 단 한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일본 본토, 그것도 '덴노가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이 컸다.
본토에 폭격이 있다는 것은 덴노의 옥체가 폭탄에 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주는 것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