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
쉬는 시간이고 나는 통나무 놀이기구에서 한 손으로 기둥을 잡고 빙빙 돌며 혼자 놀고 있다. 같은 반 금발머리 여자 애가 내 옆에서 기둥을 잡더니 나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긴장한 채 그쪽을 바라본다. 조욯히 기둥 주위를 도는 동안 우리 사이에 긴장감이 감돈다. 마침내 그 애가 침묵을 깨뜨린다.
" 너 한국 사람이야?"
그 질문에 나는 놀란다. "어떻게 알았어?" 순간 나는 그 아이가 좋아진다. 처음으로 나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부르지 않은 아이.
"한국에서 온 가족이 우리 집에서 지냈던 적 있거든, 엄마 아빠는 서울에도 가봤고" 아이는 말한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 사는 백인 부부가 1970년대에 한국을 여행한다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이었는지를 생각하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새삼 놀랍다. 우리는 통성명을하고 [그 아이의 이름은 제니였다] 따로 또 같이 원을 그리며 논다.
이튿날에도 쉬는 시간에 함께 놀고, 그 다음 날에도 같이 놀고 방과 후에도 매일 만나기 시작한다. 제니네 집에서 만든 핀란드식 카다멈 페스트리와 크림 치즈를 얹은 크레커를 먹는다. 우리 집에 올 때면, 엄마는 낮잠에서 일찍 깨 손수 바느질한 오레지색 리넨 냅킨, 크리스털 접시, 은으로 된 작은 포크까지 갖춰진 큰 식탁에 우리를 위한 오후 간식을 차려준다. 간식은 슈거 파우더를 뿌린 딸기와 멜론 같은 신선한 과일 이다.
제니는 내 단짝이 되고,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시절을 버텨내게 해줄 든든한 방패가 된다.
학교 선생님, 이웃들 , 친가 친척들과 친구들처럼 우리 가족이 직접 마주치는 사람들은 보통 우리에게 친절했고 호의 적이었다. 셔헤일리스 시내에서 10제곱킬로미터 반경 밖으로는 우리 고등학교 애들이 촌놈, 무지렁이, 똥차게라 부르고, 가끔 자기네들도 그렣게 말하고 다나는 가난한 백인들이 살았다. 이들은 헤밀턴 농장 위에 설치된 광고판에 있던 엉클 샘과 비
슷한 생각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시내와 촌의 경계는 열려 있어서, 우리는 이민자를 용인한 사람들과 우리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다.
아버지의 고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엄마는 한국 음식 이름이나 영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표현 말고는, 집에서 한국인인 우리와 얘기할 때도 영어로만 말하면서 당신의 혀에서 외국인 티를 지워내려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자란 곳에서뿐 아니라, 내가 태어난 나라의 언어에 대해서도 외부인이 되었다. 한국어를 '우리말' 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에서 나는 늘 배제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여러 해에 걸쳐 여름이면 서울에서 창문 없는 교실에 앉아 한국어 수업을 듣고 내 억양을 표준어에 맞춘 다음에도 '우리말'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나는 한국인들에게서 의심스럽다는듯한 질문을 받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왜 한국 말을 잘 못해요?
부모님이 다 한국 분이세요? 그리고 그들은 결론지을 것이었다. 아. 그럼 한국 분이 아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