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는 용인시 모현읍에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1392년 이성계의 5남이자 훗날 조선 태종에 오른
이방원과 술자리를 가지고 난 이후 귀가 하던 중 이방원이 보낸 수하가
휘두른 철퇴에 맞아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개성 근교 풍덕군에
안장되었다가 용인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런 묘소이다.
포은 정몽주선생 묘역 입구
죽기 전 정몽주는 이방원과 만나 술자리를 나누던 중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를 읊자 고려를 망친 반역자 집단으로
들어오라는 권유의 시 구절임을 인식하여 그에 반대하고 거절한다는
화답으로 단심가(丹心歌)를 읊었으며,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백주대낮에
말을 타고 귀가를 하려고 선죽교를 건너는 중 이방원이 보낸 부하가
휘두른 철퇴에 직격으로 맞고 낙마하여 집으로 도망가던 중 피살됐다.
정몽주 묘소 입구의 신도비각
정몽주는 1392년 5월 4일(음력 4월 4일) 개성 선죽교에서 피투성이가
된 이후 개성 근교에 있는 풍덕군(현 개풍지구) 야산에 안장되었으나,
1406년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그 행렬이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앞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 묘소의 위치에
떨어지게되자 영천 이장을 포기하고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선생 신도비
묘역 입구의 신도비는 1696년(숙종 22)에 건립된 것으로,
송시열이 찬(撰)하고 김수항이 글을 썼으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하여 쓰여져 있으며, 정몽주는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고 성리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까지 추대되었다.
묘역 입구
묘소는 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하였으며, 봉분은 단분이다.
묘비는 1517년(중종 12) 묘를 수축할 때 세운 것으로, 비에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왕조 때 주어진 시호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문인석 1쌍, 상석,
곡담 등은 종전의 것이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재실 전경
원래는 둘레석이 없었던 묘소였는데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둘레석이 추가로 설치되었으며, 1974년 12월 곡담을 보수하면서,
장명등, 망주석, 석양, 호석, 난간석과 별도의 새로운 문인석 1쌍 등이
추가 설치되었으며, 1980년에는 민가 3채를 이전, 묘역을 성역화 하였다.
1972년 경기도 기념물인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모사(敬慕舍)
영모재(永慕齋) 정문
영모재(永慕齋)
묘역의 홍살문 주변
포은 정몽주선생은 1338년(음력 1337년) 1월 21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392년 5월 4일(음력 공양왕 4년 4월 4일)
개경 선지교(현 개성 선죽교)에서 5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후 1401년 이방원이 왕위(태종)에 오른 후 왕자의 난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즉위 원년에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하였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도 내렸다.
정몽주 상
정몽주선생의 본관은 연일(영일),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어릴때 이름은 몽란(夢蘭),몽룡(夢龍),성인이 되면서는 몽주(夢周)이다.
봉호는 영원군(우왕, 1387년),익양군 충의군(공양왕,1389년),
익양군 충의백(공양왕,1390년),익양부원군(태종 1년,1401년)이다,
정몽주의 단심가와 정몽주 어머니의 백로가 시비
단심가(丹心歌) ~ 포은 정몽주
이 몸이 죽고죽어 / 차신사료사료(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죽어 / 일백번갱사료(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 / 백골위진토(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 / 혼백유야무(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 향주일편단심(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 / 녕유개리여지(寧有改理與之)
정몽주 어머니가 쓴 백로가(白鷺歌)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셩낸 가마귀 흰빛을 새로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더럽힐까 하노라)
홍살문
정몽주 묘역
포은 정몽주 묘
둘레석
문인석(구.신)과 묘비
맞은편 석물
옛 상석
묘소 전경
묘소 뒤에서
오른쪽은 정몽주의 묘, 왼쪽은 정몽주의 증손녀사위(증손서)인 이석형의 묘
정몽주의 묘 오른쪽 등
원사공(정몽주의 장자)과 설곡공(정몽주의 장손 ) 묘
정몽주 묘역에서 보는 안산과 앞의 연못
정몽주의 묘 측면
저헌 이석형의 묘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1415~1477)선생은 정몽주선생의
증손녀사위(증손서)로 조선전기 황해도관찰사, 판한성부사,
판중추부사,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묘는 정몽주 묘 바로 옆쪽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71호이다.
왼쪽 봉에는 정몽주, 오른쪽 봉에는 이석형의 묘가 있다
묘역을 돌아 나온다
정몽주선생의 재실
영모재 앞에서 안내, 설명하는 배 문화관광해설사
이석형 선생과 후손들인 연안이씨(延安李氏) 비각공원
저헌 이석형선생 신도비(중앙)와 행적비 등
신도비와 석비 들
정몽주선생 묘역 탐방을 마무리하고 충렬서원으로 향한다
정몽주선생의 충렬서원 정문
정몽주선생 묘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충렬서원
충렬서원 강당
충렬서원은 1576년(선조 9) 정몽주(鄭夢周)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1)에 충렬(忠烈)이라
사액이 내려졌고, 정보(鄭保)와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사우(祠宇,사당) 신문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
1911년 사우(祠宇)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고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6칸의 사우,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동.서 협문,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8칸의 강당 등이 있다.
사우(사당)
사우에는 정몽주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보와 이시직의
위패를 배향하였으며,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유물로는 포은유간집(圃隱遺簡集), 단심가(丹心歌)와 편각 등이 있다.
사우와 강당
충렬서원 옆길 바위에 새겨진 백로가
충렬서원옆 정원 기암괴석의 단심가(앞면은 한자, 뒷면은 한글)
한폭의 동양화를 담은 기암
백로정(白鷺亭)과 희귀 기암들
비너스 상
충(忠)
충의.단성(忠義.丹誠)과 충(忠) 자 두 돌의 비교
왼쪽은 영천 정몽주선생 생가앞에 있는 충의. 단성(忠義.丹誠)으로
중국 태항산에서 생산되는 홍보석(紅寶石)을 수입한 돌이라 하는데
오른쪽의 용인 충렬서원옆 정원에 있는 충(忠)자의 돌은 크기와
색상 등이 너무 닮아 아마도 동일한 분의 작품일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선생 상 일듯
어마어마한 규모의 귀한 괴석들을 감상하고 밖으로
정원 풍경을 끝으로 정몽주선생 묘역과 충렬서원 탐방을 마무리한다
첫댓글 정몽주 묘역과 충렬서원, 그리고 각종 문화재 잘 보았습니다.
빛바랜 흔적들이 우리 마음을 깊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단풍 색갈 고운 계절 유익한 곳 잘 다녀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계시지요.
차가워 지는 날씨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