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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5
#여호수아 #Joshua 5:2-3 #할례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다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요단 강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아브라함더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만큼이나 인간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불가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단을 건넌 이후에는 바로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족속들이 적대하고 있기 때문에 몇날며칠 동안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할례를 행하게 되면 여리고인들이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공격해와서 몰살당할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세겜 족속들은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한 자기들의 족장의 지시를 따라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시행했다가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게 몰살을 당한 전례가 있었다. 정 할례를 행해야 한다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하는 것도 사람의 생각으로는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굳이 기필코 요단 강을 건너고 난 후에서야 여리고가 뻔히 눈 앞에 있는데도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과연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할 자격이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검증하시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기 전 모세가 살아있을 때에는 단 1만 2천 명으로 발락의 모압 연합군을 전멸시킨 경험이 있었고 언약궤에 임재하신 여호와의 능력으로써 요단 강의 마른 땅바닥을 밟고 건넌 경험을 맛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여리고를 바로 눈 앞에 두고도 할례로써 모든 육적인 무장을 해제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담대한 믿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있는가를 스스로 검증하고 여호와 앞에 드러내 보여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의 신앙만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백만명에 육박하는 모든 이스라엘의 신앙이 하나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할례를 행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거역하게 된다면 그 작은 불씨가 모든 이스라엘에게로 옮겨 붙어서 끌 수 없는 반역의 대화재로 번지게 되었을 것이었다. 38년 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은 열두 명의 정탐꾼들 중 열명의 악평에서 비롯한 것이었고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단 몇백 명의 지지자들만을 가지고 모든 이스라엘을 선동해서 모세를 대적하였으며 그 외에 광야에서의 모든 불평과 원망과 대적과 반역들은 항상 적은 무리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그런 인간적인 위험요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할례를 행하라 하였고 자신이 직접 돌칼을 만들어 들어서 시행을 하였다. 게다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그러한 여호수아의 명령에 단 한 명도 반기를 들지 않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순종하여 할례를 받았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마치 천적이 없는 사자가 아무데서나 누워서 편하게 잠을 자듯이 눈 앞에 뻔히 여리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 여기며 편하게 할례를 시행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세겜 족속을 할례로 속여 몰살시킨 것으로 인해 야곱의 일행이 다른 족속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셨던 것처럼, 당신의 지시와 명령대로 순종하여 할례를 시행한 이스라엘이 여리고에게서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사람이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지켜주셨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이 위대한 믿음의 순종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평범하게 기록된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 마저도 그들 자신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된 것이므로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여호와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를 가지고 신자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자들은 신자는 성령의 감동이 없어도 스스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성도들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음의 고백도 순종도 불가하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반면에 극단적인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신자의 의지 자체를 무시해버리고 신자의 믿음과 순종을 기계적으로 몰아가는데 성령께서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은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성도의 돌과 같은 마음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하시고 그렇게 새롭게 변화된 성도의 심령의 의지를 활용하셔서 성도가 자원하는 심령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극단적 개혁주의자들의 기계적 믿음과 순종 또한 마찬가지로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내 생각에 이 할례는 하루만에 이뤄졌을 것이다. 먼저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의 아비 된 자들이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십부장들이 열명의 가장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오십부장들이 다섯명의 십부장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백부장들이 두명의 오십부장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지파의 수령들이 백부장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여호수아와 갈렙과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지파의 수령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엘르아살은 광야에서 죽지 않고 생존하였으므로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던 40년 전에 이미 할례를 받았으므로 각 진영을 돌아다니며 진행상황을 살펴보고 필요한 지시를 내리며 대응했을 것이다. 또한 광야에서 죽지 않은 40세 이상 60세 미만 남자들도 홍해를 건넌 후에 할례를 받았을 것이므로 그들 또한 여호수아를 도와서 각 지파의 할례를 보조하는데 일조했었을 것이다. 할례를 받은 남자들은 아이이건 어른이건간에 상관없이 얼마간은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할례받은 남자들에 대한 모든 수발들은 전적으로 여자들이 전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따라서 여자들이 할례받은 남자들을 수발들기를 싫어했다면 이 할례 의식은 적잖이 훼손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대대적이고 신속한 할례는 한치의 오차없이 완벽하게 성공했으므로 이를 통해서 남자들을 위한 이스라엘 여인들의 수발이 매우 헌신적이고 자발적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여인들 또한 남자들의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던 것이었다. 비록 여인들의 순종이 기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를 배제해서는 안되고 그 사역을 이루는데 헌신한 것을 유념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여인들은 대부분의 교회 사역에서 자신들의 헌신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드러나지 않는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되며 모든 행위를 기억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맡겨드려야 한다. 여인들의 선행이 교회에서는 가급적 드러나지도 남자들보다 앞서지도 않아야 하는 것은 하와의 범죄로 인한 징벌임과 동시에 그만큼 더 믿음과 순종을 요하는 것으로서 더 큰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20191115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3장.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아담의 아내는 처음 에덴에서는 아담으로부터 '여자'라는 고유명사의 이름을 받았다. 그래서 아마도 아담은 에덴에서 자기 아내를 부를 때 '내 여자야'라고 불렀을 것이다. '여자'라는 그녀의 이름은 아담에게 있어서는 가장 사랑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저주의 형벌을 받은 후에 아담은 아내에게 '하와'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이제 '여자'라는 이름은 그녀만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게 되었으며 이는 이제 복된 에덴에서의 생활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담이 그 절망적인 순간에 자기 아내의 이름을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인 '하와'라고 지어준 이유는 무엇인가. 적어도 이 이름의 의미는 부정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에게 각각 여러 민족의 아버지/어머니라는 뜻인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을 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복주시기 위해서 그 이름들을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와라는 뜻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사라보다 더 크고 웅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아담은 아내와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형벌을 받아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자기 아내에게 이런 복된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아담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만약에 아담이 자기 아내 때문에 금지된 열매를 먹고 범죄하여 그 처절한 저주의 형벌을 받은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아내를 미워하였다면 과연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가봇, 로암미, 로루하마보다도 저 저주스러운 이름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은 비록 아내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갈등 속에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녀를 탓하거나 증오하기보다는 여전히 자기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의 살로서 아끼고 사랑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어쩌면 그제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과 남편인 아담에 대한 미안함과 한낱 뱀의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버린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에 멘탈 붕괴 직전인 자기 아내를 위로하고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그런 복된 이름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 된다. 게다가 이 하와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신대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하와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며 한가닥 소망을 가지자는 목적도 있었을 것 같다.
한편, 하와의 입장에서는 남편 아담에게서 이 이름을 받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만약에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아담의 대답이 하와 자기에게 모든 죄책을 떠넘기고 혼자만 빠져나가려는 파렴치한 것이었다면 그에게서 저 이름을 받았을 때 기쁜 마음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대답을 들은 순간 아무리 자기가 먼저 범죄하였고 남편까지 끌어들이는 큰 잘못을 했더라도 아담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과 실망감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기가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죽을지언정, 저런 파렴치한 남편하고는 단 한순간도 같이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새로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에는 그 이름을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럼 없이 아담과 이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와는 그러지 않았다. 이는 아담의 대답이 아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그에게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도리어 여자는 자기 죄의 심각성으로 말미암아 차마 아담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절망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 아담이 남편으로서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지켜주고자 그 복된 이름을 지어 주며 위로하고 다독이자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고 감격하여 그의 품에서 한없이 흐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 사이의 고도의 사랑의 유대가 아니고서는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9백 여 년을 부부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내 생각에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말 그대로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생육 되고 번성 되었으므로 그녀는 마땅히 모든 인류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다른 하나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구원 받기로 선택 된 모든 영생하는 자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비록 자기 죄로 인해 모든 후손들이 죄에 빠지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언약대로 자기에게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이며 그분이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내포한 것이라 생각 된다.
모든 남자와 남편들은 설령 자기 여자와 아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패가망신하여 길거리에 나앉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가 자기 잘못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아담이 하와를 사랑하고 위로한 것을 본받아서 여자와 아내를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아담이 자기 아내를 따라 범죄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므로 모든 상황 가운데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모든 여자와 아내들은 하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기 남자와 남편을 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과 같이 그들을 지혜롭고 탁월하게 잘 돕는 배필의 역할에 충실하여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역사적으로나 사회 문화적으로나 부당하게 차별 받는 어려운 위치에 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남자를 잘 돕는다면 분명 남자보다 더 큰 상급을 그리스도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20161115
#창세기 #요셉
#보디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보디발에 의해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힌다. 그런데 여기에는 석연찮은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1. 요셉은 보디발이 자기 개인적으로 산 노예다. 때문에 만약 요셉이 무언가 심각한 죄를 저질렀으면 소유주의 권한으로 바로 죽여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가둔 이유는 무엇인가? 참고로 그 감옥은 보디발 자신의 집에 있는 감옥이다.
2. 애굽 왕의 술관원장과 떡관원장이 투옥되었을 때,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직접 요셉에게 이 두 명을 수종들게 명령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아마도 보디발은 이미 요셉이 자기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요셉이 결백하다는 확실한 심증은 있으나, 요셉을 모함하는 자기 아내의 체면 또한 버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인 듯 싶다.
술관원장이 바로의 생일에 요셉의 꿈 풀이대로 전직을 회복한 후에, 요셉의 부탁을 잊었다고 해서 배은망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1. 술관원장은 한 번 죽다 살아난 처지다. 때문에 아무리 전직을 회복하였다고 하더라도 말 한마디에 다시 바로의 노여움을 살 수 있는 위태한 상황인 것이다.
2. 요셉이 술관원장에게 한 부탁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무리한 부탁이다. 당시 요셉은 보디발이 개인적으로(혹은 몰래)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있는 죄수의 신분이므로, 바로에게 탄원할 처지가 못된다. 때문에 아마도 요셉은, 만에 하나의 희박한 가능성(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식)을 두고 한 공허한 부탁일 가능성도 있다.
바로의 인품
1. 요셉의 꿈풀이를 허황된 거짓말로 보지 않고, 그 말을 타당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그 일의 책임자로 요셉을 임명하고 전권을 위임하는 대범함을 보인다.
2. 자기가 임명하고 위임한 요셉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다. 7년의 대풍년 기간 동안 매 년 20%의 곡식을 저장하라는 요셉의 정책에 대해서 처음 2-3년 간은 잘 지켜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듭되는 대풍년 속에서 그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기에는 반드시 백성들의 조롱과 요셉을 시기하는 궁궐 세력들의 암투와 비방 등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 그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바로의 신뢰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