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개 위쪽으로 수연(불꽃 모양 장식), 용차(구슬 형태), 보주(최상단 여의주)로 이어지는 철제 찰간과 금동 장식들이 천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금동판을 투각하여 빚어낸 문양과 섬세한 투조(透彫) 기법은 고려 시대 금속 공예 기술이 도달했던 최고 수준의 세련미를 보여준다.
고려(高麗)는 국호부터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명확히 한 나라였다. 특히 오대산이 위치한 강원도 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신라의 사각형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고구려 풍의 팔각 다층탑을 대대적으로 세운 것에는 고구려의 당당한 기상과 문화적 정통성을 이어받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당시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요나라) 역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팔각 다층 석탑이나 전탑(벽돌탑)을 유행시켰다. 거란과의 혹독한 전쟁을 치러낸 고려 현종과 고려인들은 거란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역시 고구려의 후예로서 거란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국력과 당당한 기상을 지녔다"는 점을 석탑이라는 거대한 상징물을 통해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거란 전쟁 직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는 데 '강한 고구려의 기억'만큼 큰 힘을 주는 사상적 무기는 없었다. 결국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부처님의 치유(약왕보살)로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는 한편, 고구려의 원대한 기상을 되살려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지 않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현종과 고려인들의 자강(自强) 의지가 담긴 호국의 결정체였던 셈이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고려의 전성기를 연 현종의 드라마틱한 삶을 접하였기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1022년이라는 연도가 한층 더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전쟁의 참화를 이겨낸 현종과 고려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탑이라고 생각하면,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석탑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역사적 배경을 알고 유물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깊은 울림과 감흥이야말로 문화재를 감상하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시대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먼저 이해하고 나면, 딱딱한 연도나 유물 이름이 살아있는 역사로 와닿아서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같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상륜부의 금동 장식은 완벽한 보존성, 화려한 보개(寶蓋) 구조, 그리고 석조와 금속공예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점에서 한국 석탑사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닌다.
대부분의 석탑은 긴 세월 풍상이나 인위적 파손으로 인해 상륜부(탑 꼭대기 장식)가 유실되어 후대에 석재로 새로 깎아 올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월정사 탑은 고려 시대 당대의 금동 공예품이 원형 그대로 탑 정상에 남아있다.
상륜부 중앙에 있는지붕 형태의 고려 금동 보개(寶蓋)는 얇은 동판을 오려 팔각 지붕 모양으로 만든 유일한 실물 존재이다.
일반적인 석탑은 상륜부까지 돌로 만드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월정사 석탑은 석재 층급 위에 금동으로 제작된 보개를 올리고 그 둘레에 정교한 꽃 장식과 풍경을 달았다. 석탑 꼭대기에 금동 보개가 온전히 전해지는 사례는 한국 불교 미술사 전체에서 월정사 탑이 유일하다.
보개 위쪽으로 수연(불꽃 모양 장식), 용차(구슬 형태), 보주(최상단 여의주)로 이어지는 철제 찰간과 금동 장식들이 천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금동판을 투각하여 빚어낸 문양과 섬세한 투조(透彫) 기법은 고려 시대 금속 공예 기술이 도달했던 최고 수준의 세련미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신라·고려 석탑이 돌만으로 수직적 조형미를 완성했다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하부 탑신은 거대한 석조로, 최상단은 화려하고 경쾌한 금동 공예로 마감하는 입체적 연출을 시도했다.
이는 법당 내부의 화려한 닫집이나 왕의 어좌 위 보개를 탑 꼭대기에 그대로 구현한 것으로, 사리가 봉안된 '부처님의 신성한 공간'을 극적으로 장엄하기 위한 고려인들의 독창적인 불교 미술적 시도였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금동 상륜부는 단순히 탑을 마감하는 부속품을 넘어, 고려 전기 금속 공예의 정점과 당시 석탑 장엄 문화의 원형을 증언해 주는 독보적인 문화유산이다.
월정사 탑을 세우면서 고구려의 팔각탑 문화를 다시 복원한 것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나라의 힘과 기상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충분히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고려(高麗)는 국호부터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명확히 한 나라였다. 특히 오대산이 위치한 강원도 지역은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신라의 사각형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고구려 풍의 팔각 다층탑을 대대적으로 세운 것에는 고구려의 당당한 기상과 문화적 정통성을 이어받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당시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요나라) 역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팔각 다층 석탑이나 전탑(벽돌탑)을 유행시켰다.
거란과의 혹독한 전쟁을 치러낸 고려 현종과 고려인들은 거란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역시 고구려의 후예로서 거란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국력과 당당한 기상을 지녔다"는 점을 석탑이라는 거대한 상징물을 통해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거란 전쟁 직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는 데 '강한 고구려의 기억'만큼 큰 힘을 주는 사상적 무기는 없었다.
결국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부처님의 치유(약왕보살)로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는 한편, 고구려의 원대한 기상을 되살려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지 않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현종과 고려인들의 자강(自强) 의지가 담긴 호국의 결정체였던 셈이다.